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7화 (128/156)

* * *

대형 마수를 잡으면 마수의 수가 급감한다는 제국 측의 설명으로, 토벌대는 대형 마수가 자주 출몰하는 산 중턱으로 향했다.

라파엘은 긴장감 반 설렘 반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활약할 생각으로 벌써 어깨가 솟았다. 제국 기사들이 그런 자신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대열의 중간쯤에서 말을 몰던 그는, 앞서 걷는 사람들 중 파란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어? 설마…….”

흔치 않은 머리카락 색깔에, 라파엘은 정해진 대열을 빠져나가 속도를 높여 앞쪽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파란 머리카락의 주인은 헬레나의 메이드인 아고트였다.

“뭐야, 메이드가 여기 왜 있어?!”

“앗, 깜짝이야!”

아고트는 물론 주변의 기사들까지 눈이 동그래져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제국은 메이드까지 전장에 데려오는 것인가!”

라파엘의 돌발 행동에 대열이 멈췄다. 앞쪽에 있던 헬레나와 카이사르, 레너드도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르랑드 쪽 기사장은 소란을 일으킨 대상을 확인하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수를 잡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고 나온 것이냐!”

라파엘이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물론 아고트의 표정은 ‘이 미친놈이 뭘 잘못 먹었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저하. 이자는 메이드이기도 하지만 기사이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다른 기사가 라파엘에게 설명했지만, 라파엘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다들 매정하군! 좋아, 걱정 말거라. 너는 내가 지켜 주마!”

“네? 아뇨, 안 그러셔도…….”

아고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절했지만, 라파엘은 막무가내였다.

“레이디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기사의 의무! 오르랑드의 라파엘은 기사도를 아는 자다!”

그렇게 외친 라파엘이, 자신이 한 말에 취해 코를 찡긋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고트가 어처구니가 없어 뭔가 따지려는데,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헬레나가 아고트를 불렀다.

“아고트, 잠시 이리 오렴.”

헬레나의 명령에 아고트가 언제 찡그렸냐는 듯 활짝 웃으며 쪼르르 헬레나 곁으로 달려갔다. 헬레나는 말에서 내려 아고트에게 속삭여 명령했다.

“그냥 살살 얼러 주면서, 저 인간 옆에 딱 붙어 있어.”

“네?”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네가 옆에서 잘 지켜 주라고. 왕자가 다치면 곤란하거든.”

“아……, 네. 마마께서 그러길 원하신다면야…….”

아고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깰 늘어뜨렸다. 아고트의 기분을 헤아린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대신 제국으로 돌아가면 일주일 내내 너랑 대련해 줄게.”

“저, 정말이세요?!”

헬레나의 제안에 아고트가 퍼뜩 고갤 들었다. 헬레나가 긍정의 의미로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어 보여 주었다.

“맡겨 주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아고트는 피부에서 광채가 흐르는 것 같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라파엘의 곁으로 돌아갔다.

“저하께서 저를 지켜 주신다니, 저는 두려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고트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외침에 라파엘의 얼굴에도 한껏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대로 기사들은 공포를 느꼈지만.

“하하핫, 걱정 마라! 마수가 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참으로 든든합니다, 저하!”

그렇게 외치는 아고트의 머릿속에는 ‘마마와 일주일 내내 대련’이라는 목표만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아고트의 눈동자에서 그 야망을 본 기사들의 표정만이 처참하게 썩어 들어갔다.

* * *

주요 지역을 돌아보았음에도 마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허탕을 치는 건가 싶을 무렵, 드디어 마수가 출몰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 즈음, 한 무리의 흑요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토벌대에게 흑요견은 ‘좀 사나운 개’ 정도밖에는 안 될 마수라, 토벌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마수는 금세 정리되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혼자 대형 마수라도 상대하는 듯 온 영혼을 불살라 가며 흑요견을 상대했다.

“건방진 마수 놈들! 모조리 베어 넘겨 주마!”

검에 재능이 아예 없지는 않은지라, 라파엘은 제법 능란하게 흑요견을 상대했다. 손쉽게 베어 넘어가는 마수에, 라파엘은 어깨가 하늘만큼 솟았다.

심지어 그의 곁에서는 아고트가 손뼉을 치며 응원의 말을 해 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하! 멋지십니다, 저하!”

그야말로 국어책을 읽는 듯 영혼이 없는 억양과 말투였으나,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된 라파엘에게는 아고트가 자신에게 홀딱 반했다고밖엔 생각되질 않았다.

결국 한껏 콧대가 높아진 라파엘이 뻔뻔하게 소리쳤다.

“아하하하! 나만 믿으라 하지 않았느냐!”

“그야말로 검의 정점이십니다! 누구나 반할 만큼 근사하십니다!”

“하핫, 너에게는 이게 대단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는 누워서 수프 퍼먹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앗, 저하! 여기 아직 덜 죽은 흑요견이 있습니다! 아이, 무서워라!”

“걱정 마라! 에잇, 요놈! 여성분을 겁먹게 하다니, 죽어라!”

한껏 기분이 좋아진 라파엘이, 이미 숨이 다 끊어져 버둥대던 흑요견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었다.

남이 다 잡은 흑요견의 숨이 라파엘의 검에 의해 끊어지자, 아고트가 다시 손뼉을 치며 라파엘을 치켜세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수를 숭덩숭덩 베고 있던 호크가, 한껏 인상을 쓰며 동료 기사들에게 물었다.

“아고트 쟤 미쳤냐? 아니, 흑요견을 16등분으로 나누고도 남을 애가 도대체 왜 저래…….”

“왜겠냐. 야, 저 눈빛 좀 봐라. 이 굴욕만 참으면 마마께 더 큰 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저 욕망이 꿈틀대는 눈빛을.”

“과연, 야망의 메이드……!”

기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렸다는 눈으로 아고트와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특히 허세를 부리는 라파엘을 향하는 시선에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어리석은 왕자. 자신이 지켜 주려는 여자가 제국 검투 대회 우승자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흑요견 토벌은 빠르게 끝이 났다. 정리가 끝났을 땐 이미 해가 다 저문 후였다.

“어쩌죠?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호크가 피 묻은 검을 털며 카이사르와 헬레나에게 물었다. 헬레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카이사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조금 더 둘러보고 가죠? 어차피 대형 마수를 잡지 않으면 토벌에 의미가 없으니까요.”

“황후의 의견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카이사르가 담백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라파엘은 티 나지 않게 피식 실소했다.

저것 봐라. 역시 황제가 황후에게 꽉 잡혀 살지 않는가. 저런 황제가 뭐 무섭다고…….

“다 이동할 것 없이, 저와 기사장님이 좀 더 안쪽으로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여기서 마수의 시체를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낫겠군. 호크, 몇 명만 추려서 황후를 따라 다녀오도록.”

“존명!”

카이사르의 명령을 끝으로, 토벌단은 두 개로 나뉘어졌다.

헬레나를 앞세운 일부 기사들은 대형 마수의 흔적을 쫓아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기사들은 현장에 남아 흑요견의 시체를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라파엘은 그런 하찮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양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후후. 마수 뭐, 별것 아니군.”

고작 흑요견 몇 마리 잡고 기세등등해진 라파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중얼거렸다.

멀리 카이사르가 레너드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황제도 내 활약을 잘 봤겠지. 환송 파티 때 먼저 다가가서 은근슬쩍 말을 걸면, 분명 날 데려가겠다고 할 거야.’

저 혼자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라파엘이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망나니 취급당하며 설움 받던 것도 이제 끝이다. 자신이 가진 검의 재능을 알아봐 줄 더 큰 나라로 가서 승승장구하리라.

“저하. 뺨에 피가 묻었습니다. 이걸로 닦으세요.”

그때, 아고트가 라파엘의 곁에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그래? 고맙다. 너는 참으로 싹싹하고 좋은 메이드로구나.”

“별말씀을요.”

“하지만 다시는 겁 없이 이런 전장에 나오지 말아라. 여자에게는 너무 위험한 곳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느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후후. 연약한 여자에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실망할 건 없다. 너는 마음씨도 곱고 조신하니, 널 지켜 줄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와아,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제국 기사들이 이쪽을 노려보는지 혹시 아느냐?”

라파엘이 아고트에게 속삭였다.

아고트는 자신을 향해 ‘가증스러운 연기 그만둬!’라고 호소하는 듯한 기사들을 쳐다보며 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글쎄요. 다들 강하고 멋진 저하를 보고 질투를 하나 봅니다.”

“후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질투를 받는 건 강한 자의 숙명이지.”

라파엘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새로운 마수가 나타난 건 그즈음이었다.

갑자기 바닥이 흔들려서, 라파엘은 지진이 났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라파엘과 아고트가 서 있는 곳 바로 뒤에서 거대한 뱀이 솟구쳐 올랐다.

“허억!”

땅이 솟아올라, 라파엘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흑요견과는 그 크기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마수의 등장이었다.

라파엘은 온몸이 얼어붙을 만큼 두려웠으나, 곁에 아고트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검을 움켜쥐었다.

“거, 걱정 마라! 내가 지켜 주마!”

그는 허세에 찌든 망나니였지만, 의리는 있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두려움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기만 크지, 별것 아냐!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파엘은 기합 소리와 함께 마수를 향해 달려갔다.

“흐아아아아!”

“위험합니다, 저하!”

대형 마수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아는 토벌단의 기사들이 말렸지만, 라파엘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라파엘은 뱀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돼, 됐다! 됐……, 허억!’

공격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뱀이 몸을 뒤틀자, 라파엘은 종잇장처럼 허공을 날라 땅에 처박혔다.

“끄아악!”

공격이 통하지 않자, 라파엘은 공포와 혼란에 제정신이 아니게 됐다. 온몸이 얼어붙어, 그다음 수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이 신나게 잡은 마수는 마수의 축에도 끼지 않는 잔챙이였다는 걸.

진짜 마수는, 자신이 어찌해 볼 수도 없을 만큼 크고 강하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왕자 저하!”

기사들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렸다.

라파엘의 공격에 화가 난 뱀 마수가, 라파엘을 공격 타깃으로 삼고 돌아선 것이다.

‘주, 죽는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라파엘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뱀의 노란 눈만 응시했다.

쉬이익, 뱀이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고 라파엘을 향해 달려드는 그 순간.

서걱,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뱀의 목 아래쪽을 찢었다.

“……헉?!”

라파엘을 향해 달려들던 뱀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뱀의 목을 찢은 이는 아고트였다.

검을 쥐고 라파엘의 앞에 선 그녀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헉, 무심결에 베어 버렸네.”

거대한 마수를 눈앞에 둔 것만으로도 완전히 압도당해 꼼짝도 못 하는 라파엘과 달리,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말투였다.

“무……, 무, 무, 무, 무슨……!”

바지에 실례까지 해 버린 라파엘이, 굳은 혀를 움직여 더듬더듬 소리를 냈다.

그사이 다른 토벌대 기사들이 마수에게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라파엘처럼 겁먹고 쪼그라든 이는 없었다.

아고트가 라파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쓰게 웃었다.

“저기……, 여긴 위험하니까, 저쪽으로 피해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 무, 뭐?”

“괜찮아요.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손잡아 드릴게요.”

아고트가 어린애 어르듯 말했다.

그 말에 라파엘은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그는 냉정한 정신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 같잖은 재롱을 부렸는지. 얼마나 끔찍한 흑역사를 만든 것인지.

“우……, 우으아아아아아악!”

결국 라파엘은 울며 비명을 내질렀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창피해서 말이다.

라파엘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남들이 백 번 연습해서 겨우 익히는 기술을, 그는 서른 번만 연습하면 손쉽게 익혔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기를 그만뒀다. 노력하지 않아도 어지간히 실력을 뽐낼 수 있었으니까.

가끔 자신보다 노력은 하는데 실력이 부족한 기사들에게 대련을 청해 잘난 척을 했다. 패배하지 않는 대결만 골라 했다.

결국 그 조작된 승리 전적에 취해, 자신이 정말 천재적인 검사라 착각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턱 밑을 노려! 거기가 급소다!”

“타액에 닿지 않게 조심해! 독이 있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기어 도망친 라파엘과 달리, 기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대형 마수와 다퉜다.

심지어 라파엘이 지켜 주겠다며 거들먹거렸던 아고트까지 서슴없이 마수에게 돌격했다.

라파엘은 공포와 놀라움, 그리고 창피함에 큰 충격에 빠졌다.

‘대체 나는……,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그때, 반대편 땅도 흔들리더니 뱀 형상의 마수, 웜이 한 마리 더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처음 나타난 마수를 잡기 위해 달려간 탓에, 두 번째 마수를 상대할 이가 없었다.

“허억!”

가장 가까이에 있던 라파엘이 경기를 하듯 몸을 떨며 검을 쥐었다.

그러나 워낙 와들와들 떠는 통에, 검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대형 마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도력을 내뿜었다.

그저 마주 보고만 있어도 납작 짓눌려 살해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왕자 저하!”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아고트가 이쪽으로 달려오려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늦었다. 라파엘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는 마수를 보며 그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두 마리나 나타날 줄은 몰랐군.”

카이사르가 검을 뽑아 들고 라파엘의 앞에 섰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도, 당장 라파엘의 목을 물어뜯을 것 같던 마수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카이사르가 내뿜어 내는 살기가, 마수를 압도해 버린 것이다.

‘뭐야……, 그냥 호구 황제인 줄 알았는데?’

라파엘은 기겁했다.

허수아비 황제라 속으로 비웃었던 카이사르가, 감히 가늠하기도 힘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마수마저도 물러설 정도의.

팽팽하게 이어지던 신경전은, 카이사르가 앞으로 박차고 나아감과 동시에 깨졌다.

마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카이사르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카이사르는 조금도 멈칫하지 않고 사정거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퍽, 카이사르의 검이 마수의 급소에 깊이 꽂혔다. 곧 엄청난 양의 체액과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우, 우으아아아악!”

몸부림치던 마수의 몸이 라파엘이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허공에 흩뿌려진 피가 라파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라파엘이 기겁하며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쿠웅, 바닥에 쓰러진 마수의 거대한 몸뚱이에 먼지바람이 일었다.

“괜찮은가, 왕자?”

일격에 마수를 해치워 버린 카이사르가 라파엘에게 다가와 물었다.

라파엘은 마수의 체액에 쫄딱 젖었는데, 그는 피 한 방울 옷에 묻히지 않았다. 요령 좋게 피한 모양이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라파엘이 어버버거리며 대답도 못 하고 있자니, 아고트가 산뜻한 걸음걸이로 카이사르의 곁에 다가왔다.

카이사르가 그런 아고트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당연히 무사하지. 그러는 아고트 넌 한 마리 잡는 데 한 세월 다 쓸 작정이냐?”

“폐하께서 잡은 건 새끼거든요? 크기를 좀 보시라고요!”

“하지만 너희는 여럿이 달려들었는데도, 내가 더 빨리 잡지 않았는가.”

“당연히 새끼를 혼자 잡는 게 더 편하고 빠르죠! 새끼인데! 혼자 새끼도 못 잡겠어요?! 새끼를!”

“닥쳐라! 왜 자꾸 새끼만 강조하는 건가!”

얘들, 대체 뭐야.

이 무시무시한 마수를 잡고 나서도, 긴장감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이야.

더구나 한낱 메이드가 황제와 눈을 마주치고 언성을 높이다니,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이야.

라파엘은 이제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하, 무사하십니까?”

그나마 나자빠져 덜덜 떠는 라파엘에게 말을 걸어 준 건 레너드뿐이었다.

“많이 놀라셨죠? 대형 마수를 처음 보면 당연합니다. 저희는 몇 번 보았기 때문에 의연했던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 이 남자는 천사인가?

이토록 배려심 깊은 말이라니. 라파엘은 레너드의 손을 잡고 펑펑 울고 싶어졌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의 소란을 들은 헬레나 일행이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헬레나는, 벌써 한 손에 검을 뽑아 쥐고 있었다.

헬레나는 무슨 곡예라도 하듯 달리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하고는 이쪽으로 달려오며 외쳤다.

“마수는요! 마수는 어디 있죠?! 대형 마수가 나온 거 맞겠죠?!”

그녀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마수는 두 마리 모두 황천길로 떠난 지 오래였다. 기사들이 죄송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헬레나의 질문에 답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헬레나의 표정이, 바닥에 널브러진 웜 두 마리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서서히 굳어 갔다.

“……대형 마수는?”

뒤따라온 호크가 헬레나의 곁에 서더니, 헬레나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내 스트레스 해소는?”

헬레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죄송합니다, 마마. 이미……, 다 죽었습니다.”

기사 하나가 비통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동료의 죽음이라도 통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안돼.”

헬레나가 절망 어린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내 몫은 남겨 줬어야죠!”

그 기괴한 장면에 라파엘은 돌아 버릴 지경이 됐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마수에 벌벌 떨며 바지에 오줌을 지린 건, 자신밖엔 없었다.

이것들, 대체 뭐야.

이 미친놈들, 대체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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