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율리카를 데리고 빈방으로 향했다.
시종을 불러, 상처에 바를 연고와 얼음주머니, 그리고 간단한 다과를 부탁했다. 눈치 빠른 시종들이 군소리 없이 빠르게 내가 요구한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때까지 율리카는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축 처진 어깨와 숙인 고개가, 바람이 빠져 푹 내려앉은 풍선 같았다.
‘내가 왜 이 인간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고 있는 거지.’
하아. 절로 나오는 한숨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나는 의자를 끌어다 율리카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고개 들어요.”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요.”
율리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내 말에 군소리 없이 고갤 든다.
나는 율리카의 상처에 연고를 꼼꼼히 발라 주었다. 상처에 닿을 때마다 율리카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됐어요. 얼음은 뺨에 대고 있어요. 다행히 멍은 안 들 것 같네.”
“…….”
“단 것 좀 들어요. 우울할 땐 단 걸 먹어야죠.”
“…….”
“어휴, 머리도 다 헝클어졌네. 이따가 돌아가기 전에 사람 불러서 머리도 다시 만져야겠어요.”
나는 율리카가 반응하든 말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율리카를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어색한 공기를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그렇게 나 혼자 몇 마디나 주절주절 떠들었을까.
드디어 율리카가 입을 열었다.
“왜죠?”
“뭐가요?”
“왜……, 절 도와준 거냐고요.”
그렇게 말한 후 율리카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해 주길 원하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율리카가 인상을 쓰며 날 노려봤다.
“공녀, 그렇게 잘났어요? 그렇게 나한테 잘난 척하고 싶어요? 날 비참하게 만드는 게 즐겁냐고요!”
“……저기, 잠깐만요. 기가 차네. 아니,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는데, 이게 욕까지 먹을 일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다 새어 나왔다. 얘는 왜 도와줘도 신경질인가.
“뻔뻔한 소리도 작작 해요. 내가 뭐 당신 예뻐서 도와줬겠어요?”
“그럼 대체 왜!”
율리카가 소리쳤다.
온 방 안이 울릴 정도다.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내가 너보다 더 가졌는데, 왜! 왜 네가 나한테 동정 따위를 베풀어!”
이제 반말까지.
나는 ‘허…….’ 하고 코웃음이 나왔다.
“율리카 브란테.”
내가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네가 비참해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라고요?”
“네가 네 멋대로 비참해지고, 자존심 상하고, 열등감 느끼고……, 아니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 써 줘야 하냐고.”
‘열등감’이라는 말에 율리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더럽게 섬세해서 피곤해 죽겠네, 진짜.”
“고, 공녀, 무슨 그런 상스러운 말을……!”
“왜 도와줬냐고?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호구 짓인 줄 누가 몰라서 도와줬겠는가. 율리카를 한 대 치고 싶은 건 내가 제일 간절할 텐데.
그래도 도와준 이유는, 단순하다.
“그게 옳은 일이니까 도와준 거지.”
율리카가 넋 나간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약자에게 폭력으로 화풀이하면 안 돼. 상식 아니야? 그걸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지. 그게 옳은 거잖아.”
“그……, 그렇지만, 나, 나는 당신의 적이고…….”
“네가 적이든 원수든, 그게 내가 옳은 일을 그만둘 이유는 못 돼.”
날 노려보던 율리카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더니 서서히 아래쪽을 향해 떨어졌다.
치맛자락을 쥔 그녀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난 적어도 옳은 일을 외면하지는 않아.”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비겁한 수단도 불사하는 너와 내가, 같을 리가 없다.
“그건……, 당신이, 당신이 강하니까……, 가진 게 많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고…….”
“늘 변명뿐이구나, 너는.”
한심함에 한숨이 다 나온다. 내 한숨에 율리카의 어깨가 가볍게 움찔했다.
“율리카 브란테. 난 내가 가진 것들 중 단 하나도 손쉽게 손에 넣은 적 없어.”
율리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손에 쥔 얼음주머니에서 녹은 물이 카펫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무도 울지 않았지만, 카펫엔 젖은 자국이 남았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 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말했지만, 율리카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끝까지 고집쟁이다.
‘얘 인사 받아서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기대가 없으니 실망스럽지도 않다.
나는 율리카가 날 무시하든 말든,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방을 빠져나왔다.
보람찬 것도 아니고, 기분이 유쾌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찝찝하진 않다. 율리카가 맞는 걸 보고도 지나쳤다면 분명 내내 찝찝했겠지.
그걸로 만족하자.
무언가 켕기는 게 남는 건 싫으니까.
“아가씨!”
홀에 내려가니 아고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늦을 거라고 전해 달랬는데, 못 들었어?”
“들었어요. 그래도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요.”
아고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고트가 걸쳐 주는 코트를 입은 후 건물을 나섰다.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을 때, 난 문득 생각난 듯 아고트에게 물었다.
“아고트. 만약에 너한테 철천지원수가 있는데 말이야.”
“원수요? 번즈 같은?”
“음……, 뭐 그래, 그렇다고 치고. 번즈 백작이 물에 빠졌는데 구해 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그 인간이 물에 왜 빠지죠?”
아고트가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거기서부터 의문인 건가.
“만약이라니까, 만약.”
“그렇군요. 으음, 물에 가라앉아 죽어 가는 꼴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켜보다가, 결국 익사하여 물 위에 시체가 떠오르면 박수를 쳐 주겠어요.”
“헉.”
뭐야, 이쪽이 정상인가?
역시 내가 호구인 거야?
“그러고 싶긴 한데…….”
“……?”
“실제라면 구해 줄 것 같긴 해요. 어쩐지.”
“그래?”
“눈앞에서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으면 찜찜하잖아요.”
찜찜하다.
인간의 선량함이란, 우습게도 딱 그 정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율리카의 울부짖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강하니까, 다 가졌으니까, 그렇기에 가질 수 있는 선량함이라고.
하지만 아고트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사람은 강하지 않아도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어, 율리카.
‘네가 그걸 깨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차 벽에 기대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찜찜함을 남기지 않은 날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 * *
선황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온 제국이 들썩들썩한 탓에, 노에에 대한 조사는 어영부영 미뤄지게 됐다.
“아가씨. 일전에 부탁하신 마법사 길드의 위치입니다.”
다행히 케고르가 잊지 않고 조사해 준 덕분에, 나는 노에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남쪽 지방의 리운에 있다고 하더군요.”
“꽤 멀군요.”
나는 케고르가 건네준 주소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아고트가 혼자 갈 수 있으려나.
“아고트가 다녀올 수 있도록 여비와 교통편을 준비해 주세요.”
“네. 혹시 제가 조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죠?”
“마법사든 학자든, 권위 의식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어린 메이드 한 명만 보내서는 쉬이 협조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리 있네요. 가문의 인장이 찍힌 요청서를 함께 보내는 게 나을까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유능한 조언자가 곁에 있어서 안심이에요.”
내 칭찬에 케고르가 빙긋 웃으며 제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노에의 뒷조사를 시작해 볼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서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