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출정 당일 아침, 날이 맑았다.
맑은 날에 비하여 로위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 위로 뚜렷한 암운이 드리워진 모습에, 황성 사람들이 그녀를 흘끗흘끗 피할 정도였다.
오로지 레너드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상냥하고도 밝은 미소로 로위나를 대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함께 가지 않습니까.”
레너드의 말에 로위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께서 함께 가시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최선을 다하여 두 분을 지키겠습니다.”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저 두 분이 누가 지켜 줘야 할 분들입니까?”
“그건 저도 압니다.”
레너드가 쓰게 웃었다.
“저 두 분이 날뛰어서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게 잘 지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세상에, 페레스카 경……!”
로위나가 비로소 고갤 들고 레너드와 눈을 마주쳤다. 안경알 너머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레너드의 손을 꼬옥 쥐었다.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은 페레스카 경밖에 없습니다……!”
“이제 안심이 되십니까?”
“네에,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로위나에게는 레너드의 뒤에 후광이라도 비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믿을 건 이 남자밖에 없다. 걸핏하면 명치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녹트 자작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
“저 두 악당……, 아니, 두 분께서 국제 문제로 번질 만한 일을 만들지 않도록, 감시 그리고 또 감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맡겨 주십시오.”
둘 사이에 남들이 끼어들 수 없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멀찍이서 그 둘을 지켜보던 헬레나는, 비록 둘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정도인지라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니, 대체 나를 어떻게 보길래…….”
목줄 풀린 맹수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이래 봬도 한때는 제국을 호령하던 황제였는데 말이다.
“응? 누가 나의 헬레나에게 관심을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어떤 놈인지 눈깔을 뽑아 버려야겠군.”
그때, 곁에 선 카이사르가 헬레나의 어깨를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싱글싱글 웃는 표정을 보아 농담인 게 분명하지만,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은 그 무시무시한 대사에 ‘히익’ 하고 숨을 삼켜야 했다.
헬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목줄 풀린 맹수는 이 인간이지. 그런데 왜 자신까지 한데 엮는 거냔 말이다.
“폐하가 자꾸 그러시니까 사람들이 저까지 무서워하잖아요.”
“글쎄, 그게 과연 내 탓만일까.”
“그럼 제 탓이란 말이에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냥하게 대하고 있는데 그러세요?”
“물론 나의 황후야 상냥하겠지. 손에 든 검이 상냥하지 않아서 그렇지.”
카이사르가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흐트러진 헬레나의 머리 장식을 바로 고쳐 주었다.
그 손길이 실로 자연스러워, 헬레나가 미처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몹시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있긴 했다.
“두 분, 집중 좀 하세요!”
두 사람 앞에 서서 이동 경로에 대해 설명하던 해밀턴이 결국 꽥 소리를 질렀다.
카이사르와 헬레나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동시에 어깨를 움찔하며 해밀턴을 쳐다보았다.
“오르랑드에 가서는 눈깔을 뽑네 마네 하는 소리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별걱정을 다 하는군. 아무리 나라도, 설마 진짜 뽑기야 하겠나.”
“마마랑 그렇게 찰싹 붙어 다니시는 것도 금지입니다! 이번 출정에서 마마는 폐하의 기사 자격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그쪽에서 제가 황후라는 걸 모를 리도 없지 않나요.”
“체통 좀 지키시라는 소리입니다!”
해밀턴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으흑’ 하는 우는 소리를 냈다.
“제가 이래서……, 이래서 황후마마까지 함께 가는 건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건데……!”
“아니……,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하면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헬레나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해밀턴이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는 다시 꽥 소리쳤다.
“두 분만 어떻게 믿고 보냅니까!”
“……신뢰받지 못하고 있군.”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해밀턴의 마음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오르랑드와는 그간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좋은 기회였다.
그 좋은 기회를 한 치의 실수 없이 해내고 싶은 욕구……야, 카이사르도 헬레나도 모를 리는 없다만.
‘누가 보면 혼자 정치 다 하는 줄 알겠네.’
헬레나는 해밀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남자는 충성심도 높고 유능하긴 한데, 너무 예민하게 굴고 끝도 없이 잔소리를 해 대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뭐, 됐어. 가서 이 스트레스를 실컷 풀고 오면 되는 거지.’
뭔가를 썰어 본 지가 얼마 만이었던가.
상대를 봐주지 않고 날뛰고 올 좋은 기회다. 상상만 해도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했다.
그 쾌감을 기대하고 있노라면, 해밀턴의 잔소리도 어느 정도는 귀엽게 들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신난다. 해밀턴을 생각하며 베어야지.’
헬레나가 즐거워서 못 참겠다는 듯 손가락을 팔랑팔랑 움직이며 웃었다.
* * *
오르랑드는 제국 서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지금껏 폐쇄적인 정책을 펼친 탓에 제국과 큰 왕래가 없었다.
그러나 몇백 년 만에 갑자기 늘어난 마수 문제로, 결국 제국에 손을 벌리게 됐다.
군사만 지원받을 생각이었지만, 제국이 이 기회를 두고 넘길 이들이 아니다. 황제가 몸소 행차하신다는 얘기에, 왕성은 한껏 분주해졌다.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망나니 왕자 라파엘마저 그 긴장된 분위기를 느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이상하네. 요 며칠 다들 뭐가 이렇게 바빠?”
왕성 중정의 벤치에 쪼그리고 누워 잠을 자던 라파엘은, 복도를 바쁘게 오가는 시종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정돈을 하지 않아 부스스한 붉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라파엘은 낮잠을 방해받아 불쾌하다는 양 얼굴을 찡그렸다.
“어이, 너!”
결국 라파엘은 지나가던 시종 중 하나를 불러 세웠다. 새 태피스트리를 품에 안고 복도를 뛰어가던 시종이 깜짝 놀라 라파엘의 곁에 쪼르륵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왕자 저하?”
“이게 대체 무슨 난리통이야? 무슨 일 났어?”
라파엘이 모친에게 물려받은 푸른색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시종이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아직도 못 들으셨습니까?”
“뭘 말이야?”
“내일 제국에서 황제 폐하가 오시지 않습니까.”
“뭐? 누구?”
“황제 폐하요, 황제 폐하.”
시종이 답답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타이르듯 말했다.
“어휴, 참. 다른 왕자님들은 전부 환영 파티 준비로 바쁘신데, 저하는 아직 소식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아무도 나한테 보고도 안 했단 말이냐?”
라파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라파엘이 나라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듯, 왕성 사람들도 라파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 종일 눈에 안 보여도 ‘어디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있겠거니’ 하며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이런 큰 행사에 대해 보고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보고는커녕, 황제가 와 있는 동안 어디 구석에 처박혀 나오지 말라고 바랄 정도였다.
그러나 라파엘은 단순히 게을러서 망나니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가 행차할 정도면 어여쁜 여자들도 많이 오겠군. 제국에 그렇게 미인이 많다던데. 안 그러냐?”
“마수 토벌 때문에 오는데 무슨 미인 타령이세요.”
“황제쯤 되면 매일 밤 애첩들을 서넛 정도는 끼고 잘 거 아냐?”
라파엘이 허공을 쳐다보며 ‘크으…….’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부럽다, 부러워. 이 내가 제국에 태어났어야 했는데.”
시종은 뻔뻔한 라파엘의 말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가 나왔지 하는 눈빛이다.
그때, 라파엘이 앉은 벤치 뒤쪽에서 그의 누나인 쉐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제국에 태어났으면 진작 머리가 떨어졌을 거다.”
“앗, 누님! 너무하시네요.”
라파엘이 귓구멍을 파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쉐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구제가 불가능한 제 남동생을 딱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제국 황제는 너와 나이 차도 많지 않던데 벌써 황제 자리에 올랐건만, 넌 장가나 갈 수 있겠느냐?”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썩어도 준치인데, 아무렴 왕족에게 시집올 여자 한 명 없겠습니까?”
“왕족 아니고선 네가 내세울 게 뭐 있느냐?”
“왜요. 그래도 제가 검은 좀 쓰지 않습니까.”
라파엘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검술에 재능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재능만 믿고 훈련에는 열심히 임하지 않았다. 일부러 실력 낮은 기사들과만 대련하며,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에만 바빴다.
그러나 그놈의 재능이 뭔지 그렇게 처놀고도 실력은 제법 있는 편이라, 망나니짓을 하는 데 그럴싸한 변명이 되곤 했다.
“재능은 노력을 이기지 못해. 결국 노력이 깃들지 않은 네 재능은 고꾸라지게 될 거다.”
“고꾸라지면 또 어떻습니까. 제가 뭐 검으로 대륙을 제패할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놈아? 그게 할 소리냐?”
“제가 뭐,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날고뛰어도 13왕자인 것을요.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누님. 이렇게 한량처럼 살다가 곱게 죽으렵니다.”
라파엘이 다시 벤치 위에 벌러덩 누우며 흥얼거리듯 말했다.
그 태도에 쉐릴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됐다.
그녀는 그나마 라파엘에게 이런 잔소리나마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그녀도 이제는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네놈은 밖에서 왕가의 수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결국 쉐릴은 체면이고 뭐고 꽥 소리를 내질렀다.
라파엘은 누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벤치 위로 손을 뻗어 한들한들 흔들어 대기만 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계속 그렇게 망나니짓이나 하려무나! 행여나 내일 파티에 나와서 일이나 치지 말고!”
쉐릴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홱 돌려 자리를 떴다.
태피스트리를 들고 서 있던 시종도 발을 동동 구르다가, 쉐릴이 자리를 뜨자 눈치껏 슬그머니 사라졌다.
“흐음, 파티라 이거지.”
다시 혼자 남게 된 라파엘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내가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날 안 부를 건 또 뭐야.’
황제를 환영하는 파티라면, 분명 성대할 것이다. 춤, 노래, 성찬, 여자, 없는 게 없겠지.
잘만 하면 황제의 눈에 들어 제국으로 나갈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이런 조그마한 나라의 열세 번째 왕자로 살다 죽느니, 큰 나라로 가서 더 많은 여자를 끼고 화려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
‘내 검 실력 정도면 황제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날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생각에 들떠, 라파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래! 역시 이 몸이 그런 좋은 자리에 빠질 수야 없지!”
다시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 라파엘이, 품위 없이 복도 난간을 넘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이번에도 지나다니는 시종을 아무나 붙잡고 싱글싱글 웃으며 명령했다.
“어이, 너! 가서 재단사를 데려오너라! 이 몸이 내일 파티에 입고 나갈 옷을 골라야겠다!”
시종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이 망나니 자식이 기어코 거길 나가겠다고?! 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왕성의 공인 망나니인 라파엘에게는, 그런 시선쯤은 익숙하여 지적할 거리도 못 됐다.
더구나 지금 그는, 황제 앞에서 자신의 검 실력을 뽐낸 후에 제국으로 건너가, 한량 중의 한량이 되는 인생 설계를 상상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한 참이었다.
‘아마 황제도 내 검 실력을 보면 놀라서 까무러치게 될 것이다!’
라파엘이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정작 자신이 까무러치게 될 앞날은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