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2화 (123/156)

* * *

카이사르에게 보고가 올라간 지 세 시간 후.

황후궁에도 드디어 그 소식이 전해졌다.

평소라면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도 심드렁하게 ‘귀찮으니까 싫어.’라며 거절할 헬레나였으나, 이번만은 카이사르의 추측이 옳았다.

일주일째 율리카에게 자수 특훈을 받은 헬레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용인지 도롱뇽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의 자수를 냅다 집어 던지며 일어났다.

“나도 가겠다! 반드시 가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

“마마! 자수는 어쩌시고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용을 수놓는 것보다 써는 쪽에 재능이 있습니다. 부탁이니 이제 그만 날 포기해 주세요, 백작.”

“재능이 없으니 연습하시라는 것 아닙니까!”

“백작의 말대로 난 자수엔 재능이 없어요.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발전시켜 보려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발전시킬 근간조차 없는 걸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또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 하시죠!”

“빠져나가다뇨. 모함이군요. 어디 내가 틀린 말 했나요?”

“아뇨! 아니라서 문제죠! 그 궤변이 참 그럴싸하게 들려서 저도 미치겠습니다!”

율리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속상해했다. 일주일째 시든 나무 같던 사람이, 마수 토벌 얘기를 듣자마자 눈빛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더욱 속상하다.

그러나 율리카가 속상해하든 말든, 헬레나는 완전히 흥분 상태였다.

그러잖아도 가만히 앉아서 적성에도 안 맞는 일 하느라 좀이 쑤시던 차였는데, 기다렸다는 듯 스트레스를 풀 일이 찾아왔으니.

“마마의 무료함을 해소해 드리기 위해 귀엽고 아기자기한 취미를 소개해 드리고 싶었던 건데, 제 욕심이었나 봐요.”

“실망 말아요, 백작. 하다못해 마수라도 귀엽게 썰어 볼 테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정말로 필요 없어요……!”

율리카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헬레나와 자신은 ‘귀엽다’라는 언어의 개념부터 달랐다는 사실을.

‘그래. 마마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실 일이 하나라도 있으니 됐어. 그걸로 만족하자.’

결국 율리카는 현실과 타협했다.

이무기조차 되지 못한 헬레나의 미완성 자수를 애써 못 본 척하면서.

* * *

오르랑드에서 도착한 소식이 황성 전체에 퍼지기까지의 시간은 이틀도 채 필요하지 않았다.

더불어 황후마마께서 마수 토벌에 나가고 싶어 근질근질하시다는 소문 역시.

특히 후자의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평화로웠던 황성은 모처럼 묘한 긴장감으로 들썩거렸다.

황후의 토벌 출정에 대하여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한 탓이다.

“황후란 제국의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법이거늘! 집안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서겠다니, 당치 않은 일이오!”

“하나 마수 토벌에 황후마마만큼의 전문가가 또 있습니까? 이번 사안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니만큼, 실패가 없어야 합니다. 전 황후마마의 출정에 찬성합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하는 말 아니오! 이런 일에 황후까지 나서면 다른 나라에서 이 제국을 뭐라 생각하겠소!”

“제국은 황후마저도 강한 국가라고 생각하겠죠.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럼?”

“어허, 이리 생각이 짧아서야! 이래서 젊은 귀족 놈들이란!”

“어르신, 세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은 좀 버리시지요.”

“뭐야, 이놈아?! 엊그제까지 내 수염 당기고 놀던 놈이, 이제야 겨우 작위 물려받고 와서는 어딜 날뛰어, 날뛰길!”

“아이고~, 예~, 제가 그때 어르신 수염을 몽땅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잘못했네요.”

“억, 저, 저놈 저거 하는 소리 보게! 저 썩을 놈이!”

자문회에서의 논쟁은 어느새 서로를 향한 온갖 험담과 비속어와 저급한 공격으로 얼룩졌다. 언제나처럼.

자문회의 수장인 페레스카 공작은 삿대질도 서슴지 않으며 말다툼을 해 대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간 왜 정치판을 떠나 있었는지를 새삼 기억해 냈다.

“어쩐지 금방 결론이 안 날 것 같군요.”

점점 인신공격으로 치닫는 회의에, 페레스카 공작의 곁에 앉은 가르말 공작이 점잖게 속삭였다.

페레스카 공작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영지로 돌아가고 싶군요…….”

“가긴 어딜 가십니까. 저에게 떠넘기지 마십시오. 전 기병대 업무만으로도 죽을 지경입니다.”

“발레르 공작이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뭐, 며칠 두고 봅시다. 다들 한풀 꺾이면, 좀 냉정해지겠죠.”

가르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반대와, 반대를 반대하는 싸움. 언제나 반복되던 광경이라, 그에게는 이제 식상할 정도였다.

가르말의 맞은편에 앉은 벤 변경후도 그의 의견에 힘을 보태듯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저희끼리 박 터지게 싸워 봐야 뭐 합니까. 자문회는 어디까지나 고문 기관이라, 어차피 결론은 폐하께서 내리실 텐데.”

“하긴. 이게 뭐, 귀족과 황가가 척을 지면서까지 성토해야 될 사안도 아니고.”

벤 변경후와 가르말 공작의 태평한 말에, 페레스카 공작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 * *

토론은 이번 사태에 발언권이 없는 자문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이루어졌다.

“전 반대입니다! 검을 들고 마수 때려잡는 황후라니,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일단, 해밀턴은 반대파였다. 그의 융통성 없는 성격을 잘 아는 주변인들은 그의 의견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유례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지. 마수 때려잡는 공녀는 뭐, 유례가 있어서 토벌대로 보냈나?”

달튼이 한쪽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호크 역시 호들갑을 떨며 달튼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심지어 그때 귀찮다는 마마를 토벌대에 등 떠민 게 자작님이셨잖습니까?”

“아, 아니, 그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거고…….”

해밀턴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달튼이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해밀턴을 공격했다.

“하! 자네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사정 찾는구만.”

“제, 제가 어디 절 위해서 그랬습니까? 이게 다 폐하를 위해…….”

“뭐 사실 저도 굳이 마마께서 나서실 필요까지 있나 싶긴 한데요. 두 분 다 황성을 비우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멀리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총무 제럴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궁지에 몰렸던 해밀턴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오, 제럴드 경! 역시 내 의견을 이해해 주는 건 제럴드 경뿐입니다!”

“어이, 호크. 저 새끼 우리 편 아닌가 보다. 쟤 자르고 네가 총무 볼래?”

“예? 총무 일은 고리타분해서 싫습니다.”

“헉, 단장님! 너무하십니다! 저 없이는 기병대장님께 올릴 보고서 마감도 못 지키실 분이!”

“닥쳐!”

자신의 약점을 들켰다고 생각한 것인지, 달튼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자리의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미청년이 호쾌하게 웃으며 의견을 보탰다.

“그냥 마마도 폐하도 안 가시면 좋겠다는 의견은 없으십니까? 전 일하기 싫어서, 그쪽인데.”

“뭐야? 야, 지금도 충분히 복잡한데 여기서 더 의견 가르지 말……, 잠깐. 넌 왜 여기 있냐? 우리 기사단도 아닌 놈이.”

달튼이 흑기사단 소속의 에쉬를 향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헉’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적기사단의 단장실에 앉아 있었다는 걸 다들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듯.

에쉬가 꽃향기가 날 것 같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까부터 있었는데요? 토벌대분들과 동선 맞추는 일정 논의하려고요.”

“뭐? 흑기사단도 출정이야?”

“네. 폐하께서 가시니까요. 의전용 기사단 아닙니까.”

멸칭이나 다름없는 ‘의전용’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말하며 에쉬가 싱긋 웃었다. 달튼이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배알도 없는 놈일세. 의전용인 게 뭐 자랑이냐?”

“그게 왜요? 여러분은 검만 쓰지만, 저희는 검도 쓰고 얼굴도 씁니다. 더 좋잖아요.”

에쉬가 자신의 말에 신뢰도를 높이려는 듯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눈부신 미소에, 다른 이들이 하나같이 ‘크윽’ 하고 분하다는 듯 신음을 내뱉었다.

솔직히 얼굴값 한다는 소리 나올 만큼 잘 생기긴 했다. 재수 없는 흑기사단 놈들 같으니.

“어쨌든 여기서 이런 얘기, 저희들끼리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폐하든 마마든 찾아가서 말씀을 드려야 소용이 있죠.”

에쉬의 허를 찌르는 말에 다들 서로서로 눈치를 봤다. 에쉬가 여전히 시들지 않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들고 펄럭거렸다.

“자, 이제 일 좀 하시죠? 동선 맞추는 일정, 언제로 잡으면 됩니까?”

* * *

논쟁은 점점 더 확대되어, 이제 황성에서는 귀족이든 기사든 시종이든 셋 이상만 만나면 황후의 출정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나는 황후께서 가시는 게 맞다고 봐. 제국에서 제일 강한 분이시잖아.”

“꼭 가셔야 하나? 황가의 체통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래도 마수 토벌에 가장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고…….”

“괜히 두 분 다 가셨다가, 두 분 모두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논쟁의 거품은 꺼질 기세 없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지금.

“결론을 내리지 못해, 결국 내 의견을 물으러 날 찾아왔다……, 이거로군요.”

헬레나는 황후궁을 찾아온 수많은 무리를 둘러보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방에는 각 기사단의 기사들과, 황후궁의 시종들과, 자문회 소속의 일부 귀족들까지 모여 있었다.

“마마. 저희는 마마께서 이번 일에 꼭 나서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부디 출정을 재고해 주십시오.”

“마마는 이 제국의 가장 강한 검이십니다. 마마야말로 마수 토벌의 적임자가 아니십니까?”

헬레나는 번갈아 의견을 던지는 반대파와 찬성파를 쳐다보았다. 다들 어찌나 열성적인지, 이런 사태까지 예견하지 못한 헬레나는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니, 이게 뭐람.’

그냥 스트레스 해소가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게 온 황성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나?

“마마. 이참에 확실하게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동감입니다! 마마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마마께서는 왜 토벌대에 참여하고 싶으신 겁니까?”

“네! 부디 들려주십시오!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이 소모적인 논쟁이 끝날 것입니다!”

갑자기 반대파고 찬성파고 할 것 없이 같은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마수 토벌에 나서려 하느냐 내게 물었습니까?”

“네, 마마!”

“말씀해 주십시오!”

헬레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답을 해 주었다.

“하고 싶어서요.”

……기묘한 침묵이 방 안을 무겁게 채웠다.

뭐야. 이 이유로는 부족한 건가. 헬레나는 예상치 못한 침묵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국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겠다는데……, 혹시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허억’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적색경보다.

평소에는 느긋하고 배포 큰 황후마마이지만, 실상은 늑대 황제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마왕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다니!

“저……, 저희는, 그 뭐냐, 그저 마마께서 여론에 떠밀려 가시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던 것뿐입니다!”

“암요, 그, 그렇지요!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 하고 싶으신 일이라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 인간들……, 진짜 이 대답이 듣고 싶어서 여기 온 거 맞아?

분열되어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헬레나의 한마디에 갑자기 한마음 한뜻이 되더니, 쳐들어왔던 기세가 아까울 만큼 빠르게 물러났다.

순식간에 방은 텅 비어, 헬레나만 남게 됐다. 헬레나는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 논쟁에서 한 걸음 빠지고 싶다는 듯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율리카가, 뒤늦게 느린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났나요?”

“이게 다……, 뭐였을까요.”

헬레나가 넋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율리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오락거리가 부족한 탓이죠. 애초에 누가 마마가 하고 싶으시다는 일에 반기를 들겠어요?”

“그건……, 그렇죠.”

헬레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렇지. 자신이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애초에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누가 말린다고 그걸 안 할 사람도 아니고.

뭐, 결국 그냥 다들 할 일이 없어 너무 심심했던 것뿐이었나.

헬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휩쓸듯 지나간 폭풍을 재빨리 잊기로 했다.

* * *

결국 황성에 번졌던 ‘황후 토벌단 출정 논쟁’은, 일주일 정도 절정에 치달았다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들 ‘마마께서 하고 싶으시다니까.’ ‘마수를 수입해 와서라도 잡아야지.’ 하며 일치단결된 의견만 보여, 더 이상의 논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문회 역시, 모처럼 딸의 의욕 넘치는 상황을 접한 페레스카 공작의 강력한 의견 피력으로, 황후의 출정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후일 이 모든 사태를 보고로 전해 들은 황제가 미친 듯이 웃다 지쳐 울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만이, 야화처럼 남았다.

미담도 아니건만, 황후를 향한 황제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라는 미담으로 포장이 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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