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8화 (129/156)

* * *

토벌대가 성으로 돌아온 건 이튿날 오전이었다.

토벌대는 분노한 헬레나를 달래기 위해 산에서 야영까지 감수했고, 결국 새벽에 중형급 마수가 나타나 헬레나 혼자 신나게 써는 것으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른 아침, 헬레나는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세상 행복한 미소로 입성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한 손에는 잘린 루크로코타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심지어 황제인 카이사르를 포함한 토벌대 기사들은, 그런 헬레나를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따뜻하고 행복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었다. 마수의 머리통만 없었다면 말이다.

오르랑드는 그 기괴한 장면에 몸을 떨었다.

심지어 토벌대에 함께 다녀온 라파엘의 변화도 심상치가 않았다.

“기사장에게 다 들었다. 너는 대체 어쩌자고 거기까지 따라가서 추태를 부린단 말이냐!”

왕세자는 자신의 망나니 동생을 불러들여 크게 나무랐다.

대형 마수 앞에서 벌벌 떨며 바지를 적셨다는 일화에, 왕세자는 당장이라도 제 동생을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왕세자는 완전히 넋이 나간 라파엘을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영혼이 탈곡 된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던 라파엘이 간신히 고갤 들고 제 형과 눈을 마주쳤다.

“……형님.”

“오냐, 어디 뚫린 입이라도 달고 있으니, 할 말 있으면 해 봐라!”

“제국 놈들은 다……, 괴물이에요.”

“뭐라? 네놈이 아직도……!”

제국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이 마당에 또 초를 치려는 건가 싶어, 왕세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라파엘이 왕세자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고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그놈들, 진짜 무서운 놈들입니다! 다들 눈빛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마수 못 잡아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싹 다 돌았다고요!”

“뭐야, 이 망나니 같은 놈아?! 우리를 도와주러 온 이들에게 무슨 무례한 소리냐!”

“아니,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들 그 거대한 마수를 숭덩숭덩 베어 넘기며 즐거워했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마수가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인데! 다들 마수와 눈만 마주쳐도 얼어붙는데, 즐겁게 뭘 해?!”

“그렇죠? 그게 정상인 거죠? 제가 미친 게 아니죠? 아하하! 그래, 역시 저자들이 미친 거야!”

“이놈이……, 이놈이 드디어 완전히 돈 것인가……!”

왕세자가 질린 얼굴로 고갤 저었다.

그간 망나니 망나니 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토벌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잖아도 맛이 간 놈이 완전히 맛이 가 버린 것일까.

“하여튼 너, 환송 파티에서는 제발 좀 얌전히 굴어라. 알겠느냐? 또 문제를 일으켰다간, 그땐 아버지가 말려도 내가 널 왕가의 호적에서 파내 버릴 것이다.”

왕세자가 으르렁거리며 협박했다. 그러나 무서운 말투와 달리, 표정은 애원 그 자체였다.

왕세자의 그 반응에 라파엘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토벌에 따라나선 것인데, 그게 이리 욕을 먹을 일입니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라. 준비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데 따라나섰다가 짐만 되고 방해만 되었지 않느냐.”

“능력은……,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국에서 온 그놈들이 비상식적으로 강한 것뿐으로…….”

“태어날 때부터 강한 자들이었겠느냐? 너보다 재능이 많아 거저 얻은 실력이었겠느냐?”

왕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네가 가서 겪은 것이, 너의 그 알량한 재능의 실체다.”

억울했다.

억울했으나,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의 말이 하나 틀린 것 없이 다 맞았다.

잘났다고 설쳐 댄 게 한없이 부끄러웠다. 여자라고 얕보고 지켜 주겠다며 큰소리 쳤는데, 도리어 보호받았다는 게 창피했다.

뒤늦게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던 기사들의 눈빛이 이해가 되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 제국 놈들이 이상했던 거라고. 상식적이지 않았던 거라고.

“나아질 생각이 없으면, 나서지라도 말아야지.”

체념한 듯한 왕세자의 말에 라파엘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 *

방을 나온 라파엘은 벌 받는 학생처럼 복도에 우두커니 섰다.

지나다니는 시종이며 궁정 귀족들은, 시무룩하게 고갤 숙이고 선 왕자를 보고도 말을 걸긴커녕 못 본 척 재빨리 지나쳐 갔다.

다들 망나니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시하고, 모르는 척하고, 자기 합리화했던 그 모든 일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밀려드는 치욕에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저하?”

그때,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헬레나가 라파엘에게 말을 걸었다.

라파엘이 흠칫 놀라 고갤 들었다. 헬레나의 뒤를 따르던 아고트도 풀 죽은 라파엘의 모습에 별일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아, 그, 그, 저기…….”

민망함과 창피함에 라파엘은 말을 더듬었다.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바지까지 적시며 허둥대던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같잖은 게 허세를 부리는데, 어린애 재롱 보듯 손뼉을 치며 맞장구까지 쳐 주던 아고트는 자신을 뭐라 생각할까.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혹시 토벌 때 다치시거나 하신 건…….”

“아, 아니요! 아닙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하하, 제 주제에 다치기는요.”

대형 마수 앞에서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자신이 아니었던가.

헬레나는 기가 팍 죽은 라파엘의 태도에 고갤 갸웃했으나,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따로 인사드리려 했는데 늦었군요. 이번 토벌에 함께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애쓰긴요……. 도움이 하나도 안 되었는데…….”

“아고트에게 들으니, 대형 마수가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용감하게 달려가셨다 하던데요.”

헬레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파엘은 창피함에 고갤 푹 숙였다.

“저희 기사들은 이미 여러 번 마수와 마주쳤던 이들로, 그들보다 실력이 못하였다고 낙심하실 건 없습니다, 저하.”

“아닙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설쳤다는 거, 압니다.”

“뭐……, 아니라면 거짓말이긴 하죠. 사실 마수를 상대할 만한 실력은 아니셨으니.”

“윽.”

“그러나 저하께서는 재능이 있으신 건 확실합니다.”

그제야 라파엘이 고갤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헬레나가 빙긋 미소 지었다.

“실패를 포기의 핑계로 삼을 수도, 발전의 경험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저하께서 이번 굴욕을 교훈으로 삼으신다면, 분명 오르랑드 최고의 검사가 되실 겁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교육자의 눈은 거짓말을 안 한답니다.”

라파엘의 얼굴에 다시 환한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대단한 사람에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헬레나는 라파엘에게 묵례한 후 그의 앞을 지나쳐갔다.

라파엘과 멀리 떨어졌을 때, 아고트가 헬레나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정말 저분이 그 정도로 재능이 있으신가요?”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요령 좀 피우며 훈련해도 중상위권은 될 수준?”

“그런데 뭐 하러 그리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아고트. 호랑이 앞에 오소리가 나타났는데, 지나가던 병아리가 끼어들어서는 ‘호랑이야! 내가 지켜 줄게!’ 하는 거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니?”

“정말 같잖고 귀엽겠네요.”

“그래, 딱 그 기분이거든…….”

“아……, 이해했습니다.”

너무 작고 하찮다 보니, 아무리 설쳐 봐야 화도 안 나는 그런 무해한 존재 말이지.

그 진실을 알 길 없는 망나니 왕자를 두고, 두 여자는 쓰게 웃으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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