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04/156)

* * *

율리카와 만날 장소는 채광이 좋은 별채의 가장 큰 방으로 골랐다.

창문을 전부 열게 하여, 밖에서도 안이 보이게끔 했다. 물론 보이지 않게 감시자도 배치해 두었다.

바로 옆방에는 카이사르 측의 시종들을 대기하게 했다.

모든 부분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게 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브란테 영애가 준비할 차와 다과에는 손대지 말라고 하세요.”

나는 방을 준비해 준 로위나에게 말했다.

“만약 폐하에게 독을 쓴 게 발레르가 맞다면, 오늘 자리에서도 독을 쓸지 모르니까.”

통제를 하면 도리어 독을 사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여지를 남겨 줘야지.

그러나 내 말에 로위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공녀.”

“괜찮아요. 저는 독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줄 알거든요.”

전생의 내가 형제들의 수많은 독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진 이유였다. 뭐, 살짝 위험한 적도 있긴 했지만.

‘사실 그때의 예민함이 지금 헬레나 페레스카의 몸으로도 유효한지는 자신 없지만.’

“그리고 더 큰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더 큰 이유요?”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율리카 브란테가 독살당할 위험이요.”

로위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태황후께서 브란테가를 버리고 페레스카를 공격할 거란 뜻인가요?”

“가능성 있어요. 태황후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예요.”

마리안느 발레르.

그녀는 율리카 브란테에게 그다지 깊은 애정이나 의리가 없어 보였다.

“제가 차나 다과까지 준비하면, 율리카 브란테가 독살됐을 때 제가 용의 선상에 오를 거예요. 더구나 거기서 그치지 않겠죠. 폐하께서 중독되셨다는 걸 밝히고, 그 죄마저 제게 물을지도.”

“명분도 그럴싸하겠군요. 자신을 버리고 브란테 영애와 약혼한 것에 대한 질투와 분노…….”

“네. 그러니 다과는 브란테 영애가 마음대로 준비하게 내버려 두세요.”

“네. 그 사실을 다른 이들도 널리 알 수 있도록 해야겠고요.”

“한 번에 말이 통하니 좋네요.”

나는 만족스러움에 로위나에게 웃어 주었다.

준비는 로위나에게 맡겼으니 더는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남은 건 율리카 브란테와 직접 부딪치는 것뿐이다.

‘어디, 무슨 용건인지 한 번 가 볼까.’

* * *

방에서 마주 앉은 율리카는 어쩐지 내내 기가 죽어 있었다.

율리카와는 반대로 나는 의자에 완전히 몸을 기댄 다소 위압적이고 거만한 자세를 유지했다.

“자, 어떤 용건인지 들어 볼까요?”

“그저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안 되는 건가요?”

“제가 영애와 담소를 나눌 정도의 관계는 아니지 않나요?”

내가 고갤 빼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내 건방진 자세에 율리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페레스카 공녀는……, 솔직히 무섭네요.”

“영애가 저에게 죄지은 게 있으니 무서운 거겠죠.”

“이 황성에 있는 사람들은 다 무서워요. 폐하도, 폐하의 신하들도, 시종들마저도.”

그렇게 말하며 율리카는 가벼이 몸서리를 쳤다.

“사람만이 아니에요. 모든 게 다 무서워요. 끔찍해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게 다 영애가 가지고 싶어 하시던 것들이에요.”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율리카가 시선을 내리깐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가져야 했던 것들이죠.”

율리카가 한참 만에 고갤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내 존재 의의가 사라지니까요. 난 ‘브란테’예요. 그러니까 난 ‘브란테’를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율리카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 이유로, 공녀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날 보았던 것들……, 비밀로 해 주세요.”

“변경백이 영애에게 손찌검했던 것 말인가요?”

“그저 가족끼리의 가벼운 마찰이었을 뿐이에요.”

“폭력은 가벼운 마찰이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거, 부당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아버지는 평소엔 제게 다정하신 분이에요. 그러니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가해자를 감싸는 피해자의 입술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영애. 단 한 번이라도 약한 사람을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다면, 그건 다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절 사랑해서 그러신 것뿐이라고요.”

“사랑해서?”

내 표정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입가에 자조가 걸렸다.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버린 내 얼굴에, 율리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연하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 부모 많아요, 영애.”

내 전생의 부모도 그랬으니까.

“인간의 존재 의의는 스스로 정하는 거예요. 당신은 ‘브란테’를 위해 살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아야죠.”

하지만, 넌 못 하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갤 숙이는 율리카를 보며 확신했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추측할 수 있었다.

황후가 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존재. 제 몫을 다 하지 않으면 부모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인생.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불안해서 할 수도 없겠지.

그걸 부정하면, 자신은 정말 의지할 곳이 사라져 버리니까.

“……비밀로 해 줄게요.”

나는 긴 한숨 끝에 그렇게 말했다.

고갤 숙였던 율리카가, 고갤 반짝 들고 날 쳐다보았다.

“저, 정말인가요?”

“남의 집안 치부를 떠벌리고 다닐 만큼 입이 가볍지는 않아요.”

“아……, 고, 고마워요. 공녀에게 이렇게 고마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만약 똑같은 일이 눈앞에서 또 벌어진다면, 나는 또 끼어들 거예요.”

내가 단호하게 경고했다.

율리카는 내 말에 조용히 고갤 저었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저, 더 분발해서 폐하께도 곧 신임을 얻고 말 테니까요.”

평생이 지나도 무리일 텐데.

‘그나저나 왜 나는 율리카의 인생 상담을 해 주고 있는 거지.’

이 녀석, 친구가 그렇게도 없는 건가.

주변에 함께 다니던 영애들 많던데, 그녀에게 한 번도 이런 얘길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오늘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요. 무시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율리카가 다소 긴장이 풀린 얼굴로 말했다.

“보답으로 좋은 차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율리카가 시종을 불러 귓속말로 무언가를 명령했다. 잠시 후 시종이 티팟을 하나 더 들고 나타났다.

아직 테이블 위에 차가 가득 담긴 티팟이 남아 있었던지라, 나는 의아해하며 율리카에게 물었다.

“다른 차인가요?”

“네. 아주 고급 차랍니다. 태황후께서 제게 특별히 내려 주신 것인데, 공녀께도 특별히 맛보게 해 드리고 싶네요.”

율리카가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에게 태황후의 총애를 자랑하고 싶은 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는 얼굴이더니, 하여튼 회복도 빠르지.

이 녀석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못 살 녀석인 게 분명해.

“그러면 기쁘게 들도록 하죠.”

“네. 아마 깜짝 놀랄걸요. 향이 정말 깊고 좋거든요.”

율리카가 직접 내 찻잔과 자신의 찻잔에 각각 차를 나누어 따랐다. 찻잔 안으로 영롱한 장밋빛의 액체가 채워졌다.

율리카의 호언장담대로 향이 정말 좋았다. 나도 모르게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아 볼 정도로.

‘뭐지? 이런 향기는 처음 맡아 보는데.’

“어때요? 좋죠?”

“그렇네요. 무슨 차죠?”

“꽃차의 일종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말한 후, 율리카는 차의 향기를 음미하고 몇 모금 차를 들이켰다.

‘꽃차라…….’

나는 율리카가 차를 마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강렬한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닌데, 혀끝이 얼얼할 정도의 단맛이었다.

“……하!”

그 맛에 기가 차서 헛웃음이 터졌다.

꽃차라고?

이게?

“왜 그러시죠? ……고, 공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티팟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물에 불어 만개한 분홍색 꽃송이가 둥둥 떠 있었다.

얼핏 장미와 닮았지만, 장미차에서는 이런 단맛은 나지 않는다.

이건 차가 아니다.

“메이드!”

내 호통에 옆방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냉큼 달려 나왔다.

나는 티팟을 시종에게 건네어 주며 말했다.

“이걸 당장 에버그린 양에게 가져다줘.”

“무, 무슨 짓이죠, 공녀?!”

율리카가 모욕당한 사람처럼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짓? 저도 궁금하네요.”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율리카를 노려보며 말했다.

“한 번 같이 기다려 보죠. 당신도 공범일지, 이용당한 것일 뿐인지.”

“네? 이용이라니……!”

나는 내 찻잔의 윗부분을 잡고 테이블에 쾅 하고 내리쳤다. 찻잔이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율리카가 ‘꺄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만약 당신도 공범이라면, 그땐 내 손으로 죽여 줄 테니까.”

분노가 가시지 않은 내 목소리에, 율리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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