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날이 점점 푸근해졌다.
카이사르의 몸도 상당히 회복되어, 우리는 봄을 만끽하기 위해 오랜만에 황성 내원에서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이처럼 여유 넘치던 날이 언제였던가.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어, 감회가 새롭다.
“마리안느 발레르 말인데.”
카이사르가 먼저 마리안느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티타임에 그리 어울리는 화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도 궁금했던 일이었기에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제국 북단으로 유배가 결정됐어.”
“유배요? 황제를 해치려 했던 것치고는 벌이 가벼운 것 아닌가요?”
“선황의 부인이라 처형까지 하기엔 반대가 너무 많았거든. 어느 정도는 귀족들 의견도 들어줘야지.”
카이사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어설프게 뒤를 남기게 되는 이 상황이 탐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발레르가 마리안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며 끝까지 보호하려 들더군. 율리카에게도 벌을 주지 않았으니, 마리안느에게도 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뜻밖이군요. 마리안느를 살려 두면 언젠가 다시 복권의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럴지도. 물론 그럴 일은 영영 없겠지만.”
카이사르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로써 마리안느도 발레르도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나는 문득 배후를 전부 잃게 된 그의 어린 이복형제가 떠올랐다.
“프란 공은 어떻게 되는 거죠?”
“사삿집으로 내보낼 생각이야. 진작 내보냈어야 했던 것을, 그간 마리안느와 발레르의 반대로 황성에 머물게 했던 거니까.”
“달리 처벌은 없군요.”
“글쎄. 마리안느와 떨어져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이 될 거라 생각한다만.”
카이사르가 쓸쓸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 말이 내 마음에 박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친모를 잃었다. 어쩌면 그는 그게 ‘벌’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예전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슬픔.
“시종들도 한 세트로 나가겠지만, 아직 성인이 아니니 홀로 사는 게 쉽진 않겠지.”
카이사르의 말에 나 역시 고갤 끄덕여 동의했다.
발레르마저 몰락한 지금, 사가로 내몰린 프란을 찾아가 살뜰히 보살피려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저지른 짓에 비해 너무 약소한 처벌이네요.”
“실망했나?”
이 결과에 가장 아쉬울 사람은 카이사르일 텐데, 그는 오히려 날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 그걸로 만족하신다면, 전 됐어요.”
카이사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거리낌 없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래. 그 얘긴 그만하지. 약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약혼식은 저보다 로위나가 더 바빠 보이던걸요.”
이번에도 로위나는 나를 최고로 치장하여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내 말에 카이사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사람은 잘 뽑았지. 안 그런가?”
“그러게요.”
황성에서는 그녀를 ‘늑대 조련사’라고 불렀다. 그만큼 모두의 공포가 되는 카이사르를 잘 다룬다는 의미이겠지.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잘 뽑은 사람이긴 하다. 카이사르의 측근이면서 그가 두려워 일을 제대로 해 나가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니까.
‘그러고 보면 율리카는 몇 번을 생각해도 황후는 무리였을 거야.’
나는 카이사르의 앞에 서면 바짝 쫄아 토끼처럼 덜덜 떨던 율리카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영지에서 뭐 하고 지내고 있을까. 그 애가 궁금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만.
오랜만에 느긋한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시종 하나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기온 후작이 폐하께 인사 여쭙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카이사르는 귀찮다는 듯 혀를 쯧 소리 내어 찼다.
“숨어 있는 걸 들켰군. 하아……, 들여보내.”
응? 지금 숨어 있는 거였어?
“지나가다가 폐하께서 여기 계신 걸 본 모양이네요.”
“하아……, 앞으로 야외에서의 티타임은 안 되겠어.”
“이런. 귀찮아하는 건 제 몫이 아니었던가요, 폐하?”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카이사르를 놀렸다. 카이사르가 그런 날 향해 쓰게 웃었다.
“요즘 저렇게 인사를 핑계로 찾아와 기분 망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네? 어째서요?”
“발레르가 작위를 박탈당했으니, 그 자리를 치고 들어가고 싶은 거겠지.”
아하. 나는 대번에 납득했다.
제국에는 3공작이 서로 균형을 맞추며 귀족 사회를 이끌고 있다.
가르말은 공작이긴 하나 철저히 중립을 지켜 온지라, 현재는 페레스카 독주 체제가 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구귀족이지. 정세가 안정되면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하실 거야.’
그렇다면 발레르에 이어 비어 있는 공작위에 앉게 되는 귀족이 자문회 제일의 권력을 쥐게 된다.
‘다들 권력이 그렇게 좋은가?’
권력에 취해 쫄딱 망한 발레르의 꼴을 보고도 그 자리에 앉고 싶을까. 이해할 수 없다.
얼마 후 콧수염이 멋들어진 한 남자가 티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영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폐하. 기온의 알베른, 인사드립니다.”
후작이 카이사르의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카이사르가 고갤 끄덕이자, 이번엔 내 쪽을 쳐다보았다.
“함께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기온이라 합니다, 공녀.”
“네, 압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밖에서 차를 즐기기에 제격이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군요.”
후작이 후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카이사르가 내게만 들리도록 ‘그런데 그걸 방해하는군.’ 하고 중얼거렸다.
옆을 힐끗 쳐다보니, 표정만은 여전히 근엄해서 조금 웃을 뻔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 들었습니다. 약소하지만 폐하의 건강을 기원하며 저희 영지에서 재배되는 약초 몇 가지를 보내오라 일렀습니다.”
“그리 신경 써 주니 고마운 일이군. 그러나 황성에도 훌륭한 약재는 많이 있다. 나보다는 영지민들을 위해 애쓰는 게 낫지 않겠나.”
카이사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후작은 카이사르의 말을 칭찬으로 듣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제 영지에 관심을 가져 주시니 크나큰 감격입니다, 폐하……!”
아냐, 그거 아니야……!
관심 끄고 네 일이나 신경 쓰란 얘기잖아!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실은 이번 국경 지역의 군비 확장에 대하여 꼭 폐하와 의견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일은 이미 자문회에서 결정이 끝난 일이다.”
“그렇지요. 그러나 많은 의견이 꼭 옳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후작은 인사만 하고 떠날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더니,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야만족과 우호를 맺는 건 어떠십니까.”
“우호?”
“야만족의 땅은 척박하여 식량을 얻기 어려우니, 식량을 나누어 주면 쉽게 마음을 열 것입니다.”
“개국 이래 야만족에게 무언가를 베푼 적은 없었다. 그대는 그간 야만족 때문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간 조상들과 백성을 잊은 것인가.”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여 살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제가 좋은 방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절 사절로 삼아 주신다면, 제가 저들과 협상하여…….”
후작이 자신의 장대한 계획을 열띤 목소리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외교 사절, 이라는 단어를 택했지만, 결국 ‘공작 시켜 줘’라는 소리다. 곁에서 듣던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헬레나.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오구오구, 개소리 참 잘 떠든다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갑자기 내게 화제를 돌렸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어깨가 가볍게 튀었다.
“제 의견이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폐하.”
“듣고 싶구나. 그대는 변경에서 마수와 싸워 본 경험자이니, 군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겠지.”
음, 그렇지. 사실 난 내 집안의 성격과 달리 문관이라기보다는 무관 체질이니까.
“군비는 야만족뿐 아니라 마수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런, 공녀께서 어려 생각이 얕으십니다. 앞으로 이대륙과의 교류도 활발해질 텐데, 군비를 강화하면 폐쇄적으로 비치지 않겠습니까?”
후작이 날 향해 빙긋 웃으며 가르치려는 말투로 반박했다.
“모든 평화로운 교류는 내가 강한 후에 가능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게 끌려다니다가 주도권을 빼앗길 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찌 타인과 교류를 하겠습니까. 군비는 필요할 때 도모하여도―”
“필요할 땐 늦습니다. 그것은 대비가 아니지요.”
내가 말을 자르며 단호히 반박했다. 그것이 공격적으로 느껴졌는지, 후작이 혀를 찼다.
“허, 참. 공녀께서는 전장을 겪어 보지 않으신 분이라 모르십니다. 말을 얹으실 자리가 아닙니다.”
아, 네. 그러시겠죠.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용병으로 전장을 떠돌던 내 앞에서 ‘전장을 겪어 보지 않은’ 따위의 소리를 하다니.
“어쨌든, 폐하. 이것은 제국을 위한 선택입니다. 전 제국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후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카이사르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이런 인간들이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골치 아플 만하다.
“그대 의견은 잘 알았다. 자문회에 의견을 전해 보도록 하지. 그러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도록.”
절대 전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카이사르가 중얼거렸다.
“자문회는 도움이 안 됩니다, 폐하! 제 충의를 한 번만 믿어 주시면, 제가 놀라운 성과를―!”
“후작.”
“예, 폐하.”
“나는 분명 돌아가라 일렀다.”
카이사르가 삐딱한 고개로 후작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후작의 목구멍에서 ‘힉’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눈치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굶주린 맹수와 같은 그 살기는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대는 내 명령이 우스운 모양이군.”
“그, 그것이 아니오라, 저는 그저 충의로……!”
“그대의 충의는 내게 매우 피곤하군. 하물며 내 스승을 얕잡아 본 죄가 매우 크다.”
“스, 스승, 제가 언제 폐하의 스승을.”
후작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다. 내가 카이사르의 오랜 검술 스승이라는 것을.
“얕잡아 본 것이 아니라, 그, 이건 그저 경험의 차이를 말씀드리고자 했을 뿐―”
“대형 마수를 잡은 내 스승보다 그대가 전장에 더 박식하다 자신하는 모양이지?”
카이사르가 씩 웃었다. 사실 웃었다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다. 그렇게 살벌한 미소는 본 적이 없다.
“하면 그대 같은 인재는 전장에 보내야 옳겠군. 안 그런가?”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공녀! 용서하십시오!”
아……, 이제 딱해서 더는 못 보겠어. 눈치 없음의 대가가 매우 크구나.
“용서하겠습니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저런. 나의 스승은 너무 무르군.”
“브란테를 용서하신 폐하의 너그러운 성정을 본받고자 할 뿐이죠.”
나는 후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후작, 실은 지금 티타임 중이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후작님도 함께 하시겠어요?”
“아, 아닙니다. 폐하께서 쉬시는 자리에 제가 어찌…….”
“나의 스승께서 괜찮다 하니, 그대가 원하면 허락하겠다.”
카이사르가 말했다. 물론 말과 표정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 티타임에 끼면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이었으니까.
다행히 후작도 그걸 몰라볼 정도로 눈치가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적극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두 분의 사적인 시간을 이 이상 방해할 수는 없지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후작은 인사를 한 후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허둥지둥하던지, 가다가 한 번 발을 헛디뎌 기우뚱했다.
잠깐. 다리에 힘이 풀린 거잖아?
“……가여워라.”
나는 초라한 후작의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불쌍한가? 저자 때문에 헬레나와의 시간을 방해받게 된 내가 아니라?”
“폐하는 앞으로 질릴 만큼 저와 함께하실 거잖아요.”
내 핀잔에, 카이사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가 헬레나에게 질릴 일은 없을 테니, 그 말은 틀렸군.”
살랑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의, 질리지 않을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가 황제 하나는 잘 선택했네요. 전 정말 못 하는 게 없나 봐요.”
내 말에 카이사르가 크게 웃었다. 그렇게 거리낌 없이 웃는 모습은 오랜만이라, 나는 끝없이 안심이 됐다.
타인의 웃는 얼굴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정말 신기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