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헬레나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라며 펄쩍 뛰던 아버지와 형의 명령 때문에, 라파엘은 일찍부터 헬레나를 찾아왔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막상 복도에 서서 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긴장이 됐다.
얼마 후 안에 보고를 하러 들어갔던 파란 머리카락의 메이드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그 답에 라파엘이 흠흠 짧게 헛기침을 했다.
“저기, 이봐.”
“네.”
“지금 안에 황후마마 혼자 계신가?”
“아뇨. 폐하와 친위대장이신 페레스카 경, 그리고 보좌관이신 녹트 자작님이 함께 계십니다.”
젠장, 주요 인물은 전부 다 있다는 거잖아.
라파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쪽팔리게 그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
“저기, 그러면 나중에 찾아오겠다고…….”
라파엘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더니, 아고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시겠다는 건가요?”
“윽.”
라파엘이 찔끔해서 신음을 삼켰다.
순수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지만, 그 속내를 라파엘도 모르지 않았다. ‘또 개매너를 뽐내겠다는 거냐?’라는 협박이다, 이건.
이 메이드 뭐야. 뭔데 왕족인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걸 묻는 거지.
건방지다고 한 소리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몸이 쪼그라든다. 메이드의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뭐냐고, 이 압박감. 기사들도 그렇고, 메이드도 그렇고, 제국 황후는 주변에 이런 인간들밖에 안 두나?
“아니……, 그렇지.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문을 열어라.”
“네. 알겠습니다.”
결국 라파엘은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메이드의 말대로, 방 안에는 헬레나를 중심으로 요주의 인물이 모두 앉아 있었다.
특히 헬레나의 곁에는 황제인 카이사르가 있다. 카이사르는 마치 귀여운 애송이를 보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라파엘은 그 미소가 끔찍하게 무서웠다.
“아, 그……, 오르랑드의 열세 번째 아들인 라파엘 오르랑드,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제국의 무궁한 영광과……, 그 뭐냐……, 축복? 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젯밤 자신의 몸종이 인사말을 몇 번이나 일러 주었는데,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잘 안 나왔다. 묘한 압박감과 두려움에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탓이다.
인사말부터 망친 라파엘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고갤 푹 숙였다.
은발의 친위기사가 자신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젠장, 그게 더 짜증 난다.
“앉으세요, 저하.”
“감사합니다.”
헬레나가 빈 의자를 권했고, 라파엘이 우물쭈물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앉은 자세가 뻣뻣하고 기이하다는 걸 라파엘 본인도 깨달았지만, 도무지 어깨에 힘이 빠지질 않았다.
와, 그냥 사과만 하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마치 뱀 앞의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제게 무슨 용건이신가요?”
“아, 용건이랄지……, 그, 제가 어제 무례를 저질렀잖습니까. 아하하. 제가 그 사과를 드리려고…….”
세상에.
여자들 꼬실 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돌아가던 혓바닥이 도무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하는 말이 얼마나 어설프고 산만한지, 못 배운 사람이 더듬더듬 책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무례? 대련을 청한 것 말인가요?”
“그……, 네.”
결국 라파엘은 허세 부리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이신 줄 알았으면 그리 건방지게 굴지 않았을 텐데.”
“흐음…….”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녀로서는 이게 사과가 맞나 싶었다.
“제가 황후였던 것이 문제였던 거로군요.”
“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제국 황후인 줄 알았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거란 말은, 제가 제국 황후가 아니었다면 그리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안 들었을 거라는 것 아닌가요?”
헬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그 말에 라파엘은 뜨끔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 헬레나에게 사과하러 온 것도 아버지와 형이 재촉한 탓이다. 라파엘 본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그냥 ‘재수 없게 잘못 걸렸다’라는 생각만 했을 뿐.
마치 그 생각을 꿰뚫어 보듯, 헬레나는 라파엘의 사과를 지적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라파엘은 헬레나의 말을 들은 후에야 밑도 끝도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저는……, 죄, 죄송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어제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마마께도, 기사분들께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라파엘은 곧 입술을 깨물며 고갤 들었다.
어쩐지 이렇게 창피를 당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뚝 솟았다. 라파엘은 카이사르를 향해 호소하듯 외쳤다.
“사과의 뜻으로, 허락하신다면 이번 마수 토벌에 저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걸 왜 날 보며 말하는가?”
카이사르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라파엘도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후에게 사과하러 온 게 아닌가? 사과의 뜻으로 청하는 거라면, 황후에게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 그, 그렇죠. 그렇긴 한데.”
당황한 라파엘이 말을 더듬었다.
헬레나는 그런 라파엘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이를테면……, 찌질이 같은……. 으음, 아무리 고민해도 무례한 지칭밖엔 떠오르지 않는 남자다.
‘왜 망나니라고 불리는지 알겠네.’
그런 생각을 삼키며, 헬레나는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받아들이시지요, 폐하.”
“괜찮겠나?”
“나쁠 것 없지요.”
헬레나의 답에 라파엘의 얼굴이 활짝 갰다.
라파엘은 이것이 자신의 수치를 만회할 기회라 생각했다. 토벌에 나가서 진정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면, 다들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라파엘을 제외한 그 방의 인원 전부는, 이것이 라파엘의 비대한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 버릴 헬레나의 잔인한 가르침이라 생각했다. 과연 토벌대에 나서는 기사들 중에 라파엘보다 못한 실력이 있긴 할까?
‘마수와 마주쳐서 바지에 실례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해밀턴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우물 안 망나니가 제대로 된 전투를 해 본 적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헬레나에게 잠깐 살기를 받은 것만으로 허둥대며 나자빠지던 자인데.
“우리는 그대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네. 그 점은 확실히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 역시 검을 다루는 자,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다시금 자신감을 얻은 라파엘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잡은 물고기가 너무 작아서 너그러이 놓아줬더니, 멋모르고 다시 낚여 올라오는 꼴이구나.
그나마 자비심 많은 레너드만이, 한없이 측은한 표정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 * *
그리고 그 소식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황성에 도달했다.
“마마에게 후드려 맞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던 그 13왕자가, 마마에게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했답니다! 토벌대에 참여해 자신의 잘못을 목숨으로 갚겠다면서요!”
이번에도, 상당히 왜곡되어서.
“그 사람들, 거기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아아!”
그날 이후로, 황성 사람들 사이에서는 용의 저주에 걸려 감정을 잃어버렸던 로위나가, 황후의 활약으로 저주가 풀려 감정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연히 우스갯소리였지만, 다들 마음 한구석에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쌓여 갔다.
황후라면 정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토벌대가 나서는 날 아침, 라파엘은 갑옷 입는 시중을 받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국 황제 말이야. 좀 호구 같지 않아?”
“예에?! 아이고, 저하! 왜 그런 큰일 날 말씀을 하세요!”
시종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황후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 같단 말이지. 기사들도 황후한테나 꼼짝 못 하는 것 같고.”
여자한테 휘둘리기나 하는 남자라니. ……하긴, 그 여자가 좀 오금이 저리게 무섭긴 했지만.
라파엘은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던 헬레나가 떠올라 가볍게 몸서리쳤다.
“황후의 집안이 좋은가?”
“그런 말씀 입에도 올리지 마세요. 제국 황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요.”
“그래?”
“그럼요. 그 기세등등하던 제국의 귀족들이, 지금 황제가 등극한 이후로 쥐 죽은 듯 조용해졌잖아요.”
“맞아요, 맞아요. 황제 머리 위에 앉아 있다던 발레르 공작가도, 현 황제 때문에 완전 망했잖아요.”
“흐음…….”
시종들의 말에 라파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솔직히 믿기질 않았다. 차라리 황후가 무서워서 찍소리 못 하는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하여튼 그 황후가 특이한 거야. 절대 내가 약한 게 아니라고.’
헬레나만 떠올리면 자꾸만 작아져만 가는 자존감을 북돋우며, 라파엘이 가볍게 도리질 쳤다.
“야, 좀 더 조여. 그렇게 헐렁하게 묶었다가 내가 마수한테 죽으면 책임질 거야?”
긴장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망나니 라파엘은 애먼 시종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