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12/156)

* * *

약혼식이 끝난 후, 황성에는 내 거처가 마련되었다.

황후에게 주어지는 황성의 별채. 수많은 시종들은 덤이다.

처음 시종들과 인사를 하러 별채를 찾아갔을 때, 남작가 출신의 시녀장이 모두를 대표해 내게 인사했다.

“황후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헬레나 페레스카 님. 저는 시녀장인 ‘셀즈 루엘’라고 합니다.”

셀즈의 말투가 로위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성격까지 닮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까지는 주로 공작저에서 생활할 것이다. 오늘은 인사만 하러 온 것이니, 모두 그리 알도록.”

“그러면 황후궁의 가구나 실내 장식은 어떻게 할까요.”

보통 황가의 혼약자는 결혼 전까지 새로운 거처에 머물며, 거처 내부를 자신의 취향대로 바꾸어 간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뭐, 대부분의 일에 관심이 없긴 했지만.

“그것은 시녀장에게 맡기겠다. 그대의 미감을 믿어 보도록 하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셀즈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내게 말했다.

“아, 다만 한 가지만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검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줘.”

황성이나 기사단저에도 연무장은 있다만, 내 개인이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혹시 이 사람들도 ‘황후께서 어찌 검을!’이라며 질색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실로 기우였다.

“물론입니다. 이미 공간을 확보해 두었으니, 그 점은 염려치 마십시오.”

오오. 마음에 드는데.

‘해밀턴이나 로위나가 미리 귀띔해 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을 마주 칭찬해 주고 싶어지는걸.

“좋아, 해산.”

가볍게 손을 흔들었더니, 시종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아차, 수련병들에게 하듯이 해 버렸네.

“엇, 이제……, 뭘 하실 예정이십니까?”

“본성으로 갈 것이다만?”

“그럼 저희가 따르겠습니…….”

“거절하겠다.”

셀즈의 말을 내가 재빠르게 잘랐다.

나는 마리안느가 십여 명이나 되는 시종들을 사탕 엮듯 줄줄이 데리고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비효율적일뿐더러, 쓸데도 없다.

‘500년 전 황제였던 때에도 그렇게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닌 적 없었는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하오나 곧 황후가 되실 분이신데…….”

“아, 황후가 되어도 따르는 이들은 필요 없어. 공식적인 자리나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신경 쓰지 말도록.”

“혹시 저희를……, 아직 신뢰하지 않으셔서입니까?”

셀즈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아차’ 싶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니. 그저 번거로워서야. 실속도 없고.”

“그래도 위신이…….”

“내 위신이 염려된다면, 남아도는 시간 동안 황후궁을 더욱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

내 파격적인 제안에 다들 반신반의하는 표정들이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의문들이 눈빛에 가득하다.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하란 얘기야. 내 뒤를 따라다니며 명령 기다리지 말고.”

이들도 곧 익숙해지겠지.

공작저 사람들도, 별저의 고용인들도, 귀찮아하는 내 규칙에 금방 익숙해졌거든.

“자. 알아들었으면 다시 해산.”

내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두 번째 명령에는 그나마 덜 생소한 얼굴이 되어, 모두 쭈뼛대며 방을 나갔다. 시녀장인 셀즈는 마지막까지도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만.

* * *

황후궁에서 시종들과 인사가 끝난 후에는 본성을 찾았다.

너른 방에 들어서니, 카이사르가 방 한가운데 1인용 소파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3인용 카우치에는 레너드가 앉아 서류를 분류 중……, 와, 잠깐.

“지금 제 오라버니에게 일 시키고 본인은 놀고 계신 건가요?”

나는 성큼성큼 자리로 걸어가며 카이사르를 타박했다.

카이사르가 그런 날 보며 ‘훗’ 하고 웃었다.

“내 친위대장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군.”

“정사를 친위대장에게 맡기시면 안 되죠. 친위대장은 폐하의 안전을 지키는 자라고요.”

털썩. 나는 시종들이 내어 준 의자에 앉으며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사실 내 안전을 지키라니, 우스운 소리 아닌가? 이 제국에서 날 이길 자는 스승님밖에 없는데.”

“아, 네. 그래서 독인 줄도 모르고 덥석 드시고 앓아누우셨군요.”

“윽.”

카이사르가 정곡을 찔려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내게 좀 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할 필요가 있어!”

“최선을 다해 폐하께 다정하게 대하고 있잖아요?”

“뭐?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지?”

“폐하와 약혼해 드린 부분?”

“이럴 수가! 다정의 범위가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저기, 두 분. 결혼식 올리기도 전에 사달 날 것 같습니다.”

레너드가 나와 카이사르를 진정시키듯 양손을 허공에서 토닥거리며 말했다.

마치 들짐승을 진정시키는 듯한 그 제스처에, 나와 카이사르는 동시에 ‘크흠!’ 하고 괜히 헛기침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오라버니에게 시키시는 거죠?”

나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무실이 아닌 티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서류이니, 내가 보면 안 되는 중요한 정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보면 안 될 서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 중요하지 않은 내용도 아니었다.

“이건…….”

“그래. 드라코교의 추적 자료야.”

카이사르가 손가락 두 개로 관자놀이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최근 드라코교는 해체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습을 감췄다.

더욱 찾기 힘들게 몰래 모이는 것인지, 정말로 해체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첩자까지 심어 두고 살펴봤는데, 꼬리를 밟기가 어렵더군. 그……, 교주라는 자가 의심이 많고 까다로워.”

노에.

100년 전의 마법사.

나는 다시금 그 금발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면 본거지 추적은…….”

“실패는 아니야. 여러 지역을 탐방하고 후보지를 좁혀 가는 중이니까.”

“제국이 얼마나 넓은데요.”

“물론 후보군은 어느 정도 있어. 그리고 지금은 범위도 상당히 좁아졌지.”

나는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후보지에서 탈락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일을 오라버니가 맡아서 해 온 거야?”

“폐하를 책망하지 마, 헬레나. 내가 원해서 맡은 거야. 오히려 내게 맡겨 달라고 부탁드렸어.”

레너드가 날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생이 모처럼 의욕을 가지고 알아내려 하는 일이잖아. 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오라버니……!”

아아, 감동이다.

내 오라버니는 천사가 분명해. 신이 실수로 인간 세상에 떨어뜨려 준 것이다.

“자아, 팔불출 놀이는 그쯤하고.”

나와 레너드가 애틋한 남매의 정을 나누는 게 불만이었는지, 카이사르가 테이블을 소리 나게 탕탕 치며 분위기를 깼다.

“지금 추이면 한 달 내로 본거지는 찾아낼 수 있어. 그러면 그 교주 녀석의 꿍꿍이도 확실하게 드러나겠지.”

“아……, 그 일 말인데요.”

나는 한쪽 손을 들어 딱히 필요 없는 발언권을 청했다.

“실은 개인적으로 그 교주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폐하.”

“뭐? 본거지를 알아내기 전까지 헬레나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일렀을 텐데?”

카이사르가 탐탁잖은 듯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내게 물었다.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히 변명하는 말투로 말이 나왔다.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고트가 했죠.”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게 그거죠?”

“내가 헬레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한 건,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봐…….”

“자아, 두 분. 진정하세요.”

레너드가 다시 양손을 허공에서 토닥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는 우리 두 사람을 야생 동물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제스처가, 실제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있다는 점이 너무 자존심 상한다.

“……계속 말씀드려도 될까요, 폐하?”

“하아……. 그래. 어차피 내가 헬레나를 말릴 수는 없었을 테니.”

카이사르가 체념한 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 태도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교주의 이름은 ‘노에 라벨’. 100년 전 사람이고, 용을 부활시키려 해요.”

“100년 전 사람? 하지만 그 교주는 젊은 사람이라 들었는데.”

“나도 그 비결은 몰라. 마법사였다고 하니, 뭔가 마법을 부린 걸지도.”

레너드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카이사르가 내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의 부활이라. 그래서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이 필요했던 것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마법을 부활시키는 일인 것 같아요.”

“마법?”

“응. 오라버니가 그랬잖아? 용이 멸종한 후 마수도 줄어들고, 마법사들의 수도 급감했다고.”

“그건 그렇다 치고……, 헬레나는 그것들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레너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아차’ 하고 잠시 말을 삼켰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고 올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내가 사실은 단테 레나투스야.

……그렇게 밝혀도 될까?

아니, 믿어 주긴 할까?

“그건 그 교주 녀석을 잡아 보면 알겠지.”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카이사르가 재빨리 레너드의 질문을 수습했다.

레너드도 카이사르의 대답에 가만히 고갤 끄덕여 긍정했다. 다행히 내게 집요하게 물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사, 살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사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나에게 고맙지? 하고 묻는 듯한 그 시선이, 얄미우면서도 좋았다.

그는 내가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고 있어도 좋다고 말한다.

설령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 않아도 날 의심하지 않겠노라고. 그 비밀을 지켜 주겠노라고. 원치 않으면 묻지 않겠노라고.

그것이 고맙고……, 미안했다.

“어쨌든 정말 용을 부활시킬 목적이라면, 그 교주를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카이사르가 다시 레너드 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용은 과거에도 인간들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특히 크루세흐는 수많은 인간들을 죽음에 내몰았던 악룡이야.”

“동감입니다. 그런 게 깨어나면 제국은 물론 인류 전체에 큰 위기가 될 겁니다.”

나는 말없이 고갤 끄덕여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는 그 위험함을 잘 안다. 직접 체험해 보았으니까.

‘용이 깨어나는 걸 알게 된 이상, 두고 볼 순 없어.’

과거에도 아무도 용을 막아 내지 못했다. 나 역시 용을 쓰러뜨리긴 했으나 죽이진 못했다. 그만큼 용은 거대하고 강력한 적이다.

‘내가 없으면 용은 다시 부활하지 않았겠지.’

난 무의식중에 가슴을 움켜잡았다. 두근, 두근. 심장 고동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용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어.’

이건 귀찮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 이유. 그건 용을 부활하려는 노에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살아갈 이유는 내가 정하겠다.

“저는 용의 부활을 막고 싶습니다, 폐하.”

늘 그래 왔으니까.

과거에도. 지금도.

내 인생을 결정하고 흔들 수 있는 건, 나밖엔 없다.

“그래. 동감이다.”

카이사르가 내 말에 고갤 끄덕였다.

“아니, 막고 싶은 게 아니야. 막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군주가 할 도리일 테니까.”

“저는 폐하의 사람이니, 폐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군요.”

레너드가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그의 말에 나도 카이사르도 그제야 작게나마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구나.’

돈을 주고 고용했거나, 필요에 의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동료와 다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500년 전엔 돈 때문에 용을 사냥했다면.

‘지금은 이들을 위해 싸우고 싶어.’

소중한 게 생긴다는 건 약해지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사람을 더 강하게도 만들어 주는구나.

나는.

혼자였던 단테 레나투스보다 좀 더 강해진 것일까.

정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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