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늑대의 주인님 (2)
날 찾아왔다는 손님은 내 예상과 달리 율리카 브란테였다.
영지에 돌아간 그녀가 대체 나를 왜 찾아온 걸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기분을 삼키며 방에 들어서니, 더욱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애, 그렇다면 이 마법은 어떻습니까? 전 이 문장이 분명 오류일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만.”
“전 오류라기보다는 변주의 일종이라 생각했어요. 문법적 오류는 없으니 의도적으로 삽입한 구문일 거라고요.”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정도 마법이면 마력도 상당히 소모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볼테르의 자서전에 기록된 화염 마법과 비슷한 레벨일 거라고요.”
“동의합니다. 하지만 만약 구문을 이렇게 수정한다면…….”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시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실용성에서는 다소…….”
음.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느 대학의 강의실을 잘못 찾아온 것인가.
나는 열었던 문을 다시 조용히 닫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이 다 닫히기 전에, 율리카가 날 발견했다.
“앗, 공녀!”
“이야, 이제 오셨군요!”
율리카에 이어, 그녀와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이던 로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허술해 보이는 웃음을 실실 보이면서.
“이럴 수가! 여기, 내 집이 맞았나요?!”
나는 과장되게 놀란 척을 했다. 율리카가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쓰게 웃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공녀께서 늦으실 것 같기에, 제가 잠시 영애의 말동무가 되어 드린 것뿐입니다.”
말동무 수준이 아니던데.
나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과 종이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로만은 크루세흐의 봉인을 풀려는 노에를 만날 목적으로 수도에 남았다.
돈 없는 가난한 학자인지라, 자연스레 공작저가 그의 거처를 내주어, 현재 공작저에서 기거 중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두 사람, 원래 알던 사이인가요?”
“아뇨, 저도 영애도 오늘 서로를 처음 뵙는 겁니다.”
“이 집에 마법 학자가 있는 것이 신기하여 제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네? 브란테 영애는 로만 씨가 마법 학자인 걸 어떻게 안 거죠?”
“옷차림으로요.”
나는 로만의 투박하고 촌스러운 로드를 흘끗 쳐다봤다.
아, 저렇게 촌스러운 옷을 왜 입고 다니나 했는데, 마법 관련자들의 유니폼 같은 건가?
그러나 율리카는 다음 말로 내 추측을 부정했다.
“마법 관련자들 중에 저런 경악할 만한 패션 센스를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유니폼이 아니라 그냥 센스가 없는 거였구나.
로망이 허허허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야, 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쑥스럽네요.”
……칭찬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라.
“어쨌든 뜻밖이네요. 영애가 날 찾아올 줄은. 영지로 돌아간 것 아니었나요?”
“아……, 네. 돌아갔, 었죠.”
율리카가 내 시선을 피하며 애매한 대답을 했다.
“앞으로는 그냥 ‘율리카’로 불러 주세요. 공녀.”
“네?”
“저, 가문에서 절연당했답니다.”
“네엑?!”
우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아니, 그나저나 그런 얘길 제삼자 앞에서 막 해도 되는 건가?
나는 당황하여 로만을 쳐다봤다. 로만도 뜻밖의 무거운 주제에 다소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율리카는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 놀라실 것 없어요. 뭐, 가문에서 쫓겨나고 버림받고 그런 거, 요즘엔 흔한 일이잖아요?”
흔하지 않아!
요즘은커녕 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게 흔했던 시절은 없었어!
“설마……, 폐하께 파혼당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는 거겠죠. 하지만 그보다도…….”
“……?”
“태황후……, 아니, 마리안느 님을 비호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하셨나 봐요.”
율리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굳이 남 일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하는 것은,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간신히 참기 위해서인 듯했다.
“어떻게 아비라는 작자가 그런……!”
자기 딸에게 불임하라고 독을 먹이던 여자다. 대체 그 여자를 비호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엇……, 음. 두 분 말씀하세요.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째 분위기가 묵직해짐을 깨달은 로만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율리카가 그런 로만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계셔도 되어요. 요즘 사람 만날 일이 없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즐거운걸요.”
로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나한테 도움을 구하듯 눈빛을 보내 봤자…….
“그냥 계세요, 로만 씨.”
내가 말했다. 로만은 탈출에 실패하여, 우울한 미소와 함께 다시 착석했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쉰 후에 율리카에게 물었다.
“그러면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계신 건가요?”
“많지 않긴 해도 제 몫의 재산이 있으니 그 점은 염려 마세요.”
“그래도 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을 텐데요. 친한 영애분들께 도움을 청해 보지 그래요?”
“친한 영애? 누구 말씀이시죠?”
“자주 함께 다니던……, 헥터나 버빙카가의…….”
내 설명에 율리카가 쓰게 웃었다.
“이미 청해 보았어요.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요.”
좋은 답변을 듣지 못한 거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한가.
나는 얼마 전 태도를 바꿔 내게 아부를 떨던 두 영애를 떠올렸다. 율리카를 거부하면 거부했지, 도울 여자들이 아니다.
“하긴, 당연하죠. 저조차 제 인생은 안중에도 없이, 황후의 자리만 바라보며 살아온걸요.”
율리카가 후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도 ‘황후가 될’ 저를 보았을 따름이죠. 그러니 황후가 아닌 저를 거절한다 해도, 나무랄 수 없어요. 자업자득이에요.”
“영애…….”
“집에서 쫓겨났을 때, 여러 이름이 떠올랐지만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런 삶이었던 거예요.”
‘브란테’였던 삶.
‘율리카’는 없던 삶.
“염치없는 줄은 알아요. 그래도 공녀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려 왔어요.”
“저에게?”
“공녀는 ‘브란테’를 싫어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브란테’가 아닌 저에겐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율리카의 눈빛은 간절했다.
말로는 염려 말라 해 놓고선,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한때 적이었던 날 찾아왔겠지.
내가 그녀에게 욕을 하고 물을 뿌려 내쫓는다 해도 아무도 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 정도 각오는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날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걸까.
찾아올 이가, 나밖에 없었나.
“내가 뭘 도와주길 바라나요? 돈이라도 드릴까요?”
“일할 곳을 구해 주세요.”
“……일이요?”
“허드렛일이라도 상관없어요. 여기 공작가에 시종으로 들어오는 것도 괜찮아요.”
황가나 공작가에서는 하급 귀족의 사람을 집사나 시녀장으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백작가는 상급 귀족이다. 아무리 가문과 절연당했다고 해도, 시종을 시킬 수는 없다. 하물며 파혼당했다고 한들, 한때는 황제의 약혼녀가 아니었던가.
분명 다들 그녀를 조롱할 것이다.
“각오는 좋지만……, 못 버틸 거예요. 쉬운 일 아니에요, 남 밑에서 일하는 거.”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고했다.
“하지만 살아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는걸요.”
“조급한 마음은 알겠어요. 그 각오도 알겠고요.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그래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했는지, 율리카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며 고갤 숙였다.
그때 곁에서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만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저어……, 실례합니다만, 제가 잠시 말을 얹어도 되겠습니까.”
나와 율리카가 동시에 로만을 쳐다보았다.
로만이 흡흡 헛기침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실은 길드에서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서를 구하는 중입니다만.”
“……사서요?”
“책을 분류하고 정리해야 하는데,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오래되어 다들 손댈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로만이 쑥스럽게 웃더니 율리카를 쳐다보며 말했다.
“영애께서는 마법적 지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시고……, 아니, 대화를 나눠 보니 오히려 풍부하시더군요.”
“그러면……, 혹시…….”
“네. 괜찮으시다면 저희 길드의 사서로 일해 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율리카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희망을 찾아낸 사람처럼.
“사실 재정이 넉넉한 게 아니라 급여가 높진 않습니다. 일도 굉장히 힘들고요.”
“그런 건 괜찮아요!”
율리카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시원시원한 대답에 로만이 웃었다.
“잘 됐군요. 그러면 제가 리운에 연락을 넣어 두겠습니다. 추천서도 써 드리고요.”
“앗, 그러면 보답은 어떻게……!”
“아하하, 공녀께서 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하시니, 오히려 그 보답으로 제가 도와 드리는 거죠.”
로만이 쑥스러워하며 뺨을 긁적거렸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로만에게 따졌다.
“아니, 잠깐만요. 왜 저에게 받은 은혜를 브란테 영애한테 베푸시는 거죠?”
“에헤이.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나한테 좋은 건 대체 뭐냐고!
‘뭐……, 찝찝한 마음을 덜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기뻐하는 율리카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율리카는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 공작저를 떠났다.
나는 율리카에게 마차를 내어 줬다. 율리카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어쩐지 그녀를 박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란히 회랑을 걸으며, 율리카는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욕 얻어먹을 각오로 찾아온 거예요.”
“그렇겠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 솔직히 좀 뻔뻔하잖아요.”
“후후……, 그렇죠.”
내 냉정한 대답에 율리카가 자조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공녀라면, 날 욕하더라도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죠? 내가 영애를 동정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뇨. 공녀는 올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인 걸 알기 때문이에요.”
나는 의외의 대답에 율리카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아닌 정면을 응시한 채였다.
그녀가 굳이 눈을 마주쳐 오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감탄하고 있긴 해요.”
“뭘 말이죠?”
“영애가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요. 난, 그런 일엔 서툴거든요.”
아주 오랫동안, 나는 타인에게 마음을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조금씩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는 법을 배워 가고 있지만, 역시 아직 서툴기만 하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애쓰는 게 더 익숙하고 편했다.
도움을 구하는 일에도 정말 많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그런가요. 이상한 부분에서 약한 분이셨군요.”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율리카에게 준비해 둔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요.”
“이게 뭐죠?”
“찻잎이에요. 영애도 이 가게, 자주 갔었죠? 마침 사 둔 게 있었거든요.”
율리카가 다소 어리벙벙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종이 꾸러미 안에 든 틴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틴 케이스 겉면에는 한정판에만 붙어 있는 실링과 더불어, 찻잎의 이름이 금박으로 적혀 있었다.
“아, 독은 안 들었으니 걱정 마요.”
내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율리카가 오묘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음, 이 농담은 별로 안 좋았던 걸지도.
“왜 하필……, 차인가요?”
율리카의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당신은 귀족 영애니까요.”
차는 사치품이다.
특히 고급 찻잎은 때로 가문의 품위나 안목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브란테에서 버려졌다. 귀족의 가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더는 귀족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애는 여전히 강하고 훌륭한 귀족 영애예요. 자신의 명예를 높일 줄 알잖아요?”
“아……, 그……, 고, 고마워요.”
율리카가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도, 차마 참지 못한 굵은 눈물이 툭툭 떨어뜨렸다.
율리카는 틴 케이스를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 제 이마에 갖다 댄 채 울었다.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흐느낌뿐이던 울음은 이윽고 공기를 흔들며 소리에 먹혔다.
괜찮아.
너는 올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곁에서 기다려 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말없이.
S7. 마리안느 발레르의 사의 찬미
밖이 소란했던지라, 마리안느는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고 창가에 다가가 섰다.
아직 여명도 밝지 않았는데 마차 한 대가 입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한 필 말이 끄는 작은 마차로, 깃발이나 화려한 문양 없이 온통 검은색이었다. 허리를 숙여야 지날 수 있는 작은 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다.
곧 노크와 함께 시종 둘이 방에 들어왔다.
마리안느는 얼굴 한가득 경멸의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둘에게 말했다.
“감히 저따위 것에 나를 태워 데려가겠다 이 말인가. 진정 폐하께서 그리하라 하셨단 말이냐.”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종들은 마리안느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눈조차 맞추지 않았다.
커튼을 콱 틀어쥔 마리안느가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혀가 잘렸느냐? 왜 아무도 답을 못해!”
벼락같은 마리안느의 분노에 시종들이 흠칫한다.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그래도 한때는 황제를 쥐고 흔들고 황태자와 알력을 다투던 권력자였다.
그 독기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사람이다.
“괜히 아랫사람 겁주지 마시지요. 누가 죄인과 엮이고 싶어 하겠습니까.”
악을 쓰던 마리안느는 남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방 입구에서 흉흉한 붉은 눈동자의 사내가 고압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폐하가 아니십니까. 자랑스러운 우리 폐하.”
마리안느의 입가가 귀에 걸릴 정도로 길게 찢어졌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표독스럽게 카이사르를 향한 채였다.
마치 먹잇감이 빈틈을 보이길 주시하는 매와 같이.
카이사르 역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 알현 요청을 드렸는데 이제야 찾아오시다니. 어미에게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더 나눌 이야기가 무엇이 있다고.”
“왜 없겠습니까? 악연은 악연대로 할 이야기가 많은 법이지요.”
카이사르는 여전히 선량한 미소로 비아냥대는 마리안느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사르는 손짓으로 시종을 모두 내보낸 후 방 한가운데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마리안느도 자연스레 그 맞은편에 와 앉으며 살살 꼬드기듯 카이사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이번 일은 내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발레르 공작에게 휘둘렸을 따름입니다. 브란테 영애와 다를 바 없지요.”
“하, 휘둘렸다? 당신이?”
“한낱 계집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외친들의 욕심에 이용당한 희생양에 불과하죠.”
마리안느가 의자에서 스르륵 내려오더니 카이사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차라리 경멸하는 시선이라도 보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는 깨끗한 무표정이었다.
마리안느를 향한 분노도 혐오도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 아직 어리고 가엾은 당신의 동생을 생각해 보세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가 어미 없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지금껏 제 어미의 치마폭에 싸여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 홀로서기도 할 줄 알아야지요.”
카이사르가 마리안느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너무 무른 인간인지라, 프란은 제 어미의 죄에도 불구하고 사가에서 대접받으며 잘살 테니 염려 놓으시지요.”
그래, 죽을 때까지 대접받으며 잘살겠지.
어쨌든 큰 집에서 시종 거느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시종들에게도 푸대접받게 될 것이고, 사교계에 함부로 나설 수도 없을 것이고, 당연히 혼인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적어도 카이사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동안은 말이다.
“사가라니……, 황성에서 내쫓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수순입니다. 아니, 진작 그리 했어야 할 수순이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어미에게 자식이란 그런 존재로군요. 참으로 애틋하여 눈물이 다 납니다.”
“이제는 비호해 줄 이 하나 없는데, 꼭 그리해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마리안느가 분노에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는 게, 카이사르는 짐짓 놀라웠다.
“공녀가 그리하라 하였습니까? 그 약아빠진 계집이 폐하를 멋대로 쥐고 흔드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헬레나 페레스카.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예상했었는데.
적이 되면 반드시 성가신 존재가 되리라 생각했다. 돈으로도 명예로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심지가 내내 거슬렸다.
하여, 다소 비겁한 수를 쓰면서까지 그녀를 궁지로 몰았다. 패배해 본 적 없을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게 겁을 줬다.
겁을 줬다……, 고 생각했는데.
“제가 죽을 만큼 싫으시겠지요. 그러나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그 계집은 저와 같은 종류의 인간입니다.”
“헛소리.”
“그 계집, 보통이 아닙니다. 장담컨대, 폐하는 그 계집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리실 겁니다.”
마리안느가 악담을 퍼부어 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당신이 선황께 하였듯 말입니까?”
움찔. 마리안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 침실에 암살자가 찾아온 것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갑자기 왜 그런……?”
“기억, 하십니까?”
카이사르가 단호하게 물었다.
설마 과거에 있었던 일까지 덮어씌울 작정인 건가.
그러나 무슨 수로 그리하겠는가. 그때도 증거가 없어 자신에게 죄를 묻지 못했다. 이제 와 자신에게 죄를 물을 이유가 없었다.
마리안느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알아야지. 당신은.”
“너무 오래된 일입니다. 제가 암살자를 보낸 것도 아닌데, 어찌 그것을 기억하겠습니까?”
“기억해야지. 어머니라면.”
카이사르가 무섭게 다그쳐 말했다. 예상치 못한 질책에 마리안느는 말문이 막혔다.
카이사르는 몸을 숙여 마리안느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들었다.
주저앉은 마리안느를 온통 그의 그림자가 덮었다.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저 내가 겁먹고 후계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주길 바랐을 거야. 안 그런가?”
그의 말이 옳다.
그랬었다.
실제로, 거의 성공했다고 확신도 했다.
카이사르의 친모가 죽었을 때, 그는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거라 멋대로 추측하고 겁에 질렸었다. 애써 강한 척하는 것조차 우습기 그지없었다.
“궁금하지 않나? 그때, 당신 손에 살해당할까 봐 벌벌 떨던 하룻강아지가, 어떻게 송곳니를 가진 늑대가 되어 돌아왔는지.”
그래, 궁금했다.
내내 궁금했었다.
그저 여름 한 계절, 그 짧은 시간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공녀가……, 헬레나가 도망치지 말라 말해 주었거든.”
헬레나의 이름을 말할 때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퍼지는 것을, 마리안느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그대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하였는가. 아니, 그녀는 그대와 다르다. 단 하나도 같지 않아.”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대는 날 죽이지만, 그녀는 나를 살린다. 그대 따위와 같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의심도, 의문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맹종.
마리안느는 그의 등 뒤에 헬레나가 서서 자신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환시마저 보았다.
네가 진 거야.
자신을 향해 그렇게 읊조리는 환상을.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은가.”
마리안느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환상을 향하여 말했다.
그러나 환상은 말이 없다. 그저 싸늘한 경멸과 동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
아아, 그래. 동정.
패배자를 향한 그녀의 동정 어린 시선이, 마리안느는 못 견디게 끔찍했다.
“내가, 이대로 질 것 같은가!”
핏발 선 마리안느의 눈이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 마리안느가!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다!”
“견딜 수 없다 한들 당신이 뭘 할 수 있지?”
카이사르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황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후회하며 죽어 가는 것 외에는.”
마리안느 발레르를 위한 축제는 이제 끝났다.
“악착같이 살아남도록. 홀로 오래오래 죽어 가라고 살려 준 것이니.”
카이사르의 그 말이, 마리안느에게는 죽으라는 말보다도 더 잔인하게 들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방을 나갔다. 더는 볼 일 없다는 듯,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 * *
며칠 밤낮을 달려 마차가 도착한 곳은 북단의 작은 저택이었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건물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정원이라고는 메마른 땅 약간이 전부였다. 불을 아무리 때어도 방은 따뜻해지질 않았다.
더구나 산 중턱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지라, 주변에 인가가 하나도 없었다. 밤이면 밖은 칠흑같이 어두운 데다, 때때로 산짐승들이 저택 울타리를 넘어와 그르렁댔다.
“이딴 곳에서는 1년도 살 수 없어……!”
마리안느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됐다.
“미에라! 미에라!”
마리안느가 함께 온 몸종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미에라는 한참이 지나서야 미적미적 등장했다. 주인을 향한 존경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재수가 없으려니 자신까지 덩달아 유배 오게 됐다고 생각할 테니.
“누군가 온다는 소식은 없느냐? 편지라도 한 통 오지 않았느냐?”
“없습니다, 안느 님. 누가 무슨 득이 있어 이런 깡촌까지 오겠습니까?”
미에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프란은? 프란이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 전하는 이도 없느냐?”
“괜한 걱정 하십니다. 아무렴, 안느 님보다야 편하게 지내시겠죠.”
“넌 일을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것이냐?! 어째 대답이 다 건성이야!”
“아휴, 진정하세요. 제가 일 건성으로 하면 안느 님은 지금쯤 쫄쫄 굶으셔야 해요.”
미에라가 어린애 어르듯 마리안느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 태도에 마리안느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모두가 벌벌 떨며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에게 아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젠 한낱 시녀마저도 자신을 우습게 알다니.
맥이 탁 풀린다.
결국 자신이 지금껏 쌓아 올린 것은 다 무엇이었던가.
“아니다. 아니야.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기회가 올 거야.”
마리안느는 발발 떨며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그녀의 핏발 선 시야를 가렸다.
“그 기회, 겨울 오기 전에 왔으면 좋겠네요. 초여름에도 이리 추운데, 겨울 되면 저희 다 얼어 죽을 판입니다.”
미에라가 비아냥댔다.
미에라는 그녀가 말하는 ‘기회’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제 주인도 얼른 포기하고 이곳에서의 삶에 적응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해는 안 가도, 동정은 하니까.
‘아마 겨울이 오기 전에 미쳐 버릴걸, 이 여자.’
주인에게 품을 만한 생각치고는 꽤나 불손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는다고 나무랄 이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말에 적극 동의할 게 분명하다.
‘이미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미에라가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는 마리안느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텅 빈 동공에는 허무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게다. 얼마 못 가 완전히 돌아 버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서려던 미에라는, 문을 열기 직전 막 떠오른 사실에 걸음을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손님이 찾아오긴 했었습니다. 주무신다 하였더니 내일 다시 온다 하던데요.”
“손님? 손님이라 했느냐?”
퍼뜩, 마리안느가 고갤 들어 미에라를 쳐다보았다.
꺼진 희망에 다시 불이 켜진 듯,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누구? 누가 다녀간 것이냐? 어느 가문이었느냐?”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아니라고?”
마리안느가 실망한 낯빛이 됐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미에라는 기억을 더듬으려 허공에 시선을 보냈다.
어제 찾아왔던 남자.
금발에, 어딘가 신뢰가 가지 않는 유약하고도 비리비리한 생김새.
남자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었다. 미에라는 기억을 더듬어, 드디어 그 이상한 손님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엇, 그러니까 이름이……, ‘노에’라고 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