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17/156)

15. 결혼, 장례, 그리고

거울 속에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푸른색과 녹색의 보석으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 다이아로 장식한 장신구, 레이스가 겹겹이 겹쳐져 있는 길고 흰 드레스…….

무엇보다 바닥에 끌리다 못해 무거워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긴 베일까지.

새벽 4시부터 시작하여 장장 5시간에 걸쳐 완성된 포장 되시겠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곁에 선 로위나가 감격에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감상을 말했다.

그녀가 그토록 감상적이 된 건 처음 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마치 천사 같으셔요!”

아고트는 거의 울 지경이 됐다. 날 향한 눈빛이 단순한 감탄이 아닌 신앙에 가까워 보였다.

두 사람만이 아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시녀들과, 몇 주일을 내게 매달렸던 디자이너들, 장인들, 그들의 조수들, 기타 등등이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하고 있었다.

“정말 최고이십니다!”

“역사에 기록될 만큼 아름다운 자태이십니다!”

“제 손길을 거쳐 완성된 것이라는 걸 믿기 어렵군요……!”

이런 분위기라니. 나도 뭔가 한마디 해야 할 것 같군.

보통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본 통속 소설 속의 여성들은 뭐라고 하더라?

“이게……, 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과장되게 기뻐해 보았다.

로위나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게 말했다.

“정말 연기 못하십니다.”

쳇.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베일이 너무 길어서 밟힐 것 같아요, 로위나.”

“시중 드는 이들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옷이 구겨지거나 밟히지 않도록 곁에서 보좌할 겁니다.”

그냥 옷을 편하게 만들면 안 되는 건가.

“뭐……, 생각보다 옷도 가볍고 숨쉬기도 편해서 그건 좋네요.”

나는 거울 앞에서 좌우 45도 각도로 몸을 돌려 비춰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어찌나 코르셋을 꽉꽉 조이는지,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숨 쉴 수 있는 옷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차라리 벌거벗고 나가겠노라 화를 냈었다.

다행이면 다행이랄지, 결혼식 준비 중에 심장 격통으로 쓰러졌던 적도 한 번 있었는지라, 고문이나 다름없던 코르셋 문제는 당장 시정됐다.

“외람되지만, 보통 다른 신부들은 웨딩드레스에서 기능성을 확인하진 않습니다.”

“모든 신부들의 취향이 같을 수는 없죠.”

“미적 측면에서의 감상은 없으십니까?”

미적 측면이라.

으음. 난 패션엔 취약한데.

“……정말 새하얗네요.”

한참 고민 끝에 내가 말했다.

로위나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뒤에 서 있던 디자이너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낙담했을 뿐.

“새하얗고……, 음……, 예, 예쁘다?”

“……그래요. 충분합니다. 그게 최선이신 거겠죠.”

로위나가 체념한 듯 말했다.

뭐야. 왜 뭔가 포기한 듯이 말하는 건데.

내 심미안을 평가받고 있는 그때, 레너드가 방에 들어왔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감색의 정장과 어우러져 굉장히 어른스럽고 과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세상에, 오라버니!”

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리쳤다.

“어쩜 그렇게 멋질 수가……!”

지금 내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야! 레너드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자랑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오라버니가 최고다!

“헬레나야말로 눈을 깜박이기 아까울 정도인걸.”

레너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는 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오로지 널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빛이 나.”

레너드의 감상에, 내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오오오’ 하고 감탄했다. 딱 원하던 감상평이었던 듯, 상당히 흡족한 표정들이 됐다.

“소공작님의 화술 중 절반만이라도 닮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로위나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으음. 어쩐지 억울한데.

로위나는 무표정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레너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준비가 다 끝나셨던가요?”

“네. 녹트 자작이 감격하여 울고 있던데요.”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쪽 방은 상황이 더 안 좋군.

“한 시간 후부터 식이 시작될 겁니다. 식순, 기억하시죠?”

“대예배당으로 이동해서 성하께 설교 듣고, 혼약 선서를 하고, 황후 책봉을 받고, 머리에 관 쓰고, 광장 쪽 테라스로 이동해서 방긋방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면 되는 거잖아요?”

“뭔가 왜곡되어 있는 듯하지만, 일단 기억하고는 계시군요.”

기억할 수밖에. 몇 주 동안 옆에서 로위나가 계속 외우게 시켰으니까. 잠꼬대로도 이 순서를 외울 수 있을 정도라고.

“테라스에 나가서는 너무 밖으로 몸을 내밀지 마세요. 기사들이 있습니다만, 안전상의 문제도 있으니까요.”

로위나가 주의 사항을 말해 주었다. 나는 코를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안전상의 문제?”

“광장의 백성들은 딱히 검문받지 않은 이들입니다.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로위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살벌하게 말했다.

“하지만 테라스와 광장의 거리도 꽤 되지 않나요? 돌을 던져도 못 맞히겠던걸요.”

나는 미리 확인하고 온 테라스의 위치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때때로 황가에서 백성들과 직접 마주할 일이 있을 때 사용되는 테라스였다. 당연히 광장을 향해 있어도, 거리는 가깝지 않다.

솔직히 광장에 선 이들에겐 나나 카이사르의 눈 코 입도 제대로 안 보일 거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옛날 일이긴 하지만, 테라스가 열릴 때를 노려 암살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활이라도 쐈답니까?”

내가 피식 실소하며 농담처럼 물었다.

로위나는 내 베일을 정돈해 주며,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마법을 썼답니다.”

* * *

국혼이면 나름 큰 행사인데, 이상하게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적어도 대예배당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랬단 얘기다.

시간이 되어, 나는 안내를 받아 황성 내의 대예배당으로 이동했다. 시종들이 셋이나 달라붙어 내 치마와 베일을 끌리지 않게 잡아 주었다.

대예배당 앞에는 카이사르가 먼저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직전까지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몸이 떨려왔다.

“헬레나.”

날 발견한 카이사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햇살 같은 미소에 나는 절로 몸이 녹아내렸다.

세상에.

잊고 있었다.

그가 미남이라는 사실을.

“폐하……. 잘생기셨네요.”

카이사르의 곁에 선 내가 넋 없이 중얼거렸다. 내 말에 카이사르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색 기조의 정장은 그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가늘어지는 붉은색 눈매며 단정한 입술이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옆으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덕분에 더없이 어른스럽고 무게가 있어 보였다.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은 역시나 옷발이 잘 받는다.

새삼 실감이 난다.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는 거구나.

“드디어 스승님이 내 사람이 되는 날이야.”

카이사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잡고 다가가니, 카이사르가 내 손가락 위에 입을 맞췄다. 그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꿈만 같군. 오늘 드디어, 이 아름다운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거야.”

“떨리시나요?”

“그래. 너무 행복하니 오히려 두려움이 들 정도야.”

“저도 그래요, 폐하.”

“괜찮아. 내가 헬레나의 곁에 있으니까.”

카이사르가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을 만지게 했다. 살짝 열기가 오른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헬레나는 나에게 바라기만 하면 돼. 그게 뭐든, 내가 다 이루어 줄 테니까.”

무언가가 벅차오른다.

텅 비어 있던 것이 가득 채워진다.

그가 한없이 애틋해져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두 분, 이제 문이 열릴 겁니다. 준비하셔야 해요.”

로위나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 잔소리 같은 말에 나도 카이사르도 쓰게 웃었다.

“제가 뭘 바랄 줄 알고 그런 맹세를 하세요?”

“글쎄. 그게 뭐든, 헬레나가 간절히 원하는 게 생긴다면 기쁘겠는걸.”

그간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온 적 없는 인생이었으니까.

카이사르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허망한 사람이었는지. 무기력한 사람이었는지.

“그러면 일단은……, 제 손을 잡고 걸어가 주시겠어요?”

“기꺼이.”

곧 문이 열렸다.

엄청난 빛이 안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중앙에는 긴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길의 양쪽으로 흑기사단이 정렬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카이사르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는 걸 느꼈다. 손끝에 아주 미약한 떨림이 전해져 와서, 나는 이 소년과도 같은 남자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내가 행복하게 해 줘야지.

내가 끝까지 지켜 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우리는 예배당 안으로 나란히 첫발을 내디뎠다.

* * *

예식은 성회의 우두머리인 성하의 주도하에 엄숙하고 격식 있게 진행되었다.

나는 로위나의 특훈으로 암기한 성혼선서며 기도문이며 하는 것들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정말이지 두 번은 못 할 짓이다.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예식 말미가 되어, 시종이 반지 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아왔다.

‘그러고 보니 나, 반지를 오늘 처음 보네.’

결혼 준비로 혼이 빠질 지경이라, 반지 디자인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카이사르에게 다 맡겨 버린 터였다. 물론 내 성격을 잘 아는 카이사르도 흔쾌히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이 디자인은 카이사르의 취향인 건가?’

나는 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반지의 정중앙에는 붉은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어때?”

카이사르가 내게만 들리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고갤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이사르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날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햇빛이 들어 반짝거렸다.

“폐하의 눈동자 같습니다.”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땐, 그의 붉은 눈동자가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다. 날카롭고, 차갑고, 냉혹한 색깔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더니, 카이사르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슬쩍 떨어뜨렸다.

예식은 성하의 선포로 끝이 났다.

“신의 가호 아래,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굉장히 정신없이 흘러간 것 같지만, 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자, 이제 테라스로 가시죠.”

식이 끝나니, 어디선가 해밀턴이 나타나 말했다. 그는 눈가도 코끝도 빨개져 있었다. 설마, 울었어?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두 분의 성혼이라니, 이 해밀턴은 감격하고 감격하여……, 어흐흑.”

“좋은 날 왜 우는 거야.”

카이사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알 것 같다. 그는 그냥 쑥스러워하는 것뿐이라는걸.

우리는 사람들의 환대 속에 광장 측으로 난 테라스로 이동했다.

테라스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먼저 온 달튼이 한없이 뿌듯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폐하. 그리고 황후마마.”

달튼은 연신 싱글싱글한 얼굴이었다. 눈매가 다소 짓궂게 휘었다. 우릴 놀리고 싶은 심정을 꾹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 조심해서 올라와, 헬레나.”

먼저 단상 위에 올라선 카이사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말을 정정했다.

“자, 부인. 올라오십시오.”

으아악.

나는 온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 낯선 호칭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지만, 좋은데?’

부끄러운 것과 별개로, 싫지는 않다. 이 모순은 대체 뭐람.

단상에 올라서니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여 있던 백성들이 환호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꽃바구니다.’

나는 언젠가 카이사르에게 들었던 꽃바구니를 발견했다. 광장 중앙, 천사상이 앉아 있는 기둥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구니가 달려 있었다.

얼마 후, 황성에서 화살이 쏘아져 정확히 꽃바구니에 꽂혔다. 장치가 되어 있는지, 바구니 아래쪽이 열리고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름다워.”

아직도 이 세계에는 가슴 설레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구나.

나는 슬그머니 카이사르의 손을 잡았다. 그 모든 순간에 이 남자가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안도가 됐다.

광장에서 불미스러운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무, 무슨 소란이죠?!”

해밀턴과 달튼이 테라스 쪽에 붙어 상황을 확인했다. 나 역시 테라스 난간을 잡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꽃비에 정신이 팔려 시선이 위로 향한 사이, 사람이 죽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시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동그랗게 공간을 만들고 있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시체 앞에 피 묻은 검을 들고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 역시.

“헬레나 페레스카!”

여자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쳤다.

“내 것을 다 빼앗아 갔으니, 너 역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마리안느 발레르……?”

땅이 진동했다. 광장에 선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우왕좌왕했으나, 위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볼 수 있었다.

마리안느를 중심으로 광장 바닥에 아로새겨지는 거대한 마법진을.

“마법……?!”

곁에 선 카이사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은 안 했지만,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시대에 이만한 마법을 발동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마수다!”

“사람 살려!”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얼마 후, 광장 바닥 곳곳에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익숙한 마수가 기어 나왔다.

“루크로코타……!”

나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한탄했다.

마수 토벌에 나섰을 때, 동도 밴달리움에서 만났던 대형 마수가 지금 이곳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한 마리도 아니다. 족히 열댓 마리는 되어 보였다.

“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람들의 비명과 혼란에 엉망이 되어 버린 광장 중앙에서, 마리안느 홀로 광기에 얼룩진 폭소를 터뜨렸다.

“경고했을 텐데!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던가!”

“저 미친 여자가……!”

나와 카이사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난장을 벌였단 말인가? 죄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면서?

“폐하! 마마! 이쪽으로!”

언제 달려온 것인지, 검을 패용한 레너드가 나와 카이사르를 불렀다.

우리 둘은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테라스에서 내려와 방으로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검을 받아 패용한 후, 기병장 가르말과 의논을 시작했다.

“광장에 사병들이 있습니다. 백을 보내어 사람들을 대피시키겠습니다.”

“좋아. 흑은 내빈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마수들은 어떻게 할까요. 변경작들을 중심으로 조를 짜는 것이.”

“아니, 지난번 마수 토벌에 나섰던 이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낫겠어.”

“그러면 마수들은 적기사단에게.”

“이미 제럴드를 보내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병장님.”

달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 허허거리며 어딘가 대충대충 하는 듯한 이미지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긴장된 표정이었다.

“가르말 공. 마수들이 광장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해. 수습이 더 어려워지니까.”

“존명!”

달튼과 가르말이 카이사르에게 경례를 한 후 자리를 떴다.

나는 흘끗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이 황당한 상황에서도, 그는 꽤 침착하고 정확한 판단력으로 수습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턱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안쓰러웠다.

‘마법……. 마수를 이쪽으로 소환하는 건가.’

지시를 내리는 건 카이사르에게 맡긴 채, 나는 침착하게 조금 전 상황을 반추해 보았다.

마리안느가 사람은 해친 건, 아마 이 마법이 사람의 피나 시체 따위를 제물로 발동되는 종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기’는, 으레 그런 것들을 요구하니까.

‘그렇다면 마수 때문에 사상자가 늘어나면, 이 마법진은 계속 유지되는 건가?’

제물로 쓸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지금 소환된 마수를 잡는다고 한들 끊임없이 마수가 소환되면 답이 없다.

어떻게든 마법 자체를 멈추게 해야 한다.

“아가씨!”

그때 복도 저편에서 아고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들어 보니, 아고트가 커다란 무기 가방을 품에 안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고트!”

“허억, 허억……. 피, 필요하실 것 같아서……!”

내 앞에 도착한 아고트가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아가씨의 검이랑, 건틀릿을 챙겨 왔어요……! 갈아입으실 옷은 찾을 시간이 없어서……!”

“아니, 충분해. 잘했어, 아고트.”

진심으로 아고트가 기특했다.

나와 아고트의 대화를 들은 해밀턴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설마, 나설 생각이신 겁니까?”

“당연하죠. 손 하나라도 더 필요한 때에, 놀면 뭐 해요?”

“아니, 그렇지만 이젠 황후마마이신데 이런 위험한 일에 직접……, 끄아아아아악,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훌렁 드레스를 벗어 버리자 해밀턴이 비명을 내질렀다. 해밀턴뿐 아니다. 거기 서 있던 기사들이 모두 당황하여 빨개진 얼굴로 돌아섰다.

레너드마저도 한 손으로 눈을 가리는 와중에, 카이사르만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날 빤히 쳐다봤다.

“적어도 탈의는 다른 놈들 없는 데서 해 주면 안 되겠어, 헬레나?”

“그럴 시간 없습니다.”

무거운 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나는 가벼운 슬립 차림이 됐다.

베일도 벗어 버리려 했으나, 머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벗기기가 어려워 검으로 짧게 잘라 버렸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카이사르에게 이어 말했다.

“마법이 멈추지 않으면 마수들이 계속 소환될 거예요.”

“무슨 수로 멈추려고?”

“마법을 발동시킨 주체인 마리안느를……, 없애는 수밖에요.”

철컥.

마지막으로 검을 허리에 장착하며 내가 말했다. 카이사르는 ‘으음’ 하는 소리로 내 말에 호응했다.

“……이봐, 너.”

한참 고민에 빠진 듯한 카이사르가, 곁에 서 있는 시종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그중 하나를 지목했다.

지목받은 시종이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신발을 벗어다오.”

카이사르의 명령에 시종은 당황한 듯 고갤 휙 들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냉정한 표정에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냉큼 신발을 벗었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들고 오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내 구두를 벗기고 그 신발을 신겨 주었다.

“폐하……?”

“설마하니 구두를 신고 뛰어다닐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음……. 맨발로 뛸 생각까진 했었는데. 이 얘기는 해 봤자 혼날 것 같으니 관두자.

카이사르는 신발에 이어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거추장스러우면 벗어도 좋아.”

“네, 폐하.”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냉큼 ‘네’라고 답하면 내가 상처받고.”

카이사르가 빙긋 웃었다.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듯. 실제로 그 미소를 보니, 잔뜩 끓어올랐던 기분이 조금 차분해졌다.

“두 사람도 괜찮겠지?”

카이사르가 레너드와 아고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카이사르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갤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카이사르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자.”

“……네에?!”

이번엔 해밀턴이 아니라 내가 당황했다.

가? 어디로 가?

“자, 잠깐만요! 폐하도 가시려고요?!”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카이사르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갤 갸웃했다.

“그럼 설마 황후 혼자 보낼 줄 알았나? 저 난장에?”

“아, 아니, 폐하께서 절 지켜 주실 필요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부인? 마리안느 발레르는 내가 처치합니다. 부인은 그런 나를 곁에서 지켜 주어야 하고.”

카이사르가 검을 뽑아 들며 얄궂게 미소 지었다.

“나만을 지키는 기사가 아니었습니까?”

이러려고 기사 작위 받으라고 한 거냐고!

그때, 멀리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마수가 황성 내에도 진입한 것일까.

별수 없군. 여기서 논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폐하는 진짜 고집쟁이예요.”

내가 투덜거렸더니, 카이사르가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님께 배운 게 있어서.”

“좋아요. 가죠. 이 난장판을 정리하러.”

펄럭, 망토의 매무새를 고치며 내가 말했다.

내 선언에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날카로운 투기가 감도는 순간이었다.

* * *

황성 안으로 침입하는 마수는 수가 많지 않아 대부분 흑기사단에서 해결했다.

‘의전용 기사단’이라며 조롱받던 이들이지만, 그래도 기사는 기사다. 무엇보다 내 가르침을 받은 수련병들도 다수 있었고.

“폐하, 이쪽으로!”

앞서 길을 트며 달려가던 레너드가 소리쳤다.

나와 카이사르는 황성 입구에서 발악하던 루크로코타의 머리를 날려 버린 후, 레너드를 따라 광장 내측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대피가 순조로웠던 모양이군.”

인구 밀도가 확 줄어든 광장을 보며 카이사르가 말했다. 백기사단과 사병들이 명령대로 신속하게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광장 바닥은 이미 여기저기 시체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피해가 생각보다 ‘적었다’이지, 피해가 ‘없었다’가 아니다.

“뒤에서 옵니다!”

내가 분노를 삭이며 검 손잡이를 틀어쥔 그때 아고트가 소리쳤다.

이미 등 뒤에서 다가오는 살기를 느끼고 있던지라,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에서 다가오는 마수의 다리를 베어 버렸다.

마수가 절뚝거리며 저만치 물러났다가 다시 날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내게 재차 달려들기도 전에 레너드의 검이 마수의 머리를 잘라 냈다.

잘려 나간 마수의 머리를, 해밀턴이 하얗게 질려 발로 뻥 걷어찼다.

루크로코타는 재생 속도가 빠른 마수이므로, 몸과 머리를 분리해야 한다는 걸 다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작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건 오히려 나였다.

“으아아, 두 마리나 달려옵니다!”

“이쪽도! 이쪽도요!”

한 마리를 처리했더니, 이번엔 세 마리나 되는 마수가 날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맞다. 마수들이 유독 날 노리고 달려들었지……!’

마치 자석처럼, 내가 광장에 등장하자마자 근처에 있는 마수들이 죄다 날 향해 달려들었다.

한두 마리면 문제가 없는데, 대형 마수가 여러 마리면 아무리 나라도 벅차다.

“돌겠네, 진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정면에서 다가오는 마수의 턱 밑에 검을 꽂았다가 뺐다.

‘이래서는 마리안느를 찾기는커녕,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아갈 판이잖아!’

“아가씨! 조심하세요!”

아고트의 목소리가 쨍하니 귓가에 닿았다. 고갤 돌려 보니, 어느새 내 오른쪽에 마수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이건, 못 피하겠다.’

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면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대로, 팔을 내어 주고 머리를 베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 생각했으나.

“크으아아악―!”

내 어깨에 송곳니를 밀어 넣던 마수의 머리가, 순식간에 허공 저 멀리 날아갔다.

고통에 대비하고 있던 나는 당황하여 멈칫 멈춰 섰다.

“엇, 폐하?”

마수의 머리를 날린 건 카이사르였다.

마수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카이사르가, 내 쪽으로 휙 돌아섰다. 어딘가 화난 표정이라 어리둥절해 있자니, 카이사르가 내게 소리쳤다.

“안 되겠군!”

“……네?!”

뭐, 뭐야!

왜 갑자기 혼난 거야, 나?!

나는 코앞에 마수가 나타났을 때보다도 더 당황하여 완전히 얼어붙었다.

“대체 언제까지 혼자서 싸울 생각이지, 헬레나?”

……아.

그렇구나.

‘지금의 난, 혼자 싸우는 게 아니지.’

전투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또 잊고 말았다.

지금은 내 등을 믿고 맡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오라버니! 아고트! 광장 안쪽으로 길을 내어 줘!”

내가 검을 다시 고쳐 쥐며 소리쳤다. 내 말에, 카이사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레너드와 아고트 역시 빠르게 공격 패턴을 바꿨다.

마치 처음부터 합을 맞추었던 이들처럼 침착하고도 능숙하게 마수들을 유인하고 해치웠다.

‘좋아, 간다!’

뒤는 두 사람에 맡기고, 나와 카이사르는 그대로 도약하여 광장 안쪽으로 질주했다.

“마리안느!”

그렇게 한참을 달려, 우리는 광장 중앙의 기둥 아래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대면했다.

‘역시 이 여자가 마법의 중심이야.’

마리안느의 발밑에 깔린 마법진은, 광장 외측보다 더 밝은 빛을 내뿜었다.

더욱이 마수 몇 마리가 그녀를 보위하듯 주변에 서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마리안느가 우릴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두 분, 제 축하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카이사르가 싸늘하게 웃으며 마리안느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최악이군. 되돌려 보낼 생각이야. 당신 시신과 함께.”

“아쉽군요. 여러분을 위해 라벨 공의 손까지 빌려 준비한 것을.”

‘라벨 공? 노에 라벨?’

“부디 이번 선물은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번 선물?

이것 말고 더 뭔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리안느가 서 있는 광장 중앙에서부터 검은색이 넓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수가 튀어나올 때 생겼던 구멍과 같은 검은 바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크기로 광장을 뒤덮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검을 더욱 힘껏 쥐고 발아래를 노려보았다.

‘뭐가 나오든, 한 번에 벤다.’

카이사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검을 고쳐 잡았다.

온몸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흘렀다.

본능이 경고하는 거다.

이 아래에 있는 건 아주 위험한 것이다― 라고.

그리고 얼마 후 내가 검은 발밑에서 발견한 것은.

“……눈?”

엄청난 크기의 눈알이었다.

노랗고 반들거리는, 파충류의 눈.

“……모두 피해!”

나는 목이 터지게 소리치며 그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바닥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파충류 한 마리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용이었다.

그것도 온갖 잡동사니가 얼기설기 엮여 만들어진.

솔직히 그것을 용이라고 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일단, 아무리 봐도 생명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건물 파편, 부서진 가구, 돌덩이, 동물의 뼈……. 온갖 잡다한 쓰레기가 뭉치고 짓이겨져, 용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뿐.

크기도 대략 3미터 남짓이라, 진짜 용에 비하면 작았다. 물론 그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흑……!”

나는 찌를 듯한 통증에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더구나 짧은 격통으로 그쳤던 이전과 달리, 통증이 상당히 길었다.

뭐지? 뭐가 달라졌길래?

‘설마 용에 반응하는 건가?’

심장이 터질 듯이 거칠게 고동쳤다. 심장 안에 있는 무언가가 심장을 찢고 나오려고 발버둥 치듯이.

“마리안느 발레르!”

카이사르가 핏발 선 눈으로 마리안느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마리안느는 그 조잡한 용의 등에 올라타, 오만한 미소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조심하십시오!”

레너드의 외침과 동시에, 용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묵직해 보이는 몸이 순식간에 10미터쯤 위로 솟구쳐 올랐다.

“뭐야, 날아?!”

돌개바람에 한 팔로 얼굴을 가리며, 카이사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심장의 격통을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기둥이 쓰러진다!”

광장 중앙의 기둥이 용의 몸과 부딪쳐 반 토막이 났다. 기둥 윗부분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추락해, 근처에 서 있던 기사들이 기함하며 흩어졌다.

콜록, 콜록, 콜록.

먼지 때문에 숨도 못 쉬겠다.

“저렇게 생긴 용도 있어, 헬레나?”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생물이 아니잖아요?”

카이사르의 말에 내가 소리쳐 반박했다.

내 전생에 크루세흐 외에도 여러 용을 때려잡아 봤지만, 저런 용은 듣도 보도 못했다.

곁에서 나와 카이사르의 대화를 들은 레너드가, 이 와중에 천진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나저나 폐하는 왜 그걸 마마께 물으십니까?”

아뿔싸.

나와 카이사르가 동시에 뜨끔하여 레너드를 쳐다보았다.

“엇, 그, 그것은……, 헬레나가……, 똑똑하니까?”

카이사르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아, 하긴. 그렇군요.”

……믿어?!

아니, 이걸 믿어? 정말 믿는 건가? 내 오라버니, 대체 얼마나 동생밖에 모르는 바보인 거야? 응?

“용이 다시 옵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아고트의 외침에 우리 셋은 다시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

허공에 날아올라 균형을 잡은 용이, 우리를 목표로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자, 뭐가 나올 것인가.

브레스인가? 마법인가?

“……온다!”

용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향해 몸을 내리꽂았다. 나는 멀리 몸을 던지듯 구르며 그 공격을 피했다.

광장 바닥이 부서져,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뭐야, 몸통 박치기?”

예상치 못한 공격 방법인데?

“하핫!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 같군!”

마리안느의 광기 어린 조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용이 바닥에 착지한 직후, 아고트와 레너드가 용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건물 벽에 검을 휘두르는 것마냥, 약간의 흠집을 제외하고는 효과가 없었다.

“멍청하기는! 그깟 공격이 통할 것 같더냐!”

마리안느가 기고만장한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곧 용은 다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틈에 카이사르가 날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헬레나, 괜찮아?”

“네, 아직은요.”

“검으로는 공격이 어렵겠어.”

동감이다.

애초에 생물이 아닌데, ‘죽인다’는 게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쏴라!”

그때, 광장 한쪽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기병장인 가르말이 재빨리 궁수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용은 날갯짓 한 번에 화살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간신히 용의 몸에 꽂힌 화살도 있었으나,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 수준도 안 되었다.

“어쩌죠, 아가씨?”

아고트가 절망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도 몰라.

차라리 크루세흐를 상대하는 게 덜 당혹스러울 것 같다.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용은 본 적도 없다고.

용은 궁수 부대 쪽으로 빠르게 착지하여, 궁수들을 흩트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같은 패턴의 공격.’

나는 용의 공격 범위에서 잠시 벗어난 틈을 타,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날아올랐다가 몸체를 던져 공격하는 방식만 사용하고 있어.’

본디 용의 무기는 브레스와 마법이다.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생명체인데, 저렇듯 1차원적인 공격밖에 못 한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저건 용이 아냐.”

나는 먼지 범벅이 된 뺨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곁에 선 카이사르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용을 잡을 게 아니라, 용을 조종하는 인간을 잡아야겠군.”

마리안느 발레르.

마수도, 용도,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이 사태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이 여의치 않습니다.”

레너드가 통탄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

마리안느가 있는 곳까지 화살의 비거리는 가능한데, 위치가 나쁘다.

아래쪽에서 화살을 쏘아 봐야, 용의 몸과 날개가 다 막아 버린다. 이래서는…….

엇, 잠깐만.

아래쪽에서 불가능?

그러면 위에서 쏘면 되는 거 아냐?

“……중앙 성각(城閣)으로 가야겠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카이사르가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중앙 성각에는 꽃바구니를 쏴 맞추기 위한 활이 보관되어 있다.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들면 팔이 후들거릴 정도라고 했던, 그 거대한 활이.

“조심하세요! 용이 다시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아고트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궁수들을 흩트려 놓는 데 성공한 용이 다시 이쪽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엇, 잠깐만.

궁수들, 전멸이야?

그럼 중앙 성각으로 이동한들, 활은 누가 쏴?

“레너드. 중앙 성각으로 이동한다. 친위대는 두고, 자네만 따라붙어.”

“존명!”

짧고 분명하게 명령을 내리는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레너드의 눈빛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가자, 헬레나.”

카이사르의 말에 난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가자, 아고트!”

“네, 아가씨!”

우리 넷은 동시에 성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공격해 온 용이, 이미 우리가 떠난 광장 바닥을 파헤치며 착지했다.

“마수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폐하와 황후마마를 수호하라!”

어디선가 달튼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지켜 주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하! 도저히 상대가 안 되니 꼬리를 자르고 숨어 버릴 생각인가요?”

마리안느가 조롱하는 목소리 역시 또렷하게 들려왔다.

“좋아요! 마음껏 숨어 보시죠! 이 성을 다 부수고 으깬 후에 너희 시체를 건져 올리면 그뿐이니까!”

쿠웅.

등 뒤에서 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질주했을 뿐이다.

* * *

대부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덕분에, 성각까지의 길은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 성각에 도착했다.

성각에 들어서니, 사람 키만 한 활과 화살통이 유리 장식장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게 보였다.

“엇, 잠겼어요!”

유리 장식장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긴 채였다. 서둘러 자물쇠를 따야겠다……, 고 생각하기 무섭게, 카이사르가 검 손잡이로 장식장 문을 깨뜨렸다.

와장창하는 소리에 나와 레너드, 아고트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이, 이렇게 함부로 기물을 파손해도 괜찮은 건가요?”

“어차피 내 성의 내 물건 아닌가.”

카이사르가 장식장 안에서 활을 꺼내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잠깐만.

“왜 저에게 활을?”

“고백하지. 사실 난 활에 소질이 없어.”

“네에?!”

나는 카이사르 곁에 선 레너드를 휙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아시잖습니까, 마마.”

크으, 맞다. 페레스카는 원래 무인 가문이 아니다. 레너드야 특유의 노력과 내 가르침 덕에 검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다른 쪽은 젠병이다!

“그러면 아고트……, 는.”

나는 아고트 쪽으로 고갤 돌렸다가, 아고트의 우울한 표정을 확인하고 빠르게 단념했다.

아고트는 소질 문제를 떠나, 활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애였다.

뭐야.

여기,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란 말이야? 정말?

나는 낚아채듯 카이사르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들었다.

“화살, 얼마나 있어요?”

“한 발.”

“빗나가지 않게 기도나 해 줘요.”

책임이 막중하다.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맞히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과연 움직이는 걸 제대로 맞힐 수 있을까?

나는 성각 밖으로 나가 섰다. 용은 나보다 약간 아래쪽에서 빙빙 선회하며 공격할 이들을 노리고 있었다.

천천히 화살을 시위에 걸고, 깊이 심호흡했다. 그래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솔직히, 자신 없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니까.

시위를 당겼다. 활줄이 팽팽해졌다. 팔이 후들거려, 숨을 참았다.

‘그러고 보니 마리안느 발레르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활을 쐈지.’

다시는 내게 같잖은 협박하지 말라는 의미로 활을 쐈었다.

지금 그녀를 겨냥하여 쏘는 활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보일까.

“……핫!”

짧은 기합과 함께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화살은 마리안느를 맞히지 못하고, 용의 목덜미에 꽂혔다. 젠장.

“으아아, 다 틀렸어!”

나는 절망했다.

“괜찮아, 헬레나. 우리가 쐈으면 화살이 바닥에 추락했을걸?”

“폐하도 참, 지금 그런 위로가 무슨 소용이에요!”

“두 분, 피하십시오! 용이 이쪽으로 옵니다!”

화살에 맞은 용이, 우리를 공격 대상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용은 그대로 성각을 향해 날아들어, 머리로 성각을 들이받았다.

“꺄아아악!”

성각 지붕이 날아가고 벽체 일부가 무너졌다. 용의 머리가 성각 안쪽까지 파고 들어왔다.

“보내지 않겠다!”

카이사르가 검으로 용의 머리를 찔러, 용을 성각 바닥에 고정했다.

그런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용은 성각에 고정된 채로 날개만 퍼덕거릴 뿐 검에 꽂혀 다시 날아오르질 못했다.

“헬레나!”

카이사르가 외쳤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활을 쥐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그대로 용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 목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돌이 아닌 나무 재질에 박혔던지라, 화살은 쉽게 뽑혔다.

“무, 무슨!”

용의 등에 타고 있던 마리안느가 크게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용의 날갯짓이 만드는 돌개바람에 거칠게 흩날렸다.

화살촉은 무뎌졌고 내 팔은 후들거렸지만, 상관없다.

“이 거리라면 세 살 어린애도 당신을 맞힐 수 있어!”

나는 용의 머리에 올라서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마리안느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웃기지 마! 너 따위가 감히! 이 마리안느 발레르에게 감히!”

마리안느가 악을 썼다. 그녀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새빨갰다.

마리안느는 우아한 여성이었고, 그 본래의 성품과 상관없이 자애롭고 따뜻한 미소를 지을 줄 알던 여자였다.

그런 자신을 망친 건, 결국 그녀 자신임을 그녀는 아직도 모르는 걸까.

나는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빠르게 뻗어 나가, 마리안느의 가슴 한가운데 정확하게 박혔다.

화살의 속도에 못 이겨, 마리안느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법이 끊어져 구심점을 잃은, 가짜 용의 조각난 파편들과 함께.

* * *

바닥으로 추락한 건 마리안느뿐이 아니었다.

용 ―이었던 것― 이 와르르 분해되었을 때, 그 위를 밟고 서 있던 나 역시 몸의 중심을 잃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꺼져, 나는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허공을 향해 내던져졌다.

‘떨어진다……!’

이대로 추락하면 살아날 가망 따윈 없다.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뭐, 애초에 두 번째 인생에 큰 미련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죽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고 나니, 머릿속이 오히려 냉정해졌다.

어쩌다가 또 이렇게 열심히 살아 버린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번 생에도, 미련 따위는 없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헬레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내 귓가에 파고들었다.

카이사르가 날 향해 뛰어 들어왔다. 이미 허공에 내던져진 날 구할 방법은 없을 텐데.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허공에 뛰어들어 날 끌어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카이사르?”

아, 아니구나.

여기 있구나.

내 미련.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바닥으로 추락했다.

“폐하!”

“아가씨!”

레너드와 아고트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허공에 던져진 몸은,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아플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내가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듯, 자신의 몸이 아래로 향하게 자세를 바꿨다.

“괜찮아……!”

카이사르가 중얼거렸다.

날 안심시키려는 건지, 두려운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외국어 같기도 하고, 칠판 긁는 소음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우르(ᚢ), 에이와즈(ᛖ), 니드(ᛀ), 이스(ᛁ), 다에그(ᛞ)!”

‘……바람?’

바닥과 충돌하기 전, 아래쪽에서 강한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어왔다.

바람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안아 추락 속도를 늦췄다.

거기에 더하여,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우리를 받아 주었기 때문에, 2층 정도 높이에서 추락한 충격 정도로 그치게 됐다.

영락없이 온몸이 산산 조각날 줄 알았는데.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마마, 무사하십니까!”

바닥에 떨어진 직후, 사방에서 몰려든 기사들이 우리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을 각오였던 나와 카이사르는, 이 황당한 상황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두 분 모두, 괜찮으십니까?”

그때 비쩍 마르고 어벙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기사들을 비집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만 씨?”

“하아……, 다행입니다. 주문은 외우고 있었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바가 없어 순서를 틀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로만이 특유의 얼빠진 웃음을 헤헤 하고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 살았어…….”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카이사르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네. 살아 있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았다.

“마마.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뇨. ……좀 잡아 주세요.”

나는 달튼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엉망이 된 광장 바닥. 부서진 광장 기둥. 여기저기 널브러진 마수의 시체.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엉망으로 버려져 있는 마리안느 발레르.

“……끝났어.”

그녀와의 질긴 인연도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리안느의 시신에서 눈을 피했다.

* * *

마리안느가 사망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마리안느의 시신은 도성 밖에 버려졌다. 발레르에서 시신을 수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수습했다 해도, 반역자의 시신을 가족묘에 매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발레르가 치러야 할 장례는 마리안느만이 아니었다.

“사상자 목록입니다, 폐하.”

사건 이틀 후, 간신히 주변이 정리된 후에야 우리는 그날의 참혹한 기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카우치에 앉아 해밀턴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았다. 카이사르가 서류를 훑는 동안 해밀턴의 설명이 이어졌다.

“말씀하신 보상 문제는, 일전에 보고 드린 규모대로 차질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알겠다.”

“광장 보수는 적어도 반년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예산은 자문회에서 다시 책정하여 보고 올리겠답니다.”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하던 카이사르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그는 왼손만으로 서류의 페이지를 잘 넘기지 못해 끙끙대고 있었다.

결국 서류를 떨어뜨린 카이사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부인.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실례했습니다. 혼자 끙끙대는 폐하가 좀 귀여우셔서.”

“끙끙?! ……하아, 그래. 헬레나가 즐거웠다면 된 거지.”

카이사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아 서류를 넘겨 주었다.

카이사르는 지금 오른팔에 깁스를 했다. 용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을 때, 용의 몸부림에 어깨를 맞아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그래도 난 어디 부러진 데는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나도 여기저기 찰과상이 남았다. 갑옷도 갖춰 입지 않고 마음껏 날뛰었으니,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잠깐 멈춰 줘, 헬레나.”

일정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던 나는, 카이사르의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프란 그레이.’

이번 사건의 사망자 중 한 명.

국혼의 내빈으로 참석했던 프란은, 성벽 구석에서 마수에게 물어뜯긴 모습으로 발견됐다.

‘내빈들은 내측으로 피신했을 텐데, 왜 밖으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어미의 품에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광란과 복수심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해도.

마리안느는 나와 카이사르를 파멸하겠다며 그 일을 벌일 때, 자신의 금쪽같은 아들이 휘말려 죽게 될 거라는 걸 예상했을까?

“프란의 장례는 소예배당에서 조용히 치르는 게 낫겠지.”

카이사르가 담담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오히려 해밀턴이 깜짝 놀라 반박했다.

“예? 장례식을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어쨌든 황가의 핏줄이니까.”

“하오나 반역자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굳이 그에게 자비를 베푸실 이유는 없습니다, 폐하.”

“그런가.”

카이사르가 손가락으로 프란의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깊은 회한과 서글픔을 읽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나는 다독이듯 조용히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카이사르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가, 쓰게 웃었다.

“우린 그리 사이좋은 형제는 아니었다.”

“예, 압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지. 그냥, 서로를 잘 몰랐어.”

마리안느와 싸우던 그였으나, 정작 이복형제와는 이렇다 할 감정적 충돌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프란이 너무 어렸다.

“마리안느가 깔아 주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 그저 철없고 무지한 녀석이었을 뿐일 텐데.”

“그러나 폐하. 때로는 무지도 죄가 됩니다.”

“그리 생각하나?”

“자신의 평탄한 인생이 어떤 부조리 위에 만들어졌는지……, 그는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한 것뿐이니까요.”

“때때로 헬레나는 무서우리만치 단호할 때가 있어.”

카이사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카이사르는 열세 살 때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자신을 위협하는 주변과 싸우며 살아남았다.

지금 프란은 그때의 카이사르보다 나이가 많았다.

제 어머니가 자신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제 이복형에게 어떤 짓을 해 왔는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

“자비를 베푸시는 쪽이 마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폐하.”

나는 카이사르의 다리 위에 양손을 포개어 올려놓고 말했다.

“폐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폐하께서 옳으십니다.”

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비로소 안심이 된 듯, 카이사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해밀턴.”

“예, 폐하.”

“프란의 장례는 간소하게 진행하겠다. 의전관에게 그레이의 핏줄로서 예우를 다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나 프란은 황가의 묘지에는 묻히지 못할 것이다. 발레르가 원한다면, 발레르가의 가족묘에 매장하는 건 허락하겠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해밀턴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섰다.

약간 긴장했던지, 방에 단둘만 남게 되자 카이사르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나는 프란에게……, 복수할 생각은 없었어.”

카이사르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압니다.”

“마음이 좋지 않군.”

“가족을 잃었으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뿐일까?”

“그것 외에 뭐가 더 있겠습니까?”

카이사르가 날 향해 고갤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빛이 돌았다. 의지할 곳 없어 불안에 떠는 소년과 같은 눈빛이라, 나는 가만히 그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그가 어린애처럼 내 품에 고갤 파묻었다.

“폐하의 잘못이 아니니, 폐하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이유 따윈 없습니다.”

나는 카이사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아이 어르는듯한 그 손길에, 카이사르가 내 어깨에 고갤 더욱 파묻었다.

“혹여 누가 프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폐하께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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