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카이사르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숨기는 줄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날 믿기 때문에, 묻지 않겠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끝내 솔직하지 못한 거겠지.
날 꺼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전생의 나였다면 누구에게든 당연히 품었을, 그런 의심.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단테 레나투스와는 다르다.
‘……말해야 해.’
나 역시 그를 믿는다.
전부 믿는다.
그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시지?”
레너드와 아고트가 할슈타르로 떠난 날의 아침, 그 둘을 배웅하고 돌아온 나는 곧장 시녀장인 셀즈를 호출했다.
“3시간 전에 남쪽 정원에서 기병장인 가르말 공작과 독대하신 것으로 압니다.”
“아직도 거기 계실까?”
“사람을 보내 알아볼까요?”
“그래 줘. ……아니, 됐어. 내가 직접 가겠어.”
“이미 자리를 파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곳으로 찾으러 가 보면 되지. 생각할 겸 좀 걷고 싶으니, 괜찮아.”
“그러면 제가 모실까요?”
“아니, 혼자 걷겠다.”
따르겠다는 시녀장을 거절하고 나는 홀로 별채를 나섰다. 아고트도 출장 동행 문제로 레너드와 자리를 뜬지라, 정말 오롯이 나 혼자였다.
‘좋아. 말하자.’
카이사르에게 말해야지. 내가 단테 레나투스와 동일 인물이라고.
결심했을 때 말하지 않으면 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즉시 카이사르를 찾아 나섰다.
걷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막상 오랫동안 숨겨 왔던 진실을 털어놓으려니 떨리고 긴장됐다.
‘용 잡으러 갈 때도 이렇게 안 떨렸는데.’
그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일 줄은 몰랐다.
나는 긴장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하아, 심장이 엄청 뛰어.”
별채를 나와 정원에 진입했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오고, 온몸에 털이 바짝 섰다.
쿵, 쾅, 쿵, 쾅. 심장 뛰는 소리가 관자놀이에서 들렸다.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긴장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떨리는 것만 같다.
아니.
‘긴장 때문인 게……, 맞는 건가?’
문자 그대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가슴이……, 뻐근해.’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순간.
“……!”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격통이 심장에 꽂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온몸의 신경이 전부 끊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시야가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이윽고 눈앞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
아프다.
너무 아파.
“공녀!”
“여기 누구, 사람을 불러 줘요!”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어지럽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었다.
‘시끄러워…….’
다행히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의 소음은 오래가진 않았다.
이내 내 의식이 완전히 꺼져 버렸으므로.
* * *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여긴 너무 비좁아.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어.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여기서 나가야만 해.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텅 비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는데.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도 없었다.
응?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여기에 내가 없다니, 그런 건 역시 이상하다. 모순되어 있다. 정상이 아니다.
그럴 것이 ‘이것’은.
나잖아.
* * *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천장이 붉게 물들어 있어, 늦은 오후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개를 틀어 창가 쪽을 바라보니, 역시 열린 창문을 통해 노을빛이 넘칠 정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앞, 카이사르가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역광이라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단정한 실루엣과 종이가 사각거리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방 안을 느리게 부유하는 먼지와 일렁이는 노을.
묘하게 비현실적이다.
문밖의 세계와 시간이 어긋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
“……쓸데없이 잘생겨 가지고는.”
그를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돌아누우며 내가 중얼거렸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카이사르가 눈동자를 움직여 내 쪽을 쳐다보았다.
“깼군.”
“좋은 아침이에요, 폐하.”
“지금은 저녁이야.”
내 농담에 카이사르가 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몸은 어때? 어디 아픈 데는?”
“음……, 나른한 거 빼고는 괜찮아요.”
“쓰러졌을 때의 기억은 나?”
“쓰러졌을 때 말이죠…….”
베개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잠시 그때를 회상해 보았다.
“왼쪽 가슴에서 격통을 느꼈어요. 한순간이었지만요. 꼭 누가 심장을 꽉 쥐는 것처럼…….”
“그런가. 의사 소견으로는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던데.”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아, 한 손을 가슴 중앙에 대 보았다.
심장의 고동이 희미하게나마 손바닥 전체를 통해 전해져 왔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강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느낌으로.
“아마……, 몸의 문제가 아니지 싶어요.”
“몸의 문제가 아니다?”
카이사르가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는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더니 무언가를 접기 시작했다.
“다른 짐작 가는 이유가 있는 거로군. 그게 뭐지?”
뭘 접는 거야.
나는 분주한 카이사르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화를 이어 갔다.
“말해도 못 믿으실 것 같긴 한데.”
단테의 심장에 봉인되어 있는 크루세흐와, 내 심장의 격통.
크루세흐의 부활을 위해 날 환생시킨 노에 라벨.
‘이걸 설명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가던 길이었는데.’
낮은 한숨과 함께, 나는 한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때 내 결심은 확고했는데, 막상 시간이 좀 흐른 데다 카이사르를 눈앞에 두고 보니, 다시 망설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카이사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추측하는 바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볼 텐가?”
“……그게 뭐죠?”
“헬레나는 단테 레나투스의 심장에 크루세흐가 봉인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 황가에서도 모르는 진실을 말이야.”
“그랬……, 죠.”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본인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인정했고.”
“그, 그랬던가요? 제가?”
“배운 적도 없는데 어릴 때부터 고도의 검술을 구사하고, 에레즈 황제의 저택 비밀 통로를 알고 있고.”
으음. 이렇게 모아서 듣고 보니, 그사이 어마어마하게 단서를 흘리고 다녔구나.
나는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 됐다.
“그래서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긴 했어. 너무 터무니없어서 깊이 고민하진 않았지. 그렇지만 용도 부활하니 마니 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뭐 그리 터무니없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더군.”
“뭘……, 까요, 그게?”
뭐야, 이 불길한 예감은.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카이사르가 정답을 외쳐 버릴 것 같은 이 기분은 뭐냔 말이지.
그사이 카이사르는 종이를 접어 삼각형 모양의 날개를 가진 새를 완성했다.
“헬레나 페레스카는 단테 레나투스가 부활한 존재다, 라는 것?”
휘익.
종이 새가 날 향해 날아와, 내 다리 위에 살포시 착륙했다.
“정답인가?”
카이사르가 짓궂은 소년같이 미소 지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여자는, 사실 레나투스의 마지막 황제였던 것인가?”
카이사르는 지금 어떤 기분으로 내게 저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의 생각을 읽어 내려 애써 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잔잔한 목소리도, 옅은 미소도, 차가운 눈빛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춘 채 대답했다.
“저는 단테 레나투스입니다.”
내가 너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은, 이런 것이다.
내가,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
카이사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 허공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해는 빠르게 저물어, 노을빛으로 가득했던 방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 * *
화났겠지.
화가 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런 큰 비밀을 숨기고 나와 결혼하려 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정체를 밝힌 후, 카이사르는 그만 쉬라는 한마디만 남긴 후 방을 나갔다.
그 후 이틀째 그와 만나질 못했다. 그도 날 찾아오지 않았고, 나도 무서워서 그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에게 미움받게 되는 건 싫어.
진작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아니, 아예 영영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어떤 게 옳았던 것일까.
지금은 그저 그에게 미움받게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흘째 아침이 됐다.
“폐하께서 오늘 오후 대련을 청하셨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시녀장인 셀즈가 그런 말을 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대련? 오늘?”
“네. 사실 결혼식 준비로 바쁜 시기라 무리라고 판단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지금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 카이사르가 먼저 보자는데 당연히 한다고 해야지.
“아니, 알겠다고 해. 다른 오후 일정은 다 취소해 줘.”
“알겠습니다.”
카이사르가 먼저 보자고 하다니.
‘화가 풀린 건가?’
조금은 안도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만. 혹시 사흘간 심사숙고한 끝에 파혼을 결심한 거면 어쩌지?’
난 헬레나 페레스카를 사랑했지, 단테 레나투스를 사랑하지 않았어. 넌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야.
설마 그렇게 말하면서 이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하거나…….
“셀즈.”
“네, 주인님.”
“만약 폐하께서 내게 파혼하자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황후궁에서 나가셔야죠.”
셀즈가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답변을 해 주었다. 내가 원했던 답은 아니었다만, 갑자기 현실감이 확 들었다.
결국 카이사르의 진의는 알지 못한 채, 약속한 시각이 됐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카이사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카이사르가, 날 발견하자 눈썹을 으쓱했다.
“늦었군.”
기왕 파혼 선고를 받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늦게 받고 싶어서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요즘 결혼 준비다 뭐다 해서 검 훈련을 전혀 못 했으니까 말이야. 스승님도 오랜만에 몸을 가볍게 푸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네, 그렇네요.”
카이사르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래, 머릿속이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낫긴 하겠지.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가?”
“아뇨. 제자를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스승의 의무.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거리낌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미소 한 자락 없던 카이사르의 입가가 약간 올라갔다.
“역시 그대는 최고의 스승이야.”
“말씀, 감사합니다.”
“대련에 앞서, 모처럼이니 좀 더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작은 내기라도 걸어 봄은 어떤가?”
“……내기요?”
“그래. 이기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기 말이야.”
설마, 파혼인가!
이기면 파혼을 요구할 생각인 건가, 이 인간!
나는 불안함이 극에 달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게 됐다.
내 동공이 흔들리는 걸 재빠르게 눈치챘는지, 카이사르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저런, 표정이 좋지 않군.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인가?”
그 순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냉정해졌다.
우습게도, 나는 이 상황에서조차 내가 ‘패배한다’라는 것은 가정으로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길 자신이 없다니요? 누구 얘기죠? 설마 절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제자님?”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내 태도에 카이사르가 만족스러운 눈빛을 머금었다.
“훌륭하군.”
“내기, 응해드리죠.”
“좋아. 지는 자는 이기는 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해.”
“좋아요.”
그래, 까짓것. 차라리 잘됐다.
파혼 안 당하려면 내가 이기면 되는 거잖아?
‘좋아, 이기면 그동안 내가 단테 레나투스임을 숨겨 왔던 걸 용서하라고 하자.’
이런 식으로 용서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지만, 뭐 어때! 계속 불안해하며 피해 다니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쨌든, 내가 질 리는 없잖아?’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카이사르를 겨누었다.
카이사르 역시 내게 검 끝을 향했다. 히죽 웃으며 가벼이 굴던 태도도 잠시, 거짓말처럼 날카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묵직한 압도감이 퍼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로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언제 저렇게 능숙해진 거지.’
나는 뒷목에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삼키며 생각했다.
애초에 검에 재능이 있는 남자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그러나 기술이 훌륭한 것과 분위기로 상대를 압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흡사 맹수의 눈빛이로군요.”
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 그의 붉은 눈동자는 굶주린 늑대처럼 살의로 안광을 띠었다.
“내기는 이겨야 하는 법이지!”
카이사르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엄청난 속도로 그의 검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잔뜩 경계하고 서 있던 터라, 나는 쉽게 그 공격을 읽고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한 채였다면?
‘이 공격,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카이사르의 엄청난 힘에 손이 저릿저릿했다.
‘이 속도에 이 힘이라니……!’
체급이 다르니 힘의 차이는 그렇다 쳐도, 속도는 진심으로 놀랄 정도였다.
기술과 속도가 필승 전략인 나와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을지도.
그렇다 한들.
“아직 멀었어!”
기술은 내가 까마득히 한 수 위다.
실전 경험으로 이루어진 내 실력을, 카이사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검과 검이 몇 차례나 빠르게 부딪쳤다. 수를 읽어서가 아닌 본능으로 이루어진 검격이 몇 번이나 계속됐다.
“검이 많이 무뎌진 게 아닌가, 헬레나?!”
카이사르가 광기 어린 웃음을 머금은 채 소리쳤다.
아마 나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은 표정일 거라 생각한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날뛰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드레날린이 고통과 두려움을 지워 버렸다.
“날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어!”
그것은 염원이나 오만이 아닌 진실이다.
단테의 삶에서 그녀를 꺾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카이사르가 내 말에 긍정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널 이겨 주겠어!”
“누구 맘대로?!”
“내 스승께 그렇게 가르침 받았으니까! 스승마저 이길 수 있도록,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아, 그래. 맞다.
그가 암살자에게 시달리던 그 시절, 그에게 살인검을 가르치며 난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나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고.
“내 스승의 가르침이 틀릴 리가 없으니까!”
카아앙.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깨질 듯 공기를 흔들었다.
엄청난 기세로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높고 쨍했다.
검 한 자루가 공기를 가르며 엄청난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날아간 검은 주인에게서 저만치 멀어져 떨어졌다.
콰앙. 캉.
검이 대리석 바닥에 흠집을 내며 구르는 소리가 시리게 들렸다.
내 검이, 바닥을 굴렀다.
“이런……!”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카이사르의 빈틈을 노려 파고들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의 왼쪽 옆구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공격에 성공했다고 인지한 그 순간, 카이사르의 검이 내 검을 날려 버렸다.
설마, 빈틈은 의도된 것이었나?
그러나 내 공격을 막아 낼 만큼의 공간적 여유가 없었을 텐데?
‘검을……!’
아직 안 끝났어!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검이 더 빨랐다. 내 검을 날린 후 다음 공격까지 간격이 있었을 텐데, 믿기지 않을 속도로 내 머리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으악!”
나는 공격을 피하느라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그것을 예측한 듯, 카이사르는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날 바닥에 밀어 넘어뜨렸다.
말도 안 돼.
“끝이야!”
콰악!
그의 외침대로, 내 얼굴 바로 옆에 검이 꽂혔다.
끝난 것이다. 그와의 대결이.
믿기지 않게도, 그의 승리로.
“하아……, 하악……, 하아…….”
카이사르는 내 위에 올라타 날 내려다본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이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인지,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우리는 한동안 거친 숨만 내쉬며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졌 ……어?”
한참 만에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내가? 내가……, 졌다고?”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그렇잖아? 평생 져 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고. 패배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실력이었단 말이다.
지다니.
내가 지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내가 그동안……, 스승님을 얼마나 지켜봐 왔는데…….”
카이사르가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하고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마수 사냥 때에도, 기사단 수련병들과 대련할 때에도, 레너드나 아고트와 대련할 때에도……, 늘 스승님을 지켜봤어.”
몰랐다.
가끔 견학하듯 멀리서 지켜보는 기척은 느꼈지만.
“보고, 또 보고, 분석하고, 약점을 찾고…….”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 그렇게까지 날 이기고 싶었어?”
그렇게 나한테 지는 게 싫었나?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 나갔다. 물론 카이사르는 개의치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내 반말을 기다렸다는 듯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스승님이 나에게, 스승님도 이길 만큼 강해지라고 말했으니까.”
단지 그것 때문에?
“헬레나가……, 내게 부탁한 거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카이사르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기, 내가 이겼군.”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맞다. 이 대련에는 내기가 걸려 있었다. 이긴 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한.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내게 요구할 것을 생각하니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 나는……, 싫어!”
“……뭐?”
내 말에 카이사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어린애 같은 소리인 줄 알면서도, 도무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파혼하자는 거지? 단테 레나투스는 네가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니까, 헤어지자는 거잖아? 싫어, 그런 건. 난……, 싫어.”
“……푸핫!”
“……?”
내 말을 들은 카이사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대체. 난 심각해 죽겠는데.
“저런, 헬레나.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내가 왜 너와 파혼을 한다고 생각하지? 지금껏 널 곁에 두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하, 하지만……, 화났잖아? 내가 널 속였다고 실망했던 거잖아?”
“저런, 헬레나. 내가 말했잖아? 네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던 거라고.”
파혼하려는 게……, 아니야?
카이사르는 한 손을 뻗어, 땀 때문에 뺨에 달라붙은 내 머리카락을 떼어 내 주었다.
“네가 전생에 누구였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넌, 여전히 너잖아.”
“아무렇지 않다고? 어떻게?”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은데. 내가 그 진실을 알기 전과 후의 너는, 무언가 달라졌나?”
“……아니.”
“내가 전생을 알게 된 탓에, 너는 지금 네가 아니게 됐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내 고개를 들게 해 다시 눈을 마주쳤다.
“나는 헬레나의 일부를 사랑하는 게 아냐. 네 전부를 사랑하는 거야. 전생에 누구였든, 어떤 일을 했든, 혹은 별 볼 일 없는 이였다 해도, 그게 헬레나이기만 하면 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을 뿐.
난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테 레나투스’의 삶을 살았던 적이 있는 ‘헬레나 페레스카’이니까.
단테 레나투스라는 이름의 과거도, 헬레나 페레스카를 이루고 있는 일부일 뿐.
“자, 이제 말해 봐. 네 이름이 뭐야?”
카이사르가 고갤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나에게 물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무언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삼키며, 나는 대답했다.
“헬레나. 헬레나……, 페레스카.”
내 대답에 카이사르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사랑하는 여자네.”
그래.
이 남자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나는 양팔을 뻗어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 * *
목욕 후 탈의하고 나오니, 진작 옷을 갈아입은 카이사르가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이제 그가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홀짝거리며 서류를 넘겨 보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해졌다.
내 시야 한쪽에 박제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여전히 일이 많으시군요.”
카이사르의 맞은편에 앉으며 내가 물었다. 그제야 카이사르가 날 쳐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결혼식 당일, 기사단의 동선 체크 중이야. 헬레나도 보겠어?”
“제가 봐도 되나요?”
“물론.”
나는 카이사르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 내용을 살폈다. 서류에는 시간별 배치도와 이동 경로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의외로 흑기사단이 바쁘군요.”
“이럴 때를 위한 기사단이니까.”
의전용 기사단이라 놀림 반 멸시 반 받는 흑기사단이, 의전이 중요한 이런 행사에서는 확실히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이날 바깥 광장을 개방할 예정이라, 경호 인력이 더 늘어날 거야.”
“오라버니는 근접 호위인가요?”
“하핫! 아니, 가족인데 호위를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아, 그렇겠구나.
결혼을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얼른 다시 서류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 여기, ‘궁사’는 뭐죠?”
“황가의 혼인식을 본 적이 없어, 헬레나?”
“네, 없어요.”
“하지만 단테 레나투스는……, 음. 그렇군. 단테 황제는 독신이었지.”
카이사르가 고갤 끄덕이며 납득했다. 나는 그가 너무나 자연스레 나의 이전 이름을 언급하는 게 쑥스럽고 이상했다.
“광장 중앙의 기둥에 성회에서 혼인을 축하하며 보내온 커다란 꽃바구니가 달릴 거야. 궁사가 그걸 쏘아 맞히면, 꽃이 광장에 비처럼 쏟아지지.”
“정말요? 예쁘겠어요.”
“응. 그런데 바구니를 한 번에 맞히지 못하면 국운이 기운다는 미신이 있어서, 골치 아파.”
“궁사의 임무가 막중하군요.”
“그러니 엄선하여 선발하지. 사실 난 미신 같은 건 안 믿지만, 국혼을 지켜볼 백성들 입장은 다르니까.”
그냥 예쁘고 화려한 이벤트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무슨 꽃바구니에 국운까지 걸지?
“활은 중앙 성각(城閣)에 보관되어 있어. 그곳에서 쏴.”
“보신 적 있나요?”
“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활은 본 적 있어. 한 번 들어 봤는데, 한 손으로 들면 팔이 후들거리더군.”
엄청 큰 활인가 보다. 궁금하니 나중에 보러 가 봐야지.
“실감이 안 나네요. 결혼식.”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난생처음 치르는 행사였다. 어지간한 건 질릴 만큼 겪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인생을 이만큼 지나고 보니 겪어 보지 못한 것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겠다.
“다행이야.”
“뭐가 말이죠?”
“헬레나에게 아직 나와 함께해 줄 ‘처음’의 것이 남아 있어서.”
카이사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 전생을 다 알고도 하는 말이라, 어쩐지 기쁘면서도 쑥스러웠다.
나는 민망함을 돌리려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내기에서 이기셨는데, 저에게 뭘 요구하실 생각이세요?”
“아, 그렇군.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도 이런 내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승부로 끝나긴 했다만,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이기면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 달라 하고 싶었노라 말했다.
‘새삼 옛날 생각 나네.’
그 시절이 그리워지게 될 줄 몰랐다.
그땐 그저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시시하고 숨 막힐 정도로 의미 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는데.
“각오는 되어 있어, 헬레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괜히 긴장되니까.”
카이사르의 짓궂은 질문에 내가 정색하여 말했다. 카이사르가 내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 요구는 이거야.”
카이사르는 테이블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뒤져, 한 장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헬레나 페레스카에게 내리는 기사 봉작.”
“네?”
엇, 생각지도 못한 요구 사항이 돌아왔다.
“저에게 기사 작위를 주시겠다고요?”
“황제인 내 곁에서 늘 검을 패용하려면 이편이 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하지만……, 괜찮은 건가요, 이거? 황후에게 기사작까지 내리다니, 선례가……?”
“내가 헬레나에게 작위를 주면, 선례가 되겠지.”
아니, 쉽게 말하는데.
자문회나 다른 귀족들을 어떻게 설득할 셈이지?
내 눈빛을 보고 생각을 읽은 것일까. 카이사르가 걱정 말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반대하는 자는, 숙청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인간, 폭군으로 이미지 굳히기로 한 거야?!
카이사르가 폭소했다.
“농담이야.”
그런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
“자문회와의 논의는 이미 끝났어. 나에게 검을 쥐여 주느니, 헬레나에게 검을 쥐여 주는 게 안전할 것 같다는 데 다들 동의하더군.”
“대체 이미지가 왜 그렇게 되어 버리신 거예요, 폐하…….”
“잘됐지, 뭐. 덕분에 헬레나에게 검을 쥐여 줄 수 있게 됐으니.”
카이사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만사 귀찮고 관심 없는 헬레나가, 그래도 어릴 때부터 의욕을 가졌던 게 ‘검’이었잖아.”
“제가……, 그랬던가요?”
“내가 대련 중에 헬레나의 빈틈을 파고들 때, 헬레나는 가장 생기가 넘쳤어.”
애매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생기를 되찾는 건가, 나는.
“네게 검을 줄게. 그러니 내 기사가 되어 줘, 헬레나.”
카이사르가 내게 부탁했다.
“물론 이건 부탁이 아니니까, 헬레나는 거절할 수 없어.”
거절할 생각도 없다.
내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기보다, 오히려 커다란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오히려 이걸 받아도 괜찮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내 세계를 네게 다 맡기겠어.”
응.
내가 지켜 줘야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제가 지켜 드릴게요, 폐하.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러기 위하여 지금까지 이 길고 지루한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 * *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할슈타르로 떠났던 레너드와 아고트가 귀환했다.
나와 카이사르와 해밀턴, 그리고 로만이 함께 그 두 사람을 맞이했다.
결과는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었다.
“흔적은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현장에 없더군요.”
레너드는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결과를 보고했다. 우리는 모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실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흔적이라 함은?”
그나마 해밀턴이 재빠르게 실망감을 수습하고 레너드에게 물었다.
“버려진 수도원에서 마법을 사용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레너드가 말을 망설이자 카이사르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럼에도 레너드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내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힘들게 다시 말을 꺼냈다.
“시체들도.”
“……시체들?”
진심으로 놀랐다.
시체라니?
“아마도 행방불명됐다는 드라코교의 신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살해당한 걸까요?”
“글쎄. 왜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살해했을까?”
해밀턴의 질문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로만에게서 돌아왔다.
“사람의 생명을 대가로 마법을 사용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로만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로만이 쑥스러운 듯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대개의 금기 마법은 대가를 필요로 하죠. 아마도 어떤 마법을 행하기 위해 제물로 사용한 게 아닐까요.”
“그렇다는 건 설마……, 노에라는 그 사람이 드라코교로 사람들을 선동한 건, 제물이 필요해서였다는 말인가요, 로망 씨?”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로만이 씁쓸하게 웃으며 아고트의 말을 정정한 후, 다시 우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생명만 가져다 쓴 건 아닐 겁니다. 다수의 강력한 ‘믿음’은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지요.”
“용이 부활한다는 믿음 말인가요?”
로만은 내 말에 긍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종교의 힘이죠. 뭐, 이런 얘기를 성회에서 했다가는 이단으로 몰려 모가지가 뎅강 잘리겠지만…….”
마지막 말을 하며 로만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겁먹은 척하고 있지만, 표정은 그다지 겁이 난 표정이 아니었다.
하긴, 마법사들과 성회는 애초에 사이가 나쁘다. 방금 저 행동도, 겁을 먹어서라기보다 성회의 융통성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서겠지.
“정리해 보면―”
해밀턴이 양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사람들의 주목을 끈 후에 말했다.
“노에 라벨은 크루세흐를 부활시키기 위해 드라코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 일부 사람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어떤 마법을 실행했다. 맞죠?”
“어떤 마법이었지?”
카이사르가 레너드를 쳐다보며 물었다.
레너드가 마법에 대해 알 리가 없잖아?
그러나 레너드는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 온 종이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수도원 곳곳에서 발견된 문양들을 베껴 왔습니다. 종이에 적힌 것도 있고, 건물에 적힌 것도 있습니다.”
종이 뭉치는 자연스럽게 로만이 먼저 가져가 살폈다. 어차피 우리들은 봐도 모를 내용일 테니까.
천천히 신중하게 종이 뭉치에 그려진 그림을 살펴본 로만이 ‘으으음’ 하고 신음했다.
“그게 뭐죠?”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고트가 로만에게 물었다.
“한 종류의 마법이 아닙니다. 마수를 조종하는 마법이나, 육체의 부패를 막는 마법도…….”
“육체의 부패? 단테의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 한 건가?”
카이사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고갤 저었다.
“노에 라벨은 100여 년 전의 사람입니다. 반면 단테는 500년 전에 죽었어요. 노에가 아무리 빨리 단테의 시체를 빼돌렸어도, 썩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이제 와서 육체의 부패를 막으려 할 리가 없지.
로만도 내 말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폐하. 제 생각에는 본인에게 사용한 마법이 아닐까 싶네요.”
“노에 라벨, 본인 말인가?”
“네. 그는 순수한 인간입니다. 100년 넘게 젊음을 유지하며 사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바스락, 로만이 종잇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마법에 사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인간은 대체……, 얼마나 타락하면 그런 짓을……!”
나도 모르게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었다.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살아남으려 하다니, 그런 이기심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실은, 신경 쓰이는 건 전혀 다른 마법입니다만.”
반면 로만은 오로지 학술적인 호기심만 가득 찬 표정이었다. 도덕도 모럴도 그에게는 관심 밖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갈 수 있는 거겠지.
로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몇 장의 종이를 순서대로 나열했다.
서로 이어지지 않을 듯한 문자열이 펼쳐졌다.
“이건 무슨 마법들이지?”
“마법‘들’이 아닙니다, 폐하. 이게 모두 한 개의 마법입니다.”
“한 개?”
“네. 심지어 중간중간 구문이 빠지고 잘려서, 이게 완성된 마법진도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큰 마법진이라는 말인가요, 로망 씨?”
“로만입니다, 아고트 양. 으음……, 사실 이 구문만으로 전체 마법을 추론하긴 어렵죠. 하지만 제 생각이 맞는다면, 아마 이 방의 세 배 정도 되는 넓이의 마법진일 겁니다.”
세 배?!
나는 물론, 해밀턴과 아고트가 동시에 눈이 커다래져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도 작은 크기가 아닌데, 이것의 세 배라고?!
“대, 대체 무슨 마법진이길래 그렇게 크죠?!”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건 ‘가설’입니다.”
로만은 학술사답게, 굳이 단정적인 단어를 피하여 설명했다.
“이 구문들은 기록에 남아 있는 봉인 마법과 겹치는 게 상당합니다.”
“봉인……, 마법이요?”
“네. 크루세흐를 봉인했던 마법 말입니다.”
그랬던가?
나는 봉인 당시 거기 있었다만, 마법진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당연히 외울 생각도 하지 않아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크기는 컸어.’
그래. 이 방의 세 배쯤은 됐을 거다. 용의 레어 전체를 감싸고도 남았었으니까.
“하지만 노에는 용을 부활하려 하는 건데, 어째서 봉인 마법을……?”
해밀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로만이 지체 없이 그 혼잣말에 답했다.
“이게 봉인 마법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봉인 마법과 겹치는 구문이 있다고 했을 뿐이죠.”
“그게 무슨 의미죠?”
“즉, 이건 ‘역산 마법’이라는 겁니다.”
“역산이라.”
카이사르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산.
이미 계산한 결과를, 계산하기 전의 숫자로 되돌리는 과정.
로만이 나와 카이사르를 순서대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눈빛에서 우리의 생각을 읽은 듯 고갤 끄덕였다.
“네. 생각하신 대로.”
로만의 표정은 굉장히 밝았다.
“이건 이미 봉인되어 있는 것을 푸는 마법일 겁니다. 실로 엄청나군요. 완성된 식을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새로운 학술적 지식을 얻게 된 학자의 모럴 없는 미소에, 나는 희미하게 오싹함을 느꼈다.
* * *
레너드와 아고트는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와 주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노에가 북동쪽으로 향했으리라 예측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노에의 추적을 계속할 생각인 듯했다.
‘몇 명이나 희생된 것일까.’
레너드의 보고를 받은 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물로 희생되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들은 그저 우매하게도 이단에 빠졌다는 이유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눈치채고 움직였다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하다못해 마리안느와 싸우는 대신 크루세흐에 대한 추격에 집중했다면.’
‘마수 토벌 때 가졌던 의심에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생각이 계속 쳇바퀴를 돌았다.
동시에 노에를 향한 분노가 소리도 없이 차올랐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진정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룰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까부터 표정이 심각한데.”
생각에 골몰해 있던 나는, 곁에서 들린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카이사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썰어 입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아, 맞다. 지금 식사 중이었지.
나는 그제야 내 접시 위에서 식어 가는 고깃덩어리를 확인했다.
“입맛이……, 없어요.”
“헬레나도 입맛이 없을 때가 다 있군. 식사가 별로면, 달콤한 디저트를 내어 오라 이를까?”
“안 돼요. 로위나가 화낼 거예요.”
나는 여유라고는 1밀리미터도 없는 결혼식용 드레스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역시, 신경 쓰이나?”
“네?”
“아까 레너드가 했던 이야기들 말이야.”
“아……, 으음. 솔직히, 네.”
아니라고 허세를 부릴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너무 상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카이사르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식탁 위의 촛대에서 일렁거리는 촛불이 그의 눈동자 위에 어른거렸다.
“헬레나에게 모두를 구원해 줄 의무 같은 건 없어.”
“하지만.”
“굳이 죄를 묻자면, 백성들을 지키지 못한 내 탓이겠지.”
카이사르의 표정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였다.
그런가. 그도 이 사건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겠구나. 이제는 모두 그의 백성들이니까.
“……부탁 하나 드려도 되나요?”
“뭐지?”
“다음번에 노에가 있는 곳을 찾아낸다면, 그땐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카이사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무표정에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틀 후면 나는 이 나라의 황후가 된다. 황후에게는 황후의 책임과 임무가 있다. 거기에 용을 잡는다는 임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크루세흐를 잡을 사람이 꼭 단테 레나투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내게서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건 아마도, 내 부탁을 거절하는 의미였겠지.
“그 용은 저와 연결되어 있어요. 이 문제에서 전 타인이 될 수 없어요, 절대로.”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더욱 보내고 싶지 않아. 그대가 위험해지는 건 이젠 사양이다.”
“하지만 이 제국에 저보다 강한 이가 있나요, 폐하?”
“나?”
“한 번 이기셨죠. 그 후로 두 번 연달아 패배하셨고.”
내가 쓰게 웃으며 지적했더니, 카이사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직접 크루세흐를 없애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지? 헬레나는 귀찮은 걸 싫어하잖아?”
“옛날엔 그저 현상금이 필요했던 것뿐이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왜지?”
“지키고 싶어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헬레나 페레스카는 혼자가 아니니까. 이 세계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
“제게 폐하의 세계를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나는.
너의 검이니까.
“……내가 헬레나의 부탁을 결코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일 테지.”
“폐하는 예전부터 제 부탁에 약했죠.”
“그래. 하아,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카이사르가 식탁에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를 그런 위험한 일에 보낼 수는 없어.”
윽……, 역시 거절인가.
카이사르가 내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긴 손가락에 걸렸다가 한 올 한 올 떨어졌다.
“그러나 그대는 내 검이기도 하니까.”
카이사르가 쓰게 미소 지었다.
체념한 듯, 가볍게 한숨을 쉰다.
“함께 가자.”
“폐하도요?!”
“그래. 용은 내가 어떻게든 하겠어. 봉인을 하든, 죽이든, 뭐든 간에.”
“엇, 그러면 저는……?”
“헬레나는 날 지켜야지.”
결국 나 역시, 체념하여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별수 없군요. 명이시라면, 따라야죠.”
* * *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명확해졌다.
노에 라벨을, 막는다.
크루세흐의 부활을 저지한다.
최악의 경우, 크루세흐를 다시 봉인한다. 그게 가능한 마법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목표가 명확해지니 다소 홀가분한 기분이 됐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됐다.
그럴 것이, 이때까지는 설마 ‘용’이 나를 먼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결혼식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