* * *
응접실에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있던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
“어쩐 일이에요, 로위나?”
내가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로위나도 뒤이어 앉으며 말을 이었다.
“황망한 시기라 잘 지내고 계신지 안부를 여쭈러 들렀습니다.”
“저보다는 카이……, 폐하의 안부가 걱정인데요.”
이제는 다른 사람 앞에서도 호칭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말을 고쳤다.
그것이 어색했는지, 로위나도 눈썹을 으쓱했다.
“괜찮으십니다. ……라고, 본인은 주장하고 계십니다.”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군요.”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져진 자리 위에 앉게 된다 해도 불안할 시기였다.
그런데 황후의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 지금, 그것도 갑자기 황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은 물론, 주변 역시 걱정과 불안이 있겠지.
“상황이 많이 안 좋나요?”
“사실, 그렇습니다. 발레르에서 벌써 자문회를 휘어잡고 인사에 개입하려 들기 시작했으니까요.”
자문회.
대귀족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고문 기관이다.
“골치 아프네요.”
“네. 다행히 페레스카 공작님께서 애써 주고 계십니다.”
현재 자문회는 발레르와 페레스카의 양당 체제로 흘러가고 있다. 아마 어느 때보다 기 싸움이 팽팽할 것이다.
“다만 이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일부 귀족들이 눈치 없이 폐하를 들들 볶고 있는 통에…….”
로위나가 뒷말을 흐렸다.
나는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폭발 직전이군요.”
“네. 일촉즉발입니다.”
으으음. 우리는 동시에 긴 신음을 내뱉었다.
사실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을 빠르고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다.
나도 500년 전에 써먹었던 방법.
숙청.
군주는 때론 불가피하게 아랫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물론 이건 정말 최후까지 남겨 둬야 할 방법이고.’
효과가 빠르고 큰 만큼, 부작용도 크다.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카이사르의 각오를 지켜 줄 심지가 상당히 짧다는 거다.
“뭐……, 폐하의 성격이 아무리……, 으음, 그렇다고 해도, 판단력은 훌륭하시니까요. 최악의 상황까지는 안 갈 거예요.”
“그럴까요?”
“……믿읍시다, 우리.”
어쩌겠는가. 믿어야지.
나와 로위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문제를 포함하여……, 공녀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으음, 역시 그렇군.
단순히 안부만 묻기 위해 왔을 리가 없지.
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뭐죠?”
“실은 폐하께서 레너드 페레스카 소공작을 친위대장으로 앉히고 싶어 하십니다.”
“으잉?!”
헉, 잠깐.
원래 인선(人選)이 적의 허를 찔러야 하는 법이라지만, 이건 너무 예상 밖의 인선인데?!
“오라버니는 친위대 소속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친위대장으로?”
“친위대는 황제 직속이라 폐하의 선임이 우선입니다. 그나마 자문회의 개입이 불가능하죠.”
“하지만 반발이 있을 거예요. 역풍을 각오하고 밀어붙일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네. 저 역시, 꼭 필요한 인사라고 생각 중입니다.”
“어째서?”
“폐하께서 폭발하려 하실 때 옆에서 말려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 그쪽으로의 필요성인가.
대번에 납득했다.
“그래요. 필요하긴 하겠군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승낙할지 모르겠네요.”
레너드에게 지위가 중요했다면, 굳이 적기사단을 거치지 않고 곧장 친위대에 갔을 것이다. 그럴 실력은 충분했으니까.
그럼에도 적기사단에 입단한 것은, 그쪽에 마음을 쏟을 가치가 더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겠지.
“네. 저희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녀께 도움을 청하러 온 거고요.”
“저더러 오라버니를 설득하란 말씀이시군요.”
“그래도 공녀의 말씀은 듣지 않습니까? 두 분 다요.”
여기서 ‘두 분’은 레너드와 카이사르를 말하는 것인가.
어쩌다가 내가 두 남자의 키잡이가 되어 버린 걸까. 스승의 업이 참으로 무겁군 그래.
“말은 해 볼게요.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은 못 하지만.”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위나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기병장인 가르말 공작님과 선약이 있어서요.”
“바쁘군요.”
“그런 시기이니까요.”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쓰게 웃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 밑에 거뭇한 그림자가 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구나. 그런 시기이구나.
격변의 시기.
‘나도 카이사르도, 이젠 예전처럼 지내는 건 어렵겠지.’
이제 그를 ‘카이사르’라고 부를 수 없게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동안은 그가 원해 그의 이름을 불러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의 이름을 사랑하게 됐나 보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백기사단의 수련병들과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복도에서 호리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날 발견한 호리오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이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며 내게 다가왔지만.
양심의 반응, 정말 소소하구나.
“이제 돌아가십니까?”
“네. 경께서는 바빠 보이시네요.”
“뭐, 시기가 시기이니까요.”
“요즘 어딜 가나 그 얘길 듣는군요.”
“어쨌든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탓에 저희 기사단에 들락거리기 힘드실 텐데. 개의치 않고 계속 와 주시니 참 감사하군요.”
호리오가 히죽히죽 웃으며 거들먹거렸다. 아, 꼴 보기 싫어.
“잘못한 게 없는데 힘들 게 뭐 있겠어요?”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말입니다. 폐하의 신임을 잃으셨으니, 더는 황성 드나들기도 민망하실 테고.”
“저런. 제가 폐하의 신임을 잃었나요? 저도 몰랐던 사실이네요.”
“비 자리에서 밀려나신 일 말입니다. 뭐, 물론 공녀께는 더 좋은 남편감이 나타나시겠지만.”
“폐하의 아내가 되는 것이 신임의 증거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나는 호리오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경께서도 비 자리에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권력의 자리에 관심이 많으신 듯한데.”
“예, 예에?!”
내 말에 호리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슨 그런 무례한……!”
“어머, 물론 농담이에요. 호리오 경이 비 마마가 되실 리가 없죠.”
“커흠, 질 나쁜 농담을 하십니다, 공녀.”
귀가 시뻘게진 호리오가 헛기침을 하며 날 다그쳤다. 그런 호리오에게 나는 연신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제가 실언했네요. 황비가 되실 만한 신임도 없으실 텐데.”
“……공녀!”
결국 호리오가 폭발했다.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싹 지운 채 호리오를 쳐다보았다.
“경.”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억양이었음에도, 호리오는 내 말에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딱히 살기를 내뿜지 않았음에도 위압감을 느낀 듯.
“물건을 잘 잃어버리시던데,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 그때 일은 충분히 소공작을 의심할 수 있을 법한 일로…….”
“뭐든 잘 챙기셔야죠. 물건도, 신체도요. 한 번 잃어버리면 돌아올 길이 없답니다.”
“신체라니…….”
호리오가 얼굴이 희게 질리더니, 눈에 띄게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아마 순간 제 머리통을 잃어버리는 모습이 떠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고, 공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네? 경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제가 경을 협박하겠어요?”
“물론,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만.”
호리오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렇죠. 켕기는 게 있는 사람들이 문제죠. 제 잘못을 들키지 않았다며 방심하고 있다가, 뚝!”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위협하듯 말했더니, 호리오가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하고 머리가 떨어지는 법이잖아요?”
마지막 말을 할 때, 나는 다시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호리오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아마 지금쯤 저 조그마한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거다.
내가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안다면 왜 언급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뭘 모르면서 하는 말인지.
이래서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는 거다.
“모두 조심해야죠.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니까요.”
나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것 같은 그 말을 건네며 활짝 미소 지었다.
반대로 희게 질려 가는 호리오를 보는 게 꽤 즐거웠다.
아마 한동안은 찜찜함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겠지.
새벽녘에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 더듬더듬 제 머리를 확인하는 호리오를 상상하니 즐거워져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