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06/156)

* * *

나는 황성의 깊은 곳에 감금되어 있는 율리카를 찾아갔다.

그녀의 방은 작았지만 갖출 건 다 갖춰져 있어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닷새 만에 만난 그녀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마냥 생기 없이 수척해져 있었다.

“당신, 곧 죽겠네요.”

나는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 율리카에게 통보했다.

율리카는 죄인처럼 고갤 푹 숙이고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당신의 결백을 밝힐 만한 증거가 안 나왔대요. 오히려 불리한 것들만 잔뜩 있었을 뿐.”

“……인정할 수 없어요.”

율리카가 고갤 들지 않은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말이죠?”

“그건 태황후께서 제게 주신 거였어요. 태황후께서 제게……, 독을 주셨을 리가 없잖아요.”

율리카의 메마른 목소리가, 여전히 태황후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전 태황후마마의 편인데.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인데. 그런 제게 독을 먹게 하셨을 리가……, 없어요.”

“이봐요. 지금 당신이 죽게 생겼다니까요? 태황후마마가 아니라요.”

“죽어? 웃기지 마요! 난 결백해요! 태황후 마마께서 절 구해 주실 거예요, 반드시!”

아직도 착각 속에 있구나, 이 아이.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바우스라는 독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에요.”

율리카가 날 노려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율리카에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 독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몸을 망가뜨려요. 장기를 손상하고, 몸을 약하게 하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날……, 망가뜨리려 했다고요?”

“그래요.”

“웃기지 마요. 웃기지 마! 태황후께서 왜?! 왜 나를?!”

“페르바우스는 보통 불임 약으로 쓰이니까.”

“……!”

율리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리 바보 같은 그녀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난 잔인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이어서 설명했다.

“당신이 그동안 폐하께 드린 차. 그것도 태황후가 내려 준 거죠?”

“……설마.”

“거기에도 독이 있었어요. 폐하께서 그걸 계속 먹었다면 2, 3년 안에 승하하셨겠죠.”

젊은 황제는 일찍 의문사한다.

그의 약혼녀, 어쩌면 몇 달 안에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을지도 모를 여자는 임신을 하지 못한다.

후계자가 없으니, 그 뒤를 이을 이는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태황후에게는 한 가지 목적밖엔 없어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드는 것.”

나도 설마, 그 정도의 집착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된 이상, 프란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는 건 포기했으리라 생각했다. 그저 카이사르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할 거라고.

그러나 태황후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을 거예요.”

마리안느 발레르에게 율리카 브란테는, 그저 쓰기 좋은 말.

쓰고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용하여 망가뜨리고 시궁창에 처박는 것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으어……, 아…….”

율리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아아……!”

내게 독을 먹였다며 끌려갈 때조차 울지는 않던 그녀였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오열하지 않던 그녀였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율리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온 방 안이 떠나가라 오열한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비명과도 같은 울음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그녀에게 가르쳐 줬을 그녀의 존재 의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됐다. 아니, 처음부터 혼자였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게 정적(政敵)인 나라는 점이 참 우습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 * *

율리카는 태황후의 배신에 온몸을 떨며 울부짖었지만, 그렇다고 태황후의 죄를 실토하지는 않았다.

그건 의리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신중하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제가 보기엔 그냥 멍청하게 보일 뿐이지만요.”

카이사르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해밀턴과 나란히 걸으며, 나는 아직 감금되어 있을 율리카에 대하여 냉정하게 평가했다.

“뭐,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시간이요?”

“평생 남의 계획과 명령을 따르며 살아오신 분이니까요. 갑자기 주체성을 찾으라 해도 어렵겠죠.”

해밀턴이 제법 너그러운 표정으로 율리카를 위한 변명을 했다.

나는, 솔직히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인생이니, 그녀를 이해하는 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빨리 결단을 내려 줬으면 좋겠네요.”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더니, 해밀턴이 작게 웃었다.

“이미 판을 뒤집을 증거는 모일 만큼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브란테 영애의 결단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요.”

“기왕이면 철저히 엎어 버리고 싶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나를 건드린 대가를 그 영혼에 새겨 주겠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분이 풀리지 않을 테니까.”

태황후와의 전쟁은 그 언젠가 그녀의 앞에서 활을 당기던 그때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전 절대 공녀께 싸움을 걸지 않을 겁니다.”

해밀턴이 반쯤은 농담으로 말했다. 나는 나머지 반의 진담에 부응해 주기 위해, 웃지 않았다.

* * *

“……하여, 율리카 브란테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로위나가 내어 준 차를 마시며 카이사르와 가벼운 대화를 즐겼다.

카이사르의 몸은 아직 대련을 할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련을 하는 날엔 이렇듯 집무실에서 가벼운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 됐다.

“그사이 태황후 쪽에서 눈치를 채고 수를 쓰면 어쩔 생각이지?”

“눈치는 이미 챘을 겁니다. 율리카 브란테가 감금된 시점에서.”

그럼에도 태황후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이 사태를 모조리 율리카에게 뒤집어씌우고, 꼬리 자르기를 할 참이겠지.

“지금 증거로 발레르까지는 잡을 수는 있지만, 태황후를 잡는 건 부족해요. 발뺌하면 그만이니까요.”

모든 것을 가문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이용당한 척 자비를 구한 후 후일을 도모하려 할지도 모른다.

나는 찻잔을 양손으로 꼭 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세를 꺾어 놓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숨통을 끊어 놓아야지.”

“내 스승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

카이사르가 키득거리고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그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게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본인도 죽을 뻔한 일이니 좀 더 화를 내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모처럼 그늘 없이 웃는 그 모습을 보는 게 기분 좋아서,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벌써 이렇게 집무를 보셔도 되는 건가요?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되는데.”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걱정되나?”

“당연하죠.”

“그렇군. 음, 그러고 보니 아직 열이 좀 있는 것도 같고.”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이요?”

“글쎄. 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잠시 보겠습니다.”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은 못 했다. 일단 카이사르의 몸 상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나는 카이사르의 곁에 서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앗?!”

카이사르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덕분에 난 카이사르가 앉은 의자 위에 털썩 앉게 됐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거짓말하신 건가요?”

“안 그러면 헬레나가 곁에 안 오니까.”

“이제 황제 폐하이신데, 안전을 위해서라도 곁을 함부로 내어 주시면 안 되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련할 땐 여전히 내게 검 끝을 잘도 들이대던데.”

“그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으니.”

“하핫, 역시 참 스승이야.”

“그나저나 이제 그만 내려 주시겠어요? 이거, 좀 민망한데.”

“보는 이도 없는데 뭐 어떤가.”

그렇게 말하며 카이사르가 보란 듯 내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잔소리라도 해 주려고 노려보았으나, 카이사르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안 되는 건가?’ 하고 날 쳐다보는 통에 실패했다.

큭. 조금만 덜 잘 생겼어도 함락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정말 계속 나에게 존대만 할 생각이야?”

“이젠 황제 폐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가. 헬레나의 날카로운 지적과 비아냥을 듣지 못하니 기운이 나지 않는군.”

“취향이 왜 그러신 거예요, 폐하.”

“멀어진 것 같아서 쓸쓸하다는 뜻이야.”

카이사르가 내 몸에 자기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차분히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늑대……, 아니, 대형견?’

하긴, 늑대도 갯과인가.

멀어진 것 같아 쓸쓸하다니. 한 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꼬리를 흔들며 달라붙는 멍멍이 같다.

“전 언제나 곁에 있어요, 폐하.”

나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고갤 기댄 채 속삭여 말했다.

“폐하의 곁에 있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카이사르 곁에 있을 거야.”

카이사르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에게만 들리도록, 어쩌면 그도 미처 듣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그런 작은 목소리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 어떤 맹약보다 헬레나의 맹약이 가장 달콤하고 의지가 되는군.”

카이사르가 기쁜 듯 말했다.

그 애틋한 눈빛에 나 역시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그를 어리광쟁이로 만드는 건 내 탓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 * *

그리고 이틀 후.

가르말 공작이 날 찾아왔다.

“브란테 영애가 공녀 뵙기를 청하더군요. 어쩌시겠습니까.”

물론, 거절하지 않았다.

전언을 듣자마자 기다림 없이 바로 황성으로 향했다.

율리카는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정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도 새로 했는지 말끔했다.

다만 얼굴의 수척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밤새 울었던 것인지 눈이 부어 있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율리카와 거리를 두고 앉아 나는 그녀의 용건을 물었다.

율리카는 내가 도착한 후에도 한참 동안 허공만을 응시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녀가 말문을 연 건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브란테 변경백이 다녀갔었던 건가.

나는 율리카에게 화를 내며 율리카의 뺨을 때리던 그를 떠올렸다.

“알고 계셨느냐 물어보았습니다. 태황후께서 제게 독을 먹게 했다는 걸……, 아셨느냐고.”

“……뭐라 하시던가요.”

“죽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말라 하시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후, 율리카는 다시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흡’ 하고 울음을 삼켰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으나, 울진 않았다.

눈물 따위는 지난밤에 다 쏟아 버린 듯 메마른 눈이다.

“폐하를 사모하여 하는 혼인도 아닌데, 그런 분의 아이를 낳아 무엇 하겠느냐고요.”

하핫, 하고 율리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시나요, 공녀?”

“……뭔가요?”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입 다물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율리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웃는 것 외의 표정을 잃어버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기괴했다.

“배신감에 괴롭고, 버림받아 힘든데도, 난 그 사람들의 손을 떠나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공녀.”

“그래서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장렬하게 전사할래요?”

나는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비겁한 선택은 어쩔 수 없는 힘든 일이었고, 내가 내 뜻을 관철하는 건 손쉬운 일인 양 말했었죠, 영애.”

그 언젠가, 율리카가 내게서 카이사르를 빼앗아 갔던 그날.

율리카는 마치 자신이 내게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마냥 분노에 차 있었다.

왜 억울해하느냐고, 자신이 더 힘들었다고, 소중한 걸 뺏긴 내게 도리어 역정을 냈었다.

“이제 좀 깨달았을까요? 당신은 약해서, 불행해서 비겁했던 게 아니에요.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쉬워서 선택한 것뿐이죠.”

내 질책에 율리카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미간 사이가 그림자가 질 정도로 깊이 파였다.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아뇨.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에요. 올바른 걸 관철한다는 건.”

“당신 같은 사람에게도 말인가요?”

“물론이죠.”

내 대답에 율리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안심한 듯이.

“……언젠가 내게 물었죠. 당신에게서 폐하를 빼앗아, 그 곁을 차지하게 되어 기쁘냐고.”

그때 율리카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기쁘다고 대답했었다.

“사실은……, 기쁘지 않았어요.”

응, 알고 있었다.

마치 누르면 바로 튀어나오는 장난감처럼 기쁘다고 대답했었지만, 그 말을 할 때 율리카의 눈동자는 날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율리카는 드디어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에게 독을 준 사람은 마리안느 발레르, 태황후예요.”

율리카가 드디어 증언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의 속도는 빨랐다.

수척한 얼굴에 눈빛만은 총기가 돌았다.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한 눈빛이었다.

“폐하께 드린 차도 마찬가지예요. 난 그게 독인 줄 몰랐어요. 그저 남녀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줄 차라고 전해 들었을 뿐이에요.”

“증거는요?”

“중간에 차를 가져다준 시종이 따로 있어요. 늘 소분하여 가져다줬어요.”

“그 시종을 잡아들인다고 해도, 증언할지 의문이군요.”

나는 으음 하고 낮은 신음을 삼켰다. 어쩌면 태황후가 진작 그 시종을 처리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율리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다른 증거에 대해 밝혔다.

“차를 우리는 방법에 대한 쪽지도 있어요. 태황후께서 제가 보는 앞에서 친히 적어 주셨어요.”

“……지금 갖고 있나요?”

“저택의 제 방에 있어요. 태황후께서 제 방을 뒤지지 않았다면, 남아 있을 거예요.”

그거라면 확실히 증거가 될 수 있다.

필적 감정을 하면 태황후의 글씨라는 게 밝혀질 테니까. 그렇다면 태황후도 자신이 독을 건네주었다는 것을 발뺌할 수 없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드디어 태황후를 잡을 준비가 갖춰진 것이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기병장님께 전달해, 빨리 조사하도록 하겠어요.”

나는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용건이 끝났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카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공녀.”

“……?”

아직 뭔가 용건이 남은 걸까.

걸음을 멈춰 돌아보았을 때, 율리카는 지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가 너무 나약한 사람이라서……, 미안했어요.”

눈물은 흐르지도 않는데 어쩐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이라 생각했다. 날 바라볼 때마다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리던 열등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는 가던 걸음을 돌려 율리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다정히 안아 주었다.

“아니요. 오늘 당신은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어요.”

아마, 나보다도.

율리카는 ‘아하하’ 하고 억지로 웃으며 내 어깨에 제 이마를 댔다. 그러나 결국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나를 가장 증오했을 사람.

내가 가장 증오했을 사람.

하지만 역시 그녀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건 불가능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아, 이제는.

머리를 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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