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15/156)

14.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여름은 짙은 초록으로 색을 갈아입는 정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황가의 업무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나는 카이사르와 자주 정원을 거닐었다.

“율리카 브란테가 공작저에 다녀갔다던데.”

“그걸 폐하께서 어떻게 아시는 거죠?”

“어디든 내 눈과 귀가 있지.”

“스토커 같아.”

내가 인상을 찌푸렸더니 카이사르가 ‘파핫’ 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카 브란테가 가문에서 쫓겨난 거, 알고 계셨나요?”

“음……, 금시초문인데.”

“변경백도 참 너무한 것 같아요.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하나뿐인 딸인데.”

“글쎄. 아마도 율리카 브란테가 정말 집을 나가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건 아닐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카이사르가 가볍게 웃으며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집에서 쫓아내 봐야 갈 곳도 없으니, 잘못했다고 싹싹 빌며 다시 자신의 말 잘 듣는 딸이 될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하긴……, 예전의 율리카라면 그랬을지도요.”

부모가 정해 준 삶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던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르다. 지금의 율리카는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훨씬 더 큰 책임과 두려움이 있다 해도.

“그래서 율리카 브란테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마법 길드의 사서로 일하기로 했어요. 지금쯤이면 리운에 당도했겠죠.”

“마법 길드? 헬레나가 그런 곳과 어찌 연이 닿아서?”

“전에 아고트를 보내 ‘노에 라벨’에 대해 조사하라 시켰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일로 알게 된 사람이 있어서.”

“흐음. 남자인가?”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부터 묻는 건가. 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이사르를 째려보았다.

“남자입니다만.”

“……질투하는 모습은 꼴사나울 테니, 더 묻지는 않겠다.”

“참고로 지금 공작저에 있답니다.”

“좋아. 이젠 그자를 없애 버려도 정당한 명분이 생긴 거로군.”

“진정하세요, 폐하.”

카이사르가 검을 뽑으려 들기에, 나도 냉큼 드레스 위에 패용한 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나의 반응에 카이사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땐 날 붙잡아서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같이 검을 뽑아 들 생각을 하지?”

“검은 검으로 막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대의 검 패용을 허락하지 말 걸 그랬어.”

카이사르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나는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작게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흐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멀리 떨어져 따라오던 시종들이 나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고갤 숙였다.

음. 어쩐지 내일쯤 황성 내에 ‘폐하와 공녀는 사랑싸움도 일단 검부터 뽑아 들더라.’ 하는 소문이 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어쨌든, 그자는 그만 내보내도록 해.”

카이사르의 말에, 그제야 흐트러져 있던 내 정신이 그에게로 다시 집중됐다.

“갈 곳이 없다던데요.”

“머물 곳이라면 해밀턴을 시켜 마련해 두라 하겠어.”

“설마 정말로 질투하세요?”

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다소 놀리는 투의 내 말에 카이사르가 ‘큭’ 하고 신음을 뱉었다. 귀 끝이 빨개진다.

우아, 뭐야 이거. 아직도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려는 거지? 잡아먹어 버리고 싶네, 진짜.

“약혼녀의 집에 외간 남자가 있는 것을 눈감아 줄 남자가 어디 있지?”

“하지만 요즘 전 거의 황성에서 생활하는걸요.”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카이사르의 손을 잡았다. 카이사르가 움찔 놀라 날 쳐다보았다.

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전 그 남자보다 폐하와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어요.”

그쵸? 하고 고갤 갸우뚱하며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았더니, 카이사르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맙소사. 그런 말은 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이지?”

“어쩌시게요?”

“그자를 크게 칭찬해 주려고.”

카이사르가 마주 잡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웃었다.

좋아, 삐친 게 풀린 모양이군. 단순한 녀석.

우리의 분위기가 다시 평화롭게 바뀌니, 멀리 떨어져 뒤따르던 시종들도 얼굴이 폈다.

“하아. 안 되겠어. 얼른 결혼식 날짜를 잡아야지.”

카이사르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맞다. 아직 결혼식 안 올렸지, 우리 둘.

내 탄식에 카이사르가 한쪽 눈썹을 으쓱하며 날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음……, 폐하. 결혼식 말인데요.”

“기각하겠다.”

“엇.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만.”

“헬레나가 그런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늘일 땐, 내게 탐탁지 않은 부탁을 하려 할 때니까.”

“윽.”

하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결혼식은 좀 더 천천히 올렸으면 합니다, 폐하.”

“두 번 말하게 하는군. 기각하겠다.”

“이유도 듣지 않으시고?”

“드라코교의 일이 신경 쓰여서 그런 것 아닌가?”

“……하아. 폐하는 못 속이겠네요.”

맞다. 악룡 크루세흐에 대한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용과 이미 싸워 보았다. 그래서 잘 안다. 그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그런 큰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그와 결혼하는 건 어쩐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황후가 된 후에도 헬레나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생각은 없어. 날 믿지 못하는 건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무슨 일이 생기고 나면 결혼한 후엔 늦지 않나 싶어서.”

“아니지. 그 반대야.”

카이사르가 걸음을 멈춰서, 그와 손을 잡고 있던 나도 몇 걸음 나아가 멈춰 서야 했다.

뒤를 돌아본 나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문득 내가 실수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크루세흐에 대한 일이 해결되면 불안한 일이 또 없을까?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어디에도 없어, 헬레나.”

카이사르의 조근조근한 목소리에 어쩐지 나도 서글퍼지는 기분이 든다.

“그대는 내게 아직도 감추고 있는 것이 있지. 난 불안하지만 그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적어도 그대는, 내 불안을 위하여 나의 반려가 되겠다는 맹세는 해 주어야지.”

……그렇구나.

나는 카이사르에게 내 전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왜 크루세흐에게 집착하는지, 크루세흐의 부활에 내가 왜 관련이 있는지.

내가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내게 묻지 않았다. 내가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말없이 믿어 주었다.

‘그렇구나. 넌 그렇게 불안을 삼키며 날 믿어 주었는데, 나는.’

내가 몹쓸 짓 했구나.

“……알겠어요.”

나는 카이사르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결혼식은 폐하의 의견에 따를게요. 저, 어디 안 가요, 폐하.”

카이사르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붉은 눈동자 위로 안도감이 얇게 퍼지는 게 보였다.

곧 그는 나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었다. 그 커다란 늑대의 어리광에, 나는 작게 웃었다.

* * *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아니,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착착 진행되어 있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엄청난 양의 선물을 가지고 폐하께서 직접 영지로 찾아오셨지 뭐겠니.”

어느 주말, 모처럼 수도에 올라오신 어머니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말씀하셨다.

그 소녀 같은 표정에 안심이 되는 한편, 나 몰래 영지까지 다녀온 카이사르의 물밑 작업에 뜨악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좀 쉬란 말이야, 일벌레야!

“선물만 보내셔도 됐을 텐데 말이야. 심지어 나와 함께 쇼핑에까지 동행해 주셨단다.”

“……엥?”

“엥, 이 아니야. 자식이 둘이나 있어도 엄마랑 데이트 한 번 안 나가 줬는데 말이지.”

윽. 미안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나는 쓰게 웃으며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만사 귀찮은 내가 쇼핑을 좋아할 리도 없고, 부모와의 정도 몰랐던 전생의 기억 탓에 그런 배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나마 그런 살가운 일은 레너드가 도맡아 해 왔었다만, 레너드도 학교에 들어간 후엔 계속 바빴고.

“마치 막내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단다.”

“어휴, 폐하의 그 덩치에 딸은 아니죠. 징그러워라.”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얼굴도 잘생겼지, 매너도 좋지, 왜 다들 그분을 ‘늑대’라 부르는지 모르겠더라.”

카이사르. 엄마에게는 생글생글 웃으며 최선을 다했던 모양이구나.

“더구나 잘생긴 기사들이 호위를 해 주지 뭐겠니?”

“잘생긴?”

내가 기억하기로, 친위대에 잘생긴 사람은 레너드밖에 없을 텐데?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었어. 절도 있고 멋있더라.”

어머니의 그 설명에 비로소 나는 납득했다.

친위대가 아니라 얼굴만 보고 뽑는다는 기사단의 얼굴마담, 흑기사단을 데려갔었구나.

왜지. 어머니에게 꽃미남들의 호위를 받으며 데이트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 드리고 싶었던 건가.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인 것 같긴 하다만.

“엄마는 그런 사위라면 적극 찬성이야. 네 아버지는 여전히 걱정이 많으신 것 같지만.”

“그런가요?”

“어쨌든 황후가 되는 거잖니. 무거운 자리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아, 내가 고생할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 마음이 찡해진다.

“네 귀찮아하는 성격을 아시니, 맡은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시는 걸 거야, 분명…….”

“……두 분 기억 속의 저는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군요.”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쩐지 창피함이 밀려왔다.

그래, 내가 그동안 정말 게으르게 살긴 했지. 숨만 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결국 이렇게 부지런하다 못해 열혈인 인생을 살게 될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적당히 귀찮아할걸.

절망하는 내 곁에 어머니가 의자를 끌어당겨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헬레나. 그나저나 너는 어떤 거니?”

“……네?”

“우리 집 남자들은 의외로 섬세하지 못한 구석이 있잖니. 분명 네게 제대로 묻지도 않고 일을 밀어붙이고 있겠지. 넌 어떠니? 정말 그분을 사랑해서 하는 선택인 게 맞는 거니?”

어머니가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질문했다.

황가와의 결혼은 정치다. 아마 어떤 귀족들은, 페레스카가 발레르와 같은 권력을 쥐기 위해 황가와 사돈을 맺는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국혼을 무를 수도 없잖아요.”

“왜 없니? 네가 싫다면 엄마는 반대할 거야.”

“폐하가 막내딸 같아서 좋으셨다면서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머니는 실로 진지했다.

내가 싫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서든 국혼을 파투 낼 각오인 듯했다.

나는 문득, 내가 이런 부모를 가져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제 편이 되어 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했다.

“살가운 딸도 아니었잖아요. 자기 멋대로고, 저 혼자 잘난 딸이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계속 제 편이 되어 주실 수 있으세요?”

내가 만약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모든 부모는 이렇게 조건 없이 자식을 사랑해 주는 존재구나 하고 의심 없이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들에게 좀 더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이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내 바보 같은 질문에, 어머니가 날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야 넌, 내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이니까.”

그 대답에, 나는 결국 어머니를 끌어안고 그 품에 기댔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어머니에게 이렇게 안겨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좀 더 어리광 부릴 걸 그랬다.

좀 더 안아 달라고 할걸.

좀 더, 믿을걸.

“저, 폐하를 좋아해요. 진심으로 좋아해요. 곁에서 그 사람을 지켜 주고 싶어요.”

“그랬구나. 그렇다면 엄마도 안심이야.”

어머니는 드물게 먼저 품에 안긴 날 대하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안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의연하고 그렇게 따뜻했다.

“황성에 가게 되더라도, 넌 내 하나뿐인 딸이란다, 헬레나.”

“응. 알아요……, 엄마.”

이제는, 안다.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왜 다시 태어났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의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하고 싶어질 만큼.

* * *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면서, 황성의 분위기도 공작저의 분위기도 묘하게 들떴다.

특히 공작저는 작년의 암울했던 일을 겪은 후라 그런지, 더욱 들뜬 분위기였다.

로위나는 나흘에 한 번 공작저에 찾아와 나를 닦달했다. 왜 나흘에 한 번인가 하면, 이틀에 한 번은 이미 황성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매일 드레스를 입고, 재단하고, 보석을 고르고, 치장하고, 들어온 선물을 확인하고, 답장을 쓰고, 파티 참가자 명단을 외우고, 식순을 암기하고…….

“결혼은 무덤이야……!”

나는 선조들이 남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늦은 밤, 로위나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황후궁의 침실에 당도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불을 켜거나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대뜸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정말이지 결혼은 다시 고려해 볼 거야……!”

인생을 세 번이나 살게 되는 것부터 고려해 보고 싶지만!

“그래? 그럼 다음 생애는 느긋하게 기다려 줘야겠군.”

“……카이사, 폐, 폐하?!”

뭐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의 한쪽 벽, 어두운 그늘에 숨어 카이사르가 서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서, 나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로위나에게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지?”

“우으……, 제발 로위나 좀 데려가 주세요, 폐하……!”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우는 소리를 냈다.

카이사르가 침대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 벌려서, 나와 굳이 눈을 마주쳤다.

“저런, 우리 스승님께서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군.”

“성혼 선서 암기가 끝나기 전까지 내보내 주질 않았다고요! 얼마나 귀찮은지……!”

내 투덜거림에 카이사르가 날 끌어안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후우, 그래도 이 남자가 위로해 주니 마음이 풀리네.

“그래, 그래. 로위나가 일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위로가 아니잖아?!

나는 카이사르를 밀어내며 화를 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지. 화가 나면 한 대 쳐도 좋아.”

카이사르가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검은 앞머리가, 천진한 척 빛을 내는 붉은 눈동자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나는 주먹 쥔 손을 떨다가 결국 ‘크윽’ 하고 신음했다.

“왜 이렇게 잘생긴 거예요?! 때릴 데가 없잖아!”

“물론 헬레나 보기 좋으라고 잘생겼지.”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만하게 웃었다.

자신이 잘생긴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간의 눈빛이다. 얄미운 자식……!

“하아……, 내가 이런 사람과 결혼하는 거구나…….”

털썩, 나는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중얼거렸다.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날 위에서 내려다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뭐, 사실 꼭 결혼이 아니어도 평생 곁에 있을 방법은 많이 있기는 하지.”

“어떤 거죠?”

“내 친위기사가 된다든가.”

“오……, 혹하네요.”

그러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난 굳이 카이사르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빤히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카이사르 역시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역시……, 폐하와 결혼하고 싶어요.”

한참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내가 대답했다.

“그래?”

“결혼이라는 건 말하자면 선전 포고 같은 거잖아요? 이 남자는 내 거니까, 건드리지 마라.”

“흐음. 그런 해석도 가능하군. 하지만 황후가 못 되면 황비라도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카이사르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흐응, 지금 내가 결혼해 주겠다는데, 다른 여자를 들이시겠다?”

내가 비꼬듯 말했더니, 카이사르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 독점욕이 높아요, 폐하.”

“그것참 다행이야. 모든 게 다 귀찮은 헬레나가, 날 독점하고 싶어 한다는 게.”

카이사르가 몸을 숙여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지척에 닿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호흡이 닿아서, 그저 서로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격렬하게 키스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헬레나가 무언가 간절히 욕망하는 게 나라서 영광이야.”

카이사르가 말했다.

진심으로 감격한 듯.

그동안의 나는 모든 게 귀찮고 뭘 해도 시시한, 그런 사람이었다.

당연히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 본 적도 없고, 욕심내 본 적도 없다.

“앞으로 좀 더 욕심내도 좋아, 헬레나. 더 원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내가 너에게 가져다줄 테니까.”

“이 세계도?”

“물론, 이 세계도.”

카이사르가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나는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꽤 진지했다.

“말했을 텐데?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이 세계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이 남자, 참 큰일이네.

나밖에 몰라서.

“세계는 필요 없어요, 폐하.”

난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누려 보았다.

“폐하만 전부 주시면 돼요.”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나는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네 것이었어.”

카이사르가 장난스레 웃으며 내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건 얼마나 아득하고 오래된 언어인가.

나는, 영혼에 새겨진 비밀을 엿들은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이 들었다.

* * *

결혼식을 일주일 남긴 어느 날, 나는 레너드의 출장 소식을 듣게 됐다.

“할슈타르로 출장?”

너무나 담담하게 출장에 대해 설명하는 레너드 때문에 내가 두 배로 더 놀랐다. 하마터면 읽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할슈타르면 북동쪽에 있는 광산 도시잖아?”

“맞아. 그나저나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친위기사를 출장 보내는 경우가 어디 있어? 곁에 항상 두어야 해서 친위기사 아니냐고?”

“그러게나 말이에요.”

다과를 차리던 아고트까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레너드가 내 분노에 난감한 듯 웃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카이사르에게 찾아가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싸움이라도 걸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드라코교에 대한 조사차 가는 거야.”

“드라코교? ……서, 설마, 본거지를 찾은 거야?!”

“이번엔 거의 확실하다는 정보가 있어서 내가 직접 가 보려고 해.”

레너드는 자진해서 드라코교에 대한 조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다.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드라코교에 대한 정보라면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금, 이때인가.

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저기, 그러면 나도 같이…….”

“안 돼. 결혼식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거절당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레너드는 단호하게 한 손을 들어, 내 말을 잘랐다.

“일주일 전에 신부 오라버니를 출장 보내는 악덕 상사가 대체 누구야?”

“너의 부군?”

“때려 줄까?”

“진정해. 지금은 반역죄에 걸려, 그거.”

레너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어휴, 진짜. 아직도 이렇게 사람이 착해서 어떻게 하면 좋담, 우리 오라버니.

“정보를 확인하러 가는 것뿐이니까 위험한 일은 없어. 닷새면 넉넉하게 다녀올 수 있고.”

“그래도…….”

“더구나 적기사단에서 같이 가 주기로 했고 말이야.”

“음, 그건 다행이긴 한데…….”

노에 그 인간이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는 마당에, 오라버니만 가도 괜찮은 걸까?

차라리 내가 가서, 뭔가 불길한 조짐이 보이면 내 손으로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게…….

“떽.”

“……아야?!”

딱, 하고 레너드가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때렸다.

때렸다고는 해도 아프게 때린 건 아니었다. 다만 레너드에게 맞아 본 건 처음이라,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내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어안이 벙벙하게 레너드를 쳐다보자, 레너드가 미안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저런, 아팠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헬레나. 또 혼자 해결해 버릴 생각이었지?”

“……아.”

저런. 또 나쁜 습관이 나왔던가.

“이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좀 믿어 줘도 괜찮아, 헬레나. 나도 있고, 아고트도 있잖아.”

“마, 맞아요, 아가씨! 적기사단 사람들도 있고요!”

아고트가 주먹을 꽉 쥐고 흔들며 레너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네 제자들은 이제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약하지 않잖아.”

레너드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오라버니의 미소라서, 나는 내가 품었던 오기가 조금 민망해졌다.

맞다. 이제 내 제자들은 충분히 강해졌다. 내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발전하고 더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아가씨. 정 염려가 되시면 제가 도련님과 같이 다녀와도 될까요?”

“……아고트가?”

“전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검을 배운걸요.”

불과 얼마 전에 내 심부름으로 리운까지 다녀왔으면서도, 아고트는 다시 먼 길을 다녀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를 위하여 레너드도 아고트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믿어 주지 않으면…….’

나는, 스승님이니까.

내 제자들의 결정을 믿어 주지 않으면 안 돼.

“……알겠어. 그럼 두 사람에게 부탁할게.”

내가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다소 긴장하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믿을 수 있다. 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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