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96/156)

* * *

돌아가는 길은 로위나가 배웅을 해 주었다.

이미 해가 저물어 복도가 캄캄했다. 어서 추운 계절이 다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위나.”

“네, 공녀.”

“폐하의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내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로위나가 나를 지나쳐 두어 걸음 정도 갔다가 멈춰 서서 날 돌아보았다.

“힘든 시기인 줄은 알아요. 하지만 살이 너무 빠지신 것 같아요.”

“저희는 늘 뵙고 있어 그런지, 큰 변화를 모르겠군요. 갑자기 황제가 되신 후로 부담이 크신 탓이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긴, 발레르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살이 찐다고 해도 이상하긴 하지.

걱정이 되는 건, 이제는 이전만큼 그의 곁을 지킬 수 없게 된 나의 노파심인 것일지도.

“식사는 잘 하고 계신 건가요?”

“네. 특별히 문제없이 잘 하고 계십니다. 저와 자작님이 최대한 챙기며 살피고 있습니다.”

“잠은요? 잠은 잘 주무시나요?”

“큰 문제는 없는 걸로 압니다.”

내가 얕은 한숨을 내쉬자, 로위나가 날 위로하듯 덧붙여 말했다.

“어수선한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걱정하시는 부분도 분명 좋아지실 겁니다.”

“그렇겠죠…….”

너무 참견하는 듯 보여도 좋지는 않겠지. 나는 걱정을 꾹 삼키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폐하께 뭔가 보양식이라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풉.”

“로위나?”

“아,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요.”

“뭔데요?”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로위나는 민망해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두 분, 정말 많이 닮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폐하도 같은 얘길 하셨거든요.”

“폐하께서?”

“공녀께서 살이 많이 빠지셨다며, 보양식을 보내고 싶다 하셨죠.”

“저, 살 안 빠졌는데.”

내가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 말했다. 몸무게가 약간 줄긴 했지만, 티도 안 날 정도다.

카이사르 그 팔불출, 대체 주변에 무슨 소릴 하고 다니는 거야.

“네,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그저 두 분 다, 남들은 모르는 미세한 변화를 눈치챌 정도로 서로를 깊이 신경 쓰고 계신 덕분이겠죠.”

“그런 걸까요, 역시.”

조금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만, 이내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새어 나왔다.

내가 언제부터 남을 이렇게 살피고 신경 쓰던 사람이었던가.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도 못하는 타인의 변화에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떻게든 해 주고 싶어서 조바심을 내고.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좀 더 다채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

분명, 카이사르 덕분이겠지.

“폐하를 잘 부탁해요.”

“말씀하신 대로,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로위나.”

나는 쓰게 웃으며 로위나를 쳐다보았다.

“참 나. 생각해 보니, 지금 이런 건 내가 아니라 브란테 영애가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괜한 심술에 혼잣말로 투덜거렸더니, 로위나가 고갤 살짝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브란테 영애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계신 것 같긴 합니다.”

“아, 그래요?”

“네. 폐하와 눈만 마주쳐도 울먹울먹하시는데, 어떻게든 티타임은 매일 빠지지 않고 함께 하시더군요.”

“오……, 기특한데요.”

미묘한 기분이군.

챙겨 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나저나 카이사르와 눈만 마주쳐도 울먹울먹한다니, 걔도 참 어지간하다.’

그렇게 카이사르를 무서워하면서도 황후의 자리는 탐나는 것인가. 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거 참.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 앞에 섰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아고트가 날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아가씨!”

“미안. 좀 늦었지?”

“아니에요! 해 떨어져서 날이 추우니 어서 이거 입으셔요.”

아고트가 들고 있던 코트를 펼치며 말했다. 나는 코트에 팔을 꿰어 넣은 후, 곁에 서 있는 로위나를 돌아보았다.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죠.”

“그러면 이만……. 아, 참. 하나만 더.”

그만 자리를 떠나려던 나는, 아고트의 얼굴을 보자 떠오르는 게 있어 다시 로위나 쪽으로 돌아섰다.

“드라코교의 일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카이사르는 사라진 단테의 시신을 찾아 드라코교의 본거지를 찾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런 황망한 상황에 그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을 리 없다.

나만 해도, 노에를 조사하기 위해 아고트를 보내려던 걸 잠시 미뤘을 정도니까.

로위나가 안경을 쓱 올리며 내 말에 답했다.

“은밀히 정찰을 보내 두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결과는 없지만요.”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다만…….”

“……?”

로위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갤 들어 날 쳐다보았다.

“최근 드라코교의 집회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게 좀 신경 쓰이긴 합니다.”

“……그래요?”

“네. 이대로 해체되는 수순이라면 낫겠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예를 들어, 노에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여 더 이상 뭇 사람들을 선동할 이유가 없어진 거라면.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로위나가 안심시키려는 듯 굳이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더욱 불안함을 부추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마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리라.

* * *

황성 내 인선(人選)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황성의 분위기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일단, 카이사르에게 함부로 개기는 귀족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다들 목숨은 소중할 테니까.

“마음대로 마구 휘저으시는 것같이 보이는데, 딱 태황후께서 시비를 걸기에 애매한 선까지야.”

결국 친위대장의 직함을 받아들여, 카이사르의 곁을 종일 지키게 된 레너드의 소감이다.

“그런 거 있잖아. 누가 봐도 태황후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일인데, 그렇다고 그 일에 발끈하면 발끈한 쪽이 오히려 우스워지는.”

음, 알 것 같다.

날 다시 자신의 검술 스승으로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그런 중에도 계획을 가차 없이 밀어붙이고, 적을 냉혹하게 내친다는 이미지는 확실해졌지.”

레너드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마냥 폭정을 하시는 게 아니야.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더라고.”

“오라버니가 폐하에 대해 그렇게까지 칭찬할 줄이야.”

“오히려 반성하고 있어. 난 그분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레너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음. 카이사르가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지네.

“저기, 그런데 폐하의 건강은 좀 어때?”

“건강?”

“저번에 보니 살이 빠진 것처럼 보여서.”

내 질문에 레너드가 잠시 골똘해지더니 천천히 고갤 끄덕거렸다.

“으음, 그래. 많이 피로해 하긴 하시더라. 일이 많으니까.”

“아, 역시.”

“하지만 이제는 쉬실 여유가 좀 생기실 테니, 괜찮을 거야.”

“그러려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너드가 그런 날 툭툭 찌르며 씨익 웃었다.

“뭐야, 헬레나. 신경 쓰여?”

“응? 엇, 으음. 내가 카이, 폐하를 시, 신경 쓰면 좀 이상한가?”

어쩐지 창피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한 말이 튀어 나갔다. 얼굴이 뜨끈하다.

그런 내 모습에 레너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파핫’ 하고 파안대소했다.

“헬레나, 얼굴 빨개졌어.”

“뭣, 진짜?”

당황한 내가 양손을 뺨에 가져갔다. 차가운 손의 체온에 뜨거운 뺨이 서서히 식어 갔다.

으, 창피해.

근데 대체 내가 왜 창피해야 하는 거지. 죄지은 것도 아니고.

“헬레나, 귀여워.”

레너드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천사 같은 오라버니가 그렇듯 개구진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다.

“노,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냐. 보기 좋아서 그래.”

레너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누구라도 다 귀여워 보이기 마련인가 봐.”

어쩜. 나도 닭살 돋아서 안 할 말을, 내 오라버니는 술술 잘도 하는구나. 그마저도 레너드다워서 감탄이 다 나온다.

그에 비해 나는 나답지 않은 짓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녀라니. 내가 그런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 참 쉽게 변하네.’

그걸 나 자신이 변하는 걸 보며 깨달은 줄 몰랐다.

사람 인생, 알 수 없는 거구나.

하물며 두 번을 살아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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