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적의 몰락
로위나와 대화를 마친 해밀턴이 다시 침대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카이사르를 깨웠다고 혼내려나? 당장 나가자고 할까?
‘아니지! 카이사르가 날 내쫓아 낼 리가!’
오히려 해밀턴에게 나가라고 하겠지!
그런 기대를 품고 카이사르를 돌아보았으나―
‘……설마 다시 잠든 거야?!’
언제 날 쳐다봤었냐는 듯, 카이사르는 다시 숨을 쌔액쌔액 쉬며 잠든 상태로 되돌아갔다.
뭐야! 방금 깨어 있었던 거 아니야?! 설마 몽유병?!
“에버그린 양이 이따 저녁에 폐하의 식사를 가지고 오겠다고 합니다.”
헉.
그사이 해밀턴은 침대 앞까지 되돌아와 섰다.
“오늘 밤에는 에버그린 양이 폐하의 곁을 지키겠다고 하니, 저희는 그만 돌아가죠, 공녀.”
“네? 아, 네. 잘 됐군요. 그럼 저도 이제 슬슬―”
당황한 나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뒤에서 당기는 기분이 들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헉!”
“공녀?!”
이게 뭐야.
진심으로 당황했다.
뒤를 돌아보니, 카이사르가 여전히 내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안 놓는 건데!’
속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내 심정을 읽었는지, 카이사르가 더욱 힘주어 잡는 게 느껴졌다.
역시 깨어 있잖아, 이 인간!
깨어 있으면 일어나서 날 위한 변명을 하라고! 해밀턴을 내보내란 말이야!
“공녀? 왜 그러십니까?”
“저기, 그……, 폐하께서 제 손을 안 놓아주시는데요.”
“네?”
해밀턴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언제 손을 잡으신 겁니까? 얼른 떼어 놓고 나오세요. 그러다 폐하 깨시겠습니다.”
“그게, 잠결에 잡으셨는지 너무 꽉 잡으셔서. 이거 떼어 내다가 도리어 깨시겠어요.”
“그런……!”
“별수 없잖아요. 전 여기 있을 테니, 자작님은 그만 가서 볼일 보세요.”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녀를 데려온 건 제 책임인데, 공녀만 폐하 곁에 두고 갈 수는……!”
“으므 짓드 은 흐니끄 느그르고요, 좀!”
해밀턴이 이렇게 눈치가 없는 인간이었던가. 나는 분노를 어금니로 꼭꼭 짓씹으며 협박하듯 말했다.
내 분노가 닿긴 닿았는지, 해밀턴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그러면 이상한 짓 안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좀……!”
“정 그러시면……, 폐하께서 손 놓으시면 나오셔야 합니다? 아셨죠?”
해밀턴은 신신당부를 하고 난 후에도 영 불안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방을 나갔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등 뒤에서는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갔군. 눈치 없는 인간.”
뒤를 돌아보니, 카이사르가 문 쪽을 쳐다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폐하께서 나가라고 명령하면 됐잖아요? 왜 주무시는 척한 건데요?”
“……솔직하게 말해도 화 안 낼 건가?”
“안 낼게요.”
“헬레나가 쩔쩔매는 거 보는 게 재미있어서.”
“아오, 진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눌렀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헬레나. 눈앞의 이 인간은 지금 환자다. 황제인 건 알 바 아닌데, 환자인 건 중요하니까.
내가 참는 모습이 웃겼던지 카이사르가 킥킥 웃었다.
그는 내 뒤에서 날 끌어안고 내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속삭여 말했다.
“병문안 와 준 건가?”
“당연하죠. 걱정되잖아요.”
“그래. 헬레나가 제 발로 내 침실에 와 주다니, 아픈 것도 해 볼 만한데.”
“쓸데없는 소릴.”
“심지어 메이드복 차림이라니.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날 정도야.”
눈물은 개뿔.
“그만 웃으세요. 그렇게 들썩거리며 웃으시면 제 어깨가 아파요.”
“큭큭큭큭.”
내가 정색하여 말했다. 카이사르는 날 끌어안은 채 웃느라, 턱으로 내 어깨에 곡괭이질을 해 대고 있었다.
어깨에 구멍 날 것 같다. 내 메이드복이 왜 그렇게 웃긴 건데?
나는 몸을 돌려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폐하.”
“그래, 듣고 있다.”
카이사르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난 그의 기대를 싹 무시하고, 카이사르의 어깨를 꾹 눌러 그를 침대에 도로 눕혔다.
카이사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장난감을 던져 줄 줄 알고 한창 기대하던 강아지가, 졸지에 장난감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환자는 절대 안정입니다, 폐하.”
“……둘밖에 없는데 이름으로 불러 주면 안 되는 건가?”
침대에 누운 카이사르가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운 채 그런 표정을 짓다니. 한없이 연약해 보여서, 덜컥 하는 말을 들어주고 말게 될 것 같았다.
“당분간은 안 돼요.”
나는 간신히 이성을 지켜,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째서지?”
“실은 아직 폐하를 상대로 존댓말이 입에 안 붙어서요.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푸하핫!”
이유가 뜻밖이었던지, 카이사르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아이참, 쉬셔야 한다고요. 웃지 말고 주무시라니까요.”
“잠이 안 와.”
“아깐 잘만 주무시던데.”
“자는 척한 거야. 문소리가 들리길래.”
역시 그랬군.
그는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전생의 나처럼. 나는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됐다.
“제가 곁에서 지켜 드릴게요.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부족한걸.”
카이사르가 몸을 꿈틀꿈틀하여 침대에 자리를 만들더니, 시트 위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자, 이리 와.”
“전 환자가 아닙니다, 폐하.”
“헬레나를 안고 자면 잠이 잘 올 것 같다만.”
“물론 베개도 아니고요, 폐하.”
“제자의 간청이자 군주의 명령이다.”
‘난 맹약도 안 했는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쩍 수척해진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환자니까. 오늘 하루만 휘둘려 주지, 뭐.’
나는 헤어 드레스를 벗어 놓은 후, 침대에 올라가 카이사르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카이사르는 내가 눕자마자 나를 냉큼 끌어안았다. 진짜 베개 취급이다.
자세가 불편하긴 했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헬레나의 향기가 나는군.”
“그건 어떤 향기인데요?”
“으음. 배가 고파질 만큼 엄청나게 달콤한 향기?”
단 거 싫어하면서.
흘끗, 고개를 들어 카이사르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인간, 내가 무슨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초 같은 건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아프지 마세요, 폐하.”
나는 팔을 뻗어 카이사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곧이어 그의 심장 소리가 느리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진짜 자는구나. ……이제야.’
카이사르가 잠들 때까지 미동조차 안 하고 있던 나는,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프지 마.’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규칙적인 카이사르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 심장 소리가 그의 것과 같아져서, 이내 나도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