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환송 파티가 시작됐다.
라파엘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옷을 쫙 빼입고 파티장에 나타났다.
그의 가족들과 일부 귀족들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가.’라는 듯한 시선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라파엘은 아랑곳없이,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파티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헬레나가 목격하고는, 곁에 선 카이사르와 레너드에게 속삭여 물었다.
“저기, 13왕자 아니에요?”
“그렇군.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제국에 스카우트해서 데려가 달라고 폐하께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요?”
레너드의 말에 카이사르와 헬레나가 동시에 긴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안 보이는 곳에 숨는 게 나으려나.”
카이사르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라파엘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아, 망했다. 귀찮아지겠네.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라파엘을 보며, 세 사람은 웃고 있는 표정 그대로 복화술로 대화를 나눴다.
“국왕과 할 얘기가 있다고 하고 빠져나가야겠군.”
“전 폐하를 보위해야 하니 함께 가겠습니다.”
“둘 다 치사하기는. 그럼 저는 옷 갈아입겠다고 하고 도망칠래요. 설마 드레스룸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그사이 라파엘이 드디어 세 사람 앞에 당도했다. 라파엘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세 사람에게 물었다.
“성공적인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황후마마. 오르랑드 왕가의 한 사람으로서, 두 분의 활약에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음? 꽤 정상적인 인사를 해 온다?
더구나 라파엘은 세 사람이 예측했던 질문에서 완전히 벗어난 내용을 물어 왔다.
“그나저나 지금 아고트 양을 찾고 있는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고트를?
헬레나가 카이사르와 레너드를 차례로 쳐다보며 눈짓으로 의아함을 표했다. 그러나 둘 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뿐이었다.
“……아고트라면 토벌대 기사들과 함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파티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라파엘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헬레나는 예상했던 대로 그가 깐족거리며 치대오지 않자, 조금 실망한 표정이 됐다.
“대체 뭐죠? 아고트는 왜 찾는 걸까요?”
헬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카이사르와 레너드에게 물었으나, 두 사람 역시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 *
그 시각, 아고트는 다른 방에서 토벌대 기사들과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로빈이 어제 하루 종일 팔을 긁고 다니는 거 있죠? 더러워 죽겠어.”
“웜의 타액이 튀어서 그렇다니까? 독 때문이라고!”
“그것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자식아, 넌 좀 씻고 다녀.”
“아니라니까! 어제도 씻었다고! 에쉬, 너도 나랑 같이 씻었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음……, 머리에 물을 끼얹는 것만으로 씻었다고 봐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사들은 ‘물을 끼얹는 것만으로 씻었다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실용성 없는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논쟁의 결론이 나기도 전에, 라파엘이 나타나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사들의 시선에 라파엘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 아고트 양.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라파엘이 곧장 아고트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주변에 선 기사들이 ‘오오…….’ 하는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아고트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가볍게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신가요?”
“마수 토벌 때 나를 구해 준 일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나는 그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아……, 그거요.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뭐.”
아고트가 허공으로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자신이라고 라파엘이 보기 예뻐서 구해 줬겠나. 헬레나와의 대련에 눈이 멀어서 구해 준 거지.
“그대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더구나. 내가 선입견에 눈이 멀어 그대를 얕잡아 보았다. 사과한다.”
“네, 뭐…….”
아니,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거지?
주변의 기사들이 아고트보다 더 흥미진진해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라파엘이 드디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좀 더 키운 목소리로 아고트에게 권했다.
“내 기사가 되지 않겠나!”
“……예에?!”
“오르랑드에 남아 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나를 지키며 나를 가르쳐다오! 너에게 검을 배우고 싶구나!”
“오르랑드에도 좋은 기사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대체 왜……?”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라파엘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고트는 가장 원하지 않는 답을 들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상대가 왕자인지라, 그저 씁쓸한 실소만 흘릴 뿐이었다.
“내 기사가 되어 준다면, 네게 크게 포상할 것이다! 집과 땅은 물론이고, 형님께 부탁하여 작위도 내려 줄 수 있다! 자, 어떠하냐!”
“어떻고 자시고……, 싫은데요.”
“뭐?!”
“저는 몸과 마음을 전부 다 황후마마께 바친 사람이라서.”
아고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녀가 기이할 정도로 황후에게 집착하는 것을 이미 잘 아는 기사들이, 입을 가리고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러면 널 가르친 스승은 누구인가. 나도 너처럼 강해지고 싶구나.”
아고트가 안 되면 그 스승을 설득하여 오르랑드에 모셔 올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고트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라파엘은 물론 왕세자나 국왕이 나서도 절대 모셔 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황후마마요.”
아니, 그 사람은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되나? 어디든 안 얽힌 곳이 없어?
라파엘은 절망했다.
* * *
그러나 이튿날.
포기를 모르는 망나니 라파엘은, 귀환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며 차를 즐기고 있던 헬레나를 찾아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 방에 있던 사람들, 헬레나와 그녀의 세 제자들이 모두 말문이 막혀 똑같은 표정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청혼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라파엘이 허둥지둥 이유를 설명했다.
“저도 아고트 양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절 가르쳐 주십시오!”
차 시중을 들던 아고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이렇듯 헬레나를 귀찮게 할 줄 알았더라면, 자신의 스승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 걸, 속으로 후회하면서.
“음……, 이건 국왕 전하와 상의된 일인가요?”
“아뇨! 제 독단입니다!”
라파엘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왜 자랑스러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국의 왕자를 제국에 데려가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헬레나는 최대한 상식선에서 설득하려 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가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러나 라파엘의 해맑은 머릿속은 그런 정치적인 문제는 일절 고민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도 어차피 망나니 취급받는 인생, 제가 어디를 가서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안 쓸 겁니다! 아하하!”
“아, 네에……, 다행인……, 아니, 다행은 아닌 것 같은데요.”
헬레나는 악의 없이 다가오는 이들에 대해 면역력이 극히 얕다.
그리고 그 사실을, 헬레나의 제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그의 남편이기도 한 카이사르라면 더더욱.
“라파엘 오르랑드 왕자.”
결국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곁에서 지켜만 보던 카이사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헬레나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헬레나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잡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나의 스승님은 더 이상 제자를 만들 의향이 없으시다.”
실로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으면서.
그 엄청난 살기에 라파엘은 완전히 짜부라졌다. 대형 마수 두 마리를 물러나게 만든 바로 그 살기였다.
“아……, 저, 저, 저는…….”
“귀환 준비로 어수선한 때이다. 앞으로는 예고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카이사르가 살벌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우호국의 왕자란 이유로 거듭되는 무례를 눈감아 넘겨주는 것도 못 할 짓이군.”
“시……, 실례했습니다아악!”
결국 라파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인사도 없이 허둥지둥. 그렇지 않으면 당장 목이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콰앙. 요란하게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라파엘이 방을 나가자, 헬레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겁을 주고 그러세요?”
“헬레나가 귀엽다고 오냐오냐해 줘서 내버려 두긴 했으나,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제국을 향한 왕가의 무례도 정도가 있는 거야.”
“망나니라잖아요. 오르랑드도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어요. 적당히 얼러 주면 될 것을.”
“하아……. 스승님이 너무 물러서 이 제자는 불안이 끝이 없어.”
카이사르가 헬레나를 끌어안고 그 목에 머리를 부볐다. 헬레나가 그런 카이사르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레너드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페레스카 경이라도 이럴 때 폐하를 좀 말려 줘야죠.”
레너드는 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갸웃했다.
“아, 이번만큼은 저도 폐하와 의견이 일치했던지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마.”
나의 제자들은 왜 이렇게 집착이 심한 것인가.
헬레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 사람 때문에라도, 마음에 맞는 자가 나타난다 한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제자를 들일 수가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뭐, 귀찮아서 더 들일 생각도 없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고 마음이 맞아 봐야 내 제자들보다 강하겠어?
그런 생각도 함께.
* * *
“……그러고 울며 뛰쳐나간 게 마지막 모습이었는데.”
그렇게, 오르랑드에서 보낸 열흘간을 반추하는 시간이 끝났다.
그러나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그 망나니 왕자가 개과천선하게 된 계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남의 나라 왕자를 겁주고, 협박하고, 농락했단 얘기만 실컷 들은 기분인데요.”
중간쯤부터 자리에 와 앉아 있던 율리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로위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울며 뛰쳐나간 왕자를 토벌대 기사들이 격려해 줬다는 얘기도 듣긴 했습니다.”
레너드가 막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헬레나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아, 그럼 그게 계기겠네! 뭐라고 격려해 줬지?”
“자신들이 다 마마의 제자가 되려는 대기 줄이니, 새치기하지 말라고 했다던데요.”
“……그거, 격려 맞아요?”
율리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 이런 어이없는 인간들이 다 있나 싶었다.
“뭐 어쨌든……, 망나니 왕자의 개과천선 덕분에 오르랑드와 제국의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으니 된 거겠죠.”
로위나가 이 대화를 정리하듯 말했다. 그녀로서는 이 어이없는 안건에 대해 더는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율리카도 로위나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한 톤 밝아진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오르랑드에서 뭐 재미있었던 일은 없으셨나요?”
율리카의 말에 레너드가 활짝 웃으며 먼저 운을 떼었다.
“파티 때 오르랑드의 전통 춤을 보았는데, 아주 흥겹더군요.”
“그래. 그 춤, 꽤 흥미로웠지. 전통 의상도 특이했고.”
카이사르가 맞장구를 쳤다.
율리카가 생긋 웃으며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마마는요? 마마께서는 어떤 것이 가장 재미있으셨나요?”
“흐음……, 나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요. 대형 마수도 다른 사람들이 다 잡아 버렸고, 춤이나 음식도 특별히 마음이 동할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헬레나가 찬찬히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대체로 다 평범하고……, 뭐, 별것 없었던 것 같네요.”
“이번에도 무료한 시간만 보내다 오셨군요.”
로위나가 알 만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헬레나가 막 기억난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하나 있네요! 재미있었던 거!”
“뭔가요?”
“토벌 나서기 전 회의 때 폐하께서 잠깐 조셨거든요. 한 5초 정도? 퍼뜩 깨서는 안 존 척하시는 게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헬레나가 진심으로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반면 방 안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아니, 남의 나라 가서 온갖 대접 다 받으며 별의별 일이 다 있었을 텐데, 기껏 기억에 남는 일이 남편의 조는 얼굴이란 말인가?
모두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가운데, 카이사르만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귀여웠나?”
아니, 안 귀엽다. 안 봐도 안다. 늑대 황제가 귀엽다는 걸 믿느니, 고양이가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걸 믿겠다.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카이사르의 질문에 무언으로 반박했으나, 헬레나만은 애틋한 눈빛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보며 고갤 끄덕였다.
“폐하는 늘 귀여우시죠.”
“그렇군. 귀여움을 갈고 닦기 위해 좀 더 정진해야겠어.”
율리카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뭐……, 천생연분이시네요.”
율리카가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려 로위나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로위나는 냉정했다.
“저희의 비위는 상관없는 겁니까.”
“그래도 두 분 사이가 좋은 게 낫지 않나요? 사이가 나빠서 저 두 분이 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세계 평화를 위하여 저희의 비위를 희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용의 영혼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뭐, 물론 그런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율리카는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