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바라옵건대
내 검과 크루세흐의 마법이 동시에 서로를 할퀴듯 교차했다.
아무런 제약도 죄책감도 없는 나의 검은 일직선으로 크루세흐를 베어 냈다.
뻗어 나간 검기는 커다란 크루세흐의 왼쪽 날개를 깨끗하게 잘라 냈다.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내게 엄습했다. 나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으나, 크루세흐의 마법은 내 어깨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깝군.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떨어졌을 것을.”
크루세흐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우, 내 얼굴로 그렇게 웃지 말래? 진짜 안 어울리거든.”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군. 아예 의식 밑바닥까지 추락시켜, 다시는 이 몸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그 밑바닥에 갇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휘익, 나는 검을 허공에 털어 내며 이를 악물었다.
불법 세입자 주제에 염치도 없지.
“사양할 것 없다. 너보다 더 너답게 사용해 줄 수 있으니까.”
짧은 대화를 끝으로 전투가 재개됐다.
결코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검과 마법이 교차하고 상쇄되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오로지 서로를 파괴하겠다는 본능밖에 남지 않는 듯, 우리는 순수한 투기와 전투의 쾌락에 젖어 부수고, 베고, 망가뜨렸다.
그러나 그 부질없는 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 이, 이건 뭐야!”
어느 순간, 크루세흐의 몸에 흰색 금이 나타났다.
왼쪽 골반에서 오른쪽 가슴 아래까지 죽 그어진 하나의 금은, 순식간에 온몸에 낙서하듯 죽죽 그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크루세흐가 버둥거리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이게 무슨!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러게. 밖에서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는 검을 어깨에 척 걸친 채, 당황해하는 크루세흐를 쳐다보았다.
두 번째 봉인 마법에 관하여, 카이사르도 얽히게 됐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는 듣지 못했다. 나 역시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았고, 로만이나 율리카도 최소한으로 정보를 제한했다.
내가 알게 되면, 내 안에 기생하고 있는 이 파충류 녀석도 알게 될 수 있으니까.
‘솔직히 카이사르가 얽히게 될 거라고 했을 때 예상한 게 있긴 했지.’
그러나 어떻게든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면 의식에 내려온 후 시작한 이 전투 역시, 크루세흐가 지금 진행되는 마법에 신경 쓰지 않게끔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지분이 좀 더 크긴 했지만.’
아쉽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마음껏 날뛸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애쓴 게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내 혼잣말과 동시에, 크루세흐가 무릎을 꿇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간 이 녀석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리는 듯한 통쾌한 기분이었다.
“말, 말도 안 돼. 나를, 날, 나를 너에게서 잘라 내겠다고?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안 될 건 뭐야.”
“네 영혼에 상처 하나 없이 날 잘라 내는 게 가능할 것 같나!”
크루세흐가 내게 소리쳤다.
“설득이라도 해 볼 심산인가 본데, 그렇게 겁먹은 얼굴을 해서는 소용이 없잖아. 안 그래, 파충류 씨?”
나는 크루세흐의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천천히, 일부러 크루세흐의 애를 태우듯.
크루세흐가 마지막 허세를 부리듯, 날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잘라 낸 내 영혼을 어디에 봉인할 생각이지? 너도, 너조차도 나를 억누르느라 망가지고 부서져 일찍 숨을 거두었을 텐데.”
“그랬지.”
그랬었지. 그땐 그런 이유인 줄 미처 몰랐지만.
일찍 죽으면서도 아까운 줄 몰랐다. 33년 살았으면 오래 살았다 싶었다. 충분한 줄 알았다.
“너 같은 인간이 있겠느냐? 날 억누를 힘이 또 있겠느냔 말이다. 어리석은 짓 그만둬라. 나와 함께 멸망해가자는 것이, 그리 무리한 요구인가?”
크루세흐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날 올려다보며 웃는다. 슬픔, 두려움, 초조함, 기대. 온갖 감정이 섞여, 미소는 어딘가 일그러졌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더 함께하자는 것뿐이야. 그것이 나쁜 요구인가?”
이 파충류가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가진 존재였던가.
“너는 어차피 오래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 인간이지 않았나?”
……아, 그래.
나는 크루세흐의 어깨에 한쪽 발을 올렸다. 그리고 발을 밀어 그 몸을 넘어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크루세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크루세흐의 한쪽 어깨를 밟은 채 그 위에 서서,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용은 본능밖에 없는 종족이랬지. 그러니 지금 네가 보여 주는 그 많은 감정은, 모두 보고 베낀 것에 불과하겠지.”
크루세흐가 내 몸을 차지했을 때, 마치 흥미로운 것을 관찰하듯 내 사람들을 쳐다보았던 이유.
크루세흐는 완전히 깨어난 후 지금까지의 그 짧은 기간 동안, 인간에게서 감정을 배워 나간 것이다.
카이사르처럼 애틋하게 날 어루만지기도 했고, 인간처럼 분노하기도 하고.
“나처럼……, 살고 싶어 하기도 하고.”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영면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던 크루세흐가 지금 살고 싶다는 양 발버둥 치는 건, 분명 내게서 배운 감정.
“……네가 나를 망가뜨렸구나.”
내 말에 크루세흐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그 남자 인간을 끝내 죽이지 못한 거로구나.”
지난번 내 몸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 크루세흐는 카이사르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이지 않았다.
죽이지 못했다.
내 감정을 배웠을 테니까.
카이사르를 지키고 싶은 내 마음을 흉내 냈을 테니까.
어느새 크루세흐의 온몸은 흰색 금으로 가득 찼다. 나도 크루세흐도,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마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빌어먹을 파충류와 마주하는 건 이것이 마지막이리라.
“살려다오.”
크루세흐의 마지막 말은 날 향한 애원이었다.
나는 크루세흐를 향해 쓰게 웃었다.
어쩐지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싫어.”
나는 검을 들어, 크루세흐의 가슴 한가운데 박아 넣었다.
* * *
한기를 느껴, 나는 몸을 뒤척거리다 간신히 눈을 떴다.
‘……내 방이네.’
내가 누운 곳은 마법이 진행되던 수도원이 아닌 황후궁 침실이었다.
이미 밤이 된 듯 어두웠고, 고요했다. 멀리 괘종시계가 뚝딱거리는 소리만이 발소리처럼 묵직하게 들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뭐, 일단 살아 있다는 건 알겠는데.
‘봉인은 성공한 건가? 난 왜 이제야 깨어난 거지?’
아고트. 그래, 아고트가 옆방에 있겠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기함했다.
바닥이 날 끌어당기듯, 온몸이 무겁고 힘들었다.
“아이고오……. 헉, 내 목소리 왜 이래.”
몸만이 아니다. 목소리도 완전히 잠겨, 몇 갈래로 나뉘어 나왔다.
“마법의 여파인 건가…….”
하긴, 눈에 안 보일 뿐이지, 내 안에 있는 영혼을 쪼개고 나누고 덜어 내고 난리를 쳤는데 멀쩡한 것도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네.
그 고생을 했는데 내가 의식이 없다고 침실에 그냥 방치해 둔 거야?
“……목말라.”
목소리가 잠긴 탓인지,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나는 건너편 탁자에 놓인 주전자와 물을 확인했다.
“늦은 밤이고, 아고트도 잘 것 같고…….”
종을 울릴까 했지만, 그만뒀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피곤한 하루였을 것이다. 물 마시는 정도로 귀찮게 하지 말자.
크으, 이렇게 착한 주인이 또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과찬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건너편 탁자까지 걸어가, 물잔에 물을 따라서 한 잔 마신 후 복도에 나가 볼 생각이었다.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무릎이 꺾여 주저앉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란 얘기다.
“헉?!”
나는 탁자까지 가지 못했다.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심지어 혼자 넘어진 것도 아니다. 급하게 협탁을 짚으려다가, 협탁까지 넘어뜨리고 말았다.
“우와악!”
우당탕, 쨍그랑. 협탁이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화병이 깨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 이게 뭐야?!”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우와, 팔다리가 덜덜 떨려……!”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의 상태를 인정해야만 했다.
온몸이 녹슨 기계 장치처럼 삐걱거리고 힘이 없었다.
“마법의 부작용인가?”
나는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양손을 들어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손에 뼈가 불거져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살이 빠졌다.
과하게 빠졌다.
“……갑작스러운 체중 감량도 부작용이라고 봐야 하나?”
나는 미간에 힘을 주고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협탁이 쓰러지며 낸 요란한 소리를 듣고 누군가 오는 모양이었다.
‘아, 잘 됐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봐야지.’
나는 침대를 짚고 간신히 일어나며 생각했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고트였다.
“……마마?”
문 앞에 선 아고트가 크게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게 어두운 중에도 보일 정도였다.
뭘 저렇게 놀라는 거야.
“아고트. 와서 나 좀 일으켜 줄래? 이상하게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아, 세상에!”
“으잉?”
“마마아아아아!”
아고트가 갑자기 울면서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오오!”
물론 마법이 끝난 직후 눈을 뜨지 않으면 걱정이 되긴 하지. 그래도 그래 봤자 반나절인데, 이렇게까지 감격할 일인가.
“애애애앵! 우에에에엥!”
“크헉, 아고트. 나 숨 막혀.”
“앗, 죄송해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나요? 괜찮으신 거예요?”
“그게, 몸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가는데…….”
“아, 그야 당연하죠!”
응? 그게 당연한 거야?
아고트의 요란한 울음소리에, 곧 시녀장 셀즈도 방에 찾아왔다.
“아, 셀즈.”
나는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시녀장의 등장에 반갑게 손을 들었다.
그러나 셀즈의 표정도 아고트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던 그녀마저 하얗게 질려서, 아예 입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 왜들 그러는데 진짜.
“세상에, 마마……!”
하긴, 셀즈는 크루세흐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 황후가 갑자기 황성 외출을 하더니 의식을 잃고 돌아오면 당혹스럽긴 했겠지.
……아니, 그렇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시녀장님, 이게 무슨……, 아, 마마! 마마께서 깨어나셨다!”
“세상에, 신이시여!”
다른 시종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들 문 앞에서 차례로 주저앉거나 휘청댔다.
대체 뭐야! 침실 문 앞에 사람을 주저앉히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어?! 왜 다들 다리에 힘없는 사람처럼 주저앉는데!
“메……, 메르! 의사를 모셔와! 케일린! 본성으로 가서 녹트 자작님께 연락을, 아니, 아니야! 곧장 폐하의 처소로 가서 폐하께 알려라!”
“네, 시녀장님!”
“페레스카 공작가에도 사람을 보내! 당장!”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셀즈가 시종들에게 다급한 명령을 내렸다.
시종들도 그 명령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속속 흩어졌다.
나는 당황하여 손사래를 치며 셀즈를 말렸다.
“이미 밤이 늦었잖아? 폐하께는 내일 아침에 보고 드리도록 해.”
“아뇨, 당장 보고 드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희가 화를 당할 겁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어라, 잠깐만.
내 앞머리……, 이렇게 길었나?
나는 아까부터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길지 않았는데.
그사이 셀즈가 내 곁에 다가와, 아고트와 함께 날 부축하여 침대에 앉혔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는 듯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하긴 해야겠지만요.”
셀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등 뒤의 베개를 정리해 주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떠는 걸 처음 봤다.
“이상이 없긴, 못 서겠다니까.”
나는 약간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투덜댔다. 셀즈는 침착하게 고갤 끄덕였다.
“네, 아주 정상이십니다.”
“무슨 뜻이지?”
“아고트, 일단 물을 한 잔 떠 오렴. 미지근한 물로.”
“네, 시녀장님.”
“저기, 명령이니까 설명 좀 제대로 해 봐. 나 혹시, 이제 못 걷게 되기라도 한 거야?”
나는 셀즈의 옷자락을 쥐고 따지듯 물었다. 일어서질 못하겠는데 이게 정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셀즈가 내 재촉에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가에 물기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마마께서는 석 달 동안 주무셨습니다.”
“……엉?”
“석 달 만에 깨어나셨다고요.”
거기까지 말한 후, 셀즈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흑’ 하고 울먹거리더니, 입을 막고 고갤 숙였다.
“저는……, 저는, 마마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으흑……!”
“앗, 마마! 저는 믿고 있었어요! 마마께서 다시 깨어나실 거라 굳게 믿었다고요!”
셀즈와 아고트가 울음을 터뜨렸다. 입구에 옹기종기 서 있던 황후궁의 시종들도 울기 시작했다.
“아, 대체 왜 우는데……!”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어, 나는 몹시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석 달 만에 깨어났다.
반나절이 아니라.
* * *
늦은 밤이었건만,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대체 어디까지 퍼져 나갔는지 모르겠다.
일단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카이사르였다. 내가 아직 상황을 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중에, 복도에서 해밀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잠시만요! 잠시 진정하시고!”
그러나 엄청난 기세로 다가오는 발소리는 진정이 뭔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 설마 지금 폐하의…….”
발소리에 문 쪽으로 고갤 돌리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카이사르가 등장했다.
“헬레나!”
날 보자마자 내 이름을 외치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뭐랄까,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몰라 열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뭐, 어쨌든 내가 그 목소리를 굉장히 그리워했다는 건 알겠다.
그래. 석 달이나 지나 있었던 거구나. 나는 그제야 그 긴 시간이 실감이 났다.
“폐하.”
“헬레나! 헬레나!”
카이사르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며 침대로 다가왔다.
내 곁에 앉아, 내 손을 잡고, 내 뺨을 어루만지더니, 내 손에 이마를 대고 몸을 웅크렸다.
“헬레나……!”
“제 이름 닳겠어요, 폐하.”
행여 내 이름을 잊을까 기억에 새기려는 사람처럼, 카이사르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웅크린 어깨가, 그 큰 어깨가, 너무나 작고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없으면 이 사람은 이렇게 초라해지는 건가. 이렇게 작고 애달파지는 걸까.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무사해요, 폐하.”
“응, 그래.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저 잠들어 있었던 것뿐인데.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던 것뿐인데.
‘나는 이 남자를 두고는 못 떠나겠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마.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뒤이어 헐레벌떡 달려온 해밀턴이 내게 물었다.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오랜만인 거 맞죠, 녹트 자작?”
“네. 석 달 만에 뵙습니다.”
내 말에 해밀턴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입구 쪽엔 로위나도 서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고 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폐하. 오랜만이에요.”
나는 카이사르에게 인사했다.
그제야 웅크리고 있던 카이사르가 고갤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물기 어린 그의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제가 보고 싶으셨나요?”
“말해 무엇하겠어.”
“이상한 기분이에요. 전 불과 몇 시간 전에 폐하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분인걸요.”
크루세흐와 싸우고, 그 가슴에 검을 박아 넣고, 이후 눈앞에서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뿐이었다. 이면 의식에서의 체감 시간이 현실과는 다르겠지만, 고작해야 두 시간 정도밖엔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석 달이 지나 있었다니.
“내게 석 달은 지옥이었어.”
카이사르가 내 손등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며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세상이 온통 잿빛이었고, 살을 베어 내는 추운 겨울이었어. 네가 없으면 내 세계는 색을 잃어버려, 헬레나.”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괜찮아. 깨어나 줬으니까. 무사히 돌아와 줬으니 괜찮아.”
카이사르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좋은 꿈 꾸었나?”
그 질문에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가 차올랐다.
“……네.”
내 대답에 카이사르가 눈을 감았다.
“그럼, 됐어.”
투욱. 카이사르의 고개가 내 어깨에 떨어졌다. 이제야 간신히 안심한 것처럼.
카이사르와 애틋한 정을 나눌 새도 없이, 문밖이 다시 소란해졌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았더니, 이번엔 두 남자가 들이닥쳤다.
“황후마마!”
“헉, 아버지? 오라버니?”
뭐야, 설마 공작저에서 달려온 거야? 이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은 냉큼 침대로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카이사르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당연하게도 카이사르는 개의치 않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버지. ……많이 야위셨네요.”
“어디 마마만 하겠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마르셔서……. 대체 이 아비의 수명을 얼마나 줄여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아버지가 목이 멘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어쩐지 울컥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머니는요?”
“본저에 있습니다. 전서구를 띄웠으니, 내일 오후면 수도에 닿을 겁니다.”
“어머니도 많이 걱정하셨을 텐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깨어나실 테니, 각자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더군요.”
아버지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간신히 꺼낸 농 섞인 말이, 어째서인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걱정 끼쳐서.”
“됐습니다. 깨어나셨으니 됐습니다. 저는 이제 안심했습니다.”
아버지가 날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품이 너무나 안온했다.
나는 곁에 서 있는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레너드가 빙긋 웃었다. 그러다 이내 눈물이 나는지, 고갤 숙이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마마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거참, 죄책감 드네. 깨어나지 못했던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손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의사를 모셔 왔습니다.”
크고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침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화려한 드레스와 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울음바다가 된 상황에 홀로 다부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직 마마께서는 휴식이 필요하시니, 오늘 면회는 이쯤 하고 모두 물러가시는 게 좋겠어요.”
“나는 남겠다.”
“안 됩니다, 폐하.”
“어째서!”
“마마의 빠른 회복을 원하지 않으시나요?”
율리카의 단호한 재촉에 카이사르가 ‘크윽’ 하고 신음했다.
“마마의 곁은 저와 아고트가 지킬 테니 모두 안심하고 돌아가세요.”
응? 잠깐만. 율리카는 여기 남는 거야? 아니, 왜?
“자, 어서!”
율리카가 짝,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모든 손님들이 그 소리에 움찔하더니,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율리카.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무서워졌구나.
나는 고작 석 달 만에 격세감을 느꼈다.
모두가 빠져나간 후, 율리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사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날 향하여 환하게 웃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마마.”
“율리카 양은 울지 않네요. 다들 감격해서 울던데.”
“왜 울어야 하죠? 제가 만든 마법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어요. 어차피 다 잘 됐을 게 뻔했는걸요.”
율리카가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울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허세를 부리는 그녀가 좀 귀여웠으니까.
* * *
의사는 몇 가지 간단한 진찰을 하고 돌아갔다. 오래 잠들어 있던 탓에 생긴 문제를 제외하면, 지극히 정상이라 했다.
율리카와 아고트가 그 말을 듣고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아고트가 보고를 위해 방을 나간 후, 나는 율리카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마법은 오차 없이 잘 구현됐어요. 봉인도 잘 끝났고요. 두 개로 나뉜 봉인이 두 분의 건강이나 생명에 얼마나 영향을 주게 될지, 저와 로만 씨가 남아 주기적으로 살필 거예요.”
“그렇군요. 잘됐네요.”
500년 전에는 내 건강 문제가 봉인 때문이라고 생각을 못 했기에, 마법사를 곁에 두고 살필 생각도 못 했었다.
만약 내가 내 몸의 문제를 다른 누군가와 상의했다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에레즈와 상의를 했더라면.
‘어쩌면 에레즈는 내가 자신과 상의하지 않은 일로 섭섭하게 생각했을까?’
모를 일이다.
문득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고, 관심 가져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젠 알 길이 없지만.’
어쩐지 사과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 줄 것 같긴 하다.
“전 어쩌다가 석 달이나 잠들어 있게 됐던 걸까요.”
“체력이 소진된 탓일 거예요. 완전히 깨어난 용의 영혼을 꽤 오래 억누르고 계셨던 거니까.”
율리카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폐하도 일주일 정도 깨어나지 못하셨었어요.”
“……네?”
나는 조금 전 내게 한걸음에 달려왔던 카이사르를 떠올렸다. 전혀 그런 기미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폐하께서 공작령에 출타하신 것으로 속여 어떻게든 무마했어요. 귀족들 사이에서 의심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할 무렵 깨어나셔서 다행이었죠.”
“아슬아슬했네요.”
“뭐, 공작께서 어떻게든 해결해 주셨으리라 생각하긴 해요. 자문회를 꽉 잡고 계시니까.”
율리카가 빙긋 웃으며 내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괜히 내가 다 쑥스러워진다.
“사실, 진실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긴 했어요.”
“의견?”
“폐하께서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폐하께서 미리 조치해 두신 대로, 페레스카 공작을 황제로 추대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요.”
“……그런 조치를 했어요?”
몰랐다. 전혀.
카이사르의 각오는 알았다. 나도 그의 각오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가 그 후의 준비까지 해 두었다는 얘길 들으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내가 날 내던지는 듯한 짓을 할 때에도, 그는 이렇게 괴로웠을까.’
나는 문득, 마수 토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사실 난 그다지 개의치 않았었다. 부상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카이사르는 괴로워했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슬퍼하고, 날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었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새로이 또 배워 가는구나.
사람을 대하는 방법. 아끼는 방법. 사랑하는 방법.
나는 그들을 위하여 나부터 아끼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면 크루세흐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죠?”
“봉인이 깨지지 않는 한은요.”
“뭐, 온전한 용도 봉인해서 잘 품고 있었으니, 반 토막 난 영혼 정도야.”
내가 피식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 말에 율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온전한 용이요?”
아차. 얜 내가 단테였다는 걸 모르지, 참.
“아니, 그, 단테 황제가 그랬었다고요. 저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이거죠.”
“뭐……, 그렇기는 하겠죠.”
율리카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로만 씨와 그런 얘길 나누긴 했어요.”
“뭘 말이죠?”
“단테의 심장에 봉인한 용의 영혼이 왜 마마에게 계승되었을까 하는 거요.”
“흐음. 흥미롭고 위험한 논제네요. 결론은요?”
“페레스카가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레나투스의 피가 섞여 있어요. 영향이 있었을 거라 봐요.”
“헉, 그래요?”
“모르셨나요? 본인 가문이시잖아요?”
“아니, 음. 그랬던 것도 같네요.”
와, 몰랐네.
하긴, 귀족들이 거기서 거기고, 페레스카는 역사가 긴 구귀족인 데다 공작가였으니까.
한 번이라도 레나투스의 피가 섞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아. 어쨌든 겨우 끝난 거군요.”
500년이나 지난하게 이어졌던 용과의 전쟁이.
멋지군.
난 또다시 이 세계를 구했다.
이번에도 참 곤란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네, 끝났어요. 저도 이제야 겨우 마마께 빚을 갚았고요.”
“빚이라. 넘치게 갚았네요.”
“이자까지 친 셈 하죠, 뭐.”
율리카가 환하게 웃었다. 거리낌 없는 미소가 참 예뻤다.
“그럼 우린 이제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게 됐군요.”
“친구요? 마마와 제가?”
“아 참. 율리카는 친구가 뭔 줄 모르죠? 제대로 친구를 사귀어 봤어야 알지, 뭐.”
“어머, 그러는 마마도 딱히 또래 친구는 없으시잖아요?”
율리카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푸핫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란 건 말이죠, 율리카 양. 서로 민폐 정도는 끼칠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다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언젠가, 나의 오랜 친우에게 들었던 말을.
그러나 율리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아서, 결국 나는 다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 *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큰 이상이 있었던 게 아닌 데다, 평소에 워낙 체력이 좋았던 편이었으니까. 잘 먹고 잘 쉬는 것만으로도 몸은 금세 평소의 컨디션을 찾아갔다.
즉, 굳이 주변의 걱정과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랬는데…….
“앗, 마마! 무슨 일이신가요?”
이른 아침, 이제는 충분히 회복이 되었다 싶어 나는 방을 나섰다.
오랫동안 검을 쥐지 못했다. 몸이 둔해지기 전에, 대련은 못 하더라도 가볍게 스트레칭 정도는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오가던 황후궁의 시종들이 득달같이 내게 달려왔다.
“연무장에 갈까 하는데.”
“네에?! 세상에, 연무장이라니! 아니 될 말씀입니다, 마마!”
“아직 더 쉬셔야 하는 때에, 산책도 아니고 연무장이라니요!”
“차라리 저희를 밟고 가십시오, 마마!”
시종들이 내 앞을 가로막듯 복도 바닥에 털썩털썩 엎드렸다.
정말 이 앞을 지나가려면, 이 녀석들을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될 판이다.
“내가 너희를 왜 밟고 가야 하는데……!”
“또 마마께서 잘못되시면, 어차피 저희는 모가지입니다!”
“마마께서는 석 달 동안 황성의 분위기가 얼마나 침울하고 살벌했는지 모르시잖습니까!”
아니, 그 석 달 동안 대체 뭐 어쨌길래 이러는 거야.
내가 잠들어 있었던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고, 당연히 이들을 문책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마마! 왜 나와 계신 거예요!”
“아고트…….”
시종들과 황후궁 탈출을 놓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등 뒤에서 아고트가 나타났다.
아, 그래. 아고트라면 내 편을 들어 주겠지. 나는 기쁘게 아고트를 맞이했……, 건만.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를 시키시면 되잖아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아고트가 내 곁으로 달려와 내 팔을 부축하며 잔소리했다.
잠깐만. 부축은 왜 하는데?! 나,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거든?!
“연무장에 가려고.”
“네에?!”
“훈련은 안 해. 그냥 가볍게 스트레칭이나 하고 올 거야.”
“스트레칭이라면 제가 대신 하고 올게요!”
“그게 무슨 소용인데…….”
나는 난감한 심정을 목소리에 여과 없이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옷 얇게 입으신 거 봐! 오늘은 바람도 차요, 마마!”
“아고트의 말이 맞습니다. 감기 걸리시면 큰일 납니다.”
“아직 가을이거든?”
“제가 가서 입으실 옷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앗, 그러면 저는 몸을 덥힐 따뜻한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마마, 침실이 지루하시면 다른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자,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얘들아? 잠깐만. 왜 이럴 때만 내 말 안 듣고 너희들끼리 일사불란해지는 건데?”
당황한 내 질문에, 시종들이 동시에 날 쳐다보았다.
내 반항에 잔소리를 쏟아 낼 것 같은 그 시선들에, 나는 나도 모르게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마께서도 항상 저희에겐 상의도 없이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리시잖아요!”
“영문도 모른 채 의식 잃은 마마를 마중해야 했던 저희의 심정을 좀 헤아려 주시라고요!”
“헉……, 미안…….”
왜 내가 혼나는 입장이 된 건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내가 굉장히 잘못했다는 기분은 든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대부분 나와 함께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이라, 나를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장단에 맞춰 주는 수밖에 없는 건가.’
뭐, 며칠 정도만 분위기에 맞춰 주면 다시 평소대로 돌아가겠지.
……며칠 지나도 안 돌아오면 어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보기 좋군.”
“폐하!”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카이사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등 뒤에 서 있었다.
황제의 등장에, 나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시종들이 하나같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췄다.
얘들아, 잠깐만. 나한테는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대더니, 대우가 너무 다른 거 아냐? 응?
“의사 말로는 많이 회복되었다더니, 회복된 체력을 시종들과 다투는 데 쓸 줄은 몰랐군, 부인.”
“다투는 걸로 보이시나요? 제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는데요.”
내가 투덜거렸다.
카이사르는 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으쓱하며 웃더니, 내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겉옷을 걸쳐 주었다.
“연무장에 가는 건 나도 반대야.”
“몸이 굳어서 삐걱거릴 판이에요, 폐하.”
“정 심심하면, 기사들이 훈련하는 것을 참관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오, 좋아요! 갈래요!”
역시 믿을 건 내 남편뿐이군!
이들의 과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 나는 행여나 카이사르의 마음이 바뀔까, 재빨리 카이사르의 옷자락을 쥐었다.
“앗, 마마……!”
아고트를 위시한 시종들이 애타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카이사르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미안하구나, 얘들아. 난 좀이 쑤셔서 이제 침대에 못 누워 있겠어.
“황후는 내가 모시도록 하겠다. 걱정하지 말고 각자 할 일 하도록.”
카이사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만, 시종들의 표정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절할 수도 없는지라, 결국은 모두 순순히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나를 데리고 복도에서 돌아섰다.
“앗! 제가 모실게요, 마마!”
아고트만이 그런 나와 카이사르의 뒤를 당연하다는 듯 총총 뒤따랐다.
계단을 내려가며, 카이사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까 시종들 눈빛 봤어?”
“눈빛이 왜요?”
“날 향한 원망이 가득하던데.”
“원망이요? 그럴 리가요.”
“정말이야. ‘너랑 나갔다가 마마가 그 꼴이 되어서 돌아오신 거잖아.’ 하는 속내가 다 읽혔다고.”
“앗……, 저런.”
나는 짧게 한탄했다.
내가 ‘그 꼴’이 된 건 카이사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내 탓이다. 오히려 카이사르가 나 때문에 일주일이나 못 깨어났던 거고.
하지만 진실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 참, 답답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해서 살 수가 있나, 원.”
그렇게 투덜거리는 카이사르는, 어째서인지 웃는 표정이었다. 시종들에게 적의를 사게 되어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예전의 나라면 이해할 수 없었을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내 사람들의 잔소리도 과보호도 그리 싫지는 않았으니까.
* * *
……조금 이르긴 하지만, 방금 했던 생각을 철회하겠다.
연무장에 들어서니, 마침 백기사단의 수련병들이 훈련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나와 카이사르는 연무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합 소리며 땀 냄새며 날붙이 냄새 따위에, 어쩐지 기분이 개운해졌다.
그러나 그 여유도 잠시.
“앗, 교관님! 아, 아니, 마마께서 오셨다!”
“뭐? 마마께서!”
“황후마마께서 부활하셨다!”
일부러 조용히 자리를 잡았건만, 날 발견한 한 수련병의 외침에 나머지 수련병들까지 들썩였다.
아니, 그나저나 부활은 뭔데. 나, 죽었었어?
“마마, 무사하셨군요!”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을 쉬신다 하여, 다들 걱정했습니다!”
어느새 수련병들은 검을 내던지고 내 곁으로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정작 다들 카이사르에게는 대충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봤다. 질투의 화신인 내 남편이 속앓이를 하고 있진 않나 걱정이 됐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잊고 있었군. 이 녀석은 이상하게 남자들은 경계를 안 해……!
“건강은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모두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단장께서 말리셔서……!”
백기사단장, 열심히 일하고 있군!
“난 괜찮으니까……, 다들 그만 돌아가서 훈련을 마저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마마께서 오셨는데 훈련이 뭐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이것들이 내 핑계 대고 놀 심산인 거 아냐?!
더구나 시간이 흐르자 소란의 규모도 점점 커져 갔다.
눈치 없는 수련병 하나가 연무장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기사들까지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악! 마마아아아아!”
이 경박한 목소리는 호크로군.
나는 굳이 연무장 입구를 확인하지 않고도, 전 토벌대원들이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시끄럽고 호들갑스러운 녀석들이 왔다. 젠장.
“어째서 저희에게 먼저 기별하지 않으셨습니까! 섭섭합니다아아!”
“황후궁을 나오실 줄 알았으면, 저희가 가서 모시고 나왔을 텐데! 가마를 태워 모셨을 텐데!”
그럴 것 같아서 말 안 했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드니 먼지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잇취!”
결국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적.
방금까지 왁자지껄하던 게 거짓말인 듯 느껴지는, 무서울 정도의 정적.
……아, 이런. 불길한데.
“……따, 따뜻한 차를 내어 와라!”
“창문 닫아! 가서 담요 가져와!”
“목숨 걸고 마마의 감기를 막아라!”
“감기 아니야! 먼지 때문이라고, 이 얼간이들아!”
결국 한계에 달한 나는, 체통이고 뭐고 없이 거친 단어를 내뱉고 말았다.
다행이랄지 황후의 거친 언사에 깜짝 놀랄 마음 여린 인간은, 적어도 여기에는 없다.
“마마를 위해서라면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당장 다 벗어 드릴 수 있습니다!”
“으악, 누가 저 자식 좀 말려! 흉측해서 못 살겠네, 진짜!”
정말이지……, 울고 싶다.
황후궁의 시종들 말 듣고, 그냥 방에 얌전히 있을걸!
‘나는 그냥 참관이나 하려던 것뿐이란 말이야!’
훈련 참관하는 길이 뭐 이렇게 멀고 험한데!
이미 충분히 혼란한 상황인데, 심지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마!”
얼마 후, 여지없이 입구 쪽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내다보니, 기사복을 차려입은 레너드가 보였다.
오라버니의 등장이야 반갑지. 문제는 오라버니가 혼자였다는 게 아니다. 오라버니 뒤로 그의 충직한 친위대 기사들이 줄지어 몰려 있었다.
“마마, 이게 어찌 되신 일이에요!”
친위대 기사의 숫자에 살짝 기가 질려 있는데, 이번엔 뒤쪽 입구에서 율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율리카 역시 혼자 온 게 아니다. 로만을 위시하여 마법사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행한 마법의 결과물을 관찰하고 싶다는 양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한계다.
난 여기서 탈출하겠어.
“폐하, 제발 이들 좀……!”
나는 곁에 앉은 카이사르를 붙잡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으쓱하며 날 쳐다봤다.
“좋은 기회야, 부인.”
“대체 무슨 좋은 기회죠? 제가 새로운 욕설을 배울 기회?”
“남에게 도움을 청할 연습을 할 기회. 자, 내게 ‘도와주세요, 폐하.’라고 한번 말해 봐.”
지금의 나에게 그게 뭐 어렵겠느냐마는…….
거들먹거리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도와 달라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무, 물론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나는 양쪽에서 압박하듯 다가오는 친위대와 마법사들을 보고, 자존심을 굽히기로 결정했다.
“도, 도와 주, 도…….”
“응? 잘 안 들린다만.”
“도, 도, 돕…….”
“도, 뭐?”
“……도와, 당장!”
앗, 이런.
나는 자존심을 굽히지 못했다.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반말이 튀어 나갔다. 사람들도 많은 자리에서 황제에게 반말로 명령이라니. 이것만큼은 나에게 적응된 기사들도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푸하하하핫!”
그러나 카이사르는 최근 본 것 중에서 가장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 됐다. 어찌나 큰 소리로 폭소하던지, 내 남편이지만 얄미워 죽겠다.
“스승님의 명령이시라면, 따라야지.”
그렇게 말한 카이사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드디어 도움다운 도움을 받게 되나……, 했더니, 카이사르가 갑자기 날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응?!
“자, 면회도 참관도 이걸로 끝이다. 이제부터 황후는 이 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니, 다들 제 갈 길 가도록.”
카이사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모인 이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러나 모인 이들은 쉽사리 흩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야유를 보냈다.
“에이, 폐하만 황후마마를 독점하시는 건 반칙입니다!”
“저희를 보러 와 주셨는데, 왜 폐하가 모시고 가시는 겁니까? 이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기사들이 와글거리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화내지 않았다. 여전히 상냥하고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 꺼지라 했다.”
……말의 내용은 다정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의 거친 발언에, 그제야 기사들도 움찔하며 꼬리를 내렸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와 결혼한 후 분위기가 온화해졌다는 소문이 돌긴 한다만, 애초에 이 인간의 본성은 적을 물어 죽이는 ‘늑대’라고.
결국 모인 이들이 슬금슬금 흩어져 사라졌다.
모두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로 마지막까지 날 돌아보았다만, 나는 얼른 가라고 손을 휙휙 흔들어 줬다.
결국 레너드와 아고트까지 알뜰하게 내보낸 후, 카이사르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게 물었다.
“부인. 나, 잘했지?”
……어휴.
이 말 안 듣는 늑대.
“네에, 잘하셨습니다.”
잔소리할 기운도 없다. 나는 체념하여, 그의 어깨에 고갤 기댄 채 대답해 주었다.
비록 목소리에 영혼은 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가을도 기울고 겨울이 더욱 가까워질 무렵, 날 향한 주변의 과보호도 흥미를 잃은 듯 점차 줄어들었다.
나로서는 굉장히 다행한 일이었다. 엄청나게 번거롭고 귀찮았으니까.
이제 외출도 셀즈의 거국적인 허가가 떨어져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날이 포근한 주말에는 황성 내 예배당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예배에도 참석했다. 황후의 건재를 귀족들에게 보여 줄 첫 자리였다.
예배 후 나오는 길, 나는 예배당 건물 구석 화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늘 지나다니던 곳이었는데, 그날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저게 뭐지?”
화단에 여러 개의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분명 전엔 없었는데.
아고트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마법사 길드 사람들이 알려 준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 소원을 빌 때 쓰는 방법이래요.”
“소원?”
“네. 소원을 빌면서 돌을 쌓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요.”
“그렇구나. 사심의 탑이로군.”
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뭔 소원들이 이렇게 많은지.
“다들 마마께서 빨리 깨어나시기를 빌었어요.”
“……응?”
“뭐, 나중엔 누가 더 튼튼하고 멋지게 돌탑을 쌓는지에 대한 경쟁으로 바뀐 것 같기도 하지만요.”
아고트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네가 쌓은 것도 있어?”
“네. 저쪽에 저 돌탑은 저랑 황후궁 사람들이 같이 쌓은 거예요. 돌이 부족해서, 나중엔 황성 밖에 나갈 때마다 한 주먹씩 주워 왔다니까요.”
내가 깨어나지 않은 석 달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나는 비어 있던 화단을 한가득 채운 돌탑을 보며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 * *
“네?! 다과회요?!”
늦은 오후, 나는 해밀턴과 로위나를 황후궁으로 초대하여 나의 야심 찬 계획을 밝혔다.
내 계획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마시던 차를 뿜을 기세로 놀라며 동시에 날 쳐다봤다. 어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내뱉던지.
“그,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그 덕분에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찻잔을 양손에 쥐고 둘을 쳐다봤다.
“누가 보면 내가 국가 전복이라도 꾀하는 줄 알겠어요.”
“아니, 그, 다과회를, 그…….”
해밀턴이 ‘커흠, 커흠’ 헛기침을 하며 자꾸만 말을 번복했다.
“딱히 큰 규모를 원하는 게 아닌데요. 황후가 다과회도 마음대로 못 여나요?”
“아뇨. 당연히 여실 수 있죠. 놀란 건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밀턴이 자꾸 머뭇거리자, 결국 로위나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뭔가 하는 것.”
“아……, 그랬죠. 하긴.”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에 시선을 허공에 보냈다.
자진해서 다과회를 열겠다니, 날 아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귀찮으니까 숨 쉬는 것 빼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두 번째 삶의 모토였으니까.
“위기를 벗어나고 나니, 내 삶에 대해 좀 돌아보게 됐달까, 사람들과 교제하고 마음을 나누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달까…….”
어쩌다 보니 구구절절 변명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아, 쪽팔려.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마. 불경한 소리인 줄은 알지만, 옛말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좋은 거라고…….”
“하핫, 죽을래요?”
“초대장을 돌리려면 빨리 돌리는 게 좋겠군요. 마침 추수제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수도에 남은 귀족들도 상당수 있을 겁니다.”
헛소리하는 해밀턴과 달리, 로위나는 재빨리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귀족들을 초대하려는 게 아니에요.”
“네? 아직 작위를 받지 않은 영식과 영애들만을 초대하고 싶으시단 겁니까?”
“아뇨.”
“그러면 대체 누구를……?”
“이번에 크루세흐를 봉인하는 데 도움을 준 마법사들과 기사들이요.”
내 설명에 해밀턴과 로위나가 의견을 교환하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 해밀턴이 다시 날 향해 말을 걸었다.
“마마. 그들에 대한 치하라면 이미 폐하께서 끝내셨습니다. 귀족 영애들도 아니고, 기사나 마법사들과 어울리시는 건…….”
“도움을 받은 건 나예요. 그들에게 보답할 의무도 자격도 저에게 있는 것 아닌가요?”
딱 자른 내 말에 해밀턴과 로위나가 ‘으음’ 하고 낮게 신음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폐하께서 대신하실 이유도 필요도 없어요. 저에게는 저만의 사람들이 있어요. 내 사람들을 초대하여 교제하겠다는 게, 이상한가요?”
“……이상하지 않죠.”
해밀턴이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수긍했다.
“혹시 저희도 초대 명단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해밀턴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두 분도 저의 소중한 사람들인걸요.”
해밀턴과 로위나의 미소가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충신들을 내가 꾀고 있다는 걸 카이사르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명 싫은 표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도 결국, 내 사람이니까.
* * *
다과회는 황후궁의 내원에서 열렸다.
기사들은 기사 제복을 입고 참여했고, 마법사들은 로위나가 마련해 준 의상을 입었다. 검은 로브를 입겠다는 걸 로위나와 율리카가 애써 뜯어말렸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각종 디저트와 간단한 음식, 향기로운 술과 음료, 꽃과 음악이 함께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하늘도 푸르러 딱 좋았다.
그 좋은 분위기에서도 엉엉 우는 녀석은 있었다.
“마마. 저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이런 호화로운 파티에 참여하는 건 처음입니다.”
호크가 내 앞에 서서 꺼흑 꺼흐흑 울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마마를 알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마마께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마우니까, 그냥 아껴 둬.”
왜 이렇게 나한테 목숨 바치겠다는 애들이 많아. 내가 저승사자도 아니고.
“제가 나중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제 아이의 대모님이 되어 주십시오!”
“뭐?! 싫어!”
“마마께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폐하께 충성 서약한 인간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기겁하여 말했다. 다행히 다들 농담으로 들은 건지, 얘기를 들은 다른 이들도 큰 소리로 웃는 게 전부였다.
“누가 얘 술 먹였니?”
내가 다른 기사를 불러 물었더니, 호크가 발끈하여 외쳤다.
“아직 한 병밖에 안 마셨습니다!”
“한 잔도 아니고 한 병?! 세상에, 흑역사 더 만들기 전에 얘 좀 끌고 가서 재워.”
“와아, 마마께서 호크 녀석의 토벌을 명령하셨다! 다들 따르라!”
“아니, 토벌이 아니라 가서 재우라고…….”
내가 가르치며 오래 부대껴서 그런가, 토벌대 기사들은 내 앞에서 농담도 장난도 거침이 없다.
뭐,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 훈훈한 분위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고로 파티는 즐거워야지.
“다들 신이 났구만.”
“……달튼 경.”
어느새 곁에 적기사단장인 달튼이 다가와 섰다. 달튼은 접시에 온갖 음식을 그득하게 쌓아 놓고 입안에 욱여넣고 있었다.
저게 벌써 네 접시째라는 게 놀랍다. 이 인간의 위는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
“이런 간질거리는 파티는 처음이라 다들 즐거운가 봅니다.”
“부담스러워서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익숙하지 않은 중에도 와 줬네요.”
“어휴, 누가 부르시는 자리인데. 열 일 제치고 와야지요.”
“하긴.”
나는 달튼의 말에 굳이 빼지 않고 긍정했다.
그럼,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마련한 자리인데 다 참여해야지. 무릇 내 사람들이면.
내 반응에 달튼이 폭소했다. 어디에 있었는지, 제럴드가 쪼르르 달려와 달튼에게 체통을 지키라며 잔소리를 해 댔다.
멀리서는 로만이 율리카와 레너드에게 다과회 예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게 보였다. 학구열 빼면 시체인 로만도, 그것만은 배우고 싶지 않은 듯 열의 없는 표정이었다.
아고트는 흑기사단의 기사들과 진지한 토론 중이었다. 제스처를 보니 검을 잡는 방법에 대해 논의 중인 모양이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어쩐지 지켜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마마. 그렇게 세상 다 산 사람이 손주들 재롱 보는 듯한 표정은 삼가 주십쇼.”
곁에 선 달튼의 핀잔에 나는 ‘헉’ 하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언제 이렇게 내 주변이 요란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