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2화 (132/156)

* * *

“여기, 따뜻한 차입니다.”

율리카를 다시 황성으로 데려온 레너드는, 멍한 표정의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제야 율리카가 퍼뜩 고갤 들어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페레스카 경.”

율리카가 의연한 양 입꼬리를 올려 웃었으나, 레너드는 어쩐지 그것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르델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죠?”

“정중히 설득하여 돌려보냈습니다.”

정중하게, 근위병들을 불러서 말이다.

예상대로 강한 이에겐 약하고 약한 이에겐 강한 성격이었는지, 마르델은 큰 마찰 없이 찍소리도 않고 물러났다.

“친척이라 하던데, 사실입니까?”

“맞아요. 제 육촌 오라버니……, 래요.”

율리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 들었습니다. 요즘 추근대는 남자들이 많으시다면서요.”

“저랑 결혼하면 작위를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전 남편에게 양도할 생각 없는데.”

“피곤하시겠네요.”

“피곤해요.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 해 봤거든요. 결혼하지 않은 다른 작위 소유자들은 이런 일, 흔치 않잖아요?”

남자는 결혼한다고 해도 부인에게 작위를 넘기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남편에게 작위를 양위하는 게 암묵적인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자녀가 남편의 성을 따르므로, 그렇게 해야 작위 계승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저들에게 여자는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걸까요.”

율리카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겨우 이런 일조차 경께 의지해야 하는 제가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요. 저도 마마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여동생은 백작을 부러워하던걸요.”

레너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에 율리카가 뜻밖이라는 듯 고갤 들었다.

“저를요?”

“학문적 지식도 훌륭하시고, 자수며 춤이며 기악이며, 능란한 재주가 많으시잖습니까.”

“그런 건 그냥……, 흔한 재주잖아요?”

“아시잖습니까. 그 흔한 걸, 마마께서는 못 하십니다.”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도 백작님께서 수놓으신 자수를 제게 자랑하더군요. 어떻게 그리 잘하는지, 자신은 죽을 만큼 노력해도 못 따라 하겠다고요.”

“그런……, 겨우 자수인걸요.”

율리카가 뺨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는 겨우, 검이겠지요.”

“겨우, 검…….”

“그러니 좀 더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셔도 됩니다, 백작님. 옳지 못한 건 저들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율리카는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는 늘 그녀를 계집이라 얕잡아 보았다. 잘하는 게 하나 없으니, 그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며 윽박질렀다.

그 긴 세월,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다. 고고한 자존심과 고집으로 약한 자신을 감춰 왔다.

그러나 자신이 아버지 앞에 움츠러들 이유가 무엇일까.

“경께서는 마마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율리카가 작게 미소 지으며 레너드를 마주 보았다.

그 미소에, 레너드 역시 안심한 듯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전 그분의 하나뿐인 오라비이니까요.”

* * *

사교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며, 브란테 백작가에도 황성 주최 파티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브란테가의 사람들은 에스코트를 마르델에게 맡기라며 율리카를 종용했다.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에스코트를 부탁할 상대도 없었다.

‘부탁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인간이야 많지만…….’

아마 에스코트를 청한 것만으로 백작위를 따 놓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괜히 분란과 소문을 만드느니, 마르델에게 맡기는 게 나을지도.

결국 파티 당일, 율리카는 마르델과 함께 황성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율리카는 최대한 싸늘한 표정으로 마르델에게 경고했다.

“지난번과 같은 무례한 일은 두 번 다시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그땐 내가 성급했습니다.”

마르델이 손을 휘저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율리카의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은 참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떠먹여 줄 밥을, 급한 성미를 못 참아 밥상을 엎을 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마르델로서는 이런 어린 여자애한테 굽신대며 휘둘려야 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그 일은 좋게 좋게 넘어가고,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냅시다, 동생님.”

마르델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율리카는 인상을 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갤 돌려 마차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마차는 해 질 녘의 거리를 가로질러 황성에 도착했다. 서둘러 나온 덕분에 홀은 아직 한가했다.

“이야……, 여기가 황성이구만. 작위가 있으면 이 크고 화려한 곳을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거잖습니까?”

마르델은 도착하자마자 율리카의 에스코트는 잊고 황성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율리카는 당황하여 마르델의 팔을 잡고 꾹 잡아당겼다.

“체통을 지키세요, 좀. 당신은 브란테가의 일원으로 여기 참여한 거라고요.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할 생각인가요?”

“응? 좀 둘러봤다고 뭐 먹칠씩이나. 촌놈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지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다들 날 보는지 어찌 압니까? 황제한테 차인 여자가 잘도 황성 주최의 파티에 왔노라 쳐다보는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마르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일부러 율리카의 자존심을 깎아내릴 심산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다들 동생님을 힐난해도 나는 동생님 편입니다. 같은 가문 사람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의지할 건 집안사람이지요.”

심지어는 율리카를 위해 주는 척, 그녀를 무시하고 억압했다.

율리카에게는 익숙한 대화였다. 줄곧 아버지로부터 당해 온 일이기도 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불과 며칠 전, 레너드에게 들었던 말과는 천지 차이다.

심지어 한때 정적이었던 헬레나마저 자신을 치켜세워 주는데, 같은 가문의 남자들은 율리카를 찍어누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하긴, 그래야 내가 얌전히 작위를 내놓을 테니까.’

지금껏 손쉽게 쥐고 흔들어 온 율리카 브란테라는 여자는, 분명 함부로 대할수록 고분고분해져 작위를 내놓을 테니까.

“그러니 동생님도 제게 좀 다정하게 구세요. 제가 실수 좀 했다고 그렇게 야박하게 구시다니, 그러니 소박을 맞는 것 아닙니까.”

마르델이 그 퉁퉁하고 느끼한 손을 들어 율리카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러자 율리카는 재빨리 잡고 있던 마르델의 팔을 놓고,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죠?”

“……예?”

율리카의 반응이 뜻밖이라, 마르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희 가문의 몰락은 집안 남자들이 썩은 동아줄에 집착한 탓이죠. 제가 그걸 수습하고 작위를 찾아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으셨나요?”

율리카가 미간을 좁히며 쌀쌀맞게 말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쿵쾅 뛰었으나,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그리고 호칭에 주의하세요, 마르델 브란테. 백작저에서라면 아량으로 이해해 드리겠습니다만, 여긴 황성입니다.”

마지막 말을 하기에 앞서, 율리카는 일부러 강하게 보이려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리 못 배운 티를 못 내어 안달을 하다니, 가문의 수장으로서 수치스럽습니다.”

“못 배운 티라니……!”

마르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가문 서열에서 한참 밀려나, 시골에서 농노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자였다.

율리카와 결혼하여 백작위를 얻는다 한들 가문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되리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호화로운 삶만 영위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가문 남자들의 작당 모의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도, 동생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오라비인데, 그 무슨 막말을.”

“그 혓바닥은 ‘백작님’이라는 말은 배우질 못한 모양이로군.”

“큭……!”

율리카에게 비아냥대며 모욕을 줄 줄만 알았지, 자신이 모욕적인 언사를 듣게 될 줄 몰랐던 마르델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말로 이기질 못하니 당장 폭력이라도 행사하고 싶은 듯,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율리카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나 감히 여기서 주먹질은 못 할 것이다. 사방에 깔린 기사들이 백작에게 손찌검을 한 마르델을 즉시 체포할 테니까.

“그대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한 나의 실수입니다. 격이 떨어져서 더는 함께하기 어렵겠군요. 기왕 들어오셨으니, 전 잊으시고 파티나 즐기다 가시죠.”

율리카가 마르델에게서 돌아서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귀족분들을 보고 귀족의 품위도 좀 배우시고.”

그간 마르델이 해 왔던 비아냥과는 차원이 다른 폭격이다.

결국 율리카는 마르델을 두고 자리를 떴다. 마르델만 홀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았다.

마르델은 새빨개진 얼굴로 이를 갈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막상 율리카가 자신을 두고 떠나 버리니, 크고 화려한 분위기에 짓눌려 한없이 소심해질 뿐이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비웃는 것만 같아, 마르델은 큰 소리로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 * *

흥미진진하네.

2층 발코니석에서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던 레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율리카 브란테, 강단이 좀 생겼나.’

레너드는 그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지난번과 같은 사태가 생기면 끼어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율리카는 저 혼자 어떻게든 싸웠고, 해냈다.

그녀를 속으로 조그맣게 응원하던 레너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꼭 여동생을 응원하는 기분이네. 헬레나는 혼자 척척 다 해내는 아이라 이런 기분 잘 몰랐는데.’

마침 율리카는 헬레나와 동갑이기도 하고 말이다.

“뭘 보고 그렇게 웃으셔요?”

그때 아고트가 레너드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레너드가 퍼뜩 고갤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응, 아무것도 아냐.”

아, 참. 여기도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지. 그런 생각에 레너드의 미소가 조금 더 밝아졌다.

“폐하와 마마께서 준비가 다 끝나셨다고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래. 곧 갈게.”

“그나저나 진짜 뭘 보고 웃으신 거예요?”

“아……, 낯선 사람이 보여서 말이야.”

레너드가 에둘러 말하며 다시 아래층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푸근한 미소가 일순 다시 차갑게 식었다.

‘……브란테 전 백작?’

율리카가 자리를 떠나고 없는 아래층에서는, 율리카의 아버지가 마르델을 다그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하긴, 들어오지 못할 것도 없지.

공식적으로야 그는 범법자가 아니니까.

오늘 파티는 황성 주최라고는 해도 가벼운 사교 모임이다. 발레르 측근이었던 다른 귀족에게 부탁해 동행자로 참여하는 거야 얼마든 가능했다.

“아……, 브란테 백작님의 아버님이시네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고트도 아래층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전 백작은 한참이나 마르델을 다그치더니, 그의 팔을 끌고 율리카가 떠난 방향으로 이동했다.

“저거……, 불길한데.”

“네?”

“브란테 백작에게 가는 모양이야. 같이 간 그 남자, 전에 백작을 성희롱했던 적이 있었거든.”

“히익, 네에?!”

아고트가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어쩌지. 난 이제 폐하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당장은 끼어들 수 없겠지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예의 주시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레너드의 불안한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곁에 선 아고트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아, 그래.

여기, 상대를 때려눕힐 만큼 강한 애가 또 있었지.

“아고트.”

“네, 도련님.”

레너드가 아고트의 양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아고트와 눈을 마주쳤다.

아고트는 언제나 미소 짓는 레너드가 그토록 비장한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는 듯했다.

용을 잡을 때조차 그런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부터 네게 아주 중요한 지령을 맡기려 하는데, 할 수 있겠니?”

심지어 남에게 싫은 소리 못 하는 그가, 자신에게 명령을 하다니.

이건 받들어야만 한다. 다른 선택지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뭐든지 맡겨 주세요! 멋지게 해내겠습니다!”

레너드의 말에, 명령 마니아인 아고트가 눈을 반짝 빛내며 소리쳤다.

용을 잡아 오라는 명령이라 해도 따를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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