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이사르와의 약혼식이 끝난 후, 날 찾아오는 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초반에는 날 꼬드겨 카이사르를 휘두르고 싶어 하는 무리가 많았다. 그러나 ‘페레스카 공녀는 황제를 능가하는 대마왕이다’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문이 퍼지면서, 그런 이들의 방문은 사그라들었다.
대신 다른 명분의 손님들이 찾아와 날 귀찮게 했다.
“부탁드립니다, 공녀. 저희가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 함께 계셔 주십시오.”
황성 별채의 알현실에 이른 아침부터 두 명의 남자가 날 찾아왔다.
둘 다 작위가 높지 않은 신흥 귀족으로, 카이사르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에 초장부터 질려 버린 이들이었다.
“아니……, 저는 정치에 끼어들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 남자가 허둥지둥 내 말을 부정했다.
“저희를 옹호해 달라거나 도와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계셔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네! 그냥 옆에 계셔 주시기만 해도 됩니다!”
“제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거기 왜 가서 앉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쭈뼛대더니, 간신히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폐하께서는 아주 무서우신 분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저희는 뵙기가 두렵습니다.”
“사실 전 찬바람이 쌩쌩 도는 폐하의 얼굴만 뵈어도 오금이 다 저립니다.”
“음……, 폐하의 인상이 좀 무섭긴 합니다만…….”
나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뒷말을 흐렸다.
‘그러잖아도 시커멓고, 키는 크고, 얼굴 잘생긴 놈이 냉기가 쌩쌩 돌면 두 배로 무섭긴 하지.’
솔직히 나한테나 다정하지, 카이사르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앗, 그런데 폐하가 무서운 것과 제가 함께 있는 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두 귀족의 표정이 활짝 개더니 동시에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넘치는 목소리로.
“그나마 폐하를 이길 수 있으신 분이 공녀이시라기에!”
으음.
이 이미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지은 채 그 두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런고로, 오늘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폐하.”
이른 아침, 나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황후궁에 찾아온 카이사르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영 탐탁잖은 표정이었지만.
“만사 귀찮은 헬레나가 어째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해 주는 거지?”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서 징징대는 게 더 귀찮아서요.”
“끄응. 그대는 여전히 모든 일이 귀찮은 것과 더 귀찮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군.”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헬레나. 내 ‘다정’은 총량이 많지 않아. 그대에게 사용하는 것이 한계야.”
“이러다가 살벌한 부부로 역사에 남을 판입니다. 한 명이라도 좀 온화해야죠.”
“그게 왜 나여야 하는 거지?”
“전 귀찮아서.”
“헬레나……!”
카이사르가 억울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굳이 내게 떠넘기지 않는 게 기특하다.
“단지 귀찮아서만은 아니에요. 초반에는 발레르를 경계하고 자리를 잡기 위해 강한 이미지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카이사르는 전무후무한 강하고 두려운 군주의 모습을 충분히 구축했다.
그러니 조금쯤은 자비롭고 온화한 군주의 모습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폐하가 두려워 옳은 소리 못 하는 이가 생기는 건 좋지 않아요.”
“날 두려워하는 이가 대체 누가 있지? 해밀턴과 로위나를 좀 보라고.”
“그 두 사람이야 폐하의 진위를 알고 있는 이들이니 그렇죠.”
“나의 진위? 내가 사실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것 말인가?”
“……어쨌든요.”
“말을 돌렸군. 지금 말을 돌렸어. 내 진위가 대체 뭔지 대답해.”
“중요한 건 하루빨리 폐하 때문에 저에게 귀찮은 방문객이 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내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카이사르가 배신감에 찌든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자, 그럼 우리 함께 힘내 보아요, 폐하.”
나는 주먹 쥔 손으로 파이팅을 말하며 활짝 웃었다.
카이사르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어쩌겠어. 이 무시무시한 늑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말은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바보인걸.
* * *
실습의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카이사르와 성내를 거닐고 있는데, 흑기사단장과 기사 몇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장과 맞닥뜨린 것이다.
“오, 마침 좋은 먹잇……, 사람들이 있네요.”
“방금 먹잇감이라고 하려 했지, 헬레나.”
“자, 폐하. 가서 저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시는 거예요.”
내가 카이사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끄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는 몇 번을 망설이더니, 결국은 내 의견을 따라 그들에게로 먼저 다가갔다.
“무슨 얘기 중이지?”
저들끼리 수다를 떠드느라 삼매경이던 이들이, 뒤늦게 카이사르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희게 질려 인사를 해 왔다.
“폐, 폐하!”
“앗, 페레스카 공녀!”
“실례했습니다! 두 분을 미처 보지 못하다니, 용서하십시오!”
“아니……, 진정해. 질책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한마디밖에 안 했는데 벌벌 떠는 기사들의 반응에, 카이사르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 정도로 자신의 이미지가 사나웠던가. 카이사르도 비로소 깨달아 조금쯤은 찔끔한 모양이다.
“자, 대화. 대화.”
나는 입 모양으로 카이사르만 보이게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기사들을 향해 섰다.
“으음……, 그, 흑기사단은 요즘 어려운 일은 없나.”
부하들의 고충을 헤아리려 하는 멋진 군주의 대사다.
문제는 태도다. 낮고 고압적인 목소리. 그러잖아도 큰 키에 내려다보는 시선. 온몸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압도력.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은 카이사르의 말을 곡해한 모양이었다.
“더,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폐하께 감히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이다니, 부디 용서를!”
“아, 아니.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만.”
으음. 카이사르의 말이, ‘여기서 노닥대는 걸 보니 흑기사단은 일하기 아주 편하지? 응?’ 정도로 들린 건가.
“그저 그대들과 편하게 대화하고 싶을 뿐이다.”
“헉,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것들, 뭐 하는 거야! 폐하께서 편히 말씀하실 수 있도록 의자라도 가져와!”
“제,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 제가 가겠습니다!”
이쯤 되면 나도 좀 의문인데.
이 불통의 원인은 카이사르의 문제인지, 이들의 문제인지.
‘아무래도 카이사르의 위압적인 분위기 탓일지도.’
카이사르는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의 색채 조합도 그렇거니와, 날카로운 턱선이며 눈매가 순해 보이진 않는다.
그래, 인상 탓일지도.
“좀 웃어 주세요, 폐하.”
기사들이 허둥지둥 방에서 의자를 꺼내 오는 사이, 내가 카이사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카이사르는 이제 슬슬 한계라는 표정이었다.
“웃어 봐야 나아질 것 같지 않아.”
“해 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폐하?”
웃으라니까?
내가 씨익 웃으며 고갤 갸우뚱했더니, 카이사르가 ‘윽’ 하고 신음했다.
“폐하! 공녀! 의자를 가져왔습니다! 편히 앉아 하명하십시오!”
그사이 두 명의 기사가 식식거리며 의자 두 개를 지고 되돌아왔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시범을 보이겠다는 요량으로, 기사들을 돌아보며 생긋 웃어 주었다.
“어머,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내 미소에,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다행이다. 분위기가 조금은 온화해졌어.
자, 이때다, 카이사르! 너의 그 잘생긴 미소로 온화한 이미지를…….
‘……헉?’
카이사르가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실로 살벌한 미소였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기사들이 내 미소에 긴장을 푼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흑기사단과 마주할 일이 많아질 것 같군.”
카이사르가 우아하고도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기사들에게 말했다. 마치 멸망을 선고하는 지옥의 신 같았다.
그 살벌한 미소에 기사들이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는,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카이사르.
그냥 다정해지지 않는 게 낫겠어.
* * *
카이사르의 다정다감 대작전이 화려하게 실패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달튼은 정말이지 단장실이 떠나가라 웃어 댔다.
“으하하학, 내가 현장에서 그 인간들 표정을 목격했어야 했는데! 으하하핫, 하하핫콜록콜록!”
“어휴, 단장님. 체통 좀 지키세요.”
달튼의 곁에서 서류 정리를 돕던 총무인 제럴드가 타박하듯 말했다. 물론 달튼은 들은 척도 안 했지만.
“어휴, 그런데 나라도 오금이 다 저렸을 것 같구려. 폐하의 웃는 얼굴이라니.”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거, 굉장히 열 받았다는 의미 아닌가? 음?”
“그렇죠. 참을 만큼 참았다, 뭐 이런 의미죠.”
달튼과 제럴드가 동시에 고갤 끄덕이며 설명했다.
나는 양손으로 찻잔을 쥔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평소에 안 웃던 양반이 웃는데, 뭔가 있다 싶은 생각밖에 안 드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폐하께서 얼마나 잘 웃으시는데요. 가끔 좀 짓궂은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거야 교관에게나 그런 거지.”
그런 건가.
결국 카이사르가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나 이외엔 불가능하다는 건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다행인 것 같기도 하면서……, 조금 흐뭇하기도 하면서……. 으음. 복잡 미묘한 기분인데.
“하아,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사람들에게 폭군이라고 불리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소? 난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소만.”
“어째서인가요?”
“교관은 폭군이란 뭐라 생각하시오?”
“음……,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군주?”
“음, 그렇지. 그것도 있긴 하지. 그런데 왜 폭군을 무서워하겠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백성을 돌보지 않고, 패악을 부리고, 폭정을 일삼고, 옳은 말 하는 이들을 부당하게 처벌하고……?”
“그렇소. 나도 동의하오. 지금 폐하가 그런 것 같소?”
“……아뇨.”
나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된 후 일 중독인가 싶을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선황이 발레르에게만 의지하여 엉망이 된 온갖 일을 정상화하기 위해, 밤낮 쉬질 않았다.
“폐하께서 무서운 분인 건 사실이지. 성격도 뭐……, 우리끼리이니 하는 말이지만,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아이고, 단장님! 제발 말 좀 조심하시라니까요!”
제럴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무랐지만, 달튼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가끔 헛소리하는 귀족들 상대로 으르렁대긴 하셔도, 뭐 아직 목 떨어진 귀족 놈들은 없지 않소?”
“그렇네요, 정말.”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발레르가와 마리안느도 목 위를 보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흑기사단도 지릴 정도로 벌벌 떨었다고는 해도, 오히려 선황 시절보다 군기도 잡히고 체계도 잘 잡혀 가고 있다오.”
달튼이 모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소. 폐하가 무서운 분이긴 해도, 군주에 어울리는 분임엔 틀림없다는 것을.”
달튼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카이사르를 향한 확신과 신뢰가 언뜻 비쳤다.
“무서워하는 것과 신뢰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
“그럴까요?”
“그럼. 우리 애들도 교관이 무섭다고 오줌을 지려도, 교관을 믿고 따르지 않소?”
“제가 무섭대요? 아니, 왜?”
“으하하하학! 본인에 대한 평가는 영 모르는구만!”
달튼이 다시 폭소했다.
‘어쨌든 결국, 나의 괜한 걱정이었다는 거로구나.’
약간 헛발질한 느낌인걸.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장단에 어울려 준 카이사르에게도 미안한 기분이었고.
하지만 역시,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의 다정은 결국 나 혼자만의 특권이 됐다. 이렇게 된 것, 마음껏 누려야지.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때, 시종 하나가 방에 들어왔다. 달튼에게 용건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시종은 내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공녀. 공작저에 손님이 와 계시다는 전갈입니다.”
“……손님?”
으으, 또 카이사르를 만날 때 옆에 있어 달라는 겁쟁이 귀족들이신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사르의 다정 독점권은 대가가 너무 귀찮은 듯싶다.
만렙 공녀는 오늘도 무료하다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