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5화 (126/156)

* * *

자신이 무언가 착각을 한 게 분명하다.

대련에 앞서 가볍게 몸을 풀며, 라파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홀 반대편에서는 마찬가지로 헬레나가 몸을 풀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 휴게실에서는 그녀에게서 오금이 저릴 정도의 살기를 느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긴. 한낱 여자에게 기 싸움에서 밀리다니 말도 안 되지.’

한껏 꺾였던 자존감을 달래며,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아까는 여러 명의 기사들이 한꺼번에 검을 뽑아 들려는 모습에 당황했던 것뿐이다.

‘오히려 기회야. 저 여자를 완전히 꺾어 버리면, 다들 날 다시 보게 되겠지.’

홀에는 어느새 파티에 참여한 내빈들로 꽉 들어찼다.

라파엘은 이 기회에 자신을 망나니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뽐내야겠다 생각했다.

최대한 화려하고 멋진 기술을 잔뜩 사용하여 저 여자를 농락해 주리라.

“양쪽 다, 준비되셨으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어느 정도 몸이 달아오르고 나니, 호크가 중앙에 서서 소리쳤다. 그 신호에 헬레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홀 중앙으로 이동해 섰다.

“시간이 없어서 단판으로 끝내겠습니다. 두 분, 괜찮으시겠습니까?”

헬레나와 라파엘이 차례로 고갤 끄덕였다.

“자, 그러면 준비하시고. ……대련, 시작!”

호크가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라파엘이 헬레나를 향하여 힘껏 박차고 나아갔다. 괜히 이목을 끌기 위하여 기합 소리까지 내지르면서.

“하아아아아압!”

일부러 큰 동작을 보이는 라파엘과 달리 헬레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그녀가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파엘의 검이 헬레나를 향해 휘둘러진 순간.

“……헉?”

헬레나는 반걸음 옆으로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라파엘의 검은 허공만을 갈랐다.

“무, 뭐!”

우연이겠지.

정말, 우연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작은 움직임이었다. 라파엘은 기죽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흐아아앗!”

그러나 이번에도 헬레나는 반걸음 정도만 움직였을 뿐이다.

라파엘의 세 번째, 네 번째 공격이 연달아 헬레나를 노리고 쏟아졌다. 그 속도가 잘 훈련된 기사들 못지않게 빨랐다.

그러나 헬레나는 그 모든 공격을 슬쩍슬쩍 아주 약간만 움직이는 것으로 피해 버렸다.

‘흐음. 재능만 믿고 설치는 타입인가.’

헬레나는 살짝 지루해졌다.

조금쯤은 기대했는데, 이건 여흥 거리도 안 됐다.

비장했던 그 대련은 헬레나가 라파엘을 데리고 노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라파엘의 헛손질이 이어지니, 그는 자신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줄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에 슬슬 화가 치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여 구경하던 이들 역시 무슨 코미디를 보는 양 키득대며 웃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젠자아앙!”

창피함 탓에, 라파엘의 검은 점점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와중에 헬레나가 그런 라파엘이 딱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자, 라파엘은 얼굴이 뜨끈해졌다.

“마마. 사람들이 계속 몰려듭니다. 너무 많이 몰려오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슬슬 끝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심판을 보던 호크가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청했다.

말단 기사같이 생긴 저놈까지 감히 날 무시하다니!

호크의 말에 라파엘은 속에서 불이 확 올랐다. 수치심에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호크가 헬레나를 ‘마마’라고 칭하는 것도 놓치고 말았다.

“저런. 좋은 날 사고가 나면 안 되지.”

느긋하기는 헬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헐떡거리는 라파엘과 달리, 그녀의 호흡은 너무나 차분했다.

드디어 헬레나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그제야 라파엘은 깨달았다. 지금껏 그녀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마치 어린애의 재롱에 박수를 치며 잘한다 잘한다 말해 주는 어른처럼 라파엘을 상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라파엘의 혼란은 극점에 달했다.

지금껏 그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늘 자신보다 약한 자와 골라 겨뤄 왔으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분명 자신보다 약한 자일 터인데.

카아앙―!

허둥거리며 내리친 라파엘의 검이 헬레나의 검과 맞부딪쳤다. 라파엘은 자신의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감각에 경악했다.

“우와악!”

라파엘이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그리고 그 순간, 헬레나가 라파엘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검을 내질렀다.

“끄아악!”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라파엘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면서 제 검의 힐트 부분으로 제 얼굴을 내리찍기까지 했다.

볼품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처참한 패배였다.

승부는 났다.

그러나 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헬레나의 압도적인 실력과, 찰나의 순간 뻗어 나간 살기에 다들 기가 질려 버린 탓이다.

그 지독한 침묵 끝에, 헬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겼군요.”

바닥에 주저앉은 라파엘이, 지진이라도 날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헬레나를 쳐다보았다.

헬레나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라파엘을 내려다보고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즐거웠습니다, 왕자 저하. ……아주 조금, 무료하긴 했습니다만.”

하는 말과는 맞지 않게, 헬레나의 표정은 지루해서 죽을 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삶은 문어처럼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입만 뻐끔거릴 뿐,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헬레나는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는 라파엘을 남겨 둔 채 그대로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구경하러 나와 섰던 내빈들이, 그녀가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 길을 텄다.

헬레나가 이동하니, 제국의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서 홀을 나섰다.

그저 이동하는 것뿐인데, 방금 전의 어마어마한 대련 때문인지 위엄이 넘쳐흘렀다. 그야말로 지배자의 행차였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응? 이럴 리가 없는데……?”

라파엘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패배한 건 우연도 운도 아니라는 것. 그저, 자신이 너무나 나약했고, 상대가 너무나 강했을 따름이라는 것.

“……푸흐흐.”

그리고 그 묵직한 침묵 속에, 오로지 한 명만 웃음을 터뜨렸다.

오르랑드 국왕과 나란히 서서 대련을 지켜보던 제국의 황제, 카이사르만이.

“하하하하! 이런 재미있는 이벤트를 준비하다니, 왕자께서 참 유쾌하신 분인 것 같군요!”

“네? 아, 네에……. 그렇게 봐 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

“자아, 가서 계속 파티를 즐깁시다. 이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 가야지 않겠습니까?”

카이사르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제야 조마조마해하던 오르랑드 국왕의 얼굴도 조금 펴졌다.

뭘 어째야 하나 불안해하던 내빈들 역시, 금세 긴장을 풀고 다시 왁자지껄하며 파티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패배자인 라파엘만이, 망나니 인생 20여 년 만에 죽을 것 같은 수치심을 느끼며 홀에 버려졌다.

* * *

파티가 파한 후 새벽, 라파엘은 아버지에게 끌려가 혼쭐이 났다.

“이 미친놈! 네놈이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래, 할 짓이 없어서 제국 황후에게 시비를 걸어?!”

헬레나가 황후였다는 사실을, 라파엘은 그제야 알았다. 솔직히 속으로 찔끔했지만, 어떻게든 변명의 말을 주워섬겼다.

“아니, 황후면 드레스 곱게 입고 와야지, 제복을 입고 있는데 누가 황후인 줄 알겠습니까? 저야 그냥 기사인 줄 알았죠…….”

“뭐야,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상대가 기사라 쳐도, 그게 네놈이 한 짓이 잘한 짓이 되느냔 말이다!”

“그냥 대련한 건데…….”

“이놈이 아직도! 으어억……!”

“아바마마! 진정하십시오! 그러다가 쓰러지십니다!”

오르랑드가 뒷목을 잡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니, 곁에 서 있던 다른 왕자 왕녀들이 그의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다들 뱁새눈으로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라파엘은 자신을 나무라는 수십 개의 시선에 뻘쭘해져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황후가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으니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전쟁 날 뻔했다, 이 썩을 놈아!”

“아니 뭐 또 전쟁까지…….”

“라파엘.”

건성으로 답하는 라파엘에게, 왕세자가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라파엘의 경솔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제 형의 분노에 라파엘도 찔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가벼이 여길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네가 처참히 패배하였으니 망정이지, 황후가 해라도 입었다면 황제의 아량을 바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후가 해를 입어? 그 실력이면 마수가 아니라 마왕이 와도 때려잡겠던데.

라파엘은 멍이 든 제 왼쪽 눈을 문지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쪽팔리긴 했지만, 억울함이 남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강한 여자였다.

“어쨌든 제가 추태 부리며 패배했으니 잘된 거 아닙니까.”

“네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바람에, 오르랑드의 명예를 더럽힌 게 다행인 것이냐?”

“아니, 그거야……, 저라고 황후가 그렇게 강할 줄 알았겠습니까.”

“입 다물어라! 고얀 놈!”

좀 진정이 된 오르랑드 국왕이 버럭 소리쳤다.

“내일 날 밝는 대로 황후마마께 찾아가 네놈의 무례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라! 알겠느냐?!”

망나니 인생의 위기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야 하다니.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개기면 이번에야말로 왕가에서 쫓겨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결국 라파엘은 찍소리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다.

* * *

그리고 그 소식은 황성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뭐라고요?! 황후마마께서 오르랑드의 왕자를 후드려 패서 눈탱이 밤탱이를 만들어 놨는데, 폐하께서 그걸 보고선 재미있다며 큰 소리로 웃으셨단 말입니까?!”

……약간 왜곡되어 전해졌다.

“아아, 그런……! 역시 두 분을 같이 보내서는 안 됐는데……!”

로위나가 얼굴을 감싸 쥐고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평소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함께 그 소식을 들은 달튼은 같은 소식을 듣고 도리어 폭소했지만 말이다.

“푸하하하!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분들이구만! 그 재미있는 광경을 놓치다니,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아이고, 단장님! 좀 조용히 좀 하세요……!”

“뭐야? 제럴드 네놈은 이게 재미있지 않은 거냐?”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죠!”

제럴드가 로위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로위나가 안경을 들어 올리더니 한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럴 수가. 우는 모양이다.

“달튼 경. 제럴드 경. 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혼자 있고 싶군요…….”

“아, 아무렴요! 자, 그만 가시죠, 단장님. 어서요.”

달튼은 끝까지 투덜거리며 제럴드에게 끌려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는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분노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건 사람이 내지른 소리가 아닐 거라며, 후일 황성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남게 된 비명이 말이다.

* * *

날이 활짝 개었다.

헬레나의 얼굴은 더욱 활짝 개었다.

지난밤, 오르랑드의 13왕자가 바닥을 구르며 얼이 빠져 자신을 쳐다보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인생은 참 즐겁네요.”

정오의 티타임, 헬레나는 찻잔을 양손으로 쥔 채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헬레나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와 레너드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제 인생은 불행합니다……!”

이 방에서 불행한 사람은 딱 한 사람, 해밀턴밖엔 없었다.

“환영 파티에서 그 나라 왕자를 때려눕히는 황후라니, 어이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마마!”

“하지만 시비는 그쪽에서 먼저 걸었는걸요.”

“시비를 걸어온다고 그걸 다 받아 줍니까?”

“오는 시비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 바로 기사의 도리…….”

“기사 이전에 황후이십니다!”

해밀턴이 꽥 소리를 지르더니, 결국 명치를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동시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해밀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매번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니……, 국가 간의 화친, 매너, 예절, 그런 건 생각 안 하십니까, 폐하?”

“우린 오르랑드를 도와주러 온 거야. 매너나 예절은 저쪽에서 지켜야지. 안 그런가, 헬레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폐하.”

헬레나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건방진 애송이에게 현실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지금 기분이 최상이었다.

해밀턴은 깨가 쏟아지는 두 사람을 보며 질렸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그 둘에게 자신의 잔소리가 먹힐 리가 없다.

결국 해밀턴의 공격 대상은 레너드에게 돌아갔다.

“두 분은 그렇다 치고, 페레스카 경이라도 한마디 해 주십시오!”

“네? 저요? 음……, 어젯밤 오르랑드의 왕자를 향한 마마의 가르침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칭찬 말고요!”

해밀턴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에버그린 양과 약속하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두 분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단단히 지키겠다고요……!”

그제야 레너드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헬레나가 행복해하니 덩달아 행복해하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전 임무를 다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하지만, 마마께서 저리 행복해하시는데…….”

레너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했다.

애초에 헬레나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말린다는 건 그에게는 너무나 벅찬 임무였다. 설령 세계를 멸망시킨다고 해도 그녀가 행복해하기만 한다면, 해맑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잘한다, 잘한다, 우리 동생’ 할 인간이 그가 아니었던가.

헬레나가 그 대화에 탐탁잖은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저기요. 전 아무도 해치지 않았거든요.”

“왕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던데요! 마수 잡으러 와서 왕자를 잡으셨는데요!”

“그거야 그쪽에서 괜히 겁먹고 자빠져서 그렇게 된 거죠.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헬레나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마마께서 하시는 일이 잘못될 리가.”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격하게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다. 결국 해밀턴은 패배를 선언하듯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갤 푹 숙였다.

“에버그린 양이……, 그립습니다……!”

괴로움에 사라질 것 같은 해밀턴의 목소리를 끝으로, 아고트가 방 안에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오르랑드의 13왕자이신 라파엘 오르랑드 님께서 마마를 알현하고자 청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고트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헬레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와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다면 무시해도 좋아, 헬레나. 듣자 하니 이 나라에서도 망나니 취급을 받는지라,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던데.”

카이사르가 말했다. 괜히 매너도 없고 제멋대로인 라파엘과 계속 부딪쳐서 헬레나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게 아닐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이내 고갤 저었다.

“아니, 만나 볼게요. 이쪽으로 모시렴, 아고트.”

“네, 알겠습니다.”

아고트가 다시 방을 나가자, 해밀턴이 헬레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마마, 제발요. 제발 상냥하게 대해 주십시오. 상대가 망나니든 뭐든, 이 나라 왕자입니다.”

“알았다니까요.”

헬레나가 건성으로 답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자신이 그 왕자를 패길 했나, 욕을 했나. 그랬으면 해밀턴의 걱정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냥 대련을 청해와서 응해 줬을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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