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왕을 맞이하라
노에가 숨을 거두고 얼마 후.
바닥에서 빛이 솟구쳤다.
수십 개의 빛나는 선이 회로처럼 바닥을 뻗어 나가, 나와 단테를 연결했다. 내가 선 자리 바닥으로 빛이 뭉쳤다.
그것은 마치 빛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 같았다. 사방이 빛의 가지로 가득 찼다.
“이게 뭐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가 선 자리에서 조금 물러났다.
그러나 빛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날 따라 이동했다. 뿐만 아니라 빛이 서서히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까지 했다.
“아, 안 끊어져요!”
아고트가 빛을 끊으려는 듯 바닥을 검으로 내리쳤지만, 빛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영혼이 단테에게 빨려 들어가는 건가……?”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당황했다는 뜻이다.
내 혼잣말을 들은 로만이, 자신에게 묻는 말인 줄 알았는지 대답했다.
“이 마법에 방향성은 없습니다.”
“방향성?”
“육체와 영혼이 합쳐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마마 안의 영혼이 단테에게 흘러들어 갈지, 단테 안의 육신이 마마에게 흘러들어 올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음, 현실감이 없다 보니 그리 놀랍지가 않다. 그냥 ‘어,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500년 전 크루세흐를 내 심장에 봉인하자는 얘길 들었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난 상상력이 빈약하단 말이야.’
그 탓에 남들이 보기에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침착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면 차라리 내 안에 있는 영혼이 단테에게 옮겨 가는 게 낫겠군요?”
“마마. 500년간 풀로 붙여 둔 종이를 떼어 내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찢어지겠죠. 괜히 물었네요.”
나는 ‘으음’ 하고 신음했다.
“그렇다면 둘이 합쳐지기 전에 한쪽을 파괴해 버리면 될 거 아냐?”
단테 앞에 선 카이사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검을 치켜들어 단테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의 검은 단테의 몸을 한 뼘 남겨 두고 허공에 멈춰 서더니, 공격했던 것만큼의 반동으로 카이사르를 밀어냈다.
“으악!”
“폐하!”
휘청거리는 카이사르를 레너드가 재빨리 부축했다. 나와 로만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방어 마법이군요. 예상은 했지만.”
“단테 황제의 몸에도, 마마의 몸에도 걸려 있습니다.”
“마법이 완성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반 시진 정도요.”
한 시간. 그 안에 뭐든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최우선은 방어 마법을 깨고 단테를 없애는 건데…….’
카앙! 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다시 고갤 돌렸다. 조금 전 튕겨 나간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카이사르가 다시 단테에게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여지없이 튕겨 나왔고.
“폐하, 그만 하세요. 소용없다잖아요.”
“그만둘 리가 없잖아!”
내 말에 카이사르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더니, 로만을 휙 째려본다.
“마법이라 해도 무력으로 깨뜨릴 수 있어. 안 그런가?!”
카이사르가 내뿜는 살기에, 로만이 기가 눌려 가볍게 딸꾹질을 했다.
“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엇, 하긴. 조금 전에 마마도 깨뜨리긴 하셨으니…….”
그래. 가능하긴 하다.
내가 노에의 방어 마법을 깨뜨렸던 것처럼, 무력으로 마법을 파쇄할 수 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마법사의 정신력을 교란할 필요가 있고, 그게 성공해도 어마어마한 무력과 요령이 필요하니까.
“할 수 있는 거면, 해내면 되지!”
그러나 나의 고집 센 제자께서는, 청출어람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투지로 다시 단테에게 달려들었다.
세 번째 시도의 결과도 뭐,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 내 남편은 하늘도 참 잘 나는구나.
“어, 어떻게 해요, 마마! 빛이 허리까지 올라갔어요!”
그사이 아고트가 울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말대로 빛은 차근차근 내 몸을 타고 올라가, 어느새 골반 가까이 닿아 있었다.
‘이 빛은 심장을 향하는 건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로만.”
“네, 마마.”
“혹시 용이 내 쪽에서 부활한다면, 다시 봉인할 수 있어요?”
“……네?”
“마마!”
로만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아고트 역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벌써 포기하시면…….”
“포기한 거 아니에요. 다각도로 대응책을 미리 생각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물론 최선은 단테를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카이사르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날고 있는 걸 보니, 단테의 방어 마법이 깨지길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최악은 단테 쪽에서 용이 부활하는 것.
그건 내가 어찌 손써 볼 도리가 없다. 후세들이여 뒤를 부탁한다, 하고 나는 먼저 눈을 감는 수밖에.
불가능한 건 빨리 포기하고, 가능한 걸 고민하는 게 낫다. 예를 들면, 내 쪽에서 용이 부활하는 것.
“내 쪽에서 부활하면, 내가 잠깐이라도 용을 억눌러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라벨은 용의 봉인 장소로 내 심장이 최적의 장소라 여겼다.
용을 억누를 강한 힘과 의지가 나에게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크루세흐를 봉인할 때의 주문이라면 자료가 있을 겁니다. 율리카 양에게 부탁하면 찾아 주겠죠.”
“가능하다는 거죠?”
“그렇지만 워낙 대마법이라, 실현 가능할지는…….”
“왜죠? 마력이 부족해서?”
“아뇨. 용이 부활하면 마력이야 충분하겠죠. 그게 아니라, 실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로만이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다지 필요 없는 솔직함이었지만.
하지만 이해는 간다. 지금 세대의 마법사들은 그런 대마법을 실현해 본 적 없다. 넘치는 마력을 퍼부어 줘도 망설여지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겸손과 겸양은 하등 쓸모가 없다.
“할 수 있는 거면, 해내요.”
나는 카이사르가 한 말을 빌려 로만을 다그쳤다.
“마마, 하지만…….”
“징징대지 말아요.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어요.”
로만이 ‘윽’ 하고 짧게 신음했다.
“할 수 있겠어요?”
“……해, 해 보겠습니다.”
“원하는 답이 아니네요.”
“으으……, 해내겠습니다.”
로만이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영 미덥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일단 지금은 그걸로 됐다.
로만을 설득한 후, 나는 단테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카이사르를 위시한 기사들은 방어 마법을 깨지 못해 허공을 자유 비행 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그게 부서집니까?”
나는 카이사르와 기사들에게 딱하다는 시선을 보내 주었다.
“헬레나……!”
땀 범벅, 먼지 범벅이 된 카이사르가 그제야 날 돌아보았다. 숨은 끊어질 듯 헐떡였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잔뜩 겁먹은 대형견이다.
‘뭘 겁내는지 아니까, 미안하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것도 다 요령입니다. 폐하는 살기를 발산하기만 하지, 집중하는 걸 못 하세요.”
“살기를……, 집중?”
“검기라고 하잖아요? 자, 잘 보세요.”
나는 단테의 정면에 섰다.
단테가, ‘내’가, 잘 만든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단테 역시 하반신은 이미 빛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나무 같았다.
나는 그 앞에서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순식간에 풀어놓은 살기가 대기를 흔들었다.
“큭……!”
기사들이 오싹오싹 몸을 떨며 내게서 뒤로 물러났다.
이를테면 맹수 앞에 선 먹잇감이 된 기분일 것이다.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정신적인 압박과 공포에 혼란스럽겠지. 살기란, 그런 거니까.
‘여기까지는 카이사르도 할 수 있는 일.’
나는 천천히 검을 들어 단테의 가슴 부근에 겨누었다.
“……하앗!”
흉흉하게 대기를 채우던 살기가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빠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법이 뚫리진 않았지만, 허공이 미세하게 갈라져, 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헉, 저게 뭐야!”
내가 내지른 검기는, 단테가 앉은 뒤쪽 동굴 벽까지 닿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체 일부가 폭발하며 붕괴했다.
“자, 봤죠?”
나는 들뜬 호흡을 다시 가라앉힌 후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카이사르의 얼빠진 표정이 날 향했다. 음, 어째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데.
“설마 우리더러……, 저걸 하란 말인가?”
“몇 번 연습하면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폐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카이사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네? 왜 못 하죠? 방금 보셨잖아요. 아니, 이렇게 천천히 보여 줬는데 이걸 왜 못 해?”
“크……, 큰일이다! 황후마마께서 우리의 교육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가르칠 시간도 없고, 다들 이 정도는 보면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았나?”
“마마, 저희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나도 일단은 평범한 인간이다만.”
기사들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불평을 터뜨렸다. 아아, 몽매한 제자들이여.
나는 카이사르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뭐, 저도 깨뜨리는 것까진 기대 안 해요. 작은 구멍만이라도 만들어 주세요.”
내가 속 시원하게 깨뜨리면 좋겠지만, 난 노에의 마법을 한 번 깨뜨린 통에 힘이 좀 빠진 상태다.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을 빼놓고 보면, 카이사르나 레너드가 나보다 무력은 더 나았으니까.
“하지만 금이 가도 마법이 금방 수복됩니다.”
레너드가 내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방금 내가 내리친 허공은, 금이 가 있던 것이 어느새 말짱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가 생각해 둔 작전을 이해한 듯, 한결 차분해진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틈새로 공격할 생각이군.”
방어 마법을 전부 다 부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파괴해야 할 대상은 단테 레나투스, 그중에서도 심장뿐.
“네. 구멍이 수복되기 전에, 그 틈새로 검기를 날릴 겁니다.”
한 점으로 모은 기는, 그 범위가 극히 좁은 만큼 힘의 농도가 짙고 강하다.
할 수 있다. 충분히.
“……좋아. 해 보겠어.”
“헉, 폐하!”
“스승께서 하라 명하시면 따르는 것이 제자의 도리다.”
경악하는 기사들에게 카이사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레너드 역시 깨달음을 얻은 듯,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고트는 이미 진작부터 살기를 한 점으로 모으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고.
‘말 잘 듣는 제자들이라 다행이네.’
나는 구멍이 나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고 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빛은 이제 내 명치에 닿아 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신 실패만 이어지던 그때였다.
“이젠 시간이 없어.”
카이사르가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야.”
카이사르가 우울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빛은 이제 내 가슴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이번엔 아고트, 레너드, 나, 이 순서대로 가자.”
카이사르의 말에 레너드와 아고트가 고갤 끄덕였다.
시도해 볼 사람이 셋뿐인 것은, 다른 이들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결과가 부진한 탓이었다.
‘뭐, 나도 쉽게 성공할 거라 생각 안 했으니까 로만에게 차선책을 얘기해 둔 거지만.’
“그러면……,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아고트가 비장한 표정으로 앞에 섰다.
“……하아앗!”
한참 정신을 집중하던 아고트가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검은 허공에 막혀, 아고트는 그 반동으로 몸이 멀리 날아갔다.
‘검기를 모으는 건 성공했는데, 너무 약했어.’
아마 집중력이 최고점에 달하지 않은 탓이다. 지금 아고트는 나에 대한 염려로 정신력이 약해져 있었다.
아고트가 날아가자마자, 레너드가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검은 허공에 걸렸고, 레너드도 튕겨 나갔다.
‘위력이 약했네. 아까워라.’
레너드는 ‘두루 잘할’ 정도로 늘 표준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그 말은, 못하는 쪽으로든 잘하는 쪽으로든 극에 닿는 건 힘들다는 뜻.
“폐하!”
그러나 레너드도 그 정도는 예상했던지, 바닥에 처박히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카이사르를 불렀다.
“알고 있어!”
마지막으로 카이사르가 검을 내질렀다.
‘……아.’
솔직히, 기대 안 했다.
카이사르는 팔을 다친 상태였으니, 평소의 기량도 다 보이지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내 판단 착오였나.’
카이사르는 제 팔을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가 내지르는 검은 너무나 빨랐고, 군더더기 없이 깨끗했고, 흔들림이 없고.
아름다웠다.
‘하긴, 저런 녀석이었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하는 데 거리낌 없는 남자.
나와 처음 검을 마주하던 그때에도, 그는 자신의 팔이 부러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새삼스럽지만, 널 만나지 않았다면 난 무료한 이번 생을 어떻게 견뎌야 했을까.’
단테가 앉은 뒤편의 동굴 벽이 엄청난 기세로 무너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의 먼지가 피어올랐다.
마법에는.
드디어 금이 갔다.
그토록 기다렸던, 작은 구멍.
“헬레나, 지금이야!”
카이사르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허공에 생겨난 빛의 금을 향하여 내 검을 내질렀다.
검기는 물길을 거슬러 나아가는 화살처럼, 공기를 찢으며 뻗어 나간다.
‘꿰뚫어라……!’
나의 검이 그 좁은 한 점을 꿰뚫고 나아갔다.
콰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가 검을 쥔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나는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과거의 내 심장에 더욱 깊이 검을 꽂았다.
“서, 성공이다!”
“마법이 뚫렸어!”
기사들의 환희 어린 목소리가 아득하다.
‘빛.’
그때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단테의 심장을 노려보았다.
바닥에서 타고 올라온 빛이 단테의 가슴까지 닿아 있었다.
내 검이 깊숙하게 꽂혀 있는 왼쪽 가슴 언저리에 말이다.
마법이 닿은 게 먼저였을까.
내 검이 꽂힌 게 먼저였을까.
* * *
푸른색 벨벳이 깔린 카우치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아무런 장신구를 하지 않은 은발이 허리 아래까지 굽실거리며 내려왔고, 살짝 아래로 뜬 눈동자는 은은한 옥색이었다.
아.
이건, 나구나.
처음에는 정면에 거울이 서 있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앉아 있는 카우치는 붉은색 벨벳이 깔려 있었다. 더구나 ‘나’는, 나와 전혀 다른 모양으로 움직였다.
“안녕.”
‘나’가 천천히 고갤 들어 날 바라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로구나. 날 기억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이상한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 짧은 인사로 ‘나’의 정체가 뭔지 깨달았다.
“크루세흐로군.”
“그렇다.”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크루세흐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것은 꽤 오싹한 경험이었다. 내가 전혀 나답지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말이다.
“왜 하필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해 본 일이 너무 오래전이라, 가장 익숙한 네 모습을 잠시 빌렸다. 잘 어울리지 않느냐?”
크루세흐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말했다. 표정이 꽤 즐거워 보였다.
나는 이 황당한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개꿈…….”
“이런, 유감이구나. 이건 꿈이 아니다.”
“그래? 그럼 나, 드디어 죽은 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충분히 해 두었기 때문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내 검이 단테의 심장에 닿는 것보다, 노에의 마법이 완성되는 게 좀 더 빨랐던 모양이지, 뭐.
그러나 크루세흐는 고갤 갸웃하며 내 말을 부정했다.
“너는 죽지 않았다, 인간이여.”
“안 죽었다고? 그럼 왜 내가 이러고 너와 마주 보고 있는 건데?”
“여긴 지난 500년간 내가 잠들어 있던 장소. 즉, 너의 이면 의식이다.”
엇, 그러니까……, 내 안이라는 얘기인가?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희미한 빛이 감돌긴 했지만,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공간에 불과했다. 천장도 까마득하여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넓네…….”
나는 한 단어로 내 이면 의식이라는 장소를 평가했다. 내 말이 마음에 든 건지, 크루세흐가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하고 작게 웃었다.
“마법이 조금 더 빨랐지만, 너의 검이 마법을 파훼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
“곤란하다고?”
“부활에는 실패했으나, 영혼만은 완전히 깨어나 버렸다는 의미다.”
“아, 그래. 그러면 내가 깨어난 후에 널 다시 봉인해 줄게. 500년 전처럼.”
내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내 제안이 크루세흐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크루세흐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고갤 갸웃했을 뿐이다.
“그리되면 좋겠구나.”
“뭐?”
“나 역시 영면을 방해받으면서 이쪽 세계로 끌려온 게 유쾌하지만은 않으니까 말이야. 다시 네 안에 잠들어 있다가, 너와 함께 영면에 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뭘 혼자 다 초탈한 듯한 말투로 말하는 거야?”
“그런가? 하지만 나는 감정을 모른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건 너를 통해 습득한 모습이겠지.”
내 모습이 저렇단 말인가.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보니, 되게 재수 없구나.
10살짜리가 인생 다 산 것 같은 말을 할 때, 날 지켜보던 부모님의 심정이 이랬을까. 새삼 반성하게 된다.
크루세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나의 육신은 너의 지난 육신과 함께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이 땅에 돌아오려면 억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용이 멸종했다는 것?”
“맞다. 달리 말하자면, 마법의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에가 그토록 막아 내고 싶어 했던, 마법의 소멸.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큰 두려움인지……, 마법사가 아닌 나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용이 없으면 마법도 없다. 반쪽짜리 내 힘으로 지금 너희 세대의 인간들이 봉인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까?”
크루세흐가 카우치에 몸을 깊이 묻으며 오만하게 미소 지었다. 크루세흐의 말은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명백하게 ‘절대 못 할걸’이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공존의 길도 나쁘지는 않다, 인간이여. 물론 나를 품고서 남들만큼 오래 사는 건 무리겠지만.”
“거절하겠어, 불법 세입자 씨.”
“하핫, 나라고 원해서 여기 입주해 있는 게 아니다만.”
크루세흐가 한쪽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는 네가 싫지 않다. 미개하지만 강하고, 어리석지만 아름답지.”
크루세흐가 악수를 청하듯 내 쪽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육신을 잃었고, 너는 시간을 잃었다. 이만하면 공평하지 않은가? 함께 망가져 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루세흐에게 다가갔다.
크루세흐가 단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은은하고 여유로운 미소에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내 얼굴로 그런 짜증 나는 표정 짓지 마.”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검을 손에 쥔다는 상상만으로, 내 오른손엔 어느새 검이 쥐여졌다.
이곳은 내 이면 의식. 내 의지대로 구현 가능한 세계일 테니까.
“너랑 편 안 먹어.”
푸욱, 내 검이 크루세흐의 가슴 한가운데 꽂혔다.
크루세흐가 날 향해 쓰게 웃었다.
“저런, 아쉽군. 그럼 이제부터 전쟁이구나. 이 좁은 육신에 너와 나 둘 다 함께할 수는 없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크루세흐는 모래로 화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그 모습은 사라지고, 바닥에 흰 모래만 수북하게 쌓였다.
크루세흐를 찌른 나의 검은 카우치의 등받이에 굳건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미간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힘껏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헬레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푹신한 베개와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에,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마마! 마마, 정신이 드세요?”
몸을 조금 뒤척이자, 곁을 지키고 있던 아고트가 불에 덴 것처럼 파들짝 일어났다.
“으으……, 몇 시야, 아고트?”
“한낮이에요! 잠시만요, 폐하께 보고를, 아니, 의사가 먼저인가? 어쨌든 잠시만요! 금방 다시 올게요!”
아고트가 허둥지둥 방을 뛰어나갔다. 헬레나는 아고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일단 양손을 살펴보고, 팔을 뻗어 살펴보았다. 마치 제 팔이 무사히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으, 온몸이 아프네.”
무지막지하게 움직였으니, 다소의 근육통은 어쩔 수 없다.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뒤통수의 혹은 뭐지?
헬레나는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이 파훼되면서 튕겨 나왔고……, 그때 바닥에 부딪쳤나?’
아무도 이 몸을 안 받아 준 것인가. 괘씸하기는.
얼마 후 문이 벌컥 열리고 아는 얼굴들이 차례로 방에 쏟아져 들어왔다. 맨 처음 헐레벌떡 들어온 건 카이사르였고, 그다음으로 레너드와 해밀턴이 들어왔다.
열린 문 너머 복도에는 호크를 위시한 기사들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헬레나! 헬레나,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불편한 데는 없는 건가?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배가 고프진 않으십니까? 뭔가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까요? 의사는 다녀갔나요?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동시에 질문을 와다다 쏟아 냈다. 헬레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둘을 쳐다보았다.
“하나씩 질문해 주세요.”
“뭐? 걱정한 사람 마음도 모르고 이 무미건조한 대답이라니……!”
카이사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경악했다.
“환자 방에 우르르 몰려와서 실례잖아요? 음, 일단 제가 지금 환자 역할인 건 맞죠?”
“아니, 헬레나는 늦잠을 잔 게으름뱅이 역할이야!”
“딱이네요. 기왕 늦잠 잔 거, 잠 좀 더 자게 다들 나가 주실래요?”
반쯤 농이 섞인 헬레나의 말에 그제야 다들 표정이 풀어졌다.
이런 말장난을 할 정도라면 괜찮다는 의미이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카이사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갤 숙였다.
그 무서운 늑대 폐하가 눈물을 글썽이다니. 해밀턴이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열려 있는 문을 닫았다.
헬레나는 자신의 손을 소중하게 꼭 잡고 있는 카이사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아무나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대답은 머리맡에 서 있던 레너드에게서 돌아왔다.
“마마의 검이 단테의 심장을 찌르고 얼마 후, 엄청난 힘이 마마를 날려 버렸습니다. 그 후 마마는 의식을 잃으셨고요.”
“그랬구나. 그때 강한 빛을 보았던 기억이 나.”
아마도 마법이 파훼되면서 헬레나의 몸을 날려 버린 거겠지.
“단테 레나투스의 몸은 어떻게 됐지?”
“검이 꽂힌 왼쪽 가슴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조각나서 흩어졌습니다. 마치 유리로 만든 인형이 깨진 것처럼요.”
“온몸이 조각나서……. 으음, 직접 안 봐서 다행이네.”
헬레나가 고갤 저으며 중얼거렸다.
단테가 크루세흐를 봉인할 때, 크루세흐의 육신도 조각조각 잘라 냈었다. 작게 잘라 내는 쪽이 봉인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에.
단테의 몸이 조각난 건, 아마 그 반동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얘기로만 들어도 끔찍한데, 실제로 보면 트라우마가 남았을 것 같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겠지, 헬레나?”
“네, 몸이 좀 찌뿌둥한 것만 빼면 괜찮아요.”
“다행이군. 그 후로 이틀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아서,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던지……!”
카이사르가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쥔 헬레나의 한 손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제 이마를 댔다.
헬레나는 카이사르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이 덩치 커다란 남자가 떠는 모습이라니, 낯설면서도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난 단테의 몸은 어떻게 했나요?”
“일단 모두 수거했어. 처분은 돌아간 후에 결정해야지.”
“성회에 돌려보내게 되나요?”
“아니. 성회는 단테의 관이 비어 있는 줄도 모를 테니까. 이제 와서 단테의 시신을 가져다줘 봐야 처치 곤란일 테지.”
“하긴, 그렇게 조각조각 난 시체면 더욱 그렇겠네요.”
“헬레나가 허락한다면 아예 태워 없애 버리는 게 어떨까 하는데.”
카이사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지금 헬레나와 단테가 전혀 다른 존재라 해도, 이전의 자신을 태워 없애는 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질문에 헬레나가 빙긋 웃으며 고갤 갸웃했다.
“뭐, 황성으로 돌아간 후에 천천히 생각해도 늦진 않겠죠. 어쨌든 용의 부활은 막아 냈잖아요.”
“그렇게 하시지요, 폐하. 마마께서도 아직 피로하실 테니, 이런 얘기는 너무 이릅니다.”
해밀턴이 헬레나의 말을 거들며 말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대답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해밀턴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말없이 헬레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을 덜덜 떨며 두려움과 안도를 표하던 조금 전과는 다른, 미세한 불안이 전해졌다.
카이사르와 눈이 마주치자 헬레나가 눈썹을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헬레나, 나는.”
“실례합니다.”
카이사르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아고트가 의사를 대동하여 나타났다.
나이 많은 의사가 자신의 조수와 함께 느릿느릿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진찰을 해도 되겠습니까, 폐하?”
“아, 그렇군.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진 않은지 꼼꼼하게 진료 부탁하네.”
“맡겨 주십시오.”
의사가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카이사르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헬레나를 쳐다보았지만, 그 이상 무언가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괜찮겠어, 헬레나?”
“물론이에요, 폐하.”
“진료가 끝나면 금방 다시 오지. 옆방에 있을 테니, 혹시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부르도록.”
카이사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헬레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카이사르가 방을 나서기 직전, 헬레나는 막 무언가가 떠올라 그를 불러 세웠다.
“참, 폐하. 여쭙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뭐지?”
카이사르가 흔쾌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트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죠?”
대답은 열린 문을 잡고 있던 레너드에게서 돌아왔다.
“아직 동굴에 남아 마법의 흔적을 분석 중입니다.”
“그렇군요.”
헬레나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의사와 아고트를 남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헬레나는 닫히는 문틈 너머로 복도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카이사르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어딘가 차분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떤 기분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까.
걱정. 염려. 두려움. 불안. 안도. 감격. 그리움.
연심.
‘카이사르가 저런 표정이었던가.’
곧 문이 완전히 닫혀, 카이사르의 모습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몸이 완전히 이전의 컨디션을 되찾기까지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은 의식이 깨어난 저녁 몸을 풀겠다며 정원에 나가 검을 휘두르는 헬레나를 보며 다들 혀를 내둘렀다.
황성으로 귀환한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어째서인지 카이사르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마차 창문 너머만을 응시했다.
“피로하신가요?”
결국 헬레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카이사르가 흘끗 헬레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듯 쓰게 웃었다.
“그래, 피곤해서일지도 모르겠군.”
카이사르가 손을 들어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좀 쉬세요. 마차가 멈추면 깨워드리겠습니다.”
“좋아. 부탁할게.”
카이사르가 완고하게 팔짱을 낀 채 마차 벽에 고개를 기댔다. 억지로 잠을 청하듯,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었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북쪽 지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 * *
황성에 도착해 여독을 풀기도 전에, 황제의 집무실에 요주의 인물들이 다시 모였다.
카이사르와 레너드는 의자에 앉았고, 해밀턴과 로위나는 서류를 잔뜩 들고 와 책상 앞에 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로만도 앉아 있었다.
‘크루세흐 토벌단이라고 이름 붙여야 될 것 같네.’
양손으로 찻잔을 들어 뜨거운 차를 마시며 헬레나는 생각했다.
“크흠. 일단 모두 모이셨으니, 이번 일에 대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해밀턴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노에 라벨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신이 죽으면 마법 발동의 트리거가 되도록 자기 몸에 주문을 새겨 넣었더군요.”
헬레나는 노에의 등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룬어가 떠올랐다. 문신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새긴 게 아닌 듯 보였다.
“어지간히도 열성적이었네요, 그 인간. 뭐, 결국 실패했지만.”
“천만다행이죠. 노에에 관해서는 계속 조사 중입니다만, 특이 사항은 아직 없습니다. 조사 후에 시체는 소각될 겁니다.”
그게 가장 안전하겠지.
괜히 시신을 남겨 뒀다가 단테의 경우처럼 엉뚱한 일에 이용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동굴 내부의 경우, 마법사 길드에 협조를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군. 길드에는 나중에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어.”
카이사르의 말에 로만이 활짝 웃으며 말을 보탰다.
“마음 써 주시니 황공합니다! 뭐 사실, 이번 조사는 상부상조이긴 하죠. 우리 길드에서도 진일보적인 자료를 축적하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만은 굉장히 신이 난 얼굴이었다. 이 모든 사태가 그에게는 그저 ‘자료 획득’ 정도의 기회로밖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교도들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행방불명 접수된 이들과 대부분 일치하더군요.”
“다들 무사하던가?”
“절반쯤은 이미 제물로 희생되어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쪽도 마법으로 세뇌당한 모양이라……, 좀 애를 먹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역시.”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어리석음만 탓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카이사르는 그것이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동정심, 이라는 거겠지.
헬레나는 덩달아 우울해졌다.
“흐음. 일단 진행 중인 건 이 정도고…….”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때 레너드가 한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구했다.
“노에 라벨은 크루세흐를 단테 혹은 헬레나의 안에서 부활시키려 했던 거죠?”
“으음, 마법을 해석한 결과로는……, 그렇습니다.”
“왜입니까?”
레너드가 던진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느라, 다들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다행히 레너드는 상냥한 사람이라, 금방 보충할 말을 덧붙였다.
“용의 육신을 구현하지 않고 굳이 인간의 몸에서 부활시키려 한 이유가 뭐죠?”
“엇……, 글쎄요. 마법적으로 불가능했다든지?”
“그러기에는 성혼식 때 조잡하게나마 용을 만들어 냈잖습니까.”
레너드의 의문에 여기저기서 ‘으으음’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들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끝내 대답이 나오지 않자, 헬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용 상태로 부활해 봐야 소용없었을 테니까.”
“……뭐?”
모두의 시선이 헬레나에게 집중됐다.
헬레나는 다소 거만한 자세로 설명을 이어 갔다.
“암수 한 쌍도 아니고 크루세흐만 부활해 봤자, 멸종을 유예 시킨 것밖엔 안 되잖아.”
“설마 인간을 숙주 삼아 번식까지 하려 했다는 말인가?”
카이사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헬레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추측입니다. 대답해 줘야 할 마법사가 죽었으니, 진실은 알 수 없죠.”
그러나 노에 라벨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않았을까.
노에가 원한 건 자기 자신이 마법사로 활약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었다. 마법사라는 종 자체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길어야 천오백 년 남짓 사는 용 한 마리만 부활시켜서야 성에 안 차지.’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후세는 힘이 약해지겠지만, 어쨌든 용은 멸종하지 않게 될 테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변태적으로 치밀한 마법사였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헬레나는 어떻지?”
“저요?”
“계속 용의 영혼을 품고 있다가는, 단테 황제처럼 수명을 갉아먹게 될 것 아닌가?”
헬레나는 ‘으음’ 하고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제 안에 있는 건 온전한 용은 아니니까요. 괜찮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은 아니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걸요.”
헬레나는 어떻게든 카이사르의 질문을 무마한 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전 조각난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한걸요?”
기습 질문에 해밀턴이 허둥지둥 다시 서류를 살폈다.
“아, 단테 황제의 시신 말이죠. 그거라면 지금…….”
“자, 오늘은 이쯤 하지.”
해밀턴이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카이사르가 그의 말을 막았다.
모두 당황하여 카이사르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들 여독도 풀지 못한 상태야. 급할 것 없잖아?”
이유치곤 빈약하다.
그러나 누가 황제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는가.
결국 첫 보고회는 어딘가 찜찜하게 끝이 났다.
* * *
그날 밤, 카이사르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
헬레나는 먼저 잠이 든 척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카이사르는 침대맡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카이사르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카이사르가 곁에 누운 순간, 헬레나가 벌떡 일어나 카이사르 위에 올라탔다.
“늦으셨네요, 폐하.”
헬레나가 가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성을 비운 사이 밀린 일이 많았거든.”
카이사르가 헬레나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용에 관한 일은 무사히 다 끝났잖아요?”
“그래? 다 끝난 걸까?”
“마법사도 사라졌고, 용의 육신도 파훼됐고,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헬레나의 손길이 카이사르의 벌어진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으로 가슴 위에서 희롱하듯 더듬다가, 카이사르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큭.”
어깨를 꾹 누르자, 카이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다친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은 탓이다.
“무리하시니까 그렇죠.”
“그래, 반성하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사태였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말이야.”
“폐하는 예전부터 고집쟁이셨으니까요.”
헬레나는 능란하게 손을 놀려 카이사르의 웃옷을 벗겼다. 곧 근육이 골고루 잡힌 카이사르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아랫배 쪽을 꾹 누르며 웃었다.
“이런, 오늘따라 적극적인데.”
“이제 마음에 거리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전엔 거리낄 게 있었나?”
“크루세흐를 막는 데 실패하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뺨을 쓰다듬었다. 카이사르의 커다란 손이 쓰다듬는 헬레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니면 제가 유혹하는 걸로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신가요?”
헬레나가 하늘거리는 네글리제의 가슴에 교차하여 묶인 리본을 당겼다. 끈이 스르륵 풀리며, 꽉 조이고 있던 가슴 앞이 벌어졌다.
“동하지 않을 리가.”
카이사르가 씩 웃더니, 헬레나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헬레나가 장난스럽게 ‘꺅’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됐다.
카이사르는 손등으로 헬레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헬레나 페레스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에 대해 내가 말했던가?”
“말은 이제 됐어요. 전 폐하의 몸에 물어보고 싶은걸요.”
“애가 달았군.”
“언제나 그렇죠.”
“그 전에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뭐죠? 기쁘게 듣겠어요.”
카이사르가 천천히 헬레나에게 다가왔다. 키스를 하려는가 싶어, 헬레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키스는 없었다.
카이사르는 그대로 헬레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속삭이듯 물었다.
“당장 내 여자를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지만, 분노가 꾹꾹 압축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다시 고갤 든 카이사르를, 헬레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폐하?”
살기를 한 점에 집중하는 걸 배워서 이런 식으로 써먹다니.
붉은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살의에, 헬레나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헬레나가 베개 밑에 감춰진 단검을 뽑아 카이사르에게 휘둘렀다.
카이사르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했다. 단검은 허공만을 갈랐다.
앞섶을 풀어 헤친 헬레나가 침대에 앉아 씨익 미소 지었다.
“이상하다? 똑같이 잘 따라 했던 것 같은데?”
“큭!”
헬레나의 검이 다시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요령 좋게 공격을 피했다.
눈치챌 리가 없을 텐데.
헬레나 페레스카가 이 세상에 생긴 이래,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냈는데.
“그런 것치고는 어설픈 게 한둘이 아니던데!”
푸욱. 검이 매트리스에 꽂힌 순간, 카이사르는 재빨리 헬레나의 양손을 잡고 침대에 넘어뜨렸다.
발버둥 치는 헬레나를 상대로, 카이사르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단테의 시신을 태워 없애자고 했을 때, 반대하는 걸 보고 의아하긴 했지.”
“뭐? 대체 왜?”
“헬레나는 처음부터 단테를 없앨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화근을 내버려 두자 할 리가 없으니까.”
“겨우 그것 때문에 날 의심했단 말이야?”
“그것뿐은 아니지. 마차에서 어깨를 빌려주지 않았던 것도, 노에를 자꾸 ‘마법사’라고 칭하는 것도, 로만 그리트를 ‘그리트 씨’라고 불렀던 것도, 의심스러운 게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그래 봤자 모두 사소한 것들 아닌가. ‘이상하다’ 하고 고갤 갸웃하고 지나칠 만한 일들 아니었다.
“무엇보다 헬레나는 관찰하듯 사람을 빤히 쳐다보지 않아. 남에게 관심이 별로 없거든.”
아. 자신이 그랬던가.
헬레나가 고갤 갸우뚱했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신기했으니까.
헬레나는 워낙 감정이 얕은 인간이었다. 헬레나를 통해 배운 감정도 다채롭고 벅찬데, 그 이상의 감정으로 매 순간 흘러넘치는 인간들은 오죽했으랴.
“아, 잘 속여 넘긴 줄 알았는데.”
헬레나가.
아니, 크루세흐가 입을 가로로 길게 찢어 웃었다.
“헬레나는 어디 있어!”
“글쎄.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잠이나 자고 있지 않을까?”
“당장 돌려줘! 지금 당장!”
카이사르가 헬레나의 어깨를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헬레나는 흔들면 흔드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그 정도로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인간이여어―”
“헬레나! 헬레나, 눈을 떠!”
카이사르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꽤나 애달팠다.
애달프다, 라는 건 이런 거구나. 말이 닿는 모든 피부가 간지러워지는 것만 같다. 한쪽 가슴이 자글거리며 끓어오른다.
“헬레나!”
연심.
이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또 전혀 새로운 색을 뒤집어쓰고 쏟아진다.
연심이라는 게 이렇게 날카롭고 아프기도 하구나. 거칠고 투박하기도 하구나.
인간은 알면 알수록 미지의 존재다.
“헬레나 페레스카!”
헬레나는 눈을 감았다.
의도적으로 분리한 의식이 천천히, 검은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가장 밑바닥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공간이다. 서로 다른 색의 카우치 두 개가 마주 놓여 있었다.
푸른 카우치에는 검이 꽂혀 있고, 붉은 카우치에는.
이미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질척한 늪에 빠졌다가 건져 올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멈춰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나는 팔을 뻗어 눈앞의 카이사르를 정신없이 끌어안았다.
“카이, 사르……!”
뻣뻣했던 손발이 말초부터 찌릿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 옅은 통증이,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는 듯했다.
나는 돌아왔다.
내 의식 깊은 곳에서, 다시 현실로. 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 * *
크루세흐가 내 몸을 차지했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그건 말로 설명 못 할 정도의 공포였다.
크루세흐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 동안, 나는 물속에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헤엄쳐도 수면 위로 조금도 가까워지질 않았다.
내가 영영 잊히는 줄 알았다.
다들 날 찾지 않을 줄 알았다.
“헬레나!”
그러니 그 어둠 속에서 카이사르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헬레나 페레스카!”
환청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 카이사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빛이 일렁거리는 위쪽을 향하여 팔을 뻗었다. 거리가 아득해 손은 수면에 닿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쭉 뻗은 순간, 누군가 강하게 내 손을 잡고 물 밖으로 끌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카이, 사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날 꺼내 주었다는 것을.
나는 카이사르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의식의 밑바닥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목구멍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폐에 공기가 차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숨 쉬어, 헬레나. 괜찮아. 이제 괜찮아.”
카이사르가 나를 위로하듯 내 등을 쓸어내리며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의 느린 손길에 맞춰, 내 호흡도 간신히 진정되어 갔다.
“왜……, 왜 더 빨리 못 알아챈 건데! 영영 못 돌아오는 줄 알았잖아!”
진정이 되고 나니 벌컥 화부터 나온다. 그에게 화낼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덜덜 떨리는 몸을 들키고 싶지 않아 오기를 부린 건지도 모른다.
“그러게. 미안해.”
카이사르는 내 부당한 분노를 듣고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욱 끌어안아 주었을 뿐.
“그렇지만 내가 널 못 알아볼 일은 없어.”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 말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던 두려움을 한순간에 밀어냈다.
나는 카이사르의 어깨에 고갤 박은 채, 입 안쪽을 짓씹었다.
“다시는……, 이런 더러운 경험 하고 싶지 않아……!”
크루세흐, 이 거지 같은 파충류 새끼.
반드시 갈아 없애 버리고 만다, 내가.
* * *
나는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소집된 인원은 지난번 보고 회의 멤버 그대로다.
사실은 대책 회의를 빙자한 나의 억울함 토로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다들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크루세흐와 관련된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테이블을 탕탕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모인 이들 모두가 찔끔한 표정이 됐다.
“그렇지만 정말 위화감이라고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어서…….”
해밀턴이 웅얼거리며 변명했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더니 냉큼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폐하와의 분위기가 뭔가 어색해서 의심은 했지만…….”
레너드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진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장 커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갤 떨군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마마! 저는 마마의 오라비로 남아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자격은 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모님이 부여해 주시는 거예요.”
평소라면 우리 오라버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하며 편들어 줬겠지만, 오늘은 괘씸하니 그런 거 없어.
나에게 처음으로 차가운 지적을 받자, 레너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차라리 벌을 내려 주십시오!”
“좋아요, 페레스카 경. 벌을 내리죠. 당분간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건 금지예요. 무심코 용서해 주고 싶어지니까.”
“그런 가혹한……!”
“자작님도 당분간 취침 시간 빼고 언제나 폐하와 동행하세요.”
“네?! 너무 심하십니다, 마마!”
“뭐?! 덩달아 피해를 입게 된 내 인권은 누가 챙겨 주지?!”
해밀턴과 카이사르가 동시에 소리쳤지만, 나는 콧방귀로 대답해 줬다.
“참고로 아고트는 앞으로 일주일간 제 시중 금지의 벌을 내렸어요.”
“어찌 그리 잔인한 벌을……!”
곁에 앉은 카이사르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아고트는 그 명령을 듣자마자 엉엉 울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세상 멸망의 통보라도 들은 줄 알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로만이 몸을 들썩거리며 한 손을 들었다.
“아, 혹시 저는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 마마?”
“로만 씨는……, 으음, 로만 씨는 없어요.”
“네? 왜죠?”
“저의 이상을 눈치채야 할 만큼 우리 사이가 가깝진 않으니까요.”
“엇, 그건 좀 슬픈 이유로군요! 소외감이 드니 저도 뭔가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람. 내가 주는 벌이 벌처럼 안 보였나.
“그래요? 앞으로 크루세흐 관련 조사에서 얻게 될 마법적 자료 열람을 금지시켜 줄까요?”
내가 협박하듯 물었다.
로만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표정이 됐다.
내가 아무렇게나 벌을 주는 것 같지만, 벌 받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고통을 선사해 주는 거란 말이다.
“헉.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빠른 깨달음, 훌륭하군요.”
흐음.
화풀이는 이만하면 됐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새로운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서……, 제 안에 아직 용의 영혼이 남아 있는데 말이죠. 알다시피, 자꾸 제 몸을 차지하려 들고요. 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어두운 주제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들 이렇다 할 답이 없는지, 서로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허공만 응시했다.
나와 같은 카우치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카이사르가 일단 가볍게 화두를 던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봉인인데. 가능하지 않나, 그리트?”
카이사르가 눈썹을 으쓱하며 로만을 쳐다봤다.
“그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500년 전에 사용한 봉인 마법이 전승되고 있다 하지 않았나?”
“그 봉인 마법은 규모가 상당합니다. 즉, 마력을 많이 필요로 한단 뜻이죠.”
“용의 영혼이 아직 남아 있으니 마력은 충분할 것 같은데.”
“지금의 크루세흐는 육신이 파괴된 반쪽짜리라, 봉인 마법을 실행할 정도는 못 됩니다.”
뭐, 예상 범위 안이다.
이면 의식에서 크루세흐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미 들은 내용이기도 했고.
“봉인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
“확정적인 말씀은 못 드립니다. 다만 이전에 사용했던 봉인 마법은 확실하게 불가능합니다.”
“그 말은, 새로운 봉인 마법으로는 가능하다는 건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으면요.”
로만이 느리게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새로운 마법을 만들면 되겠네요.”
“마마는 늘 모든 걸 너무 쉽게 말씀하십니다…….”
로만이 씁쓸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로만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짐작한다.
지금 시대는 마법사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다. 당연히 마법에 관한 연구도 많이 쇠퇴했다.
새로운 마법 주문을 척척 만들어 낼 만한 인재가 있을 리 없다.
“봉인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됩니까? 설마 또 크루세흐가 마마의 몸을 차지하게 될까요?”
해밀턴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뭐……, 그렇지 않겠어요?”
말꼬리가 올라간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런 걸 어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