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20/156)

18. 너의 세계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이 상황의 원인은 고민해 볼 것도 없다.

크루세흐가 문제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 상대의 검이 박살 났고, 조금만 힘을 주면 사람이 날아갔고, 약간 방심하면 건물 기둥이 날아갔다.

이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마마, 목숨은 소중한 것인지라, 대련은 불가할 것 같습니다……!”

나와의 대련에 신나 하던 기사들이, 대번에 기가 꺾여 항복을 선언하는 것도 책할 일이 아니다.

나라도 검 한 번 휘둘러서 대리석 바닥 쪼개 놓으면 움찔하긴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내 스트레스는 어디서 풀란 말인가!”

내 절망 어린 탄식에, 멀리 날아갔던 호크가 허리를 짚고 서서 꽥 소리쳤다.

“사람 잡으면서 스트레스 푸실 생각이시냐고요!”

아, 끝이야.

내 스트레스는 누가 해결해 주냐고!

문득 푸른 카우치에 누워 낄낄거리며 이 상황을 즐거워할 크루세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면 의식인지 어딘지 다시 찾아가서 한 대 패 주고 싶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됐다.

* * *

“아침에 이상한 얘길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함께 정원 산책을 하던 카이사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먼저 운을 띄웠다.

카이사르와의 아침 정원 산책은 매일 반복되는 일과 중 하나다.

대개는 시답잖은 가십이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친애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헬레나의 별명이 ‘폭군 황제보다도 더 무서운 마왕님’에서 ‘검 한 자루로 세계를 제패할 검신(劍神)’으로 그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간 것 같던데.”

오늘의 주제는, 나인가 보다.

“뭐예요, 그 유치한 별명……!”

분명 발원지는 호크 녀석이겠지.

달튼에게 말해서 훈련량을 두 배쯤 늘려 달라고 해야지, 그 자식.

“적기사단장이 그 얘길 듣고 미친 듯이 웃어 대다가,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어 기어코 피를 봤다고 하더군.”

달튼, 당신마저!

“당분간 적기사단장실엔 안 갈래요.”

“그 별명이 싫은 건가?”

“유치하고 오글거리잖아요. 검신이 뭐예요, 검신이.”

“잘 어울리고 멋진 별명인 것 같은데.”

“500년 전에도 그런 오글거리는 별명으론 안 불렸어요!”

내가 꽥 소리쳤더니 카이사르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좀 궁금한걸. 단테 레나투스의 별명은 뭐였지?”

“음……, 용 사냥꾼?”

“으음. 너무 의미 그대로의 별명이라 재미가 없는데.”

“남들 재미있으라고 그런 놀림 받고 싶지 않거든요?!”

“푸하하핫!”

내 반박에 카이사르가 큰 소리로 웃었다.

어느 부분이 웃긴 거야.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큰 소리로 웃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나도 모르게 카이사르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크게 웃으니, 날카로웠던 인상이 부드러워진다. 올라간 입꼬리도, 가늘어진 눈매도, 순진한 소년 같았다.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조금 아련한 기분이 들어, 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말인가?”

“요즘 사실 웃을 일이 별로 없었잖아요.”

계속 몰아치는 버거운 일을 해결하기에 급급했으니까.

원래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어쩐지 내 일로 힘들게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결혼하고 나면 폐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딱히 궂은 일 한 기억은 없는데.”

“저 때문에 자꾸 피를 묻히게 되시는 것 같아서.”

카이사르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게 미안해져, 나는 시선을 정면으로 보냈다.

여름의 정중앙을 지나는 계절에, 정원은 온통 푸르렀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계절도 이만큼 지났구나, 새삼 놀라게 된다.

“그 정도로 미안해하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네? 왜죠?”

“헬레나가 겪고 있는 일을 내가 대신 감당해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폐하 탓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늘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내가 헬레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적으니까.”

카이사르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예전의 나라면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네 일은 네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지. 왜 내 문제를 네가 대신 겪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거야? ……라고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안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나도 카이사르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그 마음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나는 슬그머니 카이사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단단히 팔짱을 꼈다.

“……헬레나?”

평소와 달리 먼저 다가간 내가 의외였던 듯, 카이사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난 카이사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딱 잘라 말했다.

“앞에 봐요, 앞에.”

“……부끄러워하는군. 왜지?”

“아이참, 앞에 보라니까요.”

“하지만 목덜미가 빨개졌는데.”

카이사르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날 놀려 댔다.

나는 꽥 소리라도 쳐 주려고 카이사르를 향해 고갤 돌렸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건,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카이사르의 얼굴이었다.

우와, 나한테 부끄럽냐는 둥 놀려 대더니, 실은 자기가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가?

……어쩌지. 내 남편이 좀 과하게 귀여운 짓을 하는데.

“폐하.”

“뭐지?”

“잠깐만 시종들 물리고 으슥한 곳으로…….”

카이사르의 팔을 꾹꾹 당기며 내가 말했다. 용케 알아들은 카이사르의 눈빛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러나 우리의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금세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앗, 폐하! 마마!”

산책로 반대쪽에서 로만과 로위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로만이 우리 둘을 발견하더니,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손을 흔들어 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리 늦게 오십니까, 두 분 다!”

로만이 눈치를 말아 먹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마법사들.

마법사들이 문제야!

“역시 저 인간……, 맘에 안 들어.”

카이사르가 농담인 양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진심도 꽤 담겨 있을 거라고, 적어도 절반 이상은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굳게 확신했다.

* * *

방에 도착한 후, 가장 상석에 앉은 카이사르는 그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로만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의 산책 시간을 방해할 정도라면 꽤나 급한 용무겠군. 안 그런가?”

싱긋 미소 짓는 표정이 살벌하다.

산책하며 내게 보여 주었던 그 소년 같은 미소가 싹 지워질 정도였다.

“가급적 빨리 상의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런데 기분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폐하? 표정이 아주 좋으십니다.”

로만이 ‘헤헤’ 하고 눈꼬리 처진 미소를 지으며 헛소리를 했다.

그 말에 나는 물론이요, 평소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로위나마저 진심으로 경악했다.

세상에 이 정도로 눈치 없게 해맑은 인간이 있을 줄이야!

“……들어 보지.”

하도 어이가 없었던지, 카이사르가 다소 김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크루세흐와 관련하여 획득했던 마법의 해석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그걸 토대로 용의 영혼을 다시 봉인할 마법식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확답 드리기가 어렵네요. 저희도 이런 엄청난 작업은 처음이라.”

로만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느긋한 소릴 했다. 카이사르가 탐탁지 않았던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크루세흐가 또 제 몸을 차지하려 들까요?”

“그럴 겁니다. 현재는 제어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막거나 억누를 방법은요?”

“주도권이 누구에게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마마께서 불안해하시면, 크루세흐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쉬워지겠죠.”

결국 내 정신력 문제인 건가.

나는 ‘흐음’ 하고 짧게 소리를 뱉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도 인간인데,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는가.

“그거라면 걱정 마.”

내 불안을 읽기라도 한 듯, 카이사르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크루세흐가 또 주도권을 잡게 되어도, 내가 알아채고 다시 헬레나를 불러내 줄 테니까.”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이 날 못 알아볼 리 없다는 굳은 믿음이 느껴졌다.

나조차도 내게 자신이 없는데, 이 남자는 나의 뭘 믿고 저렇게까지 확신을 하는 걸까.

“저와 크루세흐가 얼마나 다른 점이 있다고 그렇게 확신하세요?”

“모든 게 다 달라. 눈빛도, 목소리도, 손길도.”

말투나 습관이라면 모를까, 그런 걸로 어떻게 구분하지?

내가 미간을 찡그렸더니,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내게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아는 거야. 천 명의 사람 가운데 헬레나가 서 있어도 금방 찾아낼 자신 있다고.”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까.

‘나는, 믿는 수밖에 없어.’

지금 의지할 것은 날 알아채고 나를 불러 줄 카이사르밖엔 없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올라 어디 지지할 곳 하나 없는 몸을 그가 꽉 붙잡아 주고 있는 것처럼.

결국 믿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자조했다.

“최근 마마께서 비이상적으로 강해지신 것도 용의 영향입니까?”

로위나의 질문에, 로만이 긍정의 의미로 고갤 크게 끄덕거렸다.

“그럴 확률이 높죠.”

“영혼만으로도 그 정도 힘이란 말입니까?”

로위나의 미간 사이가 살짝 좁아졌다. 로만이 가볍게 실소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기록에는 용 한 마리가 도시 하나를 몇 시간 만에 궤멸시키기도 했다니까요.”

“……새삼 크루세흐가 부활했다면 어떤 참변이 있었을지, 끔찍해지는군요.”

로위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감정이 또렷이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카이사르가 옆으로 삐딱하게 자세를 바꾸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히 봉인만 하면 곤란해.”

“송구하게도, 무슨 의미입니까, 폐하?”

“헬레나는……, 아니, 단테 황제는 용을 봉인한 영향으로 서른셋에 요절했어. 헬레나 역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해.”

“그건 가늠이 불가능합니다. 영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도 모르겠고요.”

“태평한 소릴 하는군. 그런 걸 해결하라고 최상의 지원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으으,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로만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뒷말을 흐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할 건 다 하는 사람이라, 나는 이 이상 걱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실 진짜 걱정되는 건 따로 있다.

“그나저나, 만약 크루세흐가 다시 제 몸을 차지해서 난리라도 치면, 막아 낼 수는 있나요?”

내가 힘을 조절한다고 해도 검 한 번 휘둘러서 기둥뿌리가 뽑힐 판이다.

크루세흐가 이 몸을 차지한 후 맘만 먹으면, 기사단을 전부 대동해도 막을 수 있을까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들 알고 있지만 답이 없어서 말을 꺼내지 않는 일을, 왜 굳이 들추냐는 눈빛들이었다.

으음. 나도 눈치가 없는 사람 중 하나였구나.

“으으, 사실 이런저런 고민 없이 한 방에 크루세흐를 없앨 방법도 있긴 하지만…….”

로만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말이 들렸다.

“네? 그게 뭐죠?”

“헉, 들으셨습니까?!”

로만이 화들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고요.”

“일단 말이라도 해 봐요.”

“들으셔 봐야 기분만 상하실 겁니다, 분명!”

로만이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표하며 소리쳤다. 좌우로 거세게 흔드는 고개가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쯤 되면, 나도 그가 생각하는 그 ‘방법’이라는 게 뭔지 알 수밖에 없다.

단테를 조각내어 육신과 함께 영원히 무로 되돌렸듯, 내 안에 있는 영혼과 함께 내가 죽어 사라지는 것.

……그래. 그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며 뒤탈 없는 방법이긴 하지.

“네놈, 설마……!”

카이사르도 그 방법이 뭔지 깨달은 듯, 으르렁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로만을 베어 버릴 기세였다. 좁은 방 안에 카이사르가 내뿜는 살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로만이라도 이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 그러니까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 말씀드렸는데……!”

로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억울해하며 소리쳤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레너드가 들어왔다. 그 덕분에 험악했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실례합니다. 폐하, 크루세흐에 관련하여 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오, 드디어 왔네요!”

로만이 구원자를 만난 듯 금세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마마를 구해 드리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마법식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아주 유능한 인재입니다! 폐하, 제가 마마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로만의 호들갑에 카이사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제발 누가 저 촐랑대는 마법사 녀석의 입을 막아다오.

“지금 복도에 대기 중인데, 들어오라 할까요?”

그렇게 물은 후, 레너드가 갑자기 내 쪽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응? 왜 날 보고 저런 표정을 짓지?’

나랑 관련 있는 일이라 그런 건가?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레너드가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복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레너드가 내게 보여 준 그 표정의 의미를 깨달았다.

다시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마마!”

문이 벌컥 열리고, 화려한 금발의 여성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왈칵 뛰어 들어왔다. 나는 그 극적인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율리카 양?!”

로만이 불러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율리카 브란테였다.

* * *

황후궁에 돌아왔더니, 내 방문 앞에 메이드 한 명이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제는 목 뒷덜미를 가릴 정도로 자라난 파란색 머리카락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지금 그 방에 없어, 아고트.”

“앗! 아앗, 마마!”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본 아고트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일주일이나 못 모시게 하시다니, 가혹해요! 물론 제 잘못이지만요! 마마를 곁에서 모시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제 잘못이지만요!”

“아니……, 황후궁을 나가라는 것도 아니었잖아.”

사실 아고트에게 일주일간 내 시중을 그만두라고 내린 벌은 어떤 의미에서는 ‘휴가’와도 같았다.

시녀장인 셀즈에게도, 일주일간은 아고트에게 아무런 일도 주지 말라고 말해 뒀던 터였다.

‘나랑 같이 크루세흐를 막으러 간 탓에 고생했으니, 일주일간은 좀 쉬어도 될 텐데.’

물론 괘씸한 마음에 벌이니 뭐니 하는 소릴 하긴 했지만…….

“마마께서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몸종으로 쓰시면 싫어요!”

“안 그래. 화 안 났으니까 진정해, 아고트.”

“하지만 제가 마마의 곁에 없으면, 전 뭘 하고 지내면 되나요?!”

“그냥 쉬면 되잖아.”

“쉬는 게 쉬는 것 같질 않은걸요!”

아고트가 내 옷자락을 쥐고선 버럭 소리쳤다. 이쯤 되니 내게 원망을 하는 건지 비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 없이 일주일간 마마 혼자 어떻게 둬요!”

“뭐? 내가 어린애야? 혼자 지내는 게 뭐 어때서?”

“제가 없으면 브로치가 머리 장식인 줄 알고 머리에 꽂으시려 하시면서!”

“으악! 아고트, 언제 적 얘기야!”

바늘처럼 길쭉한 대 끝에 나비 모양의 보석이 달린 장신구였는데, 비녀 같은 것인 줄 알고 혼자 머리에 꽂아 보려 하다가 아고트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브로치라는 얘길 듣고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렇지만 그건 특이하게 생긴 그 브로치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착각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고!

‘이대로 있다가는 여기 주저앉아서 내 흑역사를 줄줄 읊을 것 같은데……!’

아고트는 날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모시던 아이였던 만큼, 내 크고 작은 흑역사를 꽤 많이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나는 깊은 탄식의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포기 선언을 했다.

“끄응……, 좋아. 벌은 오늘로 끝이야.”

“저, 정말이세요, 마마?!”

“자, 가서 차와 간식을 내어 오렴. 지금부터 손님과 얘길 나눠야 하니까.”

“네! 네, 감사합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마마!”

아고트의 얼굴이 햇살처럼 활짝 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손등으로 눈가도 쓱쓱 닦는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기세 좋게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에휴, 어쩌겠어. 일하는 게 저렇게 좋다는데, 소원대로 해 줘야지.

그 순간, 등 뒤에서 ‘쿠흐흐’ 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뒤에 서 있던 금발의 여성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소리를 죽여 웃는 중이었다.

“그만 웃으세요. 부끄러우니까요.”

나는 웃고 있는 손님에게 뚱한 기분으로 쏘아붙였다.

“부끄럽긴요. 마마께 충성을 다 하는 시종들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마마.”

“절 놀리시는군요.”

“아뇨, 정말로 보기 좋습니다. 늘 붙어 다니던 아이가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을 줄 몰랐네요.”

율리카가 방긋 미소 지었다.

내가 지금껏 그녀를 알아 온 이래 가장 해맑고 사심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나도 어쩐지 안심이 됐다. 저렇게 웃을 수 있게 됐을 만큼 그동안 잘 지냈구나, 하고.

“뭐, 그러면……, 이만 들어가실까요.”

나는 멀리서 날 찾아온 손님을 방 안으로 정중히 모셨다.

* * *

율리카는 마지막에 보았던 때보다 훨씬 좋은 모습이었다.

혈색도 나아졌고, 표정도 밝았다. 목소리도 더 커졌고, 어딘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황제의 약혼녀’였을 때보다 더 반짝거리고 눈이 부셨다.

“모두 마마 덕분이에요.”

율리카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사서 일이 제법 괜찮은 모양이네요.”

“일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많아요. 코피를 몇 번 쏟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코피요?!”

뭐야. 설마 로만 그 자식, 급료는 짜게 주면서 일은 초과 근무 시키나? 이거, 불러서 한 번 엎어야 하는 거 아냐?

“혹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면 언제든 말해요.”

“네? 어머, 후후후. 아니에요. 모두 제게 친절하세요. 제가 일에서 손을 못 놓아서 그렇죠.”

율리카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몸은 피곤한데, 그래도 저는 지금이 좋아요. 모두 제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잘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더 일을 손에서 못 놓겠어요.”

“일은 어렵지 않나요?”

“어려워요. 하지만 즐거워요.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배워야 할 지식이 아직도 많더군요.”

나는 책으로 꽉 차 있던 율리카의 서재를 떠올렸다.

나는 분명 그 서재에서, 주인의 애정과 열정을 느꼈었다. 그저 그럴싸하게 꾸며 놓은 곳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권 한 권 소중하게 만들어 간 장소라고.

어쩐지…….

길드의 도서관에도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는 도서관은 얼마나 눈이 부시고 사랑스러울까.

“왜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기를 쓰고 힘들어했는지 모르겠어요. 날 행복하게 해 주는 자리는 그런 곳이 아닌데.”

“그렇죠. 동감해요.”

황제였던 나는 행복했었나?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리에 앉아야만 승리자가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나는 황제였던 단테보다, 카이사르의 반려인 헬레나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누군가는 내가 정점에 앉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해밀턴이 날 황후의 자리에 올려 주고 싶어 했듯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아닌 ‘내’가 행복한 자리를 찾고 싶다.

그게 사서의 자리든, 누군가의 딸이든, 혹은 기사나, 아내이든.

시시한, 그깟 황제의 자리 말고.

“당신이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나는 율리카를 향하여 진심으로 웃어 주었다.

힘들고 지친 날들 중에, 율리카의 방문은 내게 더없는 위로였고 안도였다.

“전부 마마 덕분이에요.”

“하하, 이상하네요. 한때는 적이었던 사람에게, 내 덕분이라는 말도 다 듣고.”

“그날, 도움을 청하려고 마마를 찾아간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어요.”

율리카가 손에 들고 있는 찻잔 입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무릎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다. 길고 푸른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괘념치 않고.

“그러니 이번엔 제가 마마를 돕겠습니다.”

“……율리카 양?”

“저는 마법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 지식은 여느 마법사들보다 뛰어나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어요. 제가 마마의 안에 있는 용을 봉인할 마법의 식을 만들 겁니다.”

율리카가 흔들림이라고는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만 씨에게……, 다 들었군요?”

“그를 책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로만 씨에게 졸라 사실을 전해 들은 것뿐이니까요.”

로만이 봉인 마법을 만들기 위해 길드에서 마법사를 모집했던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리안느가 결혼식 때 용과 마수를 소환했던 일을 핑계로 적당히 둘러댔던 터였다.

그러나 율리카는, 거의 정확하게 모든 진실을 눈치챘다.

‘하긴, 무리도 아닌가.’

마수의 몸에서 발견된 룬어를 그녀에게 보여 준 건 나였으니까.

그녀도 알게 모르게, 꽤 오래전부터 크루세흐와 관련된 일들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날 위해 그렇게까지?”

“옳은 걸 선택할 줄 아는 당신께서, 그 탓에 자신이 상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으니까요.”

율리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눈물이 많은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도 그 크고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했다.

“약속드려요. 제 모든 걸 걸고서라도 마마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율리카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단단했다.

불안과 염려로 흔들리는 나보다도,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오로지 나를 구하겠다는 열의.

인간이, 인간을 대하여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절 믿어 주세요, 마마.”

마리안느와 변경백 앞에서 고갤 숙이던 율리카 브란테는 여기에 없다.

카이사르가 두려워 목소리가 잦아들고 시선이 떨리던 소녀도 더는 없었다.

그녀는 당당히 고갤 들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응. 부탁할게요.”

그녀에게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때 세상이 무너질 듯 오열하던 너는, 어느새 이렇게나 강한 사람이 되었구나.

“부디 나를 도와주세요, 율리카.”

나는 그토록 자신 없던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분명 이 말은, 그녀에게서 처음 배운 것일 터다.

율리카가 활짝 미소 지었다.

언젠가 네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찻잎의 달고 향긋한 향기가 전해 오는 것만 같았다.

* * *

율리카는 크루세흐의 영혼을 봉인할 마법식을 만들 때까지 황성에 머물기로 했다.

로만은 율리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했다.

“그녀의 지식과 배움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째서 그런 인재가 이제야 길드에 오게 됐는지, 지난 시간이 아까울 따름입니다.”

로만의 칭찬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간 그녀가 받아 마땅했어야 할 칭찬을 이제야 몰아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뭐 과할 것도 없겠지.

‘브란테 변경백이 율리카의 재능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황후궁 내원의 정자 계단에 앉아, 나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니, 알았더라도 무시했겠지. 변경백 그 인간은.’

자신의 딸을 한낱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황후가 되는 데 마법적 지식이 무슨 소용 있느냐며 무시했을 것이다.

오히려 티 내지 말라고 다그쳤을지도 모른다. 너무 똑똑한 여자는 남자의 기를 죽인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인간들을 종종 보곤 하니까. 브란테 변경백은 딱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고.

‘율리카, 즐거워 보였지. 지금이라도 좋아할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율리카의 환한 웃음을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율리카와 만난 게 그렇게 즐거웠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자의 반대쪽 입구에서, 카이사르가 삐딱하게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딘가 불만 어린 그 표정에 내가 고갤 갸웃했다.

“삐치셨어요?”

“내가 말했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헬레나에게 더 푹 빠져든다고. 경계 대상이야, 율리카 브란테.”

카이사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여름이라도 저녁은 바람이 차가워, 카이사르가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카이사르의 어깨에 고개를 살짝 기댔다.

“일이 끝난 후에도 율리카에게 황성에 들어오라고 할까? 앞으로 황성에도 마법 학자가 필요할 테니까.”

“뭐예요, 삐치셨던 거 아니에요?”

“질투는 나지만, 네가 웃으니까.”

나는 고갤 들어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사르가 눈썹을 으쓱하며 웃었다.

“모처럼 헬레나가 즐거워 보였으니까. 헬레나가 행복한 게 제일 아니겠어?”

“폐하는 정말 저만 보시나 봐요.”

“몰랐나? 헬레나가 10살 때부터 그랬어.”

“어휴, 그만 봐요. 일을 하시라고요.”

농담과 함께 킥킥 웃으며 카이사르의 품에 더욱 기댔다. 카이사르가 그런 내 어깨를 살며시 당겨 안아 주었다.

“우습지. 율리카와 보낸 시간만 따지면 헬레나보다 내가 더 길었을 텐데, 율리카는 나보다 헬레나를 더 좋아해.”

“폐하는 율리카 양에게 무섭게 구셨잖아요.”

“헬레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다정하게 대해 주기라도 했나?”

“뭐……, 약간은요.”

한때 율리카에게 데이트 신청까지 한 몸입니다.

물론 이 얘기는 비밀로 해야지. 카이사르가 질투할 게 뻔하니까.

“나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 줄 줄 몰랐어요.”

“다들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헬레나 페레스카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군요.”

단테 레나투스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걸, 이젠 알겠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규칙적으로 뛰는 카이사르의 심장 박동에 나의 심장 박동을 맞추었다. 포개지는 심장 소리가 어쩐지 편안했다.

“카이사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고마워.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줘서.

“……나야말로.”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울먹거린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한쪽 귓가에서 들려오는 그의 심장 소리가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던지라…….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긴장감도 경계심도 없는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황후에게는 황후의 정치가 있다.

황제가 하는 업무와는 그 결이 다르겠지만.

최근에는 계속 사적인 일로 바빴으니, 오늘은 얌전히 ‘황후의 업무’를 하기로 했다.

“그날 마마께서 마리안느 발레르의 심장에 화살을 꽂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더군요.”

그 업무의 일환으로 나는 지금,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성회의 대사제와 마주 보며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대사제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결혼식 때의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설명했다.

나는 지루해 하품이 나올 것 같았으나, 어떻게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성회 분들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려요.”

칭찬은 나이 많은 사제도 춤추게 하는 법.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사제의 얼굴이 방긋 피었다.

“어휴, 저희야 신을 섬기는 이들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죠.”

그렇지. 아주 당연하게, 성하의 안전을 챙기기에만 급급하더라.

그러나 그 진실을 밝혀, 괜히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성회의 턱을 살살 긁어 주어, 불필요한 적군으로 돌리지 않을 밑 작업을 하는 것뿐.

그걸 위해 굳이 초대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누가 초대했느냐고?

사실, 난 아니다.

“황후마마께서 현명함과 강함을 모두 갖추고 계시니, 이는 제국에게 큰 복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공작.”

그 말에, 사제의 곁에 앉아 있던 내 아버지가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 이 자리를 만든 건 제국 공작이며, 현재 자문회 최고위인 내 아버지다.

“황후께서 재능이 출중하신 덕이지요. 부모는 그저 등 떠미는 것밖엔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하, 그런 겸손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우리 사이에 겸양할 게 뭐 있다고.”

흐음, 우리 사이라.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버지의 표정을 흘끗 살폈다.

아버지는 여전히 차분하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기쁘군요.”

“당연한 얘기죠. 앞으로 폐하를 돕기 위해 함께 의논해야 할 일도 많을 텐데, 피차 체면치레할 게 뭐 있습니까.”

사제는 내 쪽을 향해서도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께서도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 절 부르십시오. 돕고 사는 것도 다 신의 뜻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 같습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가식적인 미소만큼은 마리안느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실은 의논드리고 싶었던 일이 있긴 합니다만…….”

“뭡니까? 말씀만 하시죠!”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 쪽을 쳐다보았다.

이제 곧 아버지께서 ‘마마께서 어려워하시니 제가 말씀드리겠다.’라며 바통을 받아 주겠지. 나는 판만 만들어 주고 이쯤에서 적당히 빠지면 되는 거다.

‘귀찮은 일은 최소화해야지.’

일단은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을 아주 작고 사소한 부탁을 할 거다. 그러면 사제는 기꺼워하며 흔쾌히 들어줄 테고, 그 핑계로 성의 표시를 하면서 환심을 사고…….

‘성회를 적으로 돌리면 가장 까다로우니까. 밑밥은 깔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깔아 둬야지.’

나는 열띤 토론을 벌이는 아버지와 사제를 보며 차를 마셨다.

‘내 안에 용의 영혼이 있다는 걸 알면 저 우호적인 사제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 * *

사제가 돌아간 후, 나는 아버지를 황후궁 입구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더 있다가 가셔도 될 텐데요.”

“많이 심심하신 모양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시면 로위나가 뭔가 일을 가지고 찾아올 것 같아서요.”

내 한숨에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하는 걸 귀찮아하는 건 여전하십니다.”

“앗, 그래도 요즘엔 얼마나 부지런해졌는지 모릅니다.”

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용을 때려잡았다는 얘길 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레너드에게 들었습니다. 폐하와 함께 마리안느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하셨다면서요.”

모르는 이들에게 크루세흐를 잡은 이야기는 대강 그런 식으로 무마되어 있었다.

“마마의 실력이야 아비인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만, 몸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음……, 주의하겠습니다.”

지금껏 전혀 조심한 적 없던 불효한 딸은, 결국 애매모호한 다짐으로 대화를 넘겨 버렸다.

“듣기로 최근 검 실력이 또 한 차례 성장하셨다던데요.”

“아……, 들으셨나요? 연무장 바닥 박살 낸 거…….”

“네. 예상외 경비가 나갔죠.”

“……끄응.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강해지신 이유가 뭡니까?”

우뚝, 아버지가 걸음을 멈춰 서서 내게 물었다.

“그건 그냥……, 열심히 훈련한 결과인걸요.”

“이런, 제가 검을 모른다고 또 얼렁뚱땅 넘어가시는군요.”

“……나쁜 짓은 안 했어요.”

“아하하! 물론 그런 걸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마마.”

표정이 여전히 온화하고 조용해서, 아버지가 뭔가 알고 묻는 건지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지 가늠이 안 됐다.

“마마는 어릴 때부터 기이한 분이셨죠. 우리 부부가 잘 키울 수 있을까 늘 염려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잘 키운 것인지, 알아서 잘 커 준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훌륭하게 키워 주셨습니다.”

이건 진심이다. 이들이 내 가족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단테 레나투스’라는 인간의 연장선에 불과한 인간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테’였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남을 사랑할 줄 알고, 의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자란 건, 모두 이 사람들 때문이니까.

“제 자식들이야, 훌륭하지 않았던 적이 없죠.”

아버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십니까? 너무 뛰어난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실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크루세흐의 일에 얽혀 지금까지 고생하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겠지.

“제가 그런 말씀을 왜 드렸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너무 나서지 마라?”

“감당 못 할 상황이 오면,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버지의 미소가 따뜻했다.

속내를 읽을 수 없던 이전의 여유로운 표정과는 다르게.

“……저도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자식들은 훌륭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고요.”

아버지가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으며 대답했다.

“기쁘군요. 이제야 겨우 무언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해 주시니.”

나, 조금은 효도한 걸까.

겨우 무언가를 바라는 것뿐이었는데도.

“조금 늦게 철이 들었나 봐요, 저.”

나의 진심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내가 가장 되고 싶고 본받고 싶은 최고의 부모님들이었다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었다고.

* * *

늦은 오후에는 로위나가 황후궁을 찾아왔다. 나는 로위나가 가져다준 서류를 검토하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로위나의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아, 나는 굉장히 민망해졌다.

“앗, 이런. 무심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작께서 다녀가셨군요.”

“로위나는 못 속이겠어요.”

나는 실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반응에 로위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별다른 이상은 없어요. 이상할 만치 정상이에요.”

“심장 격통은요?”

“없네요. 그때의 통증은 크루세흐가 깨어나려는 징후 같은 것이었나 봐요.”

“생각보다 태연하시군요.”

“혼란스러워한다고 대책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요.”

로위나가 불안한 듯 안경을 쓱 올리며 말했다. 말의 끄트머리에서 잦아드는 로위나의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었다.

“어지간한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 온 인생이었는데,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치니 기분이 이상하긴 해요.”

남의 도움을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신기했다.

“그동안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참 늦게 깨달았네요.”

“늦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예전부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곧잘 행동하셨다만, 마마께서는 아직 20대 초반이십니다.”

“와……, 아직 파릇파릇한 애송이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나에게 아직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 됐다.

이번 생에는 서른셋 다음의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 이후의 나에게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 본 적 없는 시간이 날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이렇게 설레고 기대되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아련한 기분을 느끼며 읽던 서류를 갈무리했다.

“다 확인했어요. 이 일정대로 진행해도 되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할 일이 별로 없네요? 내가 일 많은 거 귀찮아하는 줄 알아서 일정을 조정한 건가요?”

“아뇨. 그런 이유로 일정을 조정할 순 없죠.”

로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긴, 이 여자에게 그런 인간적 자비를 바랄 수는 없지.

“크루세흐의 영혼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일정을 최소화할 수밖에요.”

로위나가 내게서 서류를 받아 들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하긴, 다른 이들과 만나는 중에 크루세흐가 튀어나와 깽판이라도 치면……, 으음. 상상하고 싶지 않군.

“귀족들이 놀고먹는 황후라고 뭐라 하지 않을까요?”

“성혼식 때 마마께서 마리안느를 제압하고 사태를 해결하신 공로만으로도, 1년 정도는 놀고먹으셔도 뭐라 할 사람 없을 겁니다.”

“헉, 그건 꽤 솔깃하네요.”

“물론 정말 놀고먹으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로위나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필요 없는 말을 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연무장 바닥 박살 낸 거……, 의심하는 사람은 없던가요?”

아버지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만 ‘알지만 묵인한다’였을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믿어 주겠다는 묵인 말이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다른 귀족들이 날 믿고 의심을 묻어 줄 이유는 없으니까.

“마마를 추종하는 기사들이 적당히 둘러대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기특한 일이.”

“그 대가로, 앞으로도 기사들 교관 일은 못 놓으실 것 같고요.”

끄응. 대가를 바라다니, 그 녀석들. 나는 그리 가르치지 않았건만.

“참고로 적기사단장께서, 마마의 새로운 별명을 전해 듣고 미친 듯이 웃다가 책상에 무릎을…….”

“그 얘기, 이미 들었어요.”

나는 재빨리 로위나의 말을 잘랐다.

그 얘기, 또 듣고 싶지 않다고. 쪽팔리니까.

“달리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로위나가 서류를 품에 안은 채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갤 갸웃하며 로위나에게 물었다.

“크루세흐 대책 회의는 또 안 하는 건가요?”

“내일 그리트 씨의 연구실에서 폐하와 녹트 자작이 의논하실 예정이라 알고 있습니다.”

“엥? 나 빼고?”

내가 커다래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니, 당사자인 날 빼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뭘 하려고?

그러나 로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는 앞으로 모든 회의에서 제외될 겁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따돌림?”

내가 중얼거렸다.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엄청 충격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로위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나는 그들의 결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또 크루세흐가 마마인 척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지금도 마마께서 접하신 정보가 마마의 안에 있는 크루세흐에게 전달될 수도 있고요.”

아……, 하긴.

크루세흐에게 정보를 제공해 줘서 좋을 건 없지.

나는 ‘으으음’ 하는 긴 신음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이것 참, 전부 날 위한 일인 줄 알면서도 섭섭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섭섭한 기분을 느낄 만큼,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건가.’

뭘까, 이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기분은.

“빨리……, 봉인 주문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위나가 말했다. 기도한다는 말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로위나도 신을 믿나요?”

“이제부터 믿어 볼까 하고요.”

로위나 역시 빙긋 미소 지으며 농담했다. 내 표정을 따라 하는 듯한 그 미소에 나는 코를 찡그렸다.

물러나기 전 로위나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갤 든 순간, 막 떠오른 듯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참, 폐하께서 팔이 다 나은지라, 내일 오후 대련을 해 주지 않겠느냐 청하셨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련이요? 지금 내 상태로?”

연무장 바닥을 깨 먹는 지금의 나와 대련하겠다고? 기껏 나은 팔이 다시 부러지고 싶은 건가, 내 남편은?

로위나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양 눈썹을 으쓱했다.

뭐, 또 카이사르의 고집일 테지. 황제의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직접 당해 보면 대련하자는 말이 쏙 들어가겠지, 뭐.’

걱정이 되는 한편 약간 기대도 되는 건, 오랜만에 그와 검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서일까.

다시 태어나서는 다신 검을 쥐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결국 이렇게 검에 안달이 나는 걸 보면, 나도 참 검에 미친 게 분명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씁쓸한 자조가 흘러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 * *

대련을 한다길래 당연히 연무장에서 모이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마중 나온 카이사르의 시종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성 가장 안쪽 정원을 지나서야 나오는 별채였다.

‘여기, 예전에는 궁인들 처소였던 것 같은데.’

2층 높이의 아담한 별채를 올려다보며, 나는 500년 전의 용도를 떠올렸다.

그때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비(妃)를 내려받지는 않은 궁인들의 처소로 쓰였다. 그것이, 단테 시절이었던 내가 남자를 총애하기는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쓸모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지만.

‘그 후로 쭉 사용하지 않았던 건가?’

별채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낡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황후가 된 후 황성 구석구석을 안내받았지만 ―나에게는 대개 의미 없는 행위였다― 이곳은 안내받지 못했던 것 같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마마.”

“아……, 그래.”

건물 입구에 서서 새삼 옛 기억을 더듬고 있던 나는, 시종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어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나저나 아고트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다시 시중들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더니, 아까부터 통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흥, 누가 그런다고 섭섭해할 줄 아나? ……그냥 아주 약간 삐친 것뿐이라고. 쳇.

그런데 이게 웬걸.

“마마!”

“엇, 너 왜 여기 있어?”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고트가 나를 반겼다. 날 발견하자마자 주인님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폴짝거리며 뛰어왔다.

아고트는 메이드복이 아닌 훈련복에, 최소한의 방어구까지 입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습관적으로 아고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폐하께서 꾸미신 일이에요! 전 마마께 보고 드리고 오고 싶었는데……!”

“뭐야, 내 탓으로 돌리는 거냐?”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난 고갤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나란히 서서 날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도 방어구를 갖춰 입은 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지금의 스승님이라면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카이사르가 별것 아니라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검을 어깨에 척 걸쳤다.

“골절 희망자가 셋이나 되는 줄은 몰랐는데요.”

“반대로, 무사하고 싶으니까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겠다는 거지.”

“뭐하러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나서서 하시려는 거죠? 지금 제 상황을 아시잖아요?”

결국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난 지금 검 한 자루로 일개 기사단을 격파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내 질문에 대답한 건 카이사르 곁에 있던 레너드였다.

“그렇기에 더욱 이 자리가 필요한 겁니다, 마마.”

“오라버니까지?”

내 목소리에 약간 노기가 묻은 것을 눈치챘는지, 카이사르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봐. 만약 크루세흐가 다시 스승님의 몸을 차지하면, 그 미친 용이 굳이 날뛰지 않고 얌전히 굴어 줄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죠.”

나는 ‘으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전의 크루세흐가 나인 척 행세를 했던 건, 조각난 단테의 시신을 어떻게든 손에 넣어 보려는 수작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육체를 수복하려는 생각이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 단테의 시신은 완전히 소거됐다. 크루세흐가 굳이 내 흉내를 내며 정보를 캘 이유가 없단 뜻이다.

“스승님이 스승님일 때엔 문제없지. 하지만 스승님이 크루세흐일 땐, 싸워야 할 수도 있어.”

“대비를 하자는 거군요.”

“그래.”

어느 정도의 힘으로 상대해야 할지를 가늠한다. 약점이 있다면, 찾아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내 문제를 무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건물은 곧 철거될 거야. 이 자리에 연못을 팔 계획이거든. 그러니까 스승님이 마음껏 날뛰어도 문제가 없단 뜻이지.”

카이사르의 설명에 나는 다시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홀은 2층까지 천장이 뚫려 있어 상당히 넓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별채의 홀이다. 본성의 연무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좀……, 좁지 않나요?”

“우리가 사용할 건 이 건물 전체야.”

“……네?”

“대련이 아냐, 스승님. 전투를 하자는 거야.”

하긴. 크루세흐가 나타나서 정중하게 ‘자, 나와 대련할 사람?’이라고 말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우리 셋을 상대하기엔 좀 버겁지 않겠어? 어때?”

카이사르가 도발하듯 내게 검을 겨누며 웃었다.

도발임을 명백히 알면서도, 그 가느다란 미소에 나는 어쩐지 피가 끓었다.

레너드 역시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아고트도 양손으로 슬그머니 검 손잡이를 쥐었다.

이런, 나의 제자들아.

그렇게 전력으로 싸워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이 스승님이 마다할 수가 없잖니.

결국 나는 양손에 두 자루의 검을 갈라 쥐었다.

“용의 힘 따위 없어도, 제게 이기는 건 턱도 없는 일이랍니다, 나의 제자님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제자가 동시에 나를 향해 도약해 왔다.

어느새 셋 다 완벽하게 살기를 한 점으로 집중한 채로.

* * *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황성 안쪽에 있는 버려진 별채에 마리안느의 영혼이 떠돌며 난동을 피운다고요.”

“쿨럭!”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온 로만이 어딘가 아둔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코로 뿜을 뻔했다.

“어이쿠, 괜찮으십니까, 마마?”

“콜록, 콜록……, 괘, 괜찮습니다.”

간신히 호흡이 잦아든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양 꾸민 표정으로 로만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황성에 그런 소문이 났나요?”

“예. 요즘 거의 매일 그 별채에서 우르르 쾅쾅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기는. 아주 생생하게 듣고 있는데. 무려 그 현장 한가운데서.

‘대련하다가 귀신 취급을 다 당하네.’

나는 민망함에 차를 마시며, 별채에서의 일을 반추했다.

요즘 그곳 별채에서 나는 애제자 세 명과 매일같이 대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전력으로 싸우는 동안 창문이 터지고 천장이 부서지고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하도 부수다 보니, 이미 내부는 철거된 수준으로 휑뎅그렁해졌을 정도다.

“용의 영혼을 봉인하는 것도 문제인데, 퇴마사라도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마법사가 뭐 그런 미신을 다 믿고 그래요?”

“전 귀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습니다. 마마는 안 무서우십니까?”

“귀신 같은 거 안 믿어요.”

“네? 정말로요? 아무리 안 믿어도, 지하실 같은 데 내려가면 괜히 뭐 나올 것 같아서 으스스하잖아요?”

“지하실은! 지하실은……, 지, 지금 중요한 건 지하실이 아니잖아요?”

내가 테이블 끝을 손끝으로 탕탕 치며 재빠르게 화제를 끊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가 생각나서 이러는 건 아니다, 정말.

“봉인 마법 때문에 할 말이 있다고 온 것 아니었나요?”

“아차, 그렇지. 아하핫.”

로만이 나사 하나 빠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렇게 허술해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마법사가 된 거지?

‘이 인간을 믿고 맡겨도 되는 건가.’

뭐, 노에와 싸울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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