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백작님을 넘보지 마세요
최근 율리카 브란테는 몹시 피곤했다.
사교 시즌을 기회 삼아, 남자들이 그녀의 주변에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인기 많은 여성의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주변에 득시글대는 남자들이 율리카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들이 호감을 품은 건 하나다.
율리카 브란테의 백작위.
그녀와 결혼하면, 율리카가 가진 백작위를 넘겨받을 수 있게 된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백작님.”
연말을 앞둔 어느 오후. 헬레나와 중정 산책을 하던 율리카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더니 자신에게 꽃을 내미는 한 남자의 태도에 질려 버렸다.
헬레나는 눈썹을 으쓱하며, 남자와 율리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의 용기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율리카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는 사이가 아닌가요?”
결국 헬레나는 율리카에게 작게 속삭여 물었다. 율리카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이자의 이름도 모릅니다.”
오……, 이런.
흐뭇한 광경이 아니었군.
남자가 율리카의 말을 들었는지, 고른 치아를 드러낸 미소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가르말 공작저에서의 다과회 때 먼발치에서 백작님을 뵙고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아……, 네.”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뭇 영애들 사이에서 시선을 사로잡았지요.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군요. 참 신기한 일이네요. 전 그 다과회에 안 갔는데.”
“그 미소가 꽃과 같이 향기롭고……, 네, 네? 아, 아니, 그럴 리가.”
“저런, 다른 분과 착각하셨나 봐요. 금발의 다른 영애라면, 으음, 페르낭 자작 영애일까요? 자, 어서 그분께 가 보셔요.”
율리카가 생긋 웃으며 격려하듯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얼떨떨한 표정의 남자를 두고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헬레나 역시 걸음을 서두르는 율리카와 속도를 맞췄다.
“자, 잠시만요! 그럴 리가요! 분명 백작님이셨는데……!”
남자가 약간 시들어 버린 꽃을 쥐고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율리카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꽤 멀리 떨어진 후에야, 헬레나는 율리카에게 물었다.
“다과회 때 정말 안 갔어요?”
“갔어요.”
“네?”
“간 건 맞는데 다른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햇살처럼 웃었던 적은 없어요.”
율리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저런 사람들이 사흘 건너 한 명씩은 와요. 질리지도 않나 봐요. 정말이지 무례하고, 경우 없고, 뻔뻔하고, 속 보여요.”
한참을 식식거리며 걷던 율리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들 내가 만만한가……?”
헬레나가 그런 율리카를 보며 씁쓸한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율리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용의 영혼도 반으로 나눈 당신이 만만한 사람일 리가요. 다들 눈이 삐었군요.”
헬레나의 위로에 율리카도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율리카의 근처를 얼쩡대는 건, 율리카와 결혼하여 한몫 챙겨 보자는 하급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문 사람들 역시 그녀의 주위를 돌며 기회를 노렸다.
가문의 힘 있는 남자에게 작위를 양위하도록 설득이란 이름의 협박을 한다든가, 사촌과 혼인을 하라고 종용한다든가 말이다.
아예 관련 없는 귀족들의 추근거림이야 딱 잘라 거절하면 그만이었으나, 가족들이 얽혀 있으면 쉬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아직도 난 아버지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는 걸까.’
늦은 오후의 백작저.
율리카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축이며, 맞은편에 앉은 자신의 아버지를 흘끗 확인했다.
아버지의 곁에는 붉은색에 가까운 금발의 남성이 자기 몫의 찻잔에 각설탕을 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분이……, 저의 육촌 오라버니가 되신다 이 말씀이시군요.”
오라버니라고 해야 할지, 아저씨라고 해야 할지. 아무리 어리게 봐 줘도 서른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왜 나에겐 레너드 페레스카 같은 오빠가 없는 거냐고.’
그 육촌 오라버니는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이다.
율리카가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이라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사실 촌수가 그리 가깝지도 않았고 말이야.”
율리카의 아버지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고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르델. 뭐 하느냐. 어쨌든 이젠 우리 집안의 수장인데, 예를 갖춰 인사드려야지.”
‘어쨌든’은 뭔가.
율리카는 찝찝한 표정으로 마르델을 쳐다보았다. 마르델 역시 율리카와 눈을 마주쳤다.
왜 자신이 이런 어린 계집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나 하는 속내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랜만입니다. 육촌 동생님.”
“……호칭에 유념해 주세요.”
“뭐, 친척끼리 백작님 백작님 하면서 아양 떠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마르델이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비아냥에 율리카가 떨리는 긴 호흡을 내뱉었다.
“마르델은 연말 파티에 참석할 때까지 수도에 머무를 예정이라 하니, 잘 대접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최고급 호텔을 알아봐 드릴 테니…….”
“뭐? 그게 무슨 소리냐. 호텔이라니. 방 많은 저택 버젓이 내버려 두고 무슨 호텔이야?”
율리카의 아버지가 인상을 쓰며 으르렁댔다.
“너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인데 반갑지도 않은 것이냐? 하여튼, 야박한 것. 그러니 다 큰 계집이 제 잘못은 모르고 집을 뛰쳐나가거나 하는 게지.”
“……아버지. 말씀을 삼가세요. 전 브란테가의…….”
“치워라! 내게 훈계할 셈이냐?”
쾅! 율리카의 아버지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찧었다. 요란한 소리에 율리카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그녀는 아직 아버지가 두려웠다. 아버지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으나, 아버지가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를 내면 그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고착된 강압적인 관계가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율리카는 가문의 남자들이 다 무서웠다. 대체로 브란테가의 남자들은 그녀의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격들이었으니까.
“마르델도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둘이 마음이 맞아 혼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결국 율리카의 아버지는, 율리카가 여전히 자신에게 움츠러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뻔뻔하게도 시커먼 속내를 입에 담았다.
“……네?”
“뭘 그리 놀라느냐. 너도 언젠가는 시집을 가긴 가야지.”
“하, 하지만 육촌과 어떻게…….”
“사촌과 결혼하는 것도 흔한 일인데, 육촌이면 남이지. 더구나 이미 폐하께 소박맞은 널 누가 데려가려 하겠느냐?”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인간들 많던데요. 율리카는 그 말을 꾹 삼켰다. 어차피 데려가겠다는 인간들 중에 마음에 드는 이도 없었고.
“언제까지 네가 감당도 못 할 그 큰 작위를 쥐고 있을 셈이냐. 어떻게 이어 온 백작위인데, 다른 가문에 넘길 수야 없지. 안 그러냐?”
“하지만…….”
“마르델은 남자답고 성실한 사람이다. 아무렴 내가 네 신랑감을 허투루 골랐겠느냐.”
허투루 고르지 않았겠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줄 알고, 함부로 휘두르기 좋은, 적당히 멍청한 사내로 잘 골라 왔겠지.
율리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 지내봅시다, 동생님?”
마르델이 그런 율리카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고르지 못한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율리카는 얼마 전 자신에게 꽃을 내밀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인간은 치열이라도 고르던데 하는, 억울한 생각을 하면서.
* * *
한 달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보내자. 율리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일이 터진 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것도 백작저가 아닌 황성에서 터졌다.
“오르랑드에서 그 난리를 치셨던 것에 비하면 두 분 모두 상태가 안정적이시네요.”
“그렇습니까? 그것참 다행이군요.”
율리카는 헬레나와 카이사르에게 봉인된 크루세흐의 영혼을 살펴보러 황성에 들른 참이었다.
레너드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했다.
“솔직히 그리트 씨만으로는 완전히 안심이 안 되었는데, 백작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군요.”
“후후, 그리트 씨도 유능한 마법사랍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건 아는데……. 음, 방금 말은 너무 무례했으려나요.”
“아니에요. 저도 그 심정, 이해는 해요.”
곤란해하는 레너드의 표정에 율리카가 쓰게 웃었다. 로만의 어딘가 맹하고 허술한 표정이며 말투를 겪고 나면, 아무래도 신뢰하기 어려워지긴 한다.
“마차가 대기 중입니까?”
“아뇨.”
“저런. 저희 마차를 불러드릴까요?”
“아니에요. 오늘은 느긋하게 걷고 싶어, 몸종도 없이 나온 거라서요.”
율리카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차가 없는 건 아침부터 마르델이 마차를 타고 나가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페레스카가에 신세를 지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황성 입구에 다다랐을 때, 율리카는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헉, 저 인간이 왜……?”
“네? 무슨 일이십니까?”
입구 근처에서 마르델이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근위병들 때문에 안에 들어오진 못하고, 밖에서 서성대며 기회를 엿보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일이라도 치면, 브란테가 타격을 받는다. 그런 생각에 율리카는 기분이 아찔해졌다.
“저, 저기,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저기, 브란테 백작?”
갑자기 허둥지둥하는 율리카의 태도에 레너드도 당황했다. 그러나 율리카는 레너드는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마르델에게 달려갔다.
“마르델!”
“오, 이게 누구야! 나의 육촌 동생님. 마침 잘 왔군. 황성엔 작위가 없으면 들여보내 주질 않는다는데, 동생님과 같이 들어가면…….”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요? 따라오세요!”
잔뜩 화가 난 율리카가 마르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자리를 떴다.
근위병들 보는 앞에서 그와 다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성 벽을 따라 빙 돌아, 인기척 없는 곳으로 오고 나서야, 율리카는 마르델을 돌아보며 다그쳤다.
“황성은 함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내 발로 내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는 건가?”
“어차피 작위도 없으시잖아요?”
“하! 작위?”
흠칫.
분노가 묻은 마르델의 비아냥에, 율리카의 몸이 순간 굳었다.
마르델이 율리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율리카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두어 번 뒷걸음질을 치니, 어느새 벽이 등에 닿았다.
마르델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서서, 다른 손으로는 율리카의 턱을 움켜잡았다.
“작위, 그거 뭐 어렵다고. 동생님과 결혼하면 결국 나한테 떨어지는 거 아닌가?”
“……차, 착각도 유분수로군요. 누가 당신과 결혼한다고 했나요?”
“동생님 의견이 뭐 중요하겠어. 가문의 뜻이 그렇다는데. 안 그런가?”
율리카는.
그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브란테가 누구도 율리카가 백작위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브란테가가 작위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 멋대로 그 작위를 누구에게 주는 것이 안전한 것인가 이미 입을 맞춘 후였다.
율리카의 아버지는 이미 황가에 미운털이 박혔으니 무리였고, 양위의 형태로 작위를 넘겨주면 황후의 견제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 또한 무리다.
결국 그들은 율리카를 또래의 친척과 혼인시켜, 그 작위를 브란테에 남게 하려 한 것이다.
“동생님도 나쁠 것 없잖아. 나 아니면 가문에 남은 총각이라고는 마흔 다 된 할아범뿐이라는데.”
마르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킥킥대며 웃음을 흘렸다.
“손 치우세요. 소리를 지르겠어요.”
“어디 질러 봐. 나도 궁금한데? 가문 사람들이 내가 널 덮쳤다고 변론할까? 아니면 결혼할 사이였다고 변론할까?”
마르델의 끈적한 손길이 율리카의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감싸 잡았다.
율리카는 불쾌함과 공포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시에, 자신을 위해 변론하지 않을 가문 사람들이 떠올라 죽을 만큼 괴로워졌다.
자신은.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왜 여전히 약한 존재인가.
마르델이 입이라도 맞추려는 듯, 율리카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입 벌려.”
마르델이 그렇게 말한 순간.
“이 꽉 무십시오.”
옆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크악!”
당황한 마르델이 돌아본 순간, 그의 얼굴에 주먹이 곧장 꽂혔다. 마르델은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처박혔다.
그러나 그는 감히 반격할 생각을 못 했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한 남자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르델에게 주먹을 휘두른 은발의 남자는, 그 위압감과는 전혀 맞지 않는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떨고 있는 율리카에게 말했다.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따라와 본 것인데, 실례가 되었을까요?”
레너드의 그 나긋한 목소리에, 율리카는 긴장이 풀려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