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11/156)

* * *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안쓰러웠는데, 놀랍게도 아고트는 더 쌩쌩해 보였다.

피부는 좀 더 가무잡잡해졌고, 몸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못 본 사이 좀 더 자란 머리카락은 뒤로 질끈 묶어 쫑긋했다.

“으앙,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나를 향한 애정과 집착은 여전한 것 같지만. 아니, 더 심해졌나?

“수고했어. 배 안 고파? 식사 먼저 할래?”

“괜찮아요. 아 참, 저 리운의 특산품도 챙겨 왔어요!”

아고트가 가방을 뒤지더니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나무 인형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으음, 특산품이란 말이지.

“창가에 걸어 두면 행운이 찾아온대요!”

악운이 찾아올 것 같이 생겼는데.

“고마워, 아고트.”

성의는 고마우니 일단은 웃어 주었다.

“그나저나…….”

흥분한 아고트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기에,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옆에 계신 이분은 누구……?”

그렇다.

아고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웬 남자가 함께였다. 키는 카이사르만큼 컸는데, 몸이 비쩍 말랐고 얼굴이 창백할 만큼 희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에, 패션 감각 없는 내가 봐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안 어울리는 커다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네? 이분이요? ……어맛, 깜짝이야! 아 맞다, 같이 왔죠, 우리?”

아고트가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맙소사. 여태껏 자신이 데려온 손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건가.

무례하게 여겼을 수도 있을 아고트의 말에도, 남자는 순박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아닙니다. 제가 너무 인기척이 없었죠.”

“이분은 마법사 길드원인 ‘로망’ 씨예요.”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로만 그리트요.”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 이름을 정정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레스카 님. 아고트 양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반가워요, 그리트 씨. 그런데 어떤 말씀을 들으셨던 걸까요?”

“천상에서 내려오신 천사처럼 아름답고, 강하고, 착하고, 못 하는 게 없으신 분이라던데요.”

왜곡됐다. 심하게 왜곡됐다.

아고트를 쳐다봤더니, 아고트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큰일이군. 나무랄 수가 없어.

“으음, 진실은 서서히 알아 가는 걸로 하고……, 그리트 씨.”

“로만이라 불러 주셔도 됩니다.”

“그러면 로만 씨. 아고트와 함께 오신 이유가 있겠죠?”

“아, 실은 흥미가 동해서…….”

“흥미?”

고개가 절로 갸웃해졌다.

내 의문을 해소할 다음 설명은 아고트가 이었다. 아고트는 다시 가방을 뒤져, 이번엔 커다란 책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책은 아주 낡고 오래되어, 잘못 만지면 종이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실은 노에에 대해 길드 명부를 뒤져 봤는데, 그런 이름은 없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여기, 로망 씨가 그 이름이 아무래도 귀에 익다고 해서 말이에요. 창고에서 며칠 내내 몇백 년 동안의 명부를 싹 다 뒤졌거든요.”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그랬는데, 있었어요. 그 이름.”

아고트가 책을 펼치며 말했다.

“무려 100년 전에요.”

아고트가 꺼낸 책은 100년 전 길드원 명부였다.

나는 아고트가 펼친 페이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이름을 발견했다.

노에 라벨.

“……라벨.”

나는 그의 이름이 아닌 성을 조용히 따라 읊조렸다.

이미 아는 성이다.

심장이……, 따끔, 아파 왔다.

‘어떻게 그동안 잊어버리고 살았지?’

크루세흐를 내 심장에 봉인할 때, 봉인 마법을 펼쳐 줬던 마법사.

다시 말해.

‘크루세흐가 내 심장에 봉인됐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

동료는 아니었다.

크루세흐를 죽일 방법이 없기에 봉인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고용한 파트너였을 뿐이다.

그런가.

그 후손이었던 건가.

그래서 내 심장에 크루세흐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였나.

“아가씨, 괜찮으세요?”

곁에 앉은 아고트가 내게 물어, 그제야 나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목 뒤가 서늘한 기분이었다.

“아……, 응.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나는 아고트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지만, 아고트의 얼굴에서는 걱정하는 낯빛이 지워지질 않았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부러 로만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로만 씨는 이 이름이 왜 귀에 익었던 거죠?”

“오래전 인물이라 가물가물해도, 길드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듣고 한 번은 갸웃했을 겁니다.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유명? 크루세흐를 봉인한 마법사의 후손이라서?”

“네? 헉, 그렇대요?”

모르는 건가.

‘하긴. 크루세흐를 봉인한 후 라벨은 아예 은둔해 버렸으니까.’

라벨 본인도 유명세를 얻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도 라벨의 존재는 쉬이 잊혔다.

“그럼 왜 유명한 거죠?”

“큰 사고를 일으키고 제명당한 길드원이거든요.”

“제명?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아마 이 무렵이 제대로 된 마법사들의 거의 마지막 세대였을 겁니다. 이 사람을 포함하여 열댓 명쯤 되는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흥시키기 위해 뭔가 금기를 저질렀다더군요.”

“금기요?”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 이미 죽은 인간을 다시 되살리는 거였던가. 태어나게 만드는 거였던가.”

이미 죽은 인간을 되살리고, 태어나게 만들고…….

설마……, 나인가?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것이,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금기였던 데다 위험한 마법이라, 관련자는 다 죽고 그 사람만 살아남았더랍니다.”

“이 사람, 죽었나요?”

“죽었겠죠. 100년 전 사람인데.”

“언제?”

“그건 모릅니다. 제명당한 후의 행방이 묘연하거든요. 처벌받아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고.”

‘안 죽었어.’

안 죽은 거다.

노에 그는, 100년 전부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나를 환생하게 하고.

단테의 시신을 훔치고.

크루세흐를 부활하려 하고.

‘오로지 마법을 되살리기 위해.’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가 어린 나를 ‘왕’이라 칭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이유.

그는 나를 무사히 환생시켜, 날 통해 왕 ―크루세흐– 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던 것뿐이다.

“맞죠, 아가씨? 그때 봤던 드라코교의 교주 말이에요. 이 사람인 거겠죠?”

아고트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로만이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핫, 아고트 양도 참. 100년 전 사람이 살아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뭐예요. 로망 씨도 그게 궁금하다면서 같이 오신 거잖아요?”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로만이 여전히 호구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잘 모르겠으나, 마법과 관련한 일이 있는 건 확실해 보여서 말입니다. 지적 호기심이랄지.”

“그래서 함께 오신 거군요.”

“아고트 양이 이 모든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너무해요, 로망 씨!”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타악.

로만이 책을 덮으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마법사 길드원 한 명 정도 끼어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지금껏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것보다, 이 남자가 가져온 정보가 가장 유용했고 확실했다.

“당신이 노에와 한편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죠?”

“보장은 없습니다. 그저 마법과 관련하여 궁금한 게 있을 때 다른 이가 아닌 저와 의논해 주시기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로만이 여전히 빈틈투성이인 얼굴로 말했다.

마리안느에게 크게 뒤통수를 맞았던 후라 그런지, 사람을 믿는 일에 어쩐지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결국 나는 로만을 의심하기를 체념했다.

“……좋아요. 앞으로 많이 도움을 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로만 씨.”

“저야 환영합니다.”

로만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마저도 묘하게 호구 같아서, 어쩐지 더 수상쩍게 보였다.

* * *

카이사르와의 약혼식은 황성의 그레이트 홀에서 파티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들 ‘황제의 약혼식치고는 간단하다’라고 하는데, 난 간단한지 잘 모르겠다. 이 약혼식 파티를 위해 로위나에게 시달렸던 날들을 떠올려 봐도 말이지.

‘더구나 약혼식에 집중도 못 하겠고.’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만에게 노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노에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100년 전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전혀 늙지 않았던 건가.’

어린 시절 마주쳤을 때와 최근 만났을 때, 그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설마 영생을 산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처음 만났던 때 그가 내게 뭐라고 말했더라.

[어찌 시간은 이리 더디게 흐르는지. 무너져 가는 이 육체가 야속할 따름입니다.]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그 장면을 조금만 골똘히 생각해도 우스울 만큼 금방 떠올랐다.

무너져 가는 육체.

그는……, 죽어 가고 있는 거다.

“아름다우신 주인공께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곁에서 들리는 카이사르의 말에, 나는 ‘헛’ 하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음, 나도 모르게 한껏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었네.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다른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지, 헬레나?”

카이사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보며 투덜거렸다.

“벌써 지루해진 건가?”

“아, 죄송합니다, 폐하.”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만, 지금은 그런 소리 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내 속내를 이미 읽은 듯,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다들 춤추는 데 정신이 팔려 이쪽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군.”

그 말에 나는 연회장 중앙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의 말대로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료해 보이는데,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올 텐가?”

나는 그의 다정함에 괜한 심술이 들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혹시 율리카 브란테에게도 이리 친절하셨나요?”

“혹시 질투하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기쁜걸.”

“제 질투가 기쁘신가요?”

“질투하는 사람은 늘 내 쪽이었으니까. 자, 이제 나의 불안을 조금쯤은 깨달으셨는지?”

카이사르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카이사르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두 사람은 메인 홀을 벗어나 테라스로 빠져나왔다.

두꺼운 커튼과 유리문이 홀 안과 밖을 나누었다.

“시원해라.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나는 난간을 짚고 정원 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밤바람에 기껏 예쁘게 꾸민 머리카락이 다소 헝클어졌다만,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내 옆에 다가와 내 앞머리를 살살 매만져 주었다.

“후회되지는 않나?”

“뭘 말이죠?”

“내 곁에 있기로 선택한 일.”

카이사르의 미소가 어둠에 묻혀 어딘가 불안했다.

“또 언젠가……, 나 때문에 그대가 위험에 처하게 되거나, 곤란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런 일이 생기면 절 버리실 건가요?”

“그럴 리가.”

“그렇죠. 저도 겨우 그런 일로 폐하를 버리지 않아요.”

나는 난간을 짚고 있는 카이사르의 긴 손가락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조용히, 그 손 위로 나의 손을 포개었다.

“내가 지켜 줄게요. 폐하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저런. 말을 뺏겼군. 그 고백은 내가 먼저 해야 했는데.”

카이사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 품은 죄책감을 다 씻어 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제는 나도 안다. 그 안타까움을. 무력함을.

난 카이사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더듬었다.

그의 체온이, 차가운 밤공기에 식었던 내 몸을 녹였다.

“폐하의 등에는 아직도 날 지키며 얻은 그 상처가 남아 있겠죠. 당신은 그때부터 날 지켜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시는 이 등에 상처를 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것이 내 방식의 사랑.

“좋아. 그렇다면 마음 놓고 그대를 독점해도 되겠군.”

카이사르가 날 꽉 끌어안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제 도망갈 기회는 끝났어, 헬레나. 나는 널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저런, 욕심도 많으셔라.”

내 농담에 카이사르가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췄다. 날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달빛이 닿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동화 속의 왕자님 같아서,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 헬레나 페레스카. 이 욕심 많은 남자와 부디 결혼해 주겠어?”

물론 이 몸의 남자가 되려면 그 정도 야망은 있어야지.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대답을 해 주었다.

“카이사르 윈터 그레이. 기꺼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니 그런 너를 가진 나는, 얼마나 큰 세계를 손에 넣게 된 것인지.

카이사르가 나의 허락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내 허리를 끌어당겨 내게 입 맞췄다. 아득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고 그를 온몸으로 느꼈다. 이제는 온전히 내 것이 된 남자의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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