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03/156)

* * *

달칵.

나를 깨운 건 문손잡이를 돌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은 채 반짝 눈만 떴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소리에 집중했다.

‘몇 분이나 지났지?’

난 재빨리 카이사르를 확인했다. 이번엔 정말 숙면에 든 게 확실해 보였다.

‘깨우면 안 돼.’

나는 조심조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카이사르는 깨지 않았다. 미간을 슬쩍 찡그렸다가 펴긴 했지만.

그대로 뒷걸음질로 침대에서 몇 걸음 물러선 후에야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발견했다. 문 앞에 식사를 담은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로위나를.

“아, 공…….”

쉬잇! 나는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대고 미간을 찡그렸다. 다행히 로위나는 해밀턴보다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내 말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짓으로 옆방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로위나는 고갤 끄덕인 후 가져온 식사를 그쪽 테이블에 옮겼다.

“폐하께서는 깊이 잠드셨어요. 깨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살금살금 다가간 내가 로위나에게 속삭였다. 로위나는 내 등 뒤로 카이사르를 확인하더니,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요즘 통 못 주무셨으니까요.”

“의사는 다녀갔나요?”

“네. 과로라고 합니다. 공녀께는 면목 없습니다. 잘 살펴 달라 따로 당부까지 하셨는데.”

로위나가 내 앞에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녀에게도 한바탕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화를 내서 어쩌겠는가. 나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죠?”

“이미 해가 저물었습니다.”

아…….

이젠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본 후, 다시 로위나에게 고갤 돌렸다.

“알았어요. 곧 나갈게요. 밖에서 기다려 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로위나는 해밀턴처럼 끈질기게 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다시 되돌아와, 이불을 다시 다독여 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도 정돈해 주었다.

셔츠가 흐트러진 채 벌어져 있어서, 옷매무새도 정돈해 주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드디어 보게 됐다.

‘……엇?’

목 뒤쪽, 평소엔 셔츠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그 부분에 푸른 멍 자국이 나 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자국을 자세히 보기 위해 셔츠를 조금 더 벌렸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헉’ 하고 숨을 삼켜야 했다.

등 쪽에 드문드문 멍 자국이 퍼져 있었다.

아니, 이건 멍이 아니다.

‘이건……!’

나는 재빨리 카이사르의 손등을 확인했다. 손은 자세히 보아야만 확인 가능했으나, 분명 손톱 밑에서도 푸른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확실하다.

이건, 중독 증상이다.

‘의사가 이걸 눈치 못 챘다고?’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공포가 밀려왔다.

카이사르는 지금 피곤한 게 아니다. 과로였던 게 아니다.

카이사르는 지금 독을 먹고 있는 것이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 * *

방을 나오니, 복도에 로위나와 레너드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얼굴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아마 내 표정이 굉장히 험악하게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일이죠, 공녀?”

로위나가 내게 물었다.

나는 주변에 우리 세 사람밖에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로위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드시는 음식은 모두 누가 확인하고 있습니까?”

“정해진 식사는 제가 확인합니다만, 그 외의 것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 외의 것?”

“다른 자리에서 드시는 다과나, 외부에서 드시는 것, 손님으로 온 귀족분들께서 진상한 차 같은 것은……. 하지만 모두 기미는 하고 있는데요.”

로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도 무언가 직감한 것이다.

“기미로는 부족해요. 이제부터는 모든 걸 다 확인하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무슨……, 일인가요?”

“폐하께서 과로라고 진단한 의사는 누구죠?”

“내의원입니다만.”

“그 사람 말고,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황성 밖에서 의사를 데려와 다시 진찰하세요.”

“왜 그런 거야, 헬레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레너드도 답답했는지 끼어들어 물었다.

나는, 내 입으로 다시 말하기도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어떻게든 화를 억누른 채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독이야.”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로위나는 아예 희게 질릴 정도였다.

“도, 독이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편인 로위나였건만, 되물을 때 그녀는 아랫입술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확실한 건 의사에게 진단을 받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중독되신 게 맞는 것 같아요.”

온몸에 퍼지는 푸른 멍.

전생에서 본 적이 있었다.

용병단에 있던 시절, 대륙 건너에도 다녀온 적 있다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륙 건너에서 구한 담배라며 곧잘 처음 보는 연초를 피우곤 했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후 온몸에 푸른 멍이 번져 끝내 숨졌다.

뒤늦게 독 때문임을 알았지만, 이 대륙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독 방법을 몰랐다.

‘그때 그 남자는 멍이 처음 나타나고 몇 달이 지난 후에 죽었어. 아마도 몸을 천천히 갉아 먹는 종류일 테지.’

그간 카이사르는 갑작스러운 선황의 죽음으로 과중 업무에 시달려 왔다. 아마도 의도된 발레르와의 신경전을 포함해서.

살이 빠지거나 피로 증상을 보인다고 해도, ‘그런 시기’라는 이유로 깊이 의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음식을 확인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하물며 의사도 과로에 불과하다고 확언했으니까.

‘외부의 침입자를 향한 경계만 강화했지, 내부의 적을 상대하기엔 맹점이 많았어.’

설마 내의원까지 회유했을 줄은.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일단 이 일은 퍼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나는 레너드와 로위나에게 당부했다.

“범인을 잡아서 족칠 때까지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그게 누구든, 카이사르가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며,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 * *

‘독’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상단을 통해 대륙 건너에서 독을 밀수했던 호리오.

호리오가 밀수했다던 독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발레르는 호리오가 독을 밀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과연 협박만으로 그쳤을까?

‘카이사르가 당한 독은 이 대륙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야.’

나는 전생에서의 기억을 반추하며 그렇게 결론 내렸다.

전생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은 그 남자가 분명히 말했다. 대륙 건너에서 구한 것이라고.

‘분명히 연결되어 있어. 호리오와 그 독의 출처는.’

그리고 이 모든 가정을 하나로 추려 보았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용의자는 하나.

발레르가.

“페레스카 공녀.”

추위가 한결 가신 봄의 한낮.

황성에서의 검 훈련을 마친 후 훈련장을 나오는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남자 기사들이 대부분인 곳에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뜻밖이라 여기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방을 확인하니 더욱 뜻밖이었다.

금발을 차분하게 늘어뜨린 율리카 브란테가 굳은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끝나길 기다린 건가?’

우연히 마주칠 장소가 아니다.

내가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브란테 영애.”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내가 한쪽 눈썹을 으쓱 올리며 물었다.

내가 너의 뭘 믿고 시간을 내주겠느냐는 신호였다. 행여나 날 끌고 태황후의 처소에라도 갈 생각이라면, 침이라도 뱉고 돌아설 작정이었다.

율리카는 내 날카로운 말에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저기, 그저……, 잠시 차나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저와 단둘이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흐음, 어쩔까.

이걸 믿어, 말아.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내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율리카가 슬쩍 붉어진 얼굴로 자백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그간 당한 게 한둘이 아닌데.”

“지난번 일의 감사를 전하고 싶어서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지난번 일?

‘아……, 변경백에게 맞았던 일 말인가.’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율리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선고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피의자와 같은 얼굴로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카가 태황후만큼 약아빠진 성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뭔가 작정을 하고 있었다면 티가 났겠지.

‘태황후에 대해 꼬리를 잡으려면 율리카처럼 약한 부분을 들쑤시는 게 제일 낫기도 하고.’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장소는 제가 정하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조건부 허락에 율리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물론이에요!”

“그러면 별채로 가도록 해요. 황성 시종들을 불러 자리를 준비하라 이르겠어요.”

물론 카이사르 측의 시종들을 불러야겠지.

내 말에 율리카는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정말 순순한 건지 아닌지는 확신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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