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율리카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용 방에 들어섰다.
아무도 방에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손을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잘했어……!”
사실 마르델에게 좀 쏘아붙였다고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차피 가문 사람들의 꼭두각시일 뿐.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부리긴 해도, 결국 빈 수레였다.
그러나 그런 인간도 율리카를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자신은, 그런 남자를 상대로도 강하게 대꾸 한 번 못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작은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래. 내가 저 멍청한 놈보다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참아야 해? 가문의 수장은 나잖아.”
더는 가문의 남자들이 자신을 함부로 하게 둘 이유가 없다.
율리카는 마르델에게 쏘아붙인 그 작고 사소한 반격만으로도 자신감을 얻었다.
그 한 걸음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무섭고 힘든 시도였으니까.
율리카는 카우치에 앉아 통쾌함에 떨리는 몸을 만끽했다.
겨우 이 정도에 통쾌함을 느낄 정도로, 그녀에게 가문의 억압은 크고 무서운 것이었다.
“좋아. 조금 이따가 나가서 그 멍청한 마르델이 혼자 얼마나 지질하게 구는지나 구경해야지.”
오늘 파티의 성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택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행한 무례를 이유로 마르델을 당장 내보낼 것이다.
한껏 자신감이 고양된 율리카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때, 휴게실에 또 다른 이들이 찾아왔다.
“여기 있었구나, 율리카.”
“……아버지?”
바로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 뒤로 억지로 끌려오는 표정의 마르델이었다.
“아버지께서 이 파티엔 어떻게 오신 거죠? 초대장도 없으셨을 텐데.”
“다 방법이 있지. 그간 가문을 이끌어 온 내가 그 정도 처세도 없을 리가.”
아버지가 거들먹거리며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잘난 척하듯 말했지만, 사실 율리카도 방법 정도는 추측 가능했다. 그녀가 질문한 의도는 방법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수장인 저의 허락도 없이 초대받지도 않은 자리에 왜 나오셨느냐 물은 겁니다.”
“……허락?”
아버지의 싸늘한 비난의 시선이 율리카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율리카가 온몸을 바짝 굳혔다.
잡아먹을 듯한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니, 방금까지의 결심이 덧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율리카는 제 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되는데.’
꾸욱, 율리카가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틀어쥐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야 해.’
알지만.
자꾸만 몸이 굳는다.
그런 율리카를 보며 그녀의 아버지는 뱀처럼 웃었다. 네까짓 게 그럼 그렇지 하는 우월감이 그를 지배했다.
“아무래도 오래 끌 일이 아닌 것 같아 무리해서라도 파티에 나온 게다.”
“……오래 끌 일이 아니라니, 뭘 말이죠?”
“너희 두 사람의 혼인 말이다.”
뭐?
율리카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가 아니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지팡이 위에 양손을 포개어 올려놓고 바닥에 짚은 채, 짓누르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너희 둘의 약혼을 발표할 작정이다. 지금이 아니면 이만한 사람 모으기가 쉽겠느냐.”
“누구 마음대로요?”
“뭐라고?”
“전 마르델과 결혼하겠다는 말, 한마디도 한 적 없습니다. 싫어요.”
“가문의 결정에 반하겠다는 거냐?”
“가문의 일원인 아버지께서는 지금, 수장인 제 의견에 반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율리카가 물러나지 않고 따져 물었다.
몸에 힘을 주지 않으면 떠는 게 티가 날 정도로 두려웠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호랑이 같은 기세로 율리카를 노려보던 그녀의 아버지도,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눈도 못 마주치던 것이…….’
이게 다 그 건방진 황후 때문이겠지.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황제며 황후와 어울리다 보니, 멋모르고 날뛰는 거겠지.
그런 생각에, 그는 자신의 딸이 한없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백작위를 받았든, 아니 황후가 되었다 해도, 자신은 반드시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존재라 생각할 테니까.
“언제쯤 쓸모를 다 하나 했더니, 끝까지 쓸모없는 것……!”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잡았다.
율리카는 그 손에 쥔 지팡이를 보고 ‘히익’ 숨을 들이켰다.
이미 아버지에게 몇 번쯤 손찌검을 당한 기억이 있는 그녀로서는, 폭력 앞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감히 네가 이 나를 무시하고……!”
아버지의 지팡이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틀렸어!’
반항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율리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고백할 게 있습니다!”
휴게실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방에 있던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입구에는 아고트가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마치 발언권을 얻으려는 듯,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선.
“……고백?”
저 메이드가 뜬금없이 끼어들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건가. 율리카의 아버지가 이마에 완고한 주름을 새겨 넣은 채 중얼거렸다.
아고트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척척 걸어오더니, 율리카의 곁에 섰다. 그리고 율리카를 바라보며 외쳤다.
“브란테 백작님!”
“네, 네?”
“사실 오래전부터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네에?!
율리카의 아버지와 마르델이,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은 최대 크기로 활짝 벌린 채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건 율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카가 말문이 막혀 ‘어, 어억’ 하는 소리만 내고 있자니, 아고트가 그제야 깜짝 놀라며 고갤 저었다.
“아, 참! 제가 아니라! 저 사람이요! 저 사람이 백작님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아고트가 휴게실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아고트에게 고정되어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옮겨졌다.
입구에는 언제부터인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의 기사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에쉬 가론?’
율리카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얼마 전 오르랑드의 출정식 때 보았던, 흑기사단의 에쉬 가론이다.
‘흑기사단은 얼굴로 뽑는다’는 소문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우수한 외모를 자랑하며, 에쉬는 느린 걸음으로 율리카에게 다가왔다.
“백작님. 한참 찾았습니다. 제 에스코트도 마다하시고 이런 곳에 숨어 계시다니요.”
에쉬가 능청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율리카는 당황했으나, 눈빛을 쏘아 보내는 아고트를 발견하고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 다들 날 이렇게 도와주는데 내가 물러설 수는 없어……!’
율리카는 다시금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전 절대로 마르델과 결혼 안 해요, 아버지.”
눈을 질끈 감고, 옆에 선 사람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외쳤다.
“전 이분과 연애 중이니까요!”
“……그 사람과 말이냐?”
얼이 빠진 아버지의 목소리에 율리카가 눈을 뜨고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아고트가 ‘으잉?’ 하는 표정으로 율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다급하게 잡는 나머지, 에쉬가 아닌 아고트의 손을 잡아 버린 것이다.
“아, 아뇨! 이분이 아니라!”
율리카가 파드득 놀라 손을 떼고는 다시 에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분이요! 이쪽과 연애하고 있어요!”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하군. 어디 감히 나를 속이려고……!”
율리카의 아버지가 으르렁거리며 에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달달 떠는 율리카와 달리 에쉬는 능청스러운 미소 그대로였다.
그는 향기가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율리카의 아버지, 전 변경백을 향해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인사를 드릴 계획은 아니었습니다만, 저 에쉬 가론, 백작님과 서로 알아 가는 중에 있습니다.”
……뭐랄까.
그것은, 오로지 잘생김으로 개연성을 만들어 낼 것 같은, 그런 화사한 표정과 다감한 목소리였다.
율리카의 아버지는 물론, 마르델도 잠시 에쉬의 얼굴에 홀릴 정도로.
그러나 아버지는 재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율리카에게 호통치듯 말했다.
“가당치 않다! 네게 마르델보다 더 적합한 남편감이 어디 있다고!”
“가론 경을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제가 왜 마르델과 결혼할 수 없는지.”
율리카가 마르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려 외쳤다.
“저는, 못생긴 남자는 싫습니다!”
마르델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기세에 눌린 양 카우치에 풀썩 주저앉았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고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바로 옆에 에쉬 같은 미남을 세워 두고 저런 소리를 하면 신뢰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네……, 네가 감히……!”
율리카의 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분노와 당혹감에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말문이 막히면 으레 그랬듯, 그는 지팡이부터 찾았다.
그러나 율리카가 더 빨랐다. 그녀는 제 아버지가 지팡이를 잡기 전 그의 지팡이를 빼앗아, 검을 쥐듯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더는 아버지 뜻대로는 안 됩니다. 전 아버지의 인형이 아니에요.”
율리카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지팡이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리쳤다.
빠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두 동강이 났다.
율리카의 아버지에게는 권위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중한 지팡이가.
“안 돼!”
그리고 그 지팡이는.
율리카에게는 부당한 폭력과 억압의 상징이기도 했다.
부러진 지팡이를 주우려 바닥에 주저앉은 아버지를, 율리카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전력으로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고 숨이 찼다.
‘겨우 이 정도의 남자인 것을.’
허둥대며 조각난 지팡이를 그러모으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율리카는 씁쓸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가론 경.”
“네, 백작님.”
“여기 두 남성분들을 당장 백작저로 모셔다드릴 것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율리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에 비해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율리카의 아버지도, 마르델도, 그녀가 한 말의 의중을 알면서도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린 소녀는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다는 걸, 그들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에.
* * *
헬레나가 아고트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파티가 끝난 이튿날 티타임에서였다.
“이럴 수가! 내가 그 현장에 있었어야 했는데!”
헬레나는 그 통쾌한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통탄했다.
“내가 남장을 하고 찾아가서, 백작의 애인이라고 말할걸!”
“아니, 세상만사 다 무료하시다는 분이 그런 건 또 아쉬워하시네요.”
로만이 품위 없이 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마마보다는 제가 갈 걸 그랬습니다. 제가 그래도 백작님과 제법 통하는 사이 아닙니까.”
“로망 씨는 패션도 얼굴도 안 되어서 탈락이에요.”
“아니! 너무하군요, 아고트 양! 그리고 로망이 아니라 로만입니다!”
로만이 벌컥 화를 냈지만, 아고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두 남자에게는 가문의 수장을 농락하려 한 죄로 석 달간 자택 연금의 처분이 내려졌대요. 그 덕분에 브란테가 사람들도 대혼란인가 봐요.”
“그렇겠지.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고 실컷 찔러 댔는데, 갑자기 송곳니를 드러내고 반격을 해 오니.”
헬레나가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좀 아쉬워요. 그 둘 말고도, 그 말도 안 되는 결혼 추진에 가담한 사람들을 다 처벌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가문 전체의 반발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게 더 효과적일 겁니다.”
로만이 아고트의 의문에 대해 설명했다. 헬레나도 긍정의 의미로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아직 율리카의 가문은 입지가 굳건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그녀에게서 작위를 이양받으려 그 난리를 피운 거겠지.
‘하지만 그 멍청한 것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얌전한 고양이로 있었을 사람을, 화가 난 호랑이로 각성시켰으니…….’
한동안 두고 볼만하겠다.
그 오만한 전 변경백이 바닥을 설설 기는 꼴을 꼭 한 번은 봐야 할 텐데 말이다.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는걸.”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인생, 왜 이렇게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