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너드가 친위대장이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카이사르가 단호하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레너드 본인 역시 처음에는 그 갑작스러운 임명에 망설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말려 줄 이가 필요하다는 내 설득에 그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많은 이들은 카이사르의 결정에 반신반의했다. 황후 측은 불쾌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같은 편이라 생각한 사람들 중에서도 반대 의견은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대표적으로, 달튼이 그랬다.
오랜만에 적기사단의 단장실을 찾았더니, 그는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근 업무가 많은 탓도 있었다만,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오? 상도덕이 없는 거지. 안 그렇소, 교관?”
달튼이 내게 하소연하여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공들여 꼬시고 키워서 데려온 인재인데, 그걸 홀랑 데려가나? 응? 아무리 폐하라지만 이건 좀 아니라 보오, 나는.”
“그러게요. 폐하가 너무하셨네요.”
난 태연히 달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레너드를 설득한 게 나라는 걸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야지.
“폐하께 따져 보시지 그러셨어요.”
“물론 따져 보았지! 그랬더니 딱 한마디 하시더구려.”
“뭐라 하시던가요?”
“이 몸이 먼저 찜했다.”
달튼이 카이사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해서,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은근히 잘 따라 하는데?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마 나 다음으로 레너드의 실력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내게 검을 배우며 레너드와 가장 자주 검을 마주한 사람이었으니까.
“좀 더 강하게 따지고 싶었는데, 오금이 저려 관뒀수다.”
“오금이 저리다니요?”
“폐하께서 요즘 어찌나 살벌한지 말도 못 붙일 판이거든.”
달튼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말이오. 기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발레르의 의견을 찍어 누르다시피 하고 계시거든.”
“괜찮은 건가요, 그거?”
“아슬아슬하지. 벌써 폭군이니 뭐니 말이 나오고 있으니까.”
달튼이 ‘으음’ 하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곤란할 때면 무의식중에 나오는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라 이거요. 괜히 호기심에 고개를 디밀 문제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문제……, 라고 생각한다.
지금 황후 측에게 힘으로 밀리면, 앞으로도 선황처럼 휘둘리게 되고 만다.
내게는 그의 폭압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처럼 보였다. 고군분투하는 것으로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해밀턴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녹트 자작님?”
“실례합니다. 다행히 아직 계셨군요, 공녀.”
“네? 절 보러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폐하를 만나 뵙고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를요?”
내가 고갤 갸웃하며 되물었다.
곁에 앉은 달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밀턴에게 윽박질렀다.
“뭐야! 설마 내 귀여운 부단장에 이어, 교관까지 뺏어 가시려는 건 아니겠지?!”
“……술을, 사겠습니다.”
해밀턴이 고민 끝에 긍정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달튼이 ‘끄아악!’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럼, 가 주시겠습니까?”
황제의 명령을 어찌 어기랴.
나는 고갤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집무실은 늦은 오후의 햇빛이 들어 오렌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손님이 다녀간 듯, 테이블 위에 아직 식지 않은 찻잔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마리아주의 달콤한 향기가 종이 냄새에 섞여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폐하.”
앞으로 나아가며, 내가 나직이 카이사르를 불렀다.
조는 건지, 서류를 읽는 건지, 고갤 숙인 채 앉아 있던 카이사르가 천천히 고갤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에서 이제 막 빛을 되찾은 듯 석류처럼 반짝였다.
카이사르.
……하고, 이름을 부르고 싶다.
“이리 가까이 와.”
상대를 죽일 듯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눈빛이, 상대가 나임을 깨달은 순간 온화하게 바뀌었다.
침묵에 뒤엉켜 냉랭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포근해진다.
나는 책상 앞을 돌아 카이사르의 곁으로 다가가,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살이 더 빠진 것 같지?’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카이사르의 얼굴에 나는 깜짝 놀랐다.
대성전에서 보았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원인은 짐작이 간다. 스트레스 탓이겠지.
그래도 황성에서 좋은 것만 먹일 텐데, 왜 이렇게 마르는 거야? 속상하게.
“어제 기사단장들과 회의가 있었다. 교관으로서 그대의 성과에 대해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
“과찬이십니다.”
“그대의 실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당연한 결과겠지.”
카이사르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
돌아오다니, 어디로?
“내게 다시 검을 가르쳐다오.”
나도, 그와 다시 검을 마주하고 싶다.
카이사르와 대련할 때가 가장 즐겁다. 가장 긴장되고, 흥분되고, 피가 끓었다.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나를 이길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제가 다시 폐하의 곁에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껏 황제가 된 보람이 없지 않겠나.”
카이사르가 피식 실소하여, 나도 작게 미소 지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지.”
“곧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의 의지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꽉 잡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이 헬레나 페레스카가, 이 세계를 당신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태황후를 쓰러뜨릴 것이다.
발레르를 꺾을 것이다.
너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너를 지킬 것이다.
“……대관식 후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로부터 군신 맹약을 받았다.”
카이사르가 회상하듯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황제가 탄생하면, 제국의 귀족과 기사들은 그 황제에게 군신 맹약을 하여 충성과 섬김을 약속한다.
“페레스카도, 가르말도, 발레르도,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과 신의를 다 하겠노라 다짐하더군.”
군신 맹약을 하지 않는 가문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내쳐지기 때문에, 속내가 어떻든 당연히 거쳐야 할 일종의 쇼였다.
카이사르는 날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모든 맹세보다도, 지금 그대의 맹세가 가장 의지가 되는군.”
“폐하.”
“그러니 이제는 그만 내게 돌아와. 내 곁에서, 그 맹세를 지켜.”
나는 카이사르의 양손을 잡고 그의 손등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댔다.
“저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내 손도, 발도, 생명도, 심장도.
나의 검도 모두.
“모든 것이 당신의 뜻하신 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왕.
나의 것.
설령 끝내 네 여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네 검이 되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