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08/156)

13. 늑대의 주인님 (1)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 물러나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최근 나의 일상에는 아주 소소하고도 귀찮은 변화가 하나 생겼다.

황성 복도를 걸을 때면,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던 귀족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알은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페레스카 공녀 아니십니까? 십 리 밖에서도 눈부신 공녀의 자태를 알겠습니다!”

“공녀, 절 기억하시나요? 전 공녀의 편이었답니다. 아, 부디 제 진심을 아셔야 할 텐데!”

“레너드 소공작이 그런 불의를 저질렀을 리 없지요! 암요! 전 처음부터 그 모든 일이 음모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레너드가 누명을 쓰고 내가 곤란을 겪을 땐 코빼기도 안 보였던 인간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친분을 표해 왔다.

율리카가 파혼당하고, 발레르가 침몰하고, 태황후가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니, 다들 발 빠르게 환승을 시작한 것이다.

‘간신배들 같으니라고.’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기는 했지만, 당연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지조를 지킨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를 향한 적의를 전혀 숨기지 않은 이도 있긴 했다.

이쪽도 물론, 날 유쾌하게 하지는 못했다.

* * *

어느 날엔가, 브란테 변경백이 나에게 직접 접견을 청해 왔다.

그의 접견 신청에, 그가 이제 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싶어 좀 의아했다.

“케고르 씨. 율리카 브란테가 아직 수도에 머물고 있나요?”

“아뇨, 듣기로 이미 나흘 전에 영지로 돌아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집사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가 갸웃해졌다. 딸도 여기 없는데, 변경작인 이 양반은 왜 아직 수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뭐, 무슨 개소리를 할지 한 번 들어라도 볼까.’

그렇게 하여 나는 뜻밖에 변경백과의 접견을 받아들이게 됐다.

약속한 시각, 변경백이 공작저를 찾아왔다. 집사가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백작님. 환영하겠습니다.”

“인사치레는 됐소. 그럴 사이도 아니지 않소.”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자신이 접견 신청을 하여 찾아온 주제에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의라고는 없는 꼰대 같으니라고.

“아버지가 아니라 저를 만나고자 하셨다니, 뜻밖입니다.”

“당사자와 이야기하는 게 낫지 싶었으니까.”

“당사자요?”

“내 딸자식의 자리를 빼앗아 꿰찬 당사자 말이오.”

백작이 이를 드러내며 협박하듯 내게 말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눈썹 가운데 부분을 으쓱하며 물었다.

“어떤 자리 말씀이시죠?”

“당연히 황후의 자리를 말하는 게요.”

“저런. 하시는 말씀에 어폐가 있으십니다, 백작.”

“어폐?”

“첫째. 율리카 브란테는 폐하와 약혼은 하였으나 혼인하지 않았으므로, 단 한 번도 황후의 자리에 앉았던 바가 없습니다.”

나는 검지를 펼치며 또박또박한 언어로 설명했다.

그 후 두 번째를 설명하면서는 중지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둘째. 저 역시 아직 폐하와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제 자리도 아닙니다.”

“결국 앉을 것 아니오?”

“글쎄요. 하지만 그 일을 백작께서 관여하실 이유는 없죠.”

“그 자리는 원래 율리카의 자리였소! 율리카의 잘못도 아닌 일로 파혼이라니, 당치 않아!”

“그걸 왜 제게 따지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백작.”

“그야 공녀가 당사자이니……!”

“당사자는 제가 아니라 율리카와 폐하이시지요. 분풀이를 하고 싶으셨다면, 죄를 지은 태황후께 하시든가요.”

태황후는 아직 황성 깊은 곳에 연금된 상태였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금되어 있긴 하지만, 불가한 건 아니다.

나는 일부러 뒤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하긴. 이제 곧 태황후도 아니게 되는군요.”

그리고 씨익, 미소를 지어 줬다.

“마리안느 발레르를 찾아가 화를 내시는 게 정당하지 않을까요, 백작?”

“감히 태황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제정신인 게요, 공녀?!”

백작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태황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더욱 감정적이 되는 것 같다.

‘딸보다 태황후가 더 중요하다 이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정정했다.

‘아니지. 태황후 덕분에 득을 얻게 될 자기 자신이 소중한 거겠지.’

나도 모르게 ‘쯧’ 하고 혀가 차졌다. 얕보는 내 태도에 울컥했는지, 백작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예의라고는 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백작이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눈동자에 날 향한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율리카였다면, 당장 손찌검을 했을 듯싶다.

“백작.”

나는 한쪽 팔걸이에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아,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예의를 차려 말씀드리는 겁니다.”

“뭐라?! 하! 내게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 어쩌려고! 날 죄인처럼 끌어내 이 집에서 쫓아내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설마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백작.”

백작이 화를 내며 방방 뛸수록,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저, 아직도 마리안느 발레르를 못 잊어 하는 백작의 충심을 폐하께 슬쩍 귀띔해 드릴 수는 있겠죠.”

그 말에 드디어 변경백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데, 차마 화도 못 낸다. 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백작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정도로 부들거리며 떨었다. 그러더니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적 언사를 쥐어짜 내게 던졌다.

“한낱 계집이 폐하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군. 그 위세가 어디 제 것 같던가……!”

“업신여길 게 고작 계집이란 것밖엔 없다니, 백작께서는 내세울 게 다리 사이의 그것 말고는 없으신 모양입니다?”

“무, 무, 뭐라?!”

“그런데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신 것 같은데.”

검지로 변경백의 다리 사이를 정확히 지칭하며 내가 비아냥댔다.

“브란테 영애에게 달리 형제가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페레스카아아! 감히 네년이!”

“닥쳐. 그대가 함부로 불러도 될 이름이 아니다.”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변경백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내게 폭력을 행사하려 했던 변경백이 움찔하며 그 자리에 굳었다. 당황한 눈동자가 일품이다.

그래, 당혹스럽겠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굳어 버린 이 상황이.

‘평생 살기다운 살기 한 번 받아 본 적 없을 테니.’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딱하고 하찮은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예의 차리는 건 이쯤 할까요.”

나는 살기등등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안느 발레르와 엮여 뒤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닥치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겁니다.”

압도력을 실어 내뱉은 내 말에 변경백의 빈약한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난 그가 왜 내 아버지가 아닌 날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

그가 그토록 업신여기기 좋아하는 ‘계집’이니까. 무섭게 협박하고 닦달하면 결국 제 뜻대로 휘둘려 줄 줄 알았으니까.

쉬울 줄 알았을 테니까.

“어……, 으으, 내,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군. 실례가 많았소. 그, 내가 한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변경백이 더듬더듬 저 자신에 대한 변호를 늘어놓았다. 물론 사과는 없다. 이런 인간들은 사과를 하면 제 혓바닥이 부러지는 줄 아는 인간이니까.

‘나도 네놈 사과는 받고 싶지 않다.’

귀가 더러워질 것 같으니 관두자.

더러운 건 빨리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다.

“여기, 백작께서 돌아가신다고 하니 배웅해 드리렴.”

나는 살기를 뒤집어썼던 얼굴에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미소를 지었다고 해도 냉랭한 분위기가 다 씻겨 가진 않았지만.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백작.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변경백은 아무 말도 없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늦은 밤, 카이사르에게 문안을 하러 온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변경백과의 일화를 끝마쳤다.

내 손에는 초코퍼지 브라우니가 담긴 접시가 올라와 있다. 카이사르가 황성 셰프에게 특별 주문한 디저트로, 사실 이 브라우니가 먹고 싶어서 문안을 온 것도 있다.

카이사르는 침대에 앉아, 내가 브라우니를 맛있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역시 단 걸로 낚는 게 제일 효과적이군.’ 하는, 의미 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저런. 감히 헬레나에게 대들다니. 그 인간, 죽여 버릴까.”

카이사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말의 내용은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만.

“죽여도 제가 죽여요, 폐하.”

내가 포크를 이용해 브라우니를 반으로 쪼개며 말했다.

자신 있어. 내가 카이사르보다 더 깔끔하게 두 동강 낼 수 있다고. 물론 귀찮으니까 안 할 거지만.

“그보다 폐하, 몸은 어떠세요?”

“많이 회복됐다. 아마 일주일 정도 지나면 완치되지 않을까 싶군.”

“다행한 말씀이네요.”

아암. 대답 후, 나는 브라우니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카이사르는 그런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온통 서류를 살피는 데에만 정신이 빠져 있었다.

최근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대부분의 집무를 살폈다.

어지간한 건 아버지와 레너드가 처리해 주고 있다만, 카이사르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본인이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려 한단다.

선황이 발레르에 의지해 정사를 펼친 탓에, 많은 영역이 황제의 권속에서 멀어져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것들을 다시 황가의 지배 아래 매어 두고 싶어 했다.

‘이해는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카이사르를 보고 있자니 흐음, 하고 낮은 콧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듯 몸을 사리질 않으니, 살이 쪽쪽 빠져도 사람들이 의심을 못 하지.

지금은 건강 회복이 최우선일 텐데.

‘무엇보다 내가 옆에 있는데, 서류가 눈에 들어오냐고.’

조금 유치한 심통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걸 티 내면 분명 놀림받겠지. 끄으응. 나는 포크를 잘근 씹으며 고뇌에 빠졌다.

“자, 폐하.”

“응? ……헙.”

나는 브라우니를 포크에 찍어 카이사르의 입에 쑥 넣어 주었다. 카이사르는 불시에 단 음식을 입에 넣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달아!”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통한에 젖어 중얼거렸다. 어지간히도 단 거 싫어하는 남자다.

“서류는 그만 보세요. 그러다 또 건강을 해치시겠어요.”

“하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한입 더 드시겠어요?”

“……치우겠다.”

내가 브라우니를 한 조각 더 찍어서 보여 주자, 카이사르가 질린 얼굴이 되어 서둘러 서류를 정리했다.

나는 근처에 서 있던 시종을 불러 침대 위를 정리하게 했다. 시종들이 서류를 착착 정리하여 옆방의 해밀턴에게 가져가려 하자, 카이사르가 급하게 말렸다.

“아, 잠시. 가장 위에 있던 서류는 두고 가도록.”

“아직도?”

“아니, 이건 헬레나가 왔을 때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제가 있을 때요?”

무슨 내용이길래?

내가 고갤 갸웃하니, 카이사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음 주에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다.”

“네? 다음 주? 약혼식? 누가요?”

“우리 두 사람의 약혼식 말이야.”

“아, 우리 둘……, 네?!”

“아직 공작이 얘기해 주지 않았나?”

“아, 아무것도요!”

“저런. 오늘 아침에 결정된 일인데, 아직 전하지 않았을 줄은.”

“오늘 아침이요? 너무 성급해요, 폐하!”

약혼식 통보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성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이니까. 그냥 가볍게 지나갈 거야.”

카이사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카이사르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내용을 확인했다.

서류에는 약혼 반지에 대한 내용과 예산이 적혀 있었다.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예산에 입이 벌어졌다.

“가볍지 않은데요! 아니, 그보다 다음 주라니! 너무 일러요, 폐하!”

“음? 나의 반려가 되기로 결정한 것 아니었나?”

“아니, 그건 맞지만!”

어쩐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카이사르는 조금 섭섭해하는 얼굴이 되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약혼은 빨리 해 두고 싶었다. 잠시라도 틈을 주면 또 뭔가 일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또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려 다른 여자를 곁에 두게 될까 봐 그게 불안한 것인가.

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율리카와 혼인을 재촉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카이사르가 얼마나 힘겹게 싸워 버텼는지 알기에, 더욱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물론 성혼식은 보다 완벽하게 준비할 거야. 누구보다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을 헬레나에게 선물할 테니까.”

카이사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카이사르에게 어리광 부려도 된다고 허락했던 건 나였으니까.

나는 서류를 꾸깃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소하게 해요. 부디……, 간소하게요.”

카이사르는 두 번째 약혼이고.

번잡한 것도 질색이고.

카이사르가 내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지. 귀찮은 게 싫은 헬레나를 위해 내가 알아서 만반의 준비를 해 둘 테니, 염려 말도록.”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걸까.

결국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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