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99/156)

* * *

“아고트 양이 안 보이는군요.”

아고트가 남쪽으로 떠나고 며칠.

공작저를 방문한 해밀턴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언제나 공녀 곁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사람이.”

“아고트라면 잠시 심부름을 보냈어요.”

“심부름이요? 시내에 말입니까?”

“아뇨. 좀 멀리…….”

해밀턴이 눈썹을 으쓱하며 내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마법사 길드로 보냈다고 하면 구구절절 이유를 물을 거고, 그러면 노에에 대해 말해야겠지.’

음, 귀찮은데.

“……본저에 보냈어요.”

나는 생긋 웃으며 거짓말로 둘러댔다.

“시절이 뒤숭숭하니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실 듯하여.”

“하긴, 그렇겠군요. 공작께서도 지금 수도에 와 계시니.”

오오, 믿는 눈치다. 다행이군.

아고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해밀턴에게 드라코교에 대해 묻기로 했다.

“로위나에게 들으니, 드라코교의 집회가 눈에 띄게 줄었다던데요.”

“아, 네. 이미 들으셨군요.”

해밀턴이 우울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집회 장소를 알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집회를 하지 않는 건지, 더욱 음지로 들어간 것인지.”

“여러모로 곤란해졌네요.”

“뭐, 서두를 건 없죠. 집회에 참여했던 서민들은 많습니다. 하나씩 탐문하다 보면 단서가 걸릴 겁니다.”

해밀턴이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는 여유롭겠지.

그는 드라코교의 문제가 우선이 아니다. 단테의 시신이 사라진 일도, 찝찝하긴 하겠지만 성회에 들키지 않았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다.

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크루세흐의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이젠 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 악룡이 떨친 악행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다.

용이 되살아나면 그 악몽도 또한 되풀이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뭐, 어쨌든.”

내가 새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니, 해밀턴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요즘 태황후께서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아……, 다행히 요 근래 마주친 일이 없네요.”

“내측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그렇다 해도 예전만큼 간섭 안 하시는 게 의외긴 하군요.”

“뭐, 태황후가 얌전한 대신, 발레르가 전면에서 열심히 간섭하고 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왜 그러시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해밀턴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짧은 한숨으로 고민을 정리하고 내게 말을 꺼냈다.

“지금 발레르에서 두 가지 사안을 놓고 폐하와 신경전 중입니다.”

“두 가지 사안이요?”

“하나는……, 음, 듣고 화내지 말아 주십시오.”

“율리카 브란테와의 성혼 말인가요?”

“헉, 어떻게?!”

“아니……, 제가 화낼 만한 일이 그것 말고 어디 있겠어요.”

단서는 다 던져 놓고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더구나 화낼 것도 없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후계자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다며, 하루빨리 혼인하여 자녀를 보시라 난리입니다.”

“그럴싸하군요. 다른 하나는요?”

“만약 성혼을 미루실 거라면, 프란 황자 전하를 황태제로 세우라는 주장입니다.”

……아하.

나는 지난번 율리카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브란테 변경백이 제 딸에게 손찌검을 하면서까지 몰아붙였던 이유.

프란 황자가 황태제가 된다면, 나중에 율리카가 아이를 낳는다 한들 그 아이는 프란 황자와 경쟁해야만 한다.

여태껏 브란테의 뒤엔 황후와 발레르가 있었는데, 그 뒷배와 적이 되는 것이다.

“변경백이 그래서…….”

“네?”

“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어 혼잣말을 부정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폐하께서 지금 여간 곤란하신 게 아닙니다.”

“으음, 그렇겠네요.”

발레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선택지를 제안하는 형태를 해 왔다.

‘이만큼은 우리가 양보해 주겠다’는 제스처나 다름없다.

그런 상황에 카이사르가 두 가지 사안을 다 거절한다면,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될 수도 있다.

“똑똑한 방법을 쓰네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달리 생각하시나요?”

“전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해밀턴이 심각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제 의견을 꺼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을 사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음……, 처음이라 간 보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아니, 그러면 좋겠지만요.”

그러면 좋겠지만.

나는 안다.

폭풍 전야의 불안함을.

그들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실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니었음을.

“또 어떤 비겁한 수단을 가지고 나올지……, 그것이 두렵습니다.”

해밀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문득, 율리카를 곁에 세워 놓고 내게 자신의 편에 서지 않겠느냐 제안하던 태황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적이었던 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보면, 쓸모없어지면 얼마든 아군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여자.’

과연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아고트가 마법사 길드로 떠나고 나니, 집에서는 나와 대련해 줄 사람이 없게 됐다.

텅 빈 가든 하우스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지만, 상대가 없으니 이내 시시해졌다.

제자들이 다들 바쁘니 외롭군.

‘오늘은 좀 쉴까.’

나는 검을 검집에 도로 넣고, 평소보다 일찍 가든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어머, 아가씨. 오늘은 일찍 마치셨네요.”

땀 닦을 수건을 들고 대기 중이던 베시가 환하게 웃으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아고트가 없으니 영 흥이 안 나시나 봐요.”

“따,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나는 속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베시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통에 더 창피해졌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정원에 차를 준비해 뒀어요.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지 않으실래요?”

“정원에?”

아……, 그러고 보니 봄이구나.

나는 그제야 정원 쪽을 확인했다. 가든 하우스를 들락날락하며 수시로 지나다녔을 길인데, 의식해서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겨우내 비쩍 마른 나뭇가지만 남아있던 나무들이 어느새 옅은 초록으로 뒤덮였다. 그러고 보니 공기도 제법 따뜻했다.

“이제 낮에는 제법 포근해졌지 뭐예요.”

“응, 그러네.”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베시.”

“네. 아, 옷 시중 도와 드릴게요.”

“됐어. 그러잖아도 아고트 몫까지 해 주느라 바쁘잖아.”

나는 손사래를 치며 베시의 도움을 거절했다. 옷 정도는 혼자 갈아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에 올라와 막상 혼자 옷을 갈아입으려니, 등 뒤에 달린 여러 개의 단추가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으으……, 그냥 도와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낑낑거리며 단추를 잠그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쩌다가 시중받는 게 당연한 몸이 된 거지.’

생각해 보니 헬레나 페레스카로 태어난 이래 줄곧 시중을 받기만 하는 인생이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해, 당시 시종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대체 왜 우리 아가씨는 시중받는 걸 이렇게 꺼려 하실까 하고 말이다.

‘전생에서는 내가 살림하고, 나무 패고, 남의 시중까지 들던 생활이었으니까.’

스승의 밑에 들어갔을 땐 그 늙은 영감탱이 수발 다 들어 줬지, 용병단 따라다닐 땐 막내랍시고 온갖 잔심부름 다 했지…….

오죽하면 황제가 된 후에도 어지간한 시중은 마다했을 정도였으니까.

“게을러졌네. 게을러졌어.”

그런데 지금은 단추가 많다는 이유로 옷 한 벌 입는데 이렇게 낑낑대야 하다니.

“어휴, 겨우 다 입었네.”

나는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거울에는 곱슬거리는 긴 은발을 늘어뜨린 푸른 눈의 여성이 비치고 있었다.

“좋아. 내려가 볼까.”

가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을 나서고 몇 걸음쯤 걸었을까.

“……어?”

쿵, 하고.

심장이 통증을 호소했다.

‘헉……!’

나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 비틀거려야 했다.

누군가 심장을 꽉 쥐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은 채, 벽에 기대어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통증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주 짧았다. 그러나, 강력했다. 그대로 숨이 멎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으윽……, 뭐야, 도대체.”

불쾌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불길함이 뇌리를 스친다.

이 통증, 알고 있다.

마수 토벌 때, 날 향해 달려드는 대형 마수와 마주한 순간 느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크루세흐가 봉인되어 있는 건 ‘단테’의 심장인데, 왜 ‘헬레나’의 심장이 아픈 거지?’

오싹함이 온몸을 훑었다.

이건 그냥……, 건강 문제인가?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아니면 정말, 크루세흐와 연관된 일 때문에?

“어머나, 아가씨!”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복도 저쪽에서 베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저앉은 날 발견한 베시가 호들갑을 떨며 내 앞으로 뛰어왔다.

“왜 그러셔요?! 올라간 지 한참이 되어도 안 오셔서 혹시나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 올라간 지 한참이 되어도 못 내려간 건, 단추가 너무 많아서였어, 베시…….

……하지만 창피하니까 그 얘긴 하지 말아야지.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의사, 아,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니야. 그냥 발목을 살짝 삐끗한 것뿐이야.”

심장의 통증은 이제 완전히 가셨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베시에게 거짓말을 했다.

“정말이셔요?! 그렇지만 식은땀이 이렇게 나는데……!”

“그러게. 너무 놀라서 식은땀까지 다 나더라. 하마터면 창피하게 복도에 대자로 뻗을 뻔했어.”

“정말이시죠? 어디 아프셔서 그런 것 아니시죠?”

“응, 괜찮다니까.”

나는 일부러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신 후였으니까.

‘하지만, 뭐였을까? 방금 그거.’

마수 토벌 이후로는 이런 통증을 느껴 본 적 없었는데.

‘혹시 단테의 심장에 봉인된 크루세흐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다거나……, 그런 걸까.’

모든 것은 막연한 추측뿐.

의문에 뒤섞인 불안함을 삼키며, 나는 베시가 이끄는 대로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정작 쓰러진 건, 내가 아닌 카이사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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