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1화 (122/156)

만렙 공녀는 오늘도 무료하다 외전

○ 외전 1. 어디든 망나니 하나쯤은 있더라

영원히 저물지 않을 제국의 위대한 지배자, 카이사르 W 그레이 황제 폐하와 헬레나 페레스카 황후마마 귀하.

일전에 베풀어 주신 크나큰 도움으로 저희 오르랑드 왕국은 오랜만에 참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 드리옵니다.

그 높고도 경이로우신 권위와 권력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어 몸소 보여 주신 가르침을 받자와, 저희 오르랑드 왕가는 앞으로도 세세토록 제국의 가장 충실한 종이요, 우애 깊은 친우요, 변치 않는 형제의 나라가 됨을 다시 한번 맹세하는 바옵니다.

다만 여쭈옵기는, 저희 미력하고도 어리석은 라파엘 오르랑드 13왕자가 지난달 기사 학교에 입학을 청하여 떠났사온데,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것이온지 몹시 경이롭고 궁금하옵니다.

도무지 구제가 불가능하여 왕가에서는 이미 손을 놓았던 그 썩어 빠진 망나니 ―이 저속한 표현에 혹여 불쾌하실까 염려되옵니다만, 달리 표현할 알맞은 단어가 없기로 양해를 구하옵니다– 왕자가, 크나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양 눈빛과 몸가짐이 새로이 되었으며, 왕국에 보탬이 되겠다는 각오와 전의가 하늘에 닿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식의 흉을 밖으로 논하기 부끄럽사옵니다만, 녹아 늘어져 굳은 떡처럼 방바닥에 달라붙어 일어나지 않던 자가 매일 새로운 힘이 샘솟는 듯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저녁 가장 늦게까지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하니, 여우 귀신에 홀렸는가 영혼이 다른 이로 바뀌었는가 근거 없는 두려움마저 일 정도이옵니다.

이에 만 번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만을 전하여도 부족하오나, 대체 어떤 묘수를 쓰신 것이온지 끓어오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여 서신 말미에 짧게나마 첨하옵니다.

* * *

“구구절절하군…….”

첫눈이 내리고 얼마 후, 서방의 오르랑드 왕국에서 도착한 편지를 끝까지 읽은 카이사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던 헬레나가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안 좋은 내용인가요?”

“그건 아닌데, 편지를 탈탈 털면 세 줄 요약밖에 안 남을 것 같은 내용을, 너무 길게 써 놓아서 되려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야.”

카이사르가 세 장짜리 편지를 허공에서 탈탈 털며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후라 그런지, 헬레나는 편지지에서 글자들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카이사르의 혼란은, 먼저 편지를 읽고 진작 요점 정리를 끝낸 레너드의 설명에 의해 해소됐다.

“요약하자면, 오르랑드와 제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굳건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잘됐네요. 애초에 폐쇄적이던 오르랑드와 관계를 트기 위한 일이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거잖아요.”

“그렇죠.”

“그나저나 그 짧은 내용을 세 장이나 써서 보냈다는 건가요?”

“아뇨, 그건 한 장이었습니다. 인사말 빼면 반 장이고요.”

“네? 그럼 나머지 두 장은요?”

“우리가 다녀간 후 망나니로 소문 난 13왕자인 라파엘 오르랑드가 개과천선했는데,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며 비법 좀 알려 달라더군요.”

“으음…….”

어이없는 내용에 헬레나가 입을 다물고 짧게 신음했다. 오르랑드 국왕의 마음속에서는 아들의 개과천선에 대한 비중이 국가 간의 문제보다도 더 놀랍고 컸나 보다.

그 녀석. 구제 불능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국가 정치를 뛰어넘을 정도로 끝장난 망나니였던 건가.

“13왕자면……, 그 사람 맞죠? 마수 토벌 나갈 때 함께 싸우게 해 달라고 나섰던 남자.”

헬레나가 카이사르를 향해 물었다. 카이사르는 가볍게 고갤 끄덕여 헬레나의 질문에 긍정했다.

헬레나는 라파엘이 어떤 이였던가를 떠올려 보았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옅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전체적으로 인상이 흐릿한 중에 성격이 꽤 뺀질거렸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뭔가……, 했나요?”

오르랑드에 머물렀던 열흘간을 찬찬히 반추해 보았으나,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다.

헬레나의 질문에 레너드와 카이사르도 허공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둘 역시 뚜렷이 떠오르는 단서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고트와 동행하면서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겪은 걸까요.”

“폐하가 괜히 겁줘서 그런 건 아니고요?”

“나보다는 헬레나와 그 추종자들이 겁줬던 게 더 컸을 것 같은데.”

“어머, 제가 언제 겁을 줬다고 그러세요?”

“그쪽을 걸고넘어지다니. 내 기사들이 모두 헬레나의 추종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모양이지?”

“그러고 보니 마마와 대련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뭔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요. 호크처럼 말입니다.”

“호크처럼……. 하긴, 둘 다 뺀질거리는 게 닮긴 했죠.”

헬레나가 적기사단의 호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도 만만치 않게 뺀질거리는 성격이란 말이지.

“하지만 대련은 오르랑드에 도착한 직후였잖아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사람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없었는걸요.”

“맞아. 그 후로도 여전히 뺀질거리긴 했지.”

“마수와 전투할 때에도 적잖이 뺀질거리는……, 그나저나 남의 나라 왕자에게 뺀질거린다고 막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레너드가 뺀질거림으로 가득한 대화에 심각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카이사르는 뭐가 대수냐는 태도로 답했다.

“본인 앞에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그리고 부모가 망나니라고 공인할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하긴…….”

레너드가 카이사르의 말에 고갤 끄덕이며 수긍했다.

정말 쉽게도 수긍한다. 더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본인 앞에서 대놓고 뺀질거린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헬레나는 고개를 저어 흐릿하게 떠오르려는 기억을 재빨리 지워 버렸다.

“결국 그 망나니 왕자가 대체 무슨 계기로 정신을 차렸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헬레나의 질문에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들 신통한 대답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쪽 왕은 비법을 알려 달라는데, 이쪽도 비법을 아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왕가에서도 포기했다던 망나니 13왕자가, 안락한 망나니 생활을 청산하게 만든 계기가.

* * *

서방 왕국 오르랑드에서 마수 토벌에 대한 원조 요청이 온 건 한 달 전, 제국 수도에 겨울이 막 걸음을 내디딜 무렵이었다.

“최근 내륙에서 마수 출몰이 급증하여, 마수 토벌에 관한 원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오르랑드의 사신이 가져온 요청서를 요약하여 설명하는 해밀턴의 말에, 카이사르의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았다.

“오르랑드는 그동안 제국에게 다소 적대적이지 않았나? 국혼 때에도 초대를 거절했었고 말이야.”

“애초에 좀 폐쇄적인 국가였으니까요. 다만 국혼 때 저희가 마수를 퇴치했다는 소식이 닿았던 모양입니다.”

“경험자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는 거로군.”

“그렇겠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 쪽 책임도 있어서 무시하기도 좀…….”

“우리 쪽 책임?”

“애초에 마수들이 들끓기 시작한 발단이 마마 때문이지 않습니까.”

원인을 따지자면, 노에가 헬레나의 심장에 봉인된 크루세흐를 자극하려 용을 깨우려고, 마수를 조종했던 탓이니까.

그러나 해밀턴의 말에 카이사르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헬레나는 잘못이 없다.”

“마마께서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요.”

“나쁜 건 헬레나를 귀찮게 만든 노에 놈이지, 헬레나가 아냐. 헬레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렇죠. 저도 마마를 책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헬레나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마라. 내 아내는 귀찮은 걸 몹시 싫어하니까.”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나쁜 놈이죠, 예!”

계속된 카이사르의 말에 결국 해밀턴이 백기를 들었다. 사죄의 말과 달리, 꽥꽥 소리 지르는 표정은 잔뜩 화가 있었지만.

해밀턴에게 항복을 받아 낸 후에야 카이사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본론으로 돌아왔다.

“오르랑드와는 좀처럼 닿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네. 자문회에서도 같은 의견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원조로 오르랑드가 제국의 속국이라는 걸 공공연히 주장할 수도 있고요.”

“우습게 됐군. 속국 소리 듣기 싫어서 애써 우리를 적대해 온 걸 텐데.”

직접적인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르랑드는 제국에 대하여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마수 문제로 감당이 안 되니, 결국 먼저 손을 벌린 것이다.

이해는 간다. 오랫동안 마수와의 전투가 전무했으니, 갑자기 늘어난 마수가 감당이 안 될 것이다.

제국도 경험자인 헬레나가 없었다면 꽤 큰 곤란을 겪었을 테니까.

“사실 노에도 용도 사라졌으니,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마수도 줄어들 테지만…….”

카이사르가 흐린 뒷말을 해밀턴이 얼른 받았다.

“그걸 오르랑드에서 알 리가 없죠. 이건 저희에게 기회입니다.”

“흐음. 양심은 좀 아프군.”

“입은 웃고 계신데요, 폐하.”

“결혼하고 나니 인생이 행복해서 웃음이 가시질 않지 뭔가.”

“하하하,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칭찬 고맙군. 보답으로 다음 주에 변경으로 출장을 나갈 영광을 안겨 주지.”

“폐하! 너무하십니다!”

한껏 억울해하는 해밀턴을 무시한 채,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원조 요청을 승인하겠다. 토벌대를 준비해.”

“알겠습니다. 토벌대장은 누구로 선발할까요? 경험자인 호크 밀렌 경은 어떠십니까?”

“으음. 그 녀석은 실력은 좋은데 너무 방정맞아서 좀…….”

카이사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단순히 마수 토벌에서 끝나면 안 된다. 오르랑드와 친선을 맺고 관계를 회복할 발판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이쪽에서도 조금쯤은 너그럽고 배포 있는 대국의 모습을 보이는 게 좋으리라.

“……내가 갈까.”

“예에?”

“좀 더 성의가 있어 보이지 않나.”

“폐하께서 움직이시면 의전 예산이 너무 많이 듭니다!”

“의전 필요 없어. 마수 때려잡으러 가는 건데 무슨 의전이야.”

“그렇다고 대충 해서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려 황제의 행차인데!”

“귀찮게 뭐 그런…….”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요! 귀찮다니요! 귀찮아하는 사람은 황후마마 한 분으로 족합니다!”

“부부는 서로 닮아 간다잖아.”

“그런 거 닮지 마십쇼!”

있는 대로 고성을 내지르던 해밀턴이, 갑자기 ‘으윽’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명치를 쥐고 몸을 웅크렸다.

카이사르는 그런 해밀턴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쓰러지면 곤란해, 녹트 자작. 이 소식을 들으면 신나서 자기도 가겠다는 사람이 하나 더 있거든.”

“설마……, 설마요.”

해밀턴이 바로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아하하’ 하고 쓰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사르는 초점이 흔들리는 해밀턴의 눈동자에, 그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신이 나간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됐다.

“세상만사 다 귀찮으신 분이 그 먼 길을 가고 싶다고 나서실 리 없잖습니까.”

“원래는 그런데……, 요즘 옆에서 닦달하는 친우가 하나 생겨서 말이야. 황성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더라고.”

최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처럼, 정말 귀찮은 일에서 도망치기 위해 덜 귀찮은 일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해밀턴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됐다.

황제가 움직이는 것도 번거로운데, 황후까지 세트로 움직이겠다고?

이 부부가 자신을 위장병으로 죽이려고 작당 모의를 한 게 아닐까?

그런 해밀턴의 추측에 쐐기를 박듯, 결국 카이사르가 확정하여 말했다.

“헬레나도 함께 가겠다고 할 거야,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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