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00/156)

* * *

카이사르와의 대련이 약속되어 있던 날. 아침 일찍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황성에 도착한 나는, 뜻밖의 통보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폐하께서 검술 훈련을 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

연무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가 싶더니, 뒤늦게 해밀턴이 나타나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거짓말이시죠?”

“유감스럽게도 업무가 너무 많아, 도저히 시간을 빼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십니다.”

거짓말이다.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나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빼먹을 사람이 아니다.

“제가 직접 폐하를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듣도록 하죠.”

나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대로 애써 차분한 척하던 해밀턴이 화들짝 놀랐다.

“네?! 아, 안 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할게요.”

“그래도 안 됩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폐하께서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스승을 바람맞히는 분이셨던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 어쨌든 지금은 상황이 좀 곤란해서!”

“녹트 자작님.”

“네?”

“솔직하게 털어놓으실래요, 제가 집무실로 쳐들어가는 걸 보실래요?”

내가 팔짱을 끼며 말했더니, 해밀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는 결국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으……, 공녀께는 들킬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러게 왜 자작님께서 오셨어요? 거짓말도 잘 못 하시는 분이.”

로위나를 보냈다면 속았을지도 모른다. 로위나는 표정만으로는 속내를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저런. 참혹한 이유가 있었군.

“그래서? 폐하께서 안 나오신 진짜 이유가 뭐죠?”

내 질문에 해밀턴은 일단 주변부터 살폈다. 꽤 먼 거리에 기사 두어 명이 서 있었다.

여기서 얘기해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해밀턴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내게 속삭여 말했다.

“저,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뭐야. 뭔가 안 좋은 이유인 건가?

나는 순순히 해밀턴을 따라 장소를 이동했다.

해밀턴은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내게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놀라지 마십시오.”

“대체 뭐 얼마나 큰일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폐하께서 피를 토하셨습니다.”

“……큰일이었네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됐다. 이렇게 큰일이었는 줄은 몰랐지.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이제 전 뭘 하면 되죠? 이 틈에 반란을 모의하는 이들을 제거할까요?”

“일단 침착해 주십시오. 뭘 상상하고 계시길래 반란까지 갑니까?”

해밀턴이 양손으로 허공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의사 말로는 피로가 누적되어 그렇답니다. 지금은 침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피로라니.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굴리고 있는 거예요, 자작님.”

어쩐지 볼 때마다 여위어 가더라니. 초조함을 넘어서 화가 치민다.

그가 그 지경이 되도록 주변에서 아무도 챙겨 주지 않았단 말인가.

“지금 침실에 계신가요?”

“네. 일단 오늘은 쉬고……, 이크, 공녀!”

내가 해밀턴을 지나쳐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니, 해밀턴이 당황하여 내 뒤를 따라와 붙잡아 세웠다.

“어, 어디로?!”

“폐하를 뵈러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쳐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집무실로 안 가겠다는 거였죠.”

“무슨 그런 억지를!”

해밀턴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절대 안 될 말씀입니다!”

“왜죠?”

“이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될 일입니다! 공녀께만 특별히 알려 드린 거라고요!”

해밀턴이 소리를 죽여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를 설득하는 데에는 그다지 효과는 없었지만.

“제가 폐하께서 피를 토하셨노라 동네방네 떠들기라도 할까 봐요?”

“브란테 영애도 오늘은 업무를 핑계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공녀께서 폐하를 찾아가시면, 그것도 침실로 찾아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 그게 문제였던 거군요.”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날 설득했다고 생각했는지 해밀턴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내 말에 해밀턴은 뜨악한 표정으로 변했다.

“안 들키면 되죠.”

“공녀……!”

“아, 메이드로 위장할까요?”

“친위대는 어쩌라고요!”

“더욱 문제 될 게 없네요. 친위대장이 제 오라버니잖아요.”

“아뿔싸……!”

해밀턴이 ‘큰일이다’ 하는 눈빛이 됐다. 바보…….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해밀턴이 내 양손을 꼬옥 쥐었다.

나는 내 손을 애틋하게 쥐는 해밀턴의 손을 내려다보며 정색했다.

“어머. 자작님의 이런 감정은 책임져 드릴 수가 없는데요.”

해밀턴은 내 농담에 응해 줄 정신이 아니었는지, 깔끔하게 무시했다.

“대신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네?”

“도무지 공녀를 혼자 보낼 자신이 없습니다. 뭔 일 저지르실 것 같아서.”

“믿음이 부족하시네요.”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해밀턴이 와들와들 흔들리는 눈으로 내게 호소했다.

흐음. 별수 없군.

사실 황제의 침실에 들이닥친다는 것부터 무리였으니까. 해밀턴이니까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가능했지, 로위나였으면 단박에 거절당했을 일이었다.

‘이쯤에서 한발 물러서 줄까.’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하며 해밀턴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요. 함께 가죠.”

* * *

메이드로 위장한다는 말은 농담이었는데, 해밀턴은 하필 그 작전에 깊이 동의한 모양이었다.

결국 해밀턴을 안심시키기 위해 황실 메이드복으로 갈아입게 됐다.

무기는 진작 해제당했다. 뭐, 이건 당연한 거지만.

“어떻게 된 일이야, 헬레나? 음……, 귀엽긴 하지만…….”

카이사르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레너드가, 내 모습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으음, 변장이야.”

“어……, 그렇구나.”

레너드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아, 얼른 들어가서 얼른 뵙고 얼른 나오시죠, 공녀.”

해밀턴은 아직도 초조한지 내게 재촉하여 말했다. 그 말에 레너드가 깜짝 놀랐다.

“폐하를 뵈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공녀께서 직접 뵈어야 하실 것 같다기에.”

“저런. 결국 다 말씀하신 겁니까?”

“……절 보내지 마셨어야죠!”

레너드의 질책 어린 질문에 해밀턴이 절규했다. 아마도 문제의 가위바위보는 레너드까지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왜 나에게 숨기려 한 거야? 날 못 믿겠어서?”

“그게 아냐. 폐하께서 별일 아닌 걸로 네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

“별일 아닌 게 아니잖아?”

“아 참, 여기서 말다툼할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어서 뵙고 어서 가자니까요?”

해밀턴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레너드와 내가 동시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해밀턴을 쳐다보았다.

아오, 이 새가슴. 진짜 성가시네.

“안 됩니다.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레너드가 검으로 문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난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막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난 아무나가 아니니까.”

“아무리 헬레나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레너드는 단호했다.

친위대로서의 듬직함이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게 불리한 요소였지만.

“스승이 제자를 위문하려는 것뿐이야.”

“다음에 뵙도록 해.”

“아니, 지금 뵈어야겠어.”

“헬레나가 아니어도 폐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안심하고 돌아가도록 해.”

“곁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움찔, 레너드의 어깨가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살기가 실린 탓이다. 순간 분노했다.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했지?”

긴 침묵.

“다시 묻겠는데, 지금 폐하의 곁에 누가 있지?”

“지금은……, 쉬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없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황제는 외로운 자리니까.

알고 있다.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까 더욱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은 거다.

“오라버니. 문을 열어 줘.”

레너드와 한동안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도, 그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레너드 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레너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곁에 설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는 걸.

“난 친위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레너드만큼 카이사르의 친위기사로 적합한 이는 없을 것 같은데.

레너드에게 환한 미소로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나는 드디어 카이사르의 침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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