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늦은 밤, 일은 시작됐다.
카이사르를 앞세운 기사들이 태황후의 처소로 향했다. 기병장인 가르말의 지시에 따라 각 기사단의 기사들은 태황후 처소를 에워쌌다.
처소에 진입한 건 카이사르와 나, 해밀턴, 그리고 레너드를 위시한 친위대 기사들.
나는 드레스가 아닌 무장한 상태로, 카이사르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폐하라 해도, 태황후마마의 처소를 짓밟듯 쳐들어오시는 건……!”
가장 먼저 입구에서부터 태황후의 시종들이 막아섰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비가 없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뒤따르던 친위대 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시종들을 제압했다.
“꺄아악!”
“폐하, 안 됩니다! 어떤 선황께서도 이렇듯 어머니의 처소를 흙발로 짓밟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
스윽.
악을 쓰는 나이 많은 시종을 향해, 카이사르가 시선을 보냈다.
그저 쳐다보았을 뿐인데,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 무례한 침입을 저지할 기세였던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무덤에서 일어나실 소릴 하는군.”
카이사르의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
순식간에 공기가 냉랭해진다.
여기 모인 이들 중 모르는 이들이 있을까. 태황후가 카이사르의 친모를 암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걸.
“사……, 살려 주시옵소서!”
시종이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판단했는지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 후 시종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태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방을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이들을 모조리 끌고 가라.”
레너드의 명령에 친위대들이 시종들을 줄줄이 엮어 끌고 갔다. 시종들은 행여나 목이 떨어질까 찍소리도 하지 않은 채 줄줄이 끌려 나갔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면서, 무리하는 거 아닌가 몰라.’
카이사르의 바로 뒤를 따르던 나는, 꼿꼿한 카이사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독이 완전히 해독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아직 침대에서 푹 쉬어야 할 사람이었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카이사르에게 바짝 다가가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폐하. 옥체를 위하여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내 속삭임에 카이사르가 희미하게 웃으며 날 힐끗 쳐다보았다.
“걱정되나?”
“폐하께서 아파 누워 계신 모습,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렇군. 기억해 두지.”
카이사르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러니 헬레나. 그대는 나를 지켜 주도록.”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번졌다.
그가 날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폐하의 뒤에 있겠습니다.”
당연하지.
널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좋아. 문을 열어라.”
카이사르의 명령에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드디어 우리는 태황후의 목전에 다다랐다.
* * *
태황후는 방의 안쪽, 보라색 벨벳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양쪽으로는 그녀를 지키듯 귀족가의 여인들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둘 다 발레르 쪽의 여자들이었다.
카이사르가 성큼 다가가자, 여자들이 ‘히이익’ 하며 희게 질렸다.
정작 태황후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방에서 홀로 선량한 사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 황성에서 썩어 문드러진 채 지내 왔을까.
“태황후.”
카이사르가 태황후 앞에서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태황후가 빙긋 미소 지으며 그런 카이사르를 맞았다.
“폐하께서는 방문 예절을 다시 배우셔야겠습니다.”
“저런, 너무 초라하여 실망하셨습니까. 시종들의 머리라도 베어 선물로 가져올 걸 그랬나 봅니다.”
카이사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 끝으로 태황후 곁에 서 있는 여자들을 차례로 겨누며 말했다.
“아니면 지금 여기서 당장 선물을 마련해 드릴까요.”
“마……, 마마!”
“흐이이익!”
여자들이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써 어엿한 폭군이시군요. 밖에서 폐하의 성정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귀에 선합니다.”
“좀 더 귀를 기울여 보시지요. 태황후의 사특함에 대해 떠드는 소리도 들리실 겁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이 어미가 무엇을 잘못하였단 말입니까?”
빙긋, 태황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천천히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카이사르가 손짓을 하자, 기사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카이사르가 의자에 앉았고, 나와 레너드가 그의 양쪽에 섰다.
“자작.”
“예, 폐하.”
“태황후께서 궁금해하시니, 어서 알려 드리도록.”
해밀턴이 꾸벅 인사를 한 후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왔다.
“마마. 율리카 브란테가 독살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저런. 브란테 영애는 그럴 이가 아닙니다.”
태황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굳이 율리카를 변호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그 정도의 절박함은 없었다.
정말 ‘예의상’이라는 게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의, 도리어 자신의 선량함과 결백함을 주장하는 듯한 말투였다.
“증거도 증인도 있습니다. 이것이 브란테 영애께서 페레스카 공녀에게 먹이려 한 독입니다.”
해밀턴이 종이에 싸 온 찻잎을 펼쳐 보여 주었다.
“저런……, 그런 안타까운 일이.”
태황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브란테 영애가 페레스카 공녀를 질투했군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태황후. 정말 전혀 모르시는 일입니까?”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천연덕스레 그리 말한 태황후가,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큰일 치를 뻔했군요, 공녀. 브란테 영애는 내가 아끼던 이였습니다. 내가 진작 잘 달래었어야 했는데, 대신 사과하죠.”
……와, 어쩌지.
난 저 여자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못 웃겠다.
슬그머니 검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당장이라도 저 가증스러운 목을 베고 싶어 손바닥에 땀이 났다.
‘저런 인간에게.’
난 저런 인간에게 휘둘렸었단 말인가.
저런 인간 때문에 카이사르가 죽을 뻔했던 건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마마. 이 독은 이대륙의 물건입니다. 율리카 브란테가 이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요?”
“글쎄요. 제가 알 길이 없죠.”
“그런가요. 그런데, 전 압니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듯, 태황후가 눈썹을 으쓱했다.
“호리오가 밀수해 온 독을 발레르에서 모조리 압수했거든요.”
“……무슨 그런.”
태황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표정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리오 경의 약점을 빌려 제 오라비를 농락하셨던 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군요.”
“무슨 그런 모함을…….”
태황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내가 제대로 된 증거를 쥐고 말하는 것인지, 그저 떠보는 것인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태황후에게 해밀턴이 쐐기를 박았다.
“호리오가를 수색, 조사하여 모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 많은 독이 발레르에게 흘러 들어간 증거도, 증인도 있습니다, 마마.”
호리오의 밀수 증거는 이미 진작에 손에 넣어 둔 패였다.
그 패가 분명 발레르를 찌를 무기가 될 거라는 내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호리오는 황제를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발레르의 적이 되는 걸 선택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증거를 탈탈 털어 가며 발레르를 고발했다.
“양쪽 말을 다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발레르 공작을 불러오세요. 저도 듣겠습니다.”
태황후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기가 차서 ‘하’ 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보통 불리한 쪽에서 ‘양쪽 말을 들어 봐야 한다’며 발을 빼더군요.”
내 비아냥에 태황후가 날 노려보았다. 물론 나도 노려봐 주었다.
뭐, 어쩌라고. 노려보면 내가 쫄 줄 아나.
“발레르 공작은 현재 연금 상태입니다.”
해밀턴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연금이요? 어처구니가 없군요.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공작가에 연금이라뇨.”
“마마. 독을 먹은 건 공녀만이 아닙니다. 누군가 폐하에게도 독을 먹이려 했습니다.”
“누군가? 그게 발레르라 이건가요? 어처구니가 없군요! 모함입니다!”
“마, 마마!”
태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저 조용히 태황후가 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브란테 영애의 아둔함이 일을 친 거겠죠! 안 그런가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발레르를 거치지 않고 그 독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폐하. 말씀해 보세요. 발레르를 버릴 생각입니까? 선황을 가장 많이 도운 가문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입니다, 폐하!”
카이사르가 다리를 꼬더니, 손깍지를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발레르만은 어지간히도 지키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태황후.”
“그것은……!”
“그러나 그 죄가 명확하여 나로서도 돌이킬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
“그러나……, 태황후께서 제 앞에 머리를 박고 빌면, 뭐 한 번쯤 고민해 볼 여지는 있겠죠.”
“……예?!”
태황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이 어미더러 아들 앞에 머리라도 조아리라 이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카이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당신의 주군에게 용서를 빌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제국의 지배자. 정점. 모든 이들의 주군.
태황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수년을, 카이사르를 자신의 아래로 깔보던 그녀였다. 새끼 늑대에 불과하다며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모욕적일까.
그리고 그 모욕을 감당할 만큼, 발레르는 그녀에게 가치 있는 것일까.
“……폐하.”
파르르 몸을 떨던 태황후가, 조금쯤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레이가에 적을 올린 몸입니다. 발레르를 위하여 무릎을 꿇으라 하심은……, 당치 않습니다.”
‘……버리는구나. 발레르마저도.’
어쩐지,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태황후의 선언이 떨어지자, 레너드가 곁에 선 친위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 태황후 곁을 지키던 발레르의 여인들을 무참하게 끌어냈다.
그녀들은 파랗게 질려 제 발로 걷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 나가며 소리쳤다.
“마마! 마마, 살려 주십시오, 마마!”
“저희를 버리십니까?! 마마!”
이 여자는……, 오롯이 혼자구나.
정말 홀로 오롯이 서 있는 태황후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가 차군. 그녀가 측은하게 보이다니.
“안타깝군요. 저도 태황후의 친가가 그리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카이사르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태황후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이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소리가 났다.
“그런데, 태황후. 그대가 ‘그레이’가에 적을 올렸다는 말은 이상하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럴 것이, 그대는 ‘마리안느 그레이’가 아니라, 여전히 ‘마리안느 발레르’가 아닙니까.”
그녀는 황가에 들어왔으나, 자신의 이전 성을 버리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이전 성을 간직하는 여인들은 많이 있었으나, 황가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정도로 발레르의 힘이 강력하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그 강력한 힘은, 지금 이 순간 마리안느의 발목을 잡는다.
끝내 마리안느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레르마저 잘라내면서까지 지켰던 그녀의 무릎은, 본인의 위기 앞에서는 너무나 손쉽게 꺾였다.
“폐하, 억지이십니다……!”
파들파들 떨며, 태황후가 호소하듯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뒷방에 밀려난 제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발레르가 저지른 일을, 당신이 몰랐다?”
“제게 원한이 깊으신 줄은 압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닙니다. 결백합니다, 폐하.”
태황후가 바닥에 앉은 채 고개만을 들어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증거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이 어미까지 벌한다면, 세간에서 폐하를 뭐라 하겠습니까. 폭군의 오명을 스스로 쓰지 마십시오, 폐하.”
“내 자비를 원하는 모양이군.”
“무고한 이에게 노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무고라.
실제로 마리안느의 표정은 무고한 이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 선량하고 간절한 눈빛. 죄 없는 이의 표정.
누군가를 독살하는 일은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나약하고 순진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녀는 그 선량한 표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은 물론, 자신의 측근까지도.
카이사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태황후의 앞에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황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카이사르가 그런 태황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는 뻐꾸기 같군. 제 알을 지키려 남의 알을 밀어 떨어뜨리는 새 말이야.”
그리고 드디어.
태황후의 눈앞에 문제의 종이가 내밀어졌다.
태황후의 필적으로 차 우려내는 방법이 적힌, 그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소한 내용의 종이가.
태황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몰랐겠지. 설마 이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은.’
아무리 조심해도, 방심하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설마 율리카가 나에게 그 차를 대접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율리카가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 자체를 가정해 본 적 없었겠지.
율리카는 제 아버지와 자기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말이었고, 나는 율리카를 경계하는 그녀의 적이었으니.
‘율리카의 마음을 홀리기 위해 다정하고 친근한 척, 보는 앞에서 손수 써 준 것이겠지만…….’
분명 본인은 잊었을 것이다.
율리카에게 이런 걸 쥐여 준 적 있다는 사실조차.
심지어는 율리카가 그깟 종이 한 장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리라고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태황후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여전히 뻔뻔한 반응을 유지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이 어미는 알지 못합니다.”
“잡아떼시겠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렇군. 나이가 있으니 기억력이 쇠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카이사르가 노골적인 비아냥으로 태황후를 모욕했다. 태황후는 초점이 나간 눈빛으로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야, 마리안느 발레르. 그대의 서재엔 이 글과 필적 감정을 할 만한 대상이 아주 많을 테니까.”
이제 카이사르는 더 이상 마리안느를 ‘태황후’라 부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카이사르는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친모에게 주고 싶었을 그 칭호.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 의심받는 여자에게 빼앗겼다. 자신을 죽이려 몇 번이나 암살자를 보내던 여자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얼마나 빼앗고 싶었을까.
마리안느가 손에 쥐고 싶어 발악하던 그 지위를. 이름을. 권력을.
“……하여, 이 어미를 죽이시겠습니까?”
결국 마리안느는 무너졌다.
그녀는 망가진 미소를 지은 채 카이사르에게 협박하듯 말했다.
“어미를 죽인 황제라 역사에 기록되길 원하십니까?”
“참으로 이상한 소릴 하는군, 마리안느 발레르. 그대가 어찌 내 어미인가. 난 그대의 배를 가르고 나오지 않았는데.”
카이사르가 어금니를 짓씹으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분노가 농축된 목소리였다.
“……폐하.”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나는 나직이 그를 불렀다.
그제야 마리안느와 눈싸움을 벌이던 카이사르는, 얕은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끌고 가.”
카이사르의 단호하고도 짧은 명령.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리안느에게 다가가 그녀를 결박했다.
마리안느는 광기에 가까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부라리며 악을 쓰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이거 놔! 놔라! 어딜 만지는 거야! 난 태황후다! 이 제국의 어머니란 말이다!”
아무리 상대가 죄인이라지만 한때는 태황후였던 사람임엔 틀림없다. 발레르 공작을 위시하여 수많은 귀족들을 수족처럼 부리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 탓에 기사들은 발악하는 마리안느를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정작 카이사르는 마리안느가 악을 쓰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이건 모함입니다, 폐하! 율리카 브란테가, 그년이 절 모함한 겁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마리안느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카이사르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일까. 마리안느는 이번엔 내 쪽을 보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페레스카 공녀! 그대가 꾸민 짓이지! 감히, 네가! 네년이 나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리안느의 마지막 발악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언제나 선량한 사람인 척 미소 짓던 그녀는, 한 꺼풀 벗기고 나니 추악한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마리안느는 내 멱살이라도 틀어쥐려는 듯 꿈틀댔지만, 기사들에게 양팔이 붙들려 그러지 못했다.
제압당한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을 걸었다.
“제가 미우십니까?”
“밉다……!”
“증오하십니까?”
“그래! 그대를 증오해! 그대를 저주한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대를 저주하고 저주하리라!”
핏발 선 눈으로 마리안느가 소리쳤다. 단정했던 붉은색 머리카락도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하여 세상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다행입니다.”
내 반응에 마리안느가 얼어붙었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녀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매일 밤 절 떠올리며 원망하고 또 원망해 주십시오. 절 떠올릴 때마다 온몸에 피가 마르고 분함에 뼈가 녹는 고통을 느껴 주십시오.”
“뭐, 뭐라……?”
나는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잘 알고 있다.
풀리지 않는 분노가, 해소되지 않은 원망이 얼마나 사람을 병들게 하는지, 잘 안다.
“난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해맑은 미소로, 나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기쁘네요. 내가 당신의 괴로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헬레나 페레스카아아악!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마리안느가 내장을 끌어 올리는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눈에 실핏줄이 터져,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뭐, 뭐 합니까? 얼른 끌고 가지 않고.”
보다 못한 해밀턴이 재촉하여 말했다. 그 말에 기사들이 허둥지둥 마리안느를 끌고 방을 나갔다.
그녀의 비명은 점점 멀어져,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됐다.
* * *
마리안느가 끌려가고 잠시 후.
“가르말 공께서 태황후의 처소를 수색하겠다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리안느 권속의 시종들까지 한 명 남김없이 모조리 잡혀가고 나니, 처소는 쥐 죽은 듯 썰렁해졌다.
레너드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카이사르에게 다가와,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다.
“글쎄. 일단은 좀……, 쉬고 싶군.”
카이사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쉬실 방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음.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헬레나, 여길 잠시 지켜 주겠어?”
“걱정 마.”
나는 내 검의 손잡이를 보여 준 후 씩 웃었다. 레너드는 안심한 듯 빙긋 웃어 보인 후에, 방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넓은 방에는 나와 카이사르, 단둘만이 남게 됐다.
나는 카이사르의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의 무릎에 기대어 그를 올려보았다.
“많이 힘드십니까, 폐하?”
“힘들군. 감정적으로.”
기가 빠진다고 해야 하나.
그토록 꾹꾹 누른 감정을 폭발시켰으니, 당연하다. 멀쩡한 사람도 지칠 판인데, 그는 지금 환자이니까.
“그래도 헬레나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야.”
“그렇습니까? 전 그저 곁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는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헬레나가 옆에 없었다면, 난 누구 하나 베어 넘겼을지도 몰라.”
“많이 참으셨군요.”
그럴 만하지.
사실 나도 검을 뽑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거든.
“결코 무너뜨리지 못할 것 같은 여자였는데.”
카이사르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딘가 씁쓸함과 소회가 묻어 있었다. 후련함과 탈력감, 아직 희미하게 남은 분노 따위가 그의 붉은 눈동자에 어지럽게 떠다녔다.
“헬레나.”
“네, 폐하.”
“나는……, 잘 해냈나?”
카이사르가 내 뺨을 살며시 감싸 쥐며 시선을 맞춰왔다.
칭찬을 갈구하는 표정.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눈빛. 난 그의 그런 표정을 잘 안다. 익숙하다.
그리고 그의 그런 눈빛에 늘, 약했다.
“네. 잘 해내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헬레나에게 상을 받을 만한가?”
“원하시나요?”
“언제나.”
카이사르의 애틋한 시선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 이제야 서서히 실감이 난다.
이제 이 남자의 곁에 있어도 되겠구나.
이 남자와 함께할 수 있겠구나.
내가 이 남자를, 다시 빼앗아 온 거구나.
나는 한 팔을 들어 카이사르의 목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그의 고개를 끌어당겼다. 카이사르는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 상태로 나는 그에게 키스했다.
내가 내려 주는 달콤한 상에,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나의 것.
이제 그는, 온전히 내 것이다.
그것이 온몸에 열기가 퍼지듯, 나의 온 세포에 새겨져 갔다.
* * *
사건은 빠른 속도로 정리됐다.
마리안느는 황성 깊은 곳에 연금되어,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의 주도로 자문회가 소집되어, 발레르의 작위 박탈과 마리안느의 태황후 폐위 등이 논의됐다.
늘 중립을 지키던 가르말이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의견을 지지해 준 덕분에, 그 일은 일사천리로 승인됐다.
그리고 백기사단장인 호리오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단장직을 반납해야 했다.
“호리오 자식 면상을 안 봐도 되어 속이 다 시원하구만!”
달튼은 호리오를 치워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얼마나 기쁜지, 내 오래된 관절염이 다 나았다오, 교관!”
“기분 탓입니다. 관절염은 그렇게 쉽게 낫지 않아요.”
“닥쳐, 제럴드! 초 치지 마!”
“어휴. 늘 이러신다니까요.”
적기사단의 총무인 제럴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단장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백기사단은 지금 어떤 상황이죠?”
“음. 단장 회의가 열리겠지. 아마 당분간은 부단장이 맡아 할 거요.”
“다행히 와해되진 않았군요.”
“그쪽은 어찌 됐소? 브란테 영애는 역시, 파혼당하겠지?”
“어휴,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세요, 단장님.”
제럴드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율리카는 카이사르와 곧 공식적으로 파혼 절차를 밟게 될 거다.
율리카는 이용만 당했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은 용서받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자비로 처벌은 면했지만, 브란테가는 많은 직위와 권력을 반납해야 했다.
‘하긴, 용서받았다고 해도 율리카 쪽에서 파혼을 청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어제 황성에서 만난 율리카와의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판단했다.
* * *
그날, 율리카는 검고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은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칙칙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금발을 돋보이게 만들어, 순수하게 잘 어울렸다.
율리카는 차분한 자세로 앉아 담담하게 내게 이야기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태황후를 잡을 증거를 내놓은 점을 들어, 저를 처벌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잘됐군요.”
“혹시 공녀께서 폐하를 설득하신 건 아닌가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곡이라 좀 찔렸다.
카이사르는 브란테도 아예 싹을 잘라 버리려 했으나, 내가 율리카만은 용서해 주자 설득했다.
난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스스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기회. 그 어려운 길을, 그녀도 한 번쯤 가 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래서……, 일단 전 본가로 되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본가? 영지로 말인가요?”
“네. 파혼당했으니, 여긴 더 머무를 이유가 없지요.”
“브란테 변경백이 순순히 파혼을 받아들이던가요?”
“아뇨. 그래서 제 선에서 그냥 승낙했습니다.”
“……영애가요?”
“폐하를 이 이상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율리카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갤 숙였다.
“전 늘 폐하가 무서웠어요. 제게 냉정하셨으면서 당신에게는 상냥하셔서, 전 늘 그게 분하고 질투가 났어요.”
빼앗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빼앗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공허.
율리카는 그걸 알아 버린 것일까.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제게 여지를 주지 않으신 폐하께서 현명하셨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군요. 난 당신이 나와 폐하를 원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뇨. 원망이라니.”
율리카가 살짝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날 바라보았다.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었어요. 미안했어요, 공녀.”
율리카의 사과는 울음이 섞여 조금 울렁거렸다. 그러나 슬퍼서 울음이 섞인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 것을 함부로 빼앗으려 해서 미안했어요. 이제, 돌려줄게요. 제게는 과분한 분이었어요.”
“누구에게나 과분한 사람이죠.”
“당신에게도 그런가요?”
“아뇨. 저는 제가 그 사람에게 과분하고요.”
내가 고갤 갸웃하며 농담을 던졌다.
내 말에 율리카가 드디어 웃었다.
“맞아요.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율리카가 말했다.
그 말은 어쩐지 진심인 것 같았다. 율리카가 이렇듯 후련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