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게 몇 달만일까.
카이사르와의 검술 수업을 위해 황성으로 향하는 길.
어느 때보다 걸음이 가벼웠다. 아고트가 눈치챌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아가씨.”
“그런가?”
“네!”
“오랜만에 상대방 안 봐주고 검 휘두를 생각 하니까 즐거운 거 있지!”
“아……, 그런 이유로군요.”
“응? 왜?”
“아, 아니에요. 아하하.”
아고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아고트와는 황성 로비에서 헤어졌다. 귀족이 아닌 그녀는 황성 내부까지 들어올 수 없으니까.
나는 곧장 카이사르와 약속한 장소를 향해 갔다.
긴 복도 끝에 다다라, 아치형의 개방된 문을 통과하여 널찍한 회랑에 들어선 순간.
“……엇?”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회랑에서 마주쳐 버렸다.
카이사르와, 율리카를.
‘아, 타이밍 안 좋네.’
나는 슬쩍 아치형 문을 다시 빠져나와, 벽에 기대어 몸을 숨겼다. 왜 숨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저 두 사람.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은데.
“아, 저, 저기.”
널찍한 회랑에 한껏 떨리는 율리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카이사르는 카우치 팔걸이에 턱을 괸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율리카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 만찬에 폐하를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이크, 저런.’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율리카의 목소리가 딱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쿡 찌르면 와앙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슬쩍, 나는 회랑 안쪽을 훔쳐보았다.
카이사르의 냉기가 도는 눈빛과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말 한 번 잘못하면 살해당할 것 같은 분위기다.
‘무시무시하네.’
저게 황성 사람들이 말하는 ‘늑대 모드’라 이거지. 나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라,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아, 저어기…….”
카이사르가 대답이 없으니, 율리카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양손을 가슴 앞에서 꼬옥 쥔 모습이 정말 안쓰러웠다.
“와, 주시겠죠? 폐하?”
정말 용기 냈구나, 율리카.
별로 응원해 주고 싶진 않지만.
카이사르가 자세를 바꿨다. 꼬아 앉은 무릎 위에 깍지 낀 양손을 얹은 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율리카를 본다.
“이 몸이, 왜 그래야 하지?”
세상 무안하군.
나는 이 흥미진진한 장면에 슬며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야, 저는 폐하의 약혼자인데…….”
“율리카 브란테.”
카이사르가 이름을 부르니, 율리카가 ‘히익’ 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적어도 나와 눈은 마주치고 대화를 나눌 수준이 되어야 그 초대에 응할 맛이 나지 않겠나?”
노골적으로 겁을 주면서 어떻게 눈을 마주치라는 거야.
뭐, 여전히 카이사르에게 꼼짝 못 해서 발발 떠는 율리카도 문제이긴 하지만.
‘쟤는 황후가 될 거라더니, 이쪽 동네랑 체질이 안 맞는 거 아냐?’
나는 벽에 뒤통수를 붙이고 서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하긴. 저런 바보 같은 애한테 뒤통수 맞은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또 생각났다. 태황후 앞에서 굴욕을 당했던 지난날. 크윽.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인지 알 수가 없군.”
“으왓, 깜짝이야!”
와, 진짜 놀랐다.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카이사르가 어느새 인기척을 싹 지운 채 내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카이사르가 씩 미소 지었다.
“일찍 왔군.”
“아……, 조,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나는 황급히 카이사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혹시 엿들었나?”
카이사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회랑에 서 있는 율리카가, 카이사르의 말에 ‘힉’ 하고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자기한테 하는 말이 아닌데도 무서운 건가.
“엿들었다기보다, 들린 거죠.”
난 고갤 갸웃하며 카이사르에게 대답했다.
“오호. 들렸다, 라. 좋은 변명이군 그래.”
“개방된 장소에서 그리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엿들었다 하문하시다니, 짓궂으십니다.”
“그러나 여기 숨지 않았는가.”
“숨은 게 아니라 분위기를 읽고 잠시 자리를 피한 겁니다.”
“으흠.”
“눈치 없이 끼어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폐하와 ‘폐하의 피앙세’께서 중요한 얘기를 나누시는 와중에.”
나는 일부러 ‘피앙세’에 힘을 주어 따지듯 말했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큭’ 하고 신음하더니 몸을 조금 물렸다.
“하아……, 그렇군. 내가 잘못했군.”
카이사르가 졌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율리카 브란테의 원망 어린 눈빛을.
그녀에게는 냉정하고 차가운 카이사르가, 나와 대화할 때는 웃고 농담을 하고 부드러워진다.
내가 밉겠지. 죽이고 싶을 만큼 싫겠지.
‘잘 봐 둬. 이 남자는 내 거야.’
나는 그런 심정으로 율리카를 노려보았다.
“율리카 브란테.”
“네?! 아, 넷, 폐하!”
“나는 오늘 내 스승과 대련이 약속되어 있어, 그대 아버지의 초대에 응할 수 없다.”
“하, 하지만…….”
“아니면 그대가 나의 검 상대가 되어 줄 텐가?”
카이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율리카를 다그치듯 말했다.
‘우와, 이 악당.’
이 남자, 어쩜 이렇게 못됐을까. 좋아 죽겠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결국 율리카는 주먹을 꼬옥 쥐며 고갤 떨어뜨렸다.
* * *
카이사르와의 대련은 정말 훌륭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전력을 다해 붙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도 나도 무언가에서 해방된 것처럼 서로 검을 교환했다.
보는 눈이 많아, 대화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검 끝이 얽혀 들어갈 때, 눈빛이 교환될 때, 서로의 몸이 가볍게 부딪칠 때.
그 모든 때에 전해야 할 말을 모두 전했고 들어야 할 말을 모두 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후련하다……!”
2시간 남짓한 대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모처럼 개운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곁에서 걷던 레너드가 그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좋은 거야?”
“그동안 수련병들만 상대하면서 영 찌뿌둥했거든. 그게 해소된 기분이야.”
“하하. 역시 넌 검을 잡을 때 가장 즐거워 보여.”
“그런가?”
검 따위 다시는 잡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전생에서 온갖 학대를 받으며 검을 배웠던 기억이 끔찍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난 검을 좋아하긴 하나 보다. ……아니면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게 좋은 건가?
“난 여기까지만 바래다줄게. 폐하의 곁을 지켜야 해서.”
복도 중간쯤에서 멈춰 선 레너드가 내게 말했다.
“응. 걱정 마.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렇게 나는 복도 중간에서 레너드와 헤어졌다.
그러나 나는 얼마 못 가 다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 멍청한 것!”
굳게 닫힌 한 방문 너머에서 찌를 듯한 호통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헉, 깜짝이야. 뭐야?”
어느 귀족이 애먼 메이드를 잡고 있나?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영 신경이 쓰인다.
결국 난 소리가 들려온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한 뼘쯤 되는 틈으로 방 안을 살폈다.
“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잘난 척이나 하라고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줄 아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율리카 브란테?’
놀랍게도 혼나고 있는 여자는 일개 메이드가 아니었다. 황제의 약혼녀였다.
그녀를 다그치는 이는 그녀의 아버지인 브란테 변경백.
그는 들고 있는 지팡이로 바닥을 찧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지팡이가 쿵쿵 소리를 낼 때마다 율리카의 어깨가 놀랄 만큼 튀었다.
“대체 언제까지 미적댈 참이야! 그깟 남자 마음 하나 휘어잡지 못해?!”
“하, 하지만 폐하께서는 다른 사람을 연모하고 계신데…….”
“어리석기는! 사람들이 널 뭐라 하는 줄 알고는 있느냐? 목석이라 한다, 목석!”
율리카가 기어코 눈물을 떨어뜨렸다. 히끅, 딸꾹질까지 한다.
“마법은 뭐하러 배운다고 설쳐서는! 차라리 너도 검이나 배울 것이지! 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래도 오기가 아예 없진 않은지, 율리카는 파들파들 떨면서도 눈을 꽉 감고 말을 꺼냈다.
“……셨잖아요.”
“뭐?”
“계집이 검 따위는 잡는 거 아니라고 했던 건 아버지셨잖아요!”
율리카의 발악에, 브란테 변경백의 표정이 악마처럼 돌변했다.
그는 더 이상 말로 다그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율리카의 뺨을 세게 내리쳤을 뿐.
철썩하는 소리가 찢어질 듯 들렸다. 율리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지나가야 해.’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율리카는 내 적이다. 내 뒤통수를 친 사람이다. 내가 나서서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줄 필요는 없었다.
쌤통이다. 인과응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쥐고 있던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네가 감히 내게 대들어?!”
브란테 변경백은 이번엔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율리카는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나는.
“적당히 하시죠, 백작님.”
결국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가고 말았다.
아아.
슬픈 호구의 인생.
나는 지팡이를 쥔 브란테 변경백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변경백은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행동이 방해받았다는 걸 도무지 용납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페레스카 공녀……?”
“여기는 황성입니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습니다.”
내 말에 변경백의 눈이 희번덕였다.
“시끄럽소! 남의 집안 문제에 끼어들 일이……!”
변경백이 내 손에 잡힌 제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조금 움찔했을 뿐, 결국 빼내지 못했다.
당연하지. 그는 중년의 늙다리였고, 난 당장 검으로 마수를 썰어 버릴 수 있는 현역이다.
변경백은 몇 번 더 빼내려 움찔거리긴 했으나, 역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큭, 이게 무슨……!”
변경백의 눈빛에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계집에게 힘으로 밀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노, 놓으시게!”
변경백이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나는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변경백은 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제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굴욕 어린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공녀!”
“무례는 백작께서 저지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지팡이는 사람을 때리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공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페레스카는 남의 집안일에 참견을 할 만큼 오지랖이 넘치는 게요?!”
“백정 같은 짓을 말릴 정도의 오지랖은 있습니다.”
“뭣?! 배, 백정이라니……!”
변경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주먹을 꾹 쥐는 꼴을 보니, 여차하면 나도 때릴 기세다.
나는 그의 꽉 움켜쥔 주먹을 힐끗 확인하고 말했다.
“혹여 제게도 폭력을 휘두르실 작정이시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
변경백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런 변경백을 노려보며 뒤이어 말했다.
“물론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나는 허리에 찬 검 손잡이 위에 슬며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마침 오늘은 검술 수업을 위해 황성에 온지라 검을 패용 하고 있었다.
물론 맨몸으로도 이런 늙다리를 넘어뜨리는 건 충분하겠지만, 시각적인 협박은 이쪽이 낫지.
“……기가 차서 더는 말을 섞을 수가 없군!”
나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소득이 없다고 여겼는지, 변경백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일어나라, 율리카! 돌아갈 것이다!”
변경백의 명령에, 율리카가 부은 뺨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율리카 앞을 가로막고 선 채 변경백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브란테 영애는 지금부터 저와 볼일이 있어서요.”
“적당히 하시지요, 공녀. 무릇 사람이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제 딸을 개 패듯 패는 사람이라 소문이 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브란테 변경백의 얼굴에 처음으로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열려 있는 문밖 복도에서, 황성 사람들이 안쪽을 기웃거리며 쳐다보는 게 보였다.
‘제 딸보다 자신의 소문이 더 걱정되는 모양이네.’
이런 부모,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맞다. 내 전생의 부모였구나.
“더구나 폐하의 약혼녀에게 손찌검을 하시다니요. 이는 폐하를 향한 위해와도 같지 않습니까?”
“지, 지나친 해석이군!”
“어쩌시겠습니까, 백작님? 전 지금 좀 화가 난 상태라, 억지로 영애를 데려가겠다 하시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변경백을 노려보았다.
변경백의 표정이 꽤 가관이다.
나 때문에 화나는데,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리자니 위험할 것 같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놈의 개도 안 주워 먹을 자존심.’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흥. 미친개는 피해 가는 게 상책이지.”
결국 변경백은 한발 물러났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서도 자신이 양보한 척 허세를 부린다.
“오늘의 무례를 두고두고 기억해 두겠소, 공녀.”
“이런 하찮은 일도 두고두고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이군요. 전 금방 잊을 것 같지만.”
“흥. 그 뻔뻔함이 언제까지 가나 봅시다.”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외침과 함께 황혼으로 사라지는 악당 같구나.
변경백은 율리카를 험악하게 노려본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비켜라!”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시종들에게 괜히 화풀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당일 수가 있지.
자아, 그럼.
이제 남은 한 명도 마저 처리를 해 보실까.
“괜찮나요, 영애?”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율리카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변경백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까다롭고 귀찮다.
율리카는 퉁퉁 부은 한쪽 뺨을 감싸 쥔 채 고갤 숙이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고, 고맙다는 말을 바라고 하신 일이라면, 크게 실수하셨네요.”
에휴. 이쪽도 허세야?
부녀가 쌍으로 왜 이 모양이야, 진짜.
“제가 영애한테 그런 기본적인 예의를 바랄 리가요. 당한 게 있는데.”
내가 빙긋 웃으며 신랄하게 비꼬아 말했다. 율리카가 ‘윽’ 하고 신음하며 날 올려다봤다.
뭐 억울할 게 있다고 내 앞에서 우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꼭 나쁜 인간 같잖아.
“뭐 일단은……, 상처부터 치료하죠.”
나는 찢어져 피가 맺힌 율리카의 입술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