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18/156)

16. 명멸하는 내일로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감으면 나의 과거가 선명한 형태를 띠고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생각에 골몰해져 도무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만약 마리안느의 저택에서 단테 레나투스와 만나게 되면, 난 그것을 베지 않으면 안 돼.’

물론 내 과거를 베는 것에 망설임이나 후회는 없다.

‘500년 전 죽었을 당시에도 그다지 미련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떠돌았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막연한 불안감이다.

난 무엇이 두려운 걸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군.”

어둠 속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 나는 옆으로 고갤 돌렸다.

바로 곁에 누운 카이사르가 잔뜩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혹시 저 때문에 깨신 건가요?”

“아니.”

“그런데 제가 깨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숨소리를 듣고.”

“숨소리만으로도 아세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카이사르가 웃었다. 가늘어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 잠겨 어딘가 몽환적이었다.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

“그냥……, 그냥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나는 그저 말을 얼버무렸다.

카이사르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다정한 손길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만약 이번에도 노에를 잡지 못하면, 그다음엔 정말 용이 부활하게 되는 걸까요?”

“만약 용이 부활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없앨 테니까 걱정 마.”

“무슨 수로요? 500년 전의 저도 끝내 없애지는 못했는데요.”

“없애지 못하면, 그땐 또 봉인하면 되지. 내 심장에.”

카이사르가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 나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화를 이어 갔다.

“……폐하. 전생에서 저는 서른셋에 죽었어요.”

“알고 있어.”

“그땐 그저 병이 깊어 그런 줄 알았어요. 젊은 시절 너무 애쓴 탓에 몸이 쇠약해진 탓이라고.”

특별히 질병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몸이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무섭거나 억울하지도 않았다.

약해져 가는 내 모습에 슬퍼했던 건 에레즈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 숨이 끊어지던 때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몸에 봉인된 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내 심장에 봉인하기를 권한 이는 마법사인 라벨이었다. 용의 힘을 억누를 만큼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용을 봉인할 땐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건가?”

“선례가 없었으니, 아마 봉인한 마법사도 그런 결과는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용이 사라지면 마법 역시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도, 라벨은 아마 몰랐던 거겠지.

알았다면……, 라벨은 과연 용을 봉인하려 했을까?

“설령 용이 부활한다고 해도, 폐하의 심장에 봉인하는 건 안 돼요. 제가 싫어요. 전 폐하가 아픈 것도, 일찍 죽는 것도 싫으니까.”

내 단호한 말에 카이사르가 쓰게 미소 지었다.

“아팠나?”

“네?”

“용이 심장에 봉인되었던 탓에 아팠던 건가?”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먼 옛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 그게 다 용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군. 아팠던 거군.”

그렇게 말한 카이사르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나는 순순히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제는 그의 품이 익숙하다 못해 안온한 느낌이다.

“아팠었구나, 헬레나.”

마치 어린애 어르듯, 카이사르가 말했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 말에 나는 실소했다.

“500년도 더 전의 일이에요.”

“그래.”

“폐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의 일이라고요.”

“그래.”

“그런데 어째서 사과하시는 거예요?”

카이사르가 날 안은 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헬레나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겠지.”

“엉터리네요.”

“응, 엉터리야.”

농담처럼 말하며 카이사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직한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을 텐데, 어쩐지 눈이 감겼다.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기대가 들었다. 불안이 이유 없이 찾아왔던 것과 같이.

* * *

아침에 깨어나 보니 곁에 카이사르가 없었다. 부스스 일어나 시각을 확인하니, 꽤 늦은 기상이었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아고트가 들어왔다.

“아, 일어나셨군요.”

“아고트. 폐하는?”

나는 일어나 앉아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두 시간 전쯤 본성으로 가셨습니다.”

“흐음……, 왜 안 깨운 거지?”

“어제 늦게 잠드셨다고, 푹 주무시도록 깨우지 말라 당부하셨거든요.”

커튼을 젖히며 아고트가 설명했다. 창문 너머에서 여름 햇살이 따갑게 들어왔다.

잠을 설치던 나 때문에 자신도 늦게 잠들었으면서, 더 자라고 깨우지 않을 건 또 뭐람.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 식당으로 내려간다고 전해 줘.”

“네, 아가씨. ……, 아, 아니. 황후마마.”

아고트가 재빨리 호칭을 정정하더니,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쑥스러운지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아고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아직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 자주 날 아가씨로 부르고는 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걸. 어쩐지 정겹다고 해야 하나. 옛날 생각 나서 그립다고 해야 하나.

“마마.”

물론 아고트와 달리 정중하고도 정확하게 호칭을 지켜 부르는 이도 있긴 하다.

나는 아고트와 교차하듯 방에 들어온 시녀장 셀즈를 쳐다보며 고갤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본성에서의 연락입니다. 식사 후에 폐하와 훈련하시는 연무장으로 와 주십사 하는데, 뭐라 전할까요.”

연무장?

‘카이사르……, 팔이 다 낫지 않았는데 검 훈련을 할 생각인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졌다.

“어떤 용건인지는 말하지 않고?”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고만.”

기밀?

나는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마리안느의 저택으로 떠날 준비가 된 거로군.’

함께 갈 기사들을 소개해 주려는 거겠지.

“정오에 가겠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셀즈가 꾸벅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크루세흐에 대한 일이 널리 퍼져 나가 봐야 좋을 것 없을 텐데, 어떤 녀석들을 뽑았을까?’

나는 큰 기지개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 중앙을 모아 올리고 말았다.

연무장에는 낯익은 얼굴이 상당수 모여 있었다.

“오오, 교관님, 아, 아니, 황후마마!”

가장 앞줄에 서 있던 호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 녀석은 시간이 흘러도 그 가벼운 말투며 행동이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다.

호크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내 등장에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황한 건 나뿐이다.

“아니……, 대체 왜?”

얼이 빠진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지도 못하고 곁에 선 로위나에게 질문했다.

왜 전 마수 토벌대 애들밖에 없는 거냐고!

“또 수련병들 끌고 가란 건가?”

내 투덜거림에 호크가 한껏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섭섭합니다, 마마! 이래 보여도 올해 기사 작위를 받았지 말입니다!”

“저도 받았습니다, 마마!”

“이제 수련병이 아니지 말입니다!”

너희들이 기사 작위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어! 물론, 좀 기특하긴 하지만!

어린애들이 자기 상장 자랑하듯 앞다퉈 자랑하는 것을 보며, 로위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설명했다.

“이 이상 ‘그것’에 대한 정보가 널리 퍼지면 곤란합니다. 이미 아는 이들을 움직이는 게 낫죠.”

적기사단은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을 확인할 때에도 도움을 줬다.

즉, 완벽하게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는 이들이었다.

로위나는 안경을 고쳐 쓴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마마께 마수 사냥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이들입니다. 경험도 있고요.”

‘하긴. 이 녀석들과는 합을 맞춰 싸워 본 적이 있지.’

대형 마수를 두 마리나 잡으면서 손발이 익은 이들이기도 했다.

나는 팀플레이는 소질이 없으니, 한 번이라도 함께 싸워 본 이들이 더 나을지도.

“그런데 이 녀석들, 기사 작위를 벌써 받아도 되나요?”

기사 작위는 매해 인원수도 한정되어 있고, 조건도 까다로웠다. 수련병만 10년을 해도 작위를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때 카이사르가 내 등 뒤에서 나타나더니,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이번 성혼식 때 들이닥친 마수들을 사냥할 때에도 공이 컸던 이들이다. 작위 정도는 내려 줘야 수지가 맞지.”

“폐하, 정말 최고이십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모인 녀석들이 카이사르의 등장에 환호성을 외쳐 댔다. 무슨 인기 많은 오페라 배우라도 나타난 줄 알았네.

“백기사단에서 가만히 있던가요?”

“호리오 일도 있는데, 지금 괜히 내 심기 건드려 좋을 게 있겠나.”

으음, 하긴 그렇군.

호리오 개인의 일도 그렇지만, 레너드에게 누명을 씌우려 백기사단 전체가 작당한 일도 있었으니까.

지은 죄가 있으니 이 특혜에 대해 말은 못 할거고, 자신들의 죄를 만회하려면 더 발버둥 치며 노력해야 할 거다.

“자아, 어떤가? 고심하여 고른 기사들이 부인의 마음에 드시는지.”

카이사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능글거리는 그의 태도가 얄미워 그를 찌릿 쳐다보았다. 카이사르가 내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옮겨, 연무장에 정렬하여 서 있는 수련병……, 아니,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내 시선이 닿으니, 장난을 치던 이들도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결국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이끄시는 것이니, 전 폐하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요.”

긍정을 의미하는 내 결정에, 긴장한 채 서 있던 기사들이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단순한 녀석들.

* * *

이튿날 새벽, 우리는 마리안느의 저택으로 향했다.

기사들과 더불어 레너드, 아고트, 해밀턴이 함께했다. 딱 마수 토벌 때의 구성이라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때 없던 이가 한 명 더 끼어 있기는 했다.

“로만 그리트를 데려가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카이사르는 마차 벽에 머리를 댄 채 불평을 하듯 말했다.

“그를 못 믿으시는군요?”

“난 원래 사람을 쉽게 안 믿어.”

카이사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는 깊이 주무시지도 못하시죠.”

“음, 아무래도……. 자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정적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그에게,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저도 예전엔 그랬어요.”

“예전? 어릴 때 말인가?”

“더 옛날이요. 아주아주 옛날.”

다시 태어난 후에도 한동안은 그랬다. 인이 박여서 쉽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폐하가 그런 날 향해 작게 웃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점을 닮았군, 우리 둘.”

“그러게요.”

“그렇지만 난 헬레나의 곁에서라면 푹 잘 수 있으니까, 내가 더 나은가?”

“제가 폐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서인가요?”

“내 적이 나타나면 헬레나가 다 무찔러 줄 것 같아서일지도?”

카이사르가 농담처럼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가 잠들 수 있을 장소가 단 한 곳이라도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라면, 더욱 기쁜 일이고.

나는 카이사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카이사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으쓱하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내 한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자,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 테니까.”

그제야 카이사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좋아. 사양 않고.”

카이사르가 얌전히 내 어깨에 고갤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차 안은 덜컹거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릴 뿐, 고요했다. 그의 숨소리가 시계 초침처럼 들려왔다.

‘졸려.’

잠들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 다행인 일이다. 그게 그라서, 더욱 기쁘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그의 머리에 살짝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 * *

마리안느가 유배당한 저택은 제국 북쪽, 더구나 산 중턱에 위치했다.

빽빽한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있어, 당연히 근처엔 인가 한 채 없다. 숲은 함부로 들어가면 길을 잃기 십상일 듯했다.

“이 지역은 여름인데도 바람이 제법 차군요.”

다 쓰러져 가는 저택의 어느 방.

나는 창가에 서서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창 너머에는 온통 나무뿐이라 풍광이 지루했다.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메마르고 엉망이었다.

‘유배지로는 딱이네.’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면 얼마 안 가 미쳐 버릴 게 분명하다.

‘하긴, 그 여자는 이미 미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이전의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던 마리안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미간을 찡그렸다.

“그만 이쪽으로 와서 앉도록 해, 헬레나. 여름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잖아.”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티 테이블에는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곳에 먼저 보냈던 수색대가 올린 보고서였다.

“로만 씨는 어디에 있죠?”

나는 자리로 와 앉으며 물었다.

“다른 녀석들과 저택 수색을 하고 있어. 마법과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과연 남아 있을까.

나는 ‘으음’ 하고 짧게 신음했다.

사건이 터지고 마리안느의 시종들을 잡아들였을 때, 이미 이 저택은 비어 있었다.

나도, 그리고 아마 카이사르도, 여기서 무언가 큰 단서를 얻는 데에는 이미 회의적이었다.

“수색대가 근처 도시도 탐문했는데, 최근 찾아온 이방인들이 며칠 전 한꺼번에 빠져나갔다더군.”

카이사르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나는 고갤 끄덕였다.

“드라코교의 신도들이겠군요.”

“음. 이미 이 도시를 빠져나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그래도 아예 허탕은 아니었습니다, 마마.”

레너드가 말했다. 나는 아직 그의 존대가 어색해서, 쓰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나온 거라도?”

“저택 지하에서 성혼식 때 나타났던 ‘용’을 만든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용을 만든 흔적이요?”

“으음. 부서진 가구며, 동물의 시체며, 잡동사니며, 그런 것들.”

카이사르가 덧붙여 설명했다.

나는 온갖 쓰레기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던 용의 모습을 새삼 떠올렸다.

카이사르도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이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기껏 목숨 붙여 놓아 줬더니 기어이 악행의 끝을 보았군.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야.”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붉은빛이 일렁이는 찻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리안느도 그렇거니와, 그녀를 홀려 일을 부추겼을 노에를 생각하니 뱃속이 뒤틀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야 만족할 셈이지.’

악의를 겹겹이 쌓아 올려 이룬 목적이 온전한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자는 그걸 모르는 건가.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는 생각하는데……, 도무지 잡히질 않네.’

초조함이 밀려온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픈 건가?”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고갤 들었다.

카이사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

“또 심장이 아픈 건가?”

아, 이런.

걱정을 끼쳤나 보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뇨. 그냥 좀……, 초조함 때문인지 고동이 가라앉질 않아서.”

사실 이 저택에 온 이후로 심장 고동이 가라앉질 않았다. 전력으로 달리기를 한 후처럼, 맥이 거칠었다.

‘가슴이 찌릿찌릿해.’

가라앉지 않는 맥박에 문득문득 가슴이 따끔거렸다.

초조함 때문이겠지.

노에를 잡을 단서를 얻지 못했다는 초조함 때문에.

‘……정말 초조함 때문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러나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심장 박동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마치 경고음처럼.

* * *

저택 내에서는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상의 끝에, 이틀 후에는 귀성하기로 결정이 됐다.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고요한 밤이 되니, 관자놀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시끄러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나는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홍차를 한 열 잔쯤은 마신 것 같네.’

심장 뛰는 것도 그렇거니와, 밤이 깊도록 이렇게까지 정신이 말똥말똥할 줄은 몰랐다.

나는 곁에서 잠든 카이사르를 흘끗 확인했다.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깊이 잠든 모양이다.

‘……바람 좀 쐬고 올까.’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가볍게 스웨터만 걸치고 방을 나섰다.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두운 복도에서 레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오십니까, 마마?”

“앗, 깜짝이야.”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레너드가, 놀라는 내 얼굴에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기척을 못 읽다니, 마마답지 않으십니다.”

“폐하 깨실까 봐 신경 쓰느라……. 그보다 우리 둘이 있을 때에도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거야?”

“이제는 황후마마이시니까요.”

으음, 하긴. 카이사르가 반말하라고 할 때에도 끝까지 존댓말을 쓰던 사람이었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레너드에게 말했다.

“페레스카 경. 이건 명령입니다. 단둘이 있을 땐 제 오라버니로 돌아와 주세요.”

“푸흐.”

레너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러면 오라버니로서 묻겠는데, 어딜 가려는 거야?”

“잠이 안 와서 산책을 좀 하려고.”

“그렇구나. 나도 잠이 안 오던 참인데. 그러면 같이 걸어도 될까?”

“기꺼이.”

레너드가 에스코트를 청하듯 팔을 내밀어,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팔짱을 꼈다.

우리는 파티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처럼, 팔짱을 낀 채 우아하게 밤의 복도를 걸었다.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헬레나.”

“응?”

“용의 부활을 막으면, 헬레나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거지?”

그 담담한 목소리에 난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너드는 내가 아닌 복도 저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부모님도, 오라버니도, 자세한 걸 묻진 않네.”

“네가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하다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잖아.”

레너드가 쓰게 웃었다.

“사실은 겁이 나는 걸지도 모르지.”

“겁이 난다고?”

“동화에 보면 그런 거 있잖아. 베 짜는 아내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더니, 학으로 변해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든가.”

“푸하하. 난 새가 아니야.”

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레너드가 다 자라서까지 그런 동화 속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어쩐지 사랑스러웠다.

“어쨌든, 그렇다는 거야. 괜한 호기심으로 잃고 싶지 않을 만큼, 넌 소중한 내 동생이니까.”

그렇게 말한 후, 레너드가 쑥스러운지 뺨을 긁적였다.

“이런 얘기, 이상해?”

“아냐.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나는 레너드의 팔에 고갤 기댔다.

“나한테도 내 가족은 소중해.”

이건 진심이다.

옛날의 나는, 분명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처음엔 마치 나와 관련 없는 이들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좋은 사람들이구나, 라는 것 이상의 감정이 없었다.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깨어날 꿈 같았다.

그렇지만 이젠 아니야.

‘가족’이라는 게 뭔지,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뭔지, 이제는 알고 있다.

나는, 헬레나 페레스카니까.

“형제라는 건, 좋은 거구나.”

내 혼잣말에 레너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에게는 내 말이 가벼운 농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잠이 좀 올 것 같아? 슬슬 돌아갈까?”

저택은 그리 넓지 않았고, 우린 어느새 복도 끝에 닿았다.

복도를 되돌아갈지 계단으로 내려갈지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서, 레너드가 내게 물었다.

“응, 돌아가서 그만 잘래.”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지만, 계속 복도를 왕복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레너드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이제 그만 되돌아가려고 했는데.

“……잠깐만.”

레너드가 문득 기척을 느낀 듯,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기척을 느꼈다.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인 창 너머에서, 분명 불빛 같은 것이 흔들리는 게 언뜻 보였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 걸 착각했나?’

나 역시 레너드와 나란히 창문 앞에 섰다. 창밖에서는 우웅우웅 하고 공기가 떨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뭔가 보여?”

“아니. 오라버니는?”

“글쎄, 나도…….”

착각한 건가?

“……엇.”

……아니.

착각이 아니다.

숲 저편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두 개가 깜박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방금, 봤어?”

레너드가 내게 물었다. 난 고갤 끄덕였다.

“산짐승일까?”

“모르겠어.”

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잠깐의 갈등 끝에, 창문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나가서 확인해 볼래.”

“내가 갈게. 그런 차림으로는 위험해.”

“검 가지고 올게.”

레너드의 설득에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레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그 허락의 신호에, 나는 옷을 갈아입으러 잰걸음으로 방을 향했다.

‘심장이 반응하고 있어.’

쿵, 쿵, 쿵, 쿵, 쿵.

심장의 맥동이 더욱 거칠어진 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심장 안쪽에서 주먹으로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잰걸음은 서서히 뛰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메아리쳤다.

* * *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무기를 챙긴 나는, 레너드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검은 구멍 같은 숲의 입구에 서서, 레너드가 내게 말했다.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어. 이 지역 사람들도 종종 숲에서 길을 잃을 정도라니까.”

“……응.”

“수색은 내일 낮에 해도 되니까 일단은 이 근처만……, 헬레나?”

레너드의 질문에 나는 퍼뜩 고갤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레너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그래? 당황한 것처럼 보여.”

그의 말대로다.

난 지금 혼란 상태다.

그럴 것이, 이 근방에 온 이후로 심장이 정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으니까. 너무 뛰어서 아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조잡한 용과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오래 아팠는데.’

그 탓에, 묘한 흥분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떤 기대가 내 등을 자꾸만 떠밀었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오라버니. 여기, 뭐가 있어.”

노에 라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정이, 점점 확신이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 순간, 레너드가 내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위험해!”

레너드의 등 뒤로 밀려나며, 나는 내 등 뒤에서 빠르게 접근해 오는 살기를 확인했다.

크고 검은 짐승이 안광을 흩뿌리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저건 짐승이 아냐.’

분명하다. 그것은 흑요견이다.

“하압!”

흑요견이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자, 레너드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레너드의 검 끝이 흑요견의 턱 밑을 베어 들어가, 흑요견은 이내 깨갱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마수?”

바닥에 널브러진 흑요견의 시체에 레너드가 중얼거렸다. 달려드니 베긴 베었으나, 마수라는 건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마수가 왜 여기에? 여긴 국경도 아닌데……!”

“왜 여기 있겠어? 빌어먹을 드라코교의 교주가 여기 있어서겠지.”

나는 내 검을 뽑아 들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오라버니. 흑요견은 혼자 다니지 않는 마수야.”

내 말이 신호가 된 듯, 사방에서 번뜩이는 수십 개의 안광이 우리를 향했다. 순식간에 우린 흑요견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나와 레너드는 등을 맞대고 서서 흑요견을 경계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뛴다.

그러나 이것은 마수나 용이나 그런 것들 때문만은 아니다.

피가 끓었다. 묘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여기, 내 적이 있다는 확신에.

“크워어엉!”

으르렁대며 다가오던 흑요견 무리에서, 한 마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끊고 달려들었다.

나는 그 흑요견을 베어 넘기려 자세를 낮췄다.

그러나 내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흑요견은 내 사정거리 밖에서 이미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예상치도 못한 다른 사람의 검에 의해.

“밤마실을 너무 멀리 나온 거 아니야, 헬레나?”

“……카이사르!”

이런. 너무 반가워서 이름이 튀어 나가 버렸다.

나는 뒤늦게 ‘헙’ 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카이사르는 오랜만에 듣는 제 이름이 기쁜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속없는 녀석.

“자, 그러면 이제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내게 설명 좀 해 주겠어?”

철컥. 카이사르가 흑요견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신호라도 된 듯, 수십 마리의 흑요견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커어엉!

내가 후려친 검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흑요견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방심할 수가 없다. 한 마리가 날아가니, 이번엔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

“저리 꺼져!”

짐승의 안광이 번쩍거리며 시야를 교란한다. 베고 베어도, 어디서 나오는 건지 흑요견이 끊임없이 달려 들어왔다.

나한테만!

아까부터 나에게만!

“제기랄!”

어쩐지 열 받는데, 이거!

정면에서 달려드는 흑요견을 베어 내려 자세를 잡는데, 내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카이사르의 검이 흑요견을 날려 버렸다.

난 죽을 것같이 힘든데, 카이사르의 표정은 꽤 여유로웠다.

“괜찮아, 부인?”

“괜찮아 보이시나요?”

“아, 그렇군. 난 꽤 괜찮아서.”

카이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얄밉게 씨익 웃었다.

그렇겠지! 넌 괜찮겠지!

흑요견들이 작정하고 나에게만 달려드니까!

다시 두 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 들어와,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각각의 흑요견을 날려 버렸다.

“긍정적인 면도 있어, 헬레나.”

“대체 어느 부분이요?”

“마수들이 한결같이 헬레나에게만 달려드니까, 공격 방향을 읽기 쉬워서 편하잖아.”

“내가 미끼냐고요!”

깨갱, 깽! 나는 검에 분노를 실어, 흑요견 두 마리를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아니 그나저나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벤 변경후의 영지에서 마수 토벌을 할 때에도 그 숫자가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횃불도 없는 한밤중이다. 야행성인 데다 민첩한 흑요견 무리를 상대하기엔 집중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조금만 더 버텨. 저택을 나오기 전에 아고트에게 기사들을 데려오라고 말해 뒀으니까.”

카이사르가 나와 등을 맞대고 서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 뒤를 온전히 맡기고, 전면에서 달려드는 흑요견을 상대하며 그와 대화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아신 거예요?”

“뭘 말이지?”

“제가 밖으로 나온 거요.”

콰드득, 내 검이 흑요견의 머리를 찔렀다가 뽑혔다.

“헬레나가 곁에 없어서 잠이 깼어.”

크헝! 등 뒤에서 카이사르가 흑요견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 아니에요? 잠이 깨서 제가 없어진 걸 눈치챈 게 아니라요?”

“난 헬레나가 곁에 없으면 잠을 못 자. 몰랐어?”

“세상에, 그렇게까지 제가 좋으신 거예요?”

“물론이지. 난 헬레나를 사랑해. 몇 번을 말해 줘야 놀라지 않게 되는 거지?”

“아니, 물론 알긴 하지만요.”

퍼억, 퍽. 대화를 하면서도 우리는 착실하게 마수를 상대했다.

이제는 카이사르도 나도 거의 기계적으로 흑요견을 베어 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측면으로 달려 들어오는 흑요견을 상대하던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만, 나중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집중을 못 하겠는데요.”

으음.

피가 튀는 살육의 현장에서 나누기엔 썩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었던가.

‘더구나 이제 슬슬 한계고.’

큰 무리 없이 마수를 쓰러뜨리고는 있지만, 숫자로 밀고 들어오는 데다 내 쪽으로만 집중적으로 달려드는 흑요견을 계속 상대하는 건 역시 힘들었다.

주변에 흑요견의 시체는 쌓여 가는데, 밀려드는 숫자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이대로라면 도무지 끝이 안 난다. 아니, 끝이 나긴 나겠지. 이쪽의 체력이 바닥나면.

“기사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

물론 체력보다 인내력이 먼저 바닥났지만.

나는 검으로 베는 게 아니라 몽둥이로 패는 느낌으로 흑요견을 때려눕히며 꽥 소리쳤다.

그때였다.

저택 쪽에서 가늘게 떨리는 외침이 들렸다.

“귀프(ᚷ)! 페오(ᚠ)! 페오(ᚠ)! 베오그(ᛒ)!”

해석할 수 없는 언어가 끝남과 동시에, 흑요견 열댓 마리 정도가 갑자기 저 혼자 허공을 날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집어다가 멀리 내동댕이치듯이.

그 기이한 현상에, 흑요견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사렸다.

“마마! 괜찮으세요?”

“아고트!”

나는 횃불을 들고 총총 달려오는 아고트를 발견했다. 그녀의 뒤로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야 왔군.”

카이사르가 뒷목을 쓸어내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유 있는 척했지만, 끝도 없이 밀려드는 흑요견의 공격에 그도 상당히 고전했던 모양이었다.

“저희가 왔습니다, 폐하! 마마! 안심하십시오!”

“마수를 때려잡자!”

“우오오오, 본때를 보여 주자!”

기사들이 눈을 빛내며 겁도 없이 달려왔다. 늦게 왔으면서 뭐 저리 신이 난 거야 싶어,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후로는 난전이었다. 이쪽의 인원수가 늘어나자 흑요견 무리도 당황한 듯, 주춤주춤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마, 다치신 데 없으세요?”

기사들이 내 앞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자랑하듯 날뛰는 사이, 아고트는 방해하는 흑요견들을 일격으로 베어 버리며 곧장 내 곁으로 달려왔다.

“응, 괜찮아. 기사들 데려오느라 수고했어, 아고트.”

“너무하세요, 마마. 밤 산책을 하시려면 절 깨우시지.”

아고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이 혼자 산책 가서 실망한 강아지 같았다.

조금 전 흑요견 머리를 날린 애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귀여움이다. 아고트, 널 어쩌면 좋니.

“흑요견들이 물러나는군.”

그사이, 난전을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도 싸우는 중인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슬슬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흑요견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하나둘 숲 저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에 남아 있는 흑요견은 죽은 흑요견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갈까요?”

레너드가 검에 묻은 피를 허공에 털어 내며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함정일 수도 있으니, 섣불리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지금은 한밤중이다.

야행성인 흑요견에게 더 유리하다. 때문에 나 역시 카이사르의 판단에 동의했다.

“이야아아……, 살면서 마수 볼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했는데, 요즘 계속 마수랑 마주치네요.”

그때, 저 멀리에서 어딘가 맥 빠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볼 것도 없이 로만이다.

로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흑요견의 시체를 조심조심 피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 있었어요, 로만 씨?”

“저쪽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어휴, 무서워서요.”

로만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말했다.

하긴, 이 유약한 남자가 난전의 중심에 있어 봐야 도움이 됐을 것 같지도 않고.

“아까 흑요견을 날려 버린 거, 로만 씨가 한 건가요?”

“아, 그거요? 보셨습니까? 아하하, 옛날에 책에서 읽고 외워 둔 주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위력이 세서 놀랐지 뭡니까.”

로만이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처진 눈꼬리가 정말 허술해 보였다.

“마법을 썼다고?”

반면 그에게 반문하는 카이사르는 어딘가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예에. 실은 그거 말고도 하나 더 시도해 봤는데, 그건 주문이 틀린 건지 제가 실수를 한 건지 구현이 안 되어서…….”

로만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방금, 지금 여기에서 마법을 사용했단 말인가?”

“네? 아, 네. 마력이 느껴져서,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력?”

“그, 예전에 폐하와 마마의 결혼식 때 광장에서처럼 말입니다. 마법사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테지만……, 어헉.”

뒤늦게 위화감을 깨달은 로만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경악했다.

그의 말을 들은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의 말이 사라졌다.

다들 겨우 눈치챈 것이다.

“이 근처에 용이……, 있는 걸까요?”

아고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카이사르가 ‘칫’ 하고 혀를 찼다.

“15분 안에 정비하고, 흑요견이 사라진 길을 추격해 숲으로 간다.”

카이사르가 낮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싸늘한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지배자다웠다.

기사들이 거짓말 같은 속도로 정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존명!”

* * *

나는 숲 한쪽에서 아고트가 챙겨 온 장비를 점검했다. 나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나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희들, 용과 싸우게 되는 걸까요?”

곁에서 내 시중을 들던 아고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니?”

“모르겠어요. 진짜 용을 본 적이 없어서요. 마마의 결혼식 때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무섭겠죠?”

“응, 그렇지.”

“후우…….”

아고트가 긴장이 되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갑옷을 갖춰 입은 카이사르가 곁으로 다가왔다.

“준비 끝났어, 헬레나?”

“네, 거의요.”

허리에 찬 검을 단단히 조이며 내가 말했다. 카이사르가 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각반을 좀 더 조이는 게 좋겠어.”

“아, 제가…….”

아고트가 나서려는데, 카이사르가 그보다 먼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내 부츠 위에 덧씌운 각반을 손수 매만져 주었다.

‘얜 자기가 황제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건가?’

아직도 내 앞에서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다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일순 나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버렸잖아.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아?”

카이사르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그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얼굴을 잡고 키스해 주고 싶을 정도다.

진정해, 헬레나.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네. 괜찮아요.”

내가 얼른 대답하니, 카이사르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아까 봤잖아. 무리 없이 검 휘두르는 거.”

흑요견 두 마리를 한꺼번에 날려 버리던 카이사르를 떠올리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은 다소 무리를 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카이사르와 같은 우수한 전력이 빠지는 건, 솔직히 좀 불안하니까.

“아고트. 가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고 와.”

내가 납득했다고 생각했는지, 카이사르가 곁에 선 아고트에게 명령했다.

아고트는 시중들 일을 뺏겨 불만 어린 표정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꾸벅 고갤 숙이고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총총 멀어져가는 아고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물었다.

“아고트는 왜 보내는 거죠?”

“아고트가 있으면 할 수가 없잖아.”

“뭘…….”

대답하기도 전에, 카이사르의 손이 내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린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가 재빨리 떨어졌다. 춉, 하는 가벼운 소리가 입안에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에도 어려울 정도의 짧은 입맞춤.

뒤늦게 멍한 얼굴로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더니, 카이사르가 그 붉은 눈을 휘며 능글맞게 웃었다.

“키스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길래.”

그게 보였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쩐지 창피함에 귀가 뜨거워진다. 밤이라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듯 괜히 카이사르에게 툴툴댔다.

“감히 스승을 놀리다니.”

“이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때와 장소를 가려야죠. 나처럼.”

난 참았다고. 얼굴 콱 잡고 키스하고 싶어도 참았단 말이야.

“나중에 혼날 각오나 하세요, 제자님.”

나는 건틀릿을 다시 조이며 다소 과장된 엄숙함으로 카이사르를 나무랐다. 내 반응에 카이사르가 ‘푸흐’ 하고 짧게 웃었다.

“네. 스승님께서 혼내시겠다는데, 얌전히 혼나야죠.”

카이사르가 장난스럽게 내 말을 받아쳤다.

“실컷 혼날게. 용을 막고 나면.”

응.

크루세흐를 없애고 나면.

우리는 긴장을 해소하듯 일부러 장난스러운 각오를 나누었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으나, 이제 그것은 앞으로의 전투에 대한 기대감처럼 느껴질 정도다.

“마마. 폐하. 기사분들의 준비가 다 끝났다고 합니다.”

곧 아고트가 되돌아와 소식을 알렸다.

다정한 미소가 머물던 카이사르의 표정이,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극과 극으로 바뀌는 그의 표정에 나는 기분 좋은 오싹함을 느꼈다.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나와 카이사르를 향해 돌아섰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폐하.”

“언제든 싸울 수 있습니다!”

기사들이 호기롭게 외쳤다.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면서 빛났다.

“엇, 저도 뭐……,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준비를 하긴 했습니다. 허허.”

로만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일한 마법사가 영 미덥지 않았으나,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함께 가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게 중요한 거겠지.

“좋아. 그러면 이동한다.”

카이사르의 단호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드디어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500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깨어나려 하는 용을 잠재우기 위하여.

* * *

도망친 흑요견을 추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두운 와중에도 흑요견의 흔적을 쉽게 찾은 덕분……, 은 물론 아니다.

숲 안쪽으로 다가갈수록, 간헐적인 심장의 통증이 더욱 격심해졌기 때문이다.

“이쪽이에요.”

어느새 나는 심장의 반응을 따라 앞장서서 기사들을 안내했다. 그런 내 곁에서 함께 걷던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나침반이 따로 없군.”

뒤따르던 기사들도 오묘한 표정으로 고갤 주억거렸다. 음, 이상한 별명이 더 붙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동굴 입구에 당도했다.

레너드가 얼빠진 표정으로 동굴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숲도 모조리 수색한 걸로 아는데, 이런 곳은 없었습니다.”

“아마 마법으로 숨긴 거겠죠.”

로만이 입구 주변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만지는 입구 벽에는 룬어가 새겨져 있었다.

카이사르가 깨끗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음’ 하고 짧게 신음했다.

“그런데 지금은 보란 듯 드러내 놓고 있는 건가.”

“유인하고 있는 걸까요?”

“그런 거겠지, 아무래도.”

내 의견에 카이사르가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다.

나는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봤다.

“함정이면 어쩌죠?”

“예를 들면?”

“우릴 내부로 끌어들인 다음, 입구를 봉쇄하고 공격한다거나.”

“만약 그렇다면, 일단은 돌아가는 편이 낫겠나?”

카이사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함정이든 뭐든 그냥 다 부수고 밀고 가는 게 속 편하긴 하겠네요.”

분명 있다. 이 너머에.

단테든, 노에든, 크루세흐든.

내 심장이 또렷이 반응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신중하기에는, 지금껏 신중함을 찾다가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적의 목을 벨 수도 있었을 순간들로부터 너무 많이 지나쳐 왔다. 이제는 고민하거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마마께서 다 쓸어 버리라 하시면, 쓸어 버릴게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고트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아고트의 결연한 태도에, 레너드와 호크도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폐하.”

“저희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교관님. 아, 아니, 황후마마.”

두 사람의 말에, 나는 등 뒤에 선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희미한 살기를 몸에 두른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엔 살기는커녕 투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녀석들인데.’

목숨 건 전투 한 번 해 본 적 없어, 어딘가 맥빠진 분위기의 기사들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이제 전투 앞에 기대 어린 긴장으로 무장한 이들을 보고 있자니, 짜릿한 쾌감이 들었다.

‘어르고 가르친 보람이 있군.’

이럴 수가. 아무래도 난 선생에 재능이 있었나 봐.

“가실까요, 존경하는 스승님.”

제일 고집 세고 능글맞은 나의 애제자가 내게 말했다. 고갤 들고 웃고 있는 표정이 오만하리만치 뻔뻔해서 딱 마음에 들었다.

“갑시다. 내 친애하는 제자님들.”

나는 두 자루의 검을 뽑아 양손으로 나누어 쥐며 웃었다.

* * *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동굴 안으로 접어든 지 삼십여 분.

“여기, 뭔가 있습니다!”

가장 앞서 걷던 호크가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모퉁이를 도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는……, 대체…….”

긴장을 유지한 채 앞서가던 레너드와 호크가 일순 긴장감을 흐트러뜨리고 중얼거렸다.

“바깥에서 볼 때는 이 정도 크기의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카이사르가 공간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동굴 깊은 곳에는 천장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돔 형태의 공간이 있었다.

종유석과 석영이 사방을 장식하고, 군데군데 온갖 보석이 박혀 반짝였다.

눈을 깜박했더니 완전히 다른 장소로 날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뭔가에 홀린 것 같다.

“이런 곳은 처음 봐요.”

아고트가 넋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이런 신비한 곳은 꿈에서나 보았다는 듯한 표정.

그러나 나는 이 장소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런 장소를 일찍이 알고 있다. 몇 차례, 와 본 적도 있었다.

부숴 본 적도 있었고, 약탈한 적도 있었다.

여기는―

“용의 둥지예요.”

나는 검을 더욱 힘주어 쥐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공간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누구냐!”

레너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검을 고쳐 쥐며 소리쳤다.

레너드의 말에 답하듯, 어둠 속에서 긴 지팡이를 든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검은 후드를 쓰고 있어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난 그가 누군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노에 라벨.”

“그렇습니다, 왕이시어. 이 미천한 자를 기억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노에가 후드를 벗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금발이 희미하게 빛났다.

여전히 유약하고 유려한 생김이었다. 10여 년 전, 축제 거리에서 만났던 그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오오……, 오오, 저, 전설의 인물을 실제로 뵙게 되다니…….”

모두 이를 득득 갈고 있는 가운데, 로만만이 경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헬레나.”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그런 날 붙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는 것으로 안심시킨 후, 가장 앞으로 나아가 노에와 마주 섰다.

신기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노에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였다. 감격에 찬 그의 미소가, 수면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네 목적은 크루세흐를 다시 되살리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용은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몸에 갇혀 있을 존재가 아니니까요.”

“용이 부활하면 수많은 인간이 죽고 다칠 텐데도? 과거, 용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이고 도시를 궤멸했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아뇨, 저도 잘 압니다.”

“안다면 용을 다시 깨우겠다는 짓을 획책할 리가 없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용은 사악한 존재. 마(魔)의 원류. 용은 인간을 해치고 말살하지요. 그러나 왕이시여,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사소해?”

내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반면 노에는 실로 차분한 목소리로 제 주장을 이어 갔다.

“네, 사소합니다. 용의 부활로 얻게 될 이득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용의 부활로 얻게 될 이득…….”

등 뒤에 선 카이사르의 혼잣말이 들렸다.

“용이 부활하면 마법이 다시 인간의 손에 돌아옵니다. 이는 실로 강력하고 위대한 능력이지요. 기껏해야 100년밖에 못 사는 인간의 생명과 달리.”

자신의 주장에 취한 듯, 노에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어 갔다.

“인간 수천이 죽는다고 인류가 멸망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강한 마법사는 역사를 바꾸지요. 뭘 선택해야 할지는 뻔한 것 아닙니까?”

“주객이 전도됐군. 그 강력한 힘도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텐데.”

“물론이지요. 이것은 결국 인간을 위한 일입니다, 왕이시어. 약간의 인간을 희생하여 다수의 인간이 번영을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노에가 활짝 웃는 얼굴로 양팔을 쫙 펼쳤다.

“위기 없는 인간은 도태될 뿐! 용은 인간을 위한 시련이며, 그 시련을 이겨 낸 자에겐 큰 능력을 부여하는 존재! 그러니, 제가! 그 위대한 종족을! 지금 여기서! 다시 부활시키는 겁니다!”

“……돌았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처럼 느껴졌다. 저 남자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언젠가 카이사르가 말했다. 사람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다 다른 법이라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다. 나도 그런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우선순위를 달리 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생각을 바꿀 여지는 없는 거로군.”

“왜 제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위한 선택인 겁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오른손에 쥔 검을 들어 노에를 겨누었다.

“……나 또한 더는 망설임 없이, 그대를 베겠다.”

철컹, 철컹.

내가 검을 듦과 동시에, 등 뒤에서 검을 고쳐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는 끝났다.

나는 내가 베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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