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새로운 세계
몸이 나른했다.
새삼 골똘히 생각해 보니 요즘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헬레나는 침대에 베개를 세워 기대어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헬레나의 혼잣말에, 커튼을 열던 아고트가 생긋 웃었다.
“마마께서는 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항상 바쁘신걸요.”
“아니……, 오늘의 ‘하기 싫다’는 평소의 ‘하기 싫다’랑 좀 다른 느낌이야.”
뒹굴, 몸을 옆으로 돌려 누우며 헬레나가 말했다.
“오늘 원로분들과의 만남이 신경 쓰이셔서 그런 걸까요?”
“아, 맞다. 그거, 오늘이었지.”
오늘은 귀족 원로들과의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정사에서도 손을 뗀 지 오래된 원로들이니만큼, 만나 봐야 나눌 얘기가 뭐 있겠나. 대부분 잔소리와,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뿐이다.
즉, 오늘 헬레나는 잔소리를 듣기 위해 제 발로 모임에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원로들은 대부분 발레르 파였고.’
강경이든 온건이든, 과거에는 발레르가 강하게 권세를 쥐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니 발레르를 몰락시키고 마리안느를 내쫓은 자신이 얼마나 미울까?
“으아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
황후란 왜 이렇게 귀찮은 일이 많단 말인가.
결국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하기 싫다’를 발산하며, 헬레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원로들과의 만남은 호수가 내다보이는 대접견실에서 치러졌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노인들은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전부터 내어 온 간식에 달다, 싱겁다, 딱딱하다, 무르다 하는 투정부터 늘어놓았다.
상석에 앉은 헬레나는 그저 그린 듯한 미소만 유지한 채 그 투덜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 뺨에서 경련 일 것 같다.’
마리안느는 대체 어떻게 본인 성격과 다른 그 순진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죽기 전에 그것만큼은 배워 두었다면 좋았을걸.
‘물론, 가르쳐 달라고 해도 가르쳐 줬겠나 싶지만.’
옛날을 추억하며, 헬레나가 허공으로 시선을 보냈다. 입가에 어쩐지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작년 겨울, 폐하와 함께 오르랑드에 함께 다녀오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원로 중 대장 격인 가르말 선대 공작이 드디어 말을 걸어왔다.
헬레나는 다시 얼굴에 힘주어 미소를 지으며 가르말 원로를 바라보았다.
“네,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도 활약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응? 무슨 얘길 하려고 칭찬을 늘어놓지.
이 인간들의 칭찬이란 당의정과 같은 것이다. 달달하게 달래 놓고선 쓴소리를 마구 내뱉겠다는 선전 포고와도 같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원로가 긴 수염을 손으로 쓸며 탐탁잖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마의 실력이야 제국에 모르는 자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이제는 자중하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동감입니다. 이제 검은 그만 놓으시고 내조에 힘쓰셔야죠.”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되셔서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겠으나, 큰 권력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마마.”
으음……, 역시.
시작됐군. 잔소리 융단 폭격.
“전 황후이기도 하지만, 폐하께서 친히 봉작하신 폐하의 기사이기도 합니다.”
헬레나가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설득하듯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들은 토론을 벌이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네 대답은 알 바 없고, 우리가 하는 얘길 들어, 라는 생각일 뿐.
“어떤 자리의 책임이 더 무거운지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할 때입니다.”
“수련병들이며 기사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히 보기에 좋진 않습니다, 마마.”
“그렇군요. 고견, 감사합니다.”
헬레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인사로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다.
어차피 원로들은 정치에 직접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고 서둘러 끝내는 게 상책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녀 앉혀 두고 ‘우리 때는 어림도 없는 짓이었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릴 늘어놓으려는 것뿐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 인간들이 나보다도 훨씬 후손들인데.’
500년 전 사람인 자신보다 고리타분한 소리뿐이라니.
요즘 어린 것들은 다들 왜 이럴까. 슬슬 말세인가.
“무엇보다 마마께는 가장 큰 임무가 있지 않으십니까.”
헬레나가 자신보다 늙은 ‘어린 것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원로 가르말이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헬레나가 고갤 갸웃하며 그 말을 받았다.
“검에 재능 있는 후학의 양성 말인가요?”
“아니……, 그쪽이 아니라요. 양성 말고 양육 말입니다, 양육.”
“양육이요?”
“어서 회임을 하셔서 후계자를 낳으셔야죠.”
……으악.
언젠가 그 얘기가 나올 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벌써?!
“저……, 혼인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넘었을 따름입니다.”
“벌써 1년이 훌쩍 넘은 거지요. 아직도 소식이 없으시다니, 이는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폐하도 이른 나이에 황위에 앉으셨으니,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서두를 필요는…….”
“무슨 한가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후계자 자리를 비워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원로 가르말이 호통을 치며 말했다. 헬레나는 결국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눈을 찡그렸다.
으아, 뭐야. 이 할아버지 무서워.
“레나투스에서 그레이로 황가가 바뀐 것도 후계자가 없어서였습니다. 그런 일을 또 만들 수는 없지요.”
아니, 그게 뭐 어때서!
그레이로 바뀐 후에도 제국이 번영했으니, 된 거 아닌가?!
황가를 그레이에 넘긴 장본인인 헬레나는 괜히 발끈해졌다.
설마 이미 죽은 ‘단테’까지 이 잔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폐하께서 황비를 얻어, 황비에게서 첫 자식이 나오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폐하께서 황비를 맞으실 리가 없는데요.”
“지금이야 두 분 금실이 좋으니 그렇겠지만, 황후께서 계속 회임을 하지 못하시면 사정이 달라지지요.”
……하긴.
카이사르 본인의 의지는 둘째치고, 슬슬 그의 주변에도 황비를 맞아서라도 자식을 낳으라며 그를 재촉하는 이들이 늘어나겠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헬레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해! 라는 주변의 강박이 부담스럽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헬레나의 심장을 꾹 누르는 듯한 불안도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걸까?’
자신의 심장엔 크루세흐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
자신뿐이 아니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다.
그런 두 사람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는 ‘용’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진 않을까?
‘난 죽은 후에도 용 때문에 다시 환생했고, 별별 일을 다 겪었잖아. 내가 낳은 아이는, 그런 일 없이 무사히 자랄 수 있을까?’
그래.
정말 불안한 건, 그런 것이다.
자신의 아이는…….
……행복할 수 있을까?
* * *
“피곤해 보이는군.”
웃음기가 서린 카이사르의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헬레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옆을 보니, 카이사르가 턱을 괴고 엎드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헬레나는 한 손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 보여요?”
“오늘 원로들과 만난 자리가 영 불편했던 모양이지?”
“뭐, 늘 그렇죠. 잔소리만 잔뜩 들었어요.”
“큰일인데. 내일은 내 차례거든.”
카이사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내게 조언해 줄 말은 없나?”
“뭐, 그냥 가끔씩 고개를 끄덕끄덕 해 주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밖에는…….”
그러나 한 귀로 흘린다고 해도, 이미 들어 버린 이야기는 작은 찌꺼기라 해도 가슴이 남는다.
한참 말이 없던 헬레나는 카이사르와 눈을 마주쳤다.
“폐하.”
“응?”
“아이, 원하세요?”
“……응?”
카이사르가 웃는 건지 놀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원로들이 뭔가 쓸데없는 바람을 넣은 모양이군.”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요.”
“헬레나는 어떻지?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
아이를 ‘맞이한다’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헬레나가 그 생소한 표현에 말문이 막힌 사이, 카이사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가 생겨서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건 아무래도 여자 쪽이지. 그러니 난 헬레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야.”
“다들 폐하의 아이를 보고 싶어서 안달인데, 폐하만 시큰둥하시네요.”
“아이 때문에 헬레나가 아프거나 힘들다면, 내게는 큰 의미가 없어. 난 무엇보다 헬레나가 우선이니까.”
헬레나가 몸을 빙글 돌려,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자세를 바꾸며 머리가 헝클어지니, 카이사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이젠 익숙한 그 손길에 얌전히 맡긴 채, 헬레나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전생의 부모님은 좀, 이상했어.”
오랜만에 듣는 헬레나의 반말에 카이사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프리 레나투스 말인가?”
카이사르는 역대 레나투스 중 가장 많은 황비를 두었던 황제를 떠올리며 물었다.
“어머니는 아예 기억도 안 나. 정말 어릴 때 날 버리고 도망갔거든. 아버지도……, 뭐랄까, 사업 동업자 같은 느낌이었고.”
명성과 이름을 빌려줄 테니, 돈과 편의를 내놓아라.
그런 거래를 걸 수 있는 상대였을 뿐, 부녀간의 정 같은 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부모님들은 아니야.”
페레스카 공작과 공작 부인.
조건 없는 애정과 신뢰. 그런 것들이 낯설던 헬레나는, 처음엔 그들의 애정을 껄끄러워하거나 의심했다.
자식이 똘똘해 보이니 잘 키워서 뭔가 받아먹으려는 속셈이겠지. 말 좀 알아듣는 애라 좋아하지만, 수틀리면 언제든 버리겠지.
그러나 성인이 다 되도록,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을 의심하며 그 애정을 온전히 받아 주지 못한 과거가 후회스러울 정도로.
“아이라는 건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거잖아. 근데 그게, 심지어 살아 있어. 말도 하고, 감정도 있어.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걸까?”
두렵다.
자신이 전생의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될까 봐.
하지만 그런 두려움 이상으로…….
“그래도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말이야. 우리 부모님 같은……, 그런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
헬레나가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한결같은 온도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를.
“아이, 태어나면 좋겠다.”
헬레나의 작은 속삭임에, 카이사르가 대답하듯 헬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페레스카 공작에게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게 참 많아.”
카이사르가 농담하듯 말해서, 헬레나도 마주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