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10/156)

* * *

수련병들과 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황성 복도에서 웬 영애들과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가려는데, 영애들이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머, 공녀! 오랜만에 뵈어요! 폐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이신가요?”

“아뇨. 적기사단과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만.”

드레스 차림이 아닌데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두 영애를 살폈다.

‘율리카 뒤꽁무니 따라다니던 버빙카랑 헥터로군.’

나만 보면 오만하게 비웃음을 날리던 두 영애가 내겐 어쩐 볼일이려나.

“공녀께서 검을 휘두르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어요. 정말 멋져서 반해 버리겠던걸요.”

“저도요. 어쩜 그리 우아하신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였답니다.”

두 영애가 호들갑을 떨며 내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나는 문득, 그들이 율리카와 한통속이 되어 내 드레스에 음료를 쏟았던 때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율리카 다음엔 나에게 빌붙는 것인가.’

얘들은 어딘가에 빌붙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성격인 건가?

“그러고 보니 브란테 영애는 영지로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잘 지내고 계시다 하던가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두 영애에게 물었다.

브란테의 이름에 영애들이 화들짝 놀랐다. 처벌을 받지는 않았으나, 황제를 해하려 한 일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얻은 가문이었다.

아마도 어울려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 그, 글쎄요. 통 연락을 하질 않아서요.”

“그런가요? 두 분, 브란테 영애와 친하셨잖아요?”

“친하다뇨! 전혀 아닌걸요?!”

“그럼요! 다른 영애들과도 그 정도의 대화는 한답니다? 의례적인 거예요.”

“오호. 의례적이라.”

나는 헥터 영애의 말꼬리를 따라 하며 고갤 끄덕였다.

딱히 비아냥거릴 목적은 아니었는데, 내 반응에 두 영애가 다시 깜짝 놀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엇, 그……, 드, 들었답니다! 폐하와의 약혼 소식!”

“앗, 저도요! 정말 축하드려요, 공녀. 전 이리 될 줄 알았습니다.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거죠.”

두 영애는 능숙하게 화제를 바꾸어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이겨서 쟁취한 게 아닙니다. 폐하를 사모하고 있기에 결혼하기로 결심한 거예요.”

“어머, 물론이죠! 당연하고 말고요!”

어떻게든 말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듯, 두 영애가 격하게 고갤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의 이들이라면 내가 ‘내일 세계는 멸망합니다.’라고 말해도 동의할 것 같다.

“어쨌든 저희를 잊지 마세요, 공녀. 저희는 공녀를 응원하고 있었답니다.”

“맞아요. 어쩜 이리도 황후에 어울리는 분이 계실 수 있을까 늘 생각했는걸요.”

“그렇군요. 감사한 일이네요.”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생긋 웃어 주었다.

“제 드레스의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한, 제가 두 분 영애를 잊을 일은 없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드레스 얼룩이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두 명 다,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 원래 못된 장난을 친 애들은 잘 기억 못 하는 법이지.

“어머, 잊으셨나요? 왜, 폐하의 황태자 즉위식 파티 때…….”

내 설명에 비로소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아아, 하고 뭔가 떠오른 표정이 되더니, 곧장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 기억나셨나 봐요.”

“엇, 그때는 그, 브란테 영애가 몹쓸 실수를…….”

“그때 말씀드렸죠? 언젠가 여러분께 보답할 수 있도록 기억해 두겠다고.”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두 영애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내 시선에 동시에 흐이익 숨을 들이켰다.

“염려 마세요. 전 반드시 갚는답니다. 은혜든, 원수든.”

“……저, 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헥터가 얼굴이 희게 질린 채 허둥지둥 내게 인사를 하고 날 지나쳐 갔다.

“어머나, 영애! 같이 가야죠! 앗, 실례할게요, 공녀.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는 사과의 꼬리를 끌며 버빙카 영애도 멀어져 갔다.

나는 뒤뚱거리며 멀어져 가는 두 영애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살살 해 줄 걸 그랬나.”

조금 괘씸한 생각에 살짝 놀려 준 것뿐인데 저렇게 기겁할 줄이야. 뭐, 누르는 대로 반응하는 게 재미있어서 더 놀린 것도 있지만.

* * *

날 향한 태도가 달라진 이들은 당연하게도 영애들만이 아니었다.

베시와 황성을 막 나서는데, 이번엔 남자 귀족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야, 이게 누구신지. 페레스카 공녀 아니십니까.”

“이처럼 든든한 자녀분들이 계시니, 공작님께서 복이 많으시군요.”

뜻밖에도 셋 다 발레르의 측근들이었다.

“공녀, 폐하를 뵙고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아뇨. 기사단에서 검 훈련이 있었습니다.”

대체 이 질문을 몇 번이나 받는 거야.

그간 내가 검술 훈련 때문에 황성을 얼마나 들락거렸는데, 왜 갑자기 카이사르를 만나러 오가는 게 되어 버린 거냐고, 왜!

“참 열심히 하시는군요. 하긴, 이제 곧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실 테니, 아쉬움이 크시겠습니다.”

금발의 남자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난 고갤 갸웃하며 되물었다.

“네? 못 하게 된다니요?”

“곧 황후가 되실 분이시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금발 남자가 ‘알지?’ 하고 묻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영문은 모르겠고 불쾌하기만 하다.

“황후가 되는 것과 검을 그만두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 정작 전 생각도 안 하는 일을, 성급하시네요.”

사실 검 가르치는 거, 귀찮다.

카이사르와 결혼하면 이전처럼 내 제자들이나 가르쳐야지 싶긴 했었다.

그렇지만 멋대로 내 진로를 단정해 버리는 이들에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체통이 있는데, 황후가 되신 후에는 좀…….”

“황후가 되시면 검은 놓으시고 내조에 힘쓰셔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발레르 공에 대한 분노를 좀 거두어 주십사 말씀드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나는 노골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저더러 폐하를 살해하려 한 이들을 용서해 달라 청을 드리라 이 말씀이신가요?”

“발레르의 죄가 큰 건 사실이지만, 그 공도 무시할 수 없죠. 한데 폐하께서는 그저 숙청하실 생각만 하시니, 원.”

“원래 황후 하는 일이 그런 거 아닙니까. 폐하께서 옳은 선택을 하시게끔 곁에서 도우셔야죠.”

“어차피 공녀도 황후가 되시면 지지 기반이 필요하실 테니, 이 기회에 상부상조하자는 말씀입니다.”

말이 좋아 상부상조지,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폐하를 움직여 달라 이 소리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소식이 어두우시군요.”

“예? 소식이라니요?”

“폐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 그나마 발레르가 목숨 부지하는 거랍니다. 전 베어 버리자 했거든요.”

내 돌직구에 세 명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베, 베어 버리자니.”

“허허, 공녀께서 융통성이 없으시네.”

“네, 제가 융통성이 좀 없습니다. 적은, 벱니다. 참작의 여지 따윈 없지요.”

세 남자들이 당황하여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셋 다 ‘엇,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게 고스란히 읽혔다.

“발레르는 반역가의 가문입니다. 본인은 물론 그 시종과 가축까지 육시하여 도성 밖에 내다 버려도 시원찮을 이들을, 폐하의 자비하심으로 목숨 부지하는 겁니다.”

나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입가는 미소를 머물고 있었지만, 찌를 듯한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거침없는 내 말에, 뱀 앞에 얼어붙은 개구리처럼 세 남자의 눈동자가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아차 이거 잘못 건드렸다 싶을 것이다.

“혹 지금 여러분은 그런 발레르를 비호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비, 비호라니, 당치 않습니다!”

“어, 어허, 괜한 소릴 한 것 같군요. 잊어 주십시오, 공녀. 실언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참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무고한 분들을 벨 뻔했군요.”

나는 살기를 잠재우고 빙긋 미소 지었다. 내 미소에도 세 사람은 전혀 웃질 못했지만.

“전 여러분의 충심을 믿습니다. 부디 폐하를 위해 애써 주세요.”

세 사람이 허둥지둥 내게 고갤 숙여 인사했다. 아니, 고개가 아니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카이사르와 달리, 나라면 쉽게 좌지우지될 줄 알았겠지.

‘바보들. 그 카이사르를 누가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뒤통수 세 개를 내려다보며 나는 코웃음을 흘렸다.

* * *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틀 후, 아버지를 만나러 공작저를 찾아온 해밀턴이, 날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얼굴 보자마자 대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졌단 말입니다. ‘폐하가 늑대라면, 공녀는 마왕이다.’라고요.”

“아니, 인간에게 갑자기 마왕이라니…….”

내가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원인은 짐작이 간다. 어제 만난 그 세 명,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다.

“발레르를 용서해 달라고 폐하께 말씀드리라길래,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육시해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 그, 그런 끔찍한!”

해밀턴이 뜨악하고 입을 벌렸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죠. 끔찍하죠. 어떻게 제게 발레르를 용서해 달란 말을 전하라 할 수 있죠?”

“자비라고는 없으시군요.”

“그건 자비가 아니라 호구죠.”

“아아, 육시라니. 온화하고 자비로운 폐하와 따뜻하고 상냥한 황후마마를 모시는 게 저의 꿈이었는데……!”

해밀턴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꼈다.

설마 진짜 우나?

“저런. 소중한 꿈을 깨뜨려서 죄송해요, 자작님.”

“제 꿈을 깨뜨리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겠다는 가정은 없는 겁니까?”

“사람에게 상냥해지는 건 너무 귀찮아서…….”

“으아아, 귀찮아서 대체 숨은 어떻게 쉬시는 겁니까아!”

해밀턴이 절규했다.

“아직 결혼 전인데 장차 황후 될 이의 별명이 ‘마왕’이라니……!”

“잘 됐지 않나요? 앞으로 제게 추근댈 귀족들은 없을 거 아녜요.”

“역사상 가장 살벌한 부부가 되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른 해밀턴이, 갑자기 명치를 움켜쥐고 허리를 숙였다.

“으으……, 위장이……, 위장이 아파 옵니다……!”

……어쩐지 좀 미안하네.

“음,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달리 바쁜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재빨리 해밀턴을 두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그도 내게 용건이 있어 공작저에 온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안 그러면 계속 복도에 선 채로 잔소리를 듣게 될 것 같거든.

‘그나저나 마왕이라니.’

그러고 보니 적기사단의 여름 합숙에 따라갔을 때에도 달튼이 날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나름대로 선량하고 너그럽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마리안느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잖아.

“앗, 아가씨.”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날 발견한 케고르가 허겁지겁 내게 다가왔다.

무슨 급한 용건이 있나 싶어, 난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에요?”

“자작님께 말씀 들으셨습니까? 내일 에버그린 양이 찾아오겠다 했다던데.”

“아뇨. 그랬군요.”

그 인간, 정작 중요한 얘긴 빼먹었잖아!

“약혼식 준비로 오겠답니다. 지난번처럼 분명 디자이너며 온갖 보석류를 마차 몇 대에 꽉꽉 채워 오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겠죠. 으음. 드레스룸을 치워 두고, 다과도 넉넉히 준비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드디어 시작되는 거구나, 약혼 준비.

귀찮은 건 싫다는 나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약혼은 황성에서 조촐한 파티를 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귀족을 만나야 하는 건 사실인지라, 로위나는 결코 허투루 내보낼 생각이 없다며 눈을 빛냈다.

‘조촐한 약혼식도 이 정도인데, 결혼식 땐 어쩌지.’

으으, 벌써 피곤이 밀려와.

“그리고 하나 더.”

계단을 다시 올라가려는데, 케고르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내게 말했다.

나는 세 개 계단을 올라가 멈춰 서서 케고르를 돌아보았다.

“또 뭐죠?”

“방금 아고트 양이 돌아와, 접견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아고트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떴다.

대체 왜 내 주변 남자들은 중요한 얘기를 먼저 하지 않는 거냐고.

불평을 삼키며, 나는 그대로 접견실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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