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2화 (135/156)

* * *

이튿날 아침, 카이사르는 잠든 헬레나보다 먼저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침실을 나서기 전, 헬레나의 자세도 불편하지 않게 해 주고, 이불도 다시 다독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기상에 시종들도 후다닥 세숫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른 방으로 이동해 준비를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로위나가 방에 찾아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래. 간밤에 별일 없었지?”

“네. 폐하, 오늘은 원로분들과…….”

“하아. 알고 있어. 벌써 피곤해지는군.”

오늘은 내가 피곤해질 날이로군. 카이사르는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어제 유독 피곤해 보이던 헬레나의 얼굴이 떠올라 로위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브란테 백작과 그리트가 헬레나의 몸 상태를 살펴본 게 언제쯤이었지?”

“폐하와 마찬가지로, 오르랑드에서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럼 얼마 전이군.”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요즘 유독 피곤해 보여서 말이야. 며칠 전에 아고트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그러잖아도 요즘 유달리 나른해하는 것 같다고도 하고.”

“환절기 감기라도 걸리신 걸까요?”

“글쎄. 어지간하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라…….”

카이사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뭐랄까……, 아프다기보다는, 평소랑 뭔가 좀 달랐단 말이야…….”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원래 좀 시큰둥하고, 만사 귀찮아하고, 그런 사람이잖아?”

로위나가 대답 대신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어쩐지 측은해하는 시선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보면서.

카이사르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좀 감정적이랄지……. 옛날얘기도 자주 하고, 솔직하게 속내를 얘기하기도 하고. 어제는 심지어 원로들 잔소리에 수긍하기도 하고 말이야.”

“마지막의 그건 정말 수상쩍네요. 원로들 그렇게 싫어하셨는데.”

“그렇지?”

로위나도 그제야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오르랑드에서도 대형 마수를 못 잡았다고 꽤나 분노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엔 어지간히 스트레스가 쌓였구나 하고 넘어갔다만, 뭐든 미련이 별로 없는 헬레나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하긴 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직감 같은 것이 그녀를 스쳤다.

“엇, 설마…….”

“응? 왜? 뭔가 알고 있나?”

“아뇨, 아직은요. 좀 더 확실해지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로위나가 딱 잘라 말했다.

말투며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으나, 그녀를 곁에 오래 두고 겪은 카이사르는 알 수 있었다.

안경 너머 그녀의 눈이 이채를 띠며 반짝이는 것을 말이다.

* * *

헬레나는 원래 달거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큰 전투를 치르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달거리를 건너뛰곤 했다.

밴달리움에서 마수 토벌을 했던 때에도, 카이사르가 율리카와 약혼을 했던 시기에도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크루세흐와 한창 싸우던 해에는 달거리를 한 달보다 거른 달이 더 많았다.

전생에서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헬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었다.

황후궁의 사람들도 그녀의 불규칙한 달거리 주기를 알았다. 때문에 고작 두 달 달거리를 거른 것으로 호들갑을 떨기엔 시기상조라 여겼다.

더구나 이번엔 오르랑드에 마수 토벌을 다녀왔다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으니 말이다.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마마.”

그러니 궁정 의사의 확신에 찬 그 진단에 다들 얼마나 놀랐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기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누구보다도 헬레나가 가장 크게 놀랐다.

“네? 뭘 해요?”

헬레나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동시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 있던 시녀장 셀즈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마마……! 이 셀즈, 마마를 곁에서 모시면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죽어 마땅합니다! 죽여 주십시오!”

“아니……, 죽이긴 왜 죽여. 장본인인 나도 전혀 몰랐는데.”

헬레나가 착잡한 표정으로 셀즈를 바라보았다. 헬레나는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전히 파악이 안 됐다.

“아직 초기이니 알아채기 어려우셨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달거리도 불규칙하신 편이었고요.”

나이 지긋한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은 애틋한 시선으로 헬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그나마 방 안에서 유일하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로위나였다.

하긴, 뜬금없이 의사를 불러 건강 진단을 하자고 한 것도 로위나였으니, 그녀는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로위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셀즈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본성에 사람을 보내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세요. 공작저에도 사람을 보내시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혼란스러워하던 셀즈도 그제야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나갔다.

그리고 몇 초 후, 밖에서 떠나갈듯한 시종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헬레나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왜, 왜들 저래?”

임신을 한 건 자신인데, 왜 저들이 더 난리인가. 자신은 아직도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상황인가 싶어 혼란스러울 뿐인데.

“그러게요. 아직 임신 초기라 조심하셔야 하는데, 마마 놀라시게 저리 조심성 없이 굴다니.”

로위나가 헬레나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물론 핀트는 약간 어긋나 있었으나.

“그나저나 마마.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말했잖아요. 원래 달거리가 불규칙하다니까요?”

“그 외에도 징후는 여럿 있었을 텐데요. 더구나…….”

“더구나?”

“외람된 말씀이지만……. 폐하와 함께 침소에 드셨던 시기를 계산해 보아도…….”

“아아…….”

어렵게 꺼낸 로위나의 질문에 헬레나가 짧게 탄식하며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그게 뭐랄까……, 사나흘에 한 번씩이면 계산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요…….”

헬레나의 작은 속삭임에, 그제야 로위나도 ‘아아…….’ 하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이들의 불타는 신혼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함께.

그사이 종이에 주의 사항을 빼곡하게 적은 의사가 몸을 일으켜 헬레나에게 다가왔다.

“일단 간단히 주의 사항을 적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시녀장을 따로 불러 당부해야 할 것들을 알려 주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직 초기이시니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검술 훈련은 당분간 못하겠네요.”

헬레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 답이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노골적으로 좁히며 말했다.

“검술 훈련이 다 뭡니까? 당분간 산책도 자제하셔야 합니다.”

“네에?!”

헬레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그 정도로 조심하라는 의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분간은 깨지기 쉬운 유리 다루듯 조심조심하셔야 합니다. 걸을 때도 사뿐사뿐히, 특히 더 조심하십시오.”

“아니……, 원래 그 정도로 조심해야 하는 건가요?”

헬레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의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임신을 해 봤어야 알지.

헬레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아직은 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배가 아프지도 않았고, 몸무게가 불지도 않았으니까.

‘여기 진짜 살아 있는 뭔가가 들어 있다는 건가?’

나름대로 각오는 했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사실만 되새기게 되는 기분이었다.

‘난 정말로……,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맞는 건가?’

시종들은 환호성을 외치고 난리인데, 헬레나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 * *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불과 어젯밤 막 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눈 터였는데,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런 소식이라니.

“어떻게 하루 만에 아이가 생기지? 혹시 원로들의 잔소리에 마법적인 힘 같은 게 실려 있는 것인가……?”

“하루 만에 생겼을 리가 없잖습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비틀거리는 카이사르를 보며 레너드가 충고했다.

참고로 해밀턴은 이미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울고 있었다.

“감격입니다! 감격뿐입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두 분이 결혼하신 것도 꿈만 같았는데, 회임이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자작님도 정신 잘 붙드십시오. 일이 이렇게 밀렸는데 벌써 죽으면 안 되죠.”

“아니, 자네는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가 있지?”

카이사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레너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헬레나를 가장 아끼는 그녀의 오라버니였다. 그가 이 상황에 이렇듯 냉정한 게 이해가 안 됐다.

“일단 두 분 다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한숨 돌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레너드는 실로 침착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가 넘치는데도, 계속.

“……침착은 자네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헉, 어느새! ……앗 뜨거!”

레너드가 화들짝 놀라 티 포트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 그렇지. 이 방에 제정신인 인간은 하나도 없군. 카이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르랑드에 다녀오신 후 어지간히 돈독한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해밀턴이 짓궂게 미소 지으며 카이사르를 놀렸다.

카이사르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갤 갸웃했다.

“해밀턴. ‘어지간히’ 돈독한 시간 같은 건 없어. 우린 시도 때도 없이 돈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거든.”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오르랑드에 계셨을 땐…….”

“물론 그때도 포함해서다.”

“……남의 나라에 마수 토벌을 하러 가서 말입니까?”

“천막은 처음이라, 헬레나가 굉장히 즐거워하더군…….”

카이사르가 그 시기를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증언에 해밀턴이 경악했다.

“설마 야영 때 말입니까?! 마수 토벌한 직후였잖습니까! 아니, 두 분은 지치지도 않으셨습니까?!”

“스승님을 충분히 만족시켜 드리기엔, 내 체력이 아직도 부족하단 것을 깨달았네……!”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크윽’ 하고 통한에 찬 소리를 내뱉었다.

저것이 기사 열 명과 차례로 연속 대련하여 전승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어, 해밀턴은 경악했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부인에게 가야겠어. 레너드, 따라와.”

“네, 폐하.”

“아니, 잠깐만요! 가긴 어딜 가십니까! 오늘 원로들과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벌써 원로들이 모여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해밀턴이 양팔을 저으며 문 앞을 막아섰다.

카이사르가 팔짱을 끼고 서서 고갤 삐딱하게 기울였다.

“지금 감히 황제의 앞길을 막는 건가?”

“원로들 삐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게 구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아니, 지금 황후가 회임을 했는데 원로들이 문제인가! 내 아내가! 지금! 내 애를 가졌다고!”

“그 애는 열 달이 지나야 나옵니다, 폐하! 원로들은 당장 만나셔야 하고요!”

“폐하, 자작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원로들을 뵙고 이동하시죠. 마마께는 제가 먼저 가 있겠습니다.”

레너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 친위기사가 내 곁을 비우겠다는 말을 뭐 그리 당당하게 하는 건가.”

“전 오라버니이지 않습니까.”

“논리라고는 전혀 없는데, 그럴싸하게 들려서 짜증 나는군.”

카이사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로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궁으로부터 온 그녀의 등장에, 세 사람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반면 로위나는, 입구에 옹기종기 서 있는 세 남자를 둘러보고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로위나는 카이사르가 오늘 원로들과 일정이 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

그러나 그라면 회임 소식을 듣자마자 황후궁으로 달려올 것이다. 미룰 수 있는 일정이면 상관없지만, 원로들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폐하. 황후궁에 가실 생각이시라면, 원로분들과의 일정부터 끝내고 이동하십시오.”

“오오, 에버그린 양!”

“큭, 로위나 자네마저……!”

해밀턴은 동지를 만난 듯 활짝 웃었고, 카이사르는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로위나는 손이 베일 듯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평소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혹시라도 일정 팽개치고 오시면 가만두지 않으시겠다 하셨습니다.”

“이 황성에 내 편은 하나도 없군……!”

아내의 말은 차마 거역할 수 없었던지, 카이사르가 괴로워하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당장이라도 황후궁으로 달려가 헬레나를 번쩍 안아 들고 다섯 바퀴쯤 돈 후에 키스를 퍼부어 주고 싶은 내 소망은 어쩌란 말인가!”

“폐하. 그건 일정과 상관없이 임신 초기의 마마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로위나가 무덤덤하게 안경을 추어올리며, 카이사르의 소망을 싹둑 잘라 버렸다.

“좋아. 원로들에게 얼굴만 비치면 되는 거겠지?”

“네. 오래 끄실 필요 없죠.”

“해밀턴. 당장 원로들에게 안내해.”

“예! 알겠습니다!”

해밀턴이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카이사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나섰다.

약속된 시각보다 약간 이르긴 했으나, 카이사르는 원로들이 모여 있는 방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예상보다 이른 카이사르의 등장에 원로들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들의 인사를 받을 정신도 없이 뚜벅뚜벅 자리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은 후 입을 열었다.

“인사치레는 생략하도록 하지. 어차피 그대들이 내게 요구할 것이야 뻔하니까 말이야.”

“네?”

“어서 빨리 후계자를 낳으라는 것 아닌가?”

카이사르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원로들이 난색을 표하며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헬레나에 이어 카이사르에게도 그 문제를 성토하려 했었다.

그러나 혹시 그 문제로 황제의 심기가 불편한가 싶어, 다들 곤란한 표정이었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나마 원로 가르말이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혼인하신 지 벌써 1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슬슬 불안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폐하.”

“핫, 쓸데없는 걱정이군.”

카이사르가 턱을 괴고 앉아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 딴에는 헬레나가 회임했으니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란 의미였으나, 원로들은 카이사르의 표정이 살벌하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폐하. 물론 황후마마를 향한 폐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마와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낳는 게 정 어려우시면, 하루라도 빨리 황비를 들이시는 편이…….”

카이사르가 속으로 가볍게 웃음을 삼켰다.

그 속내를 모를 줄 알고. 다들 가문 내에 황비로 올릴 여자들이 있는 것이다.

마리안느처럼 일단 황비로 밀어 넣었다가, 먼저 아들을 낳게 하든지 해서 권력 한번 잡아 보겠다는 속셈이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 둬야겠군. 난 황후 외에 다른 아내를 들일 생각이 없다.”

“하오나, 폐하.”

“황비의 질투와 권력욕에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그대들이 잊지 않았다면, 그런 것을 내게 제안할 수야 없지.”

카이사르가 낮고도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그제야 원로들도 입을 다물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병사했다. 그러나 당시 황비였던 마리안느가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 그 후로도 카이사르는 마리안느에게 여러 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그녀와의 알력 다툼으로 오랫동안 힘들었다.

카이사르는 헬레나에게, 그리고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고난을 안겨 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주제는 이제 의미가 없다. 황후가 회임을 했으니 말이야.”

“……예?”

원로들이 커다래진 눈으로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태어날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다. 그러니 후계자 문제로 더는 나와 황후를 괴롭히지 말도록.”

이번만큼은 황제에게 강하게 의견을 밀어붙이자 합의를 보았던 원로들은,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군주로서 그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게 되어 몹시 기쁘군. 자, 그러면 논의할 건이 해결되었으니 난 먼저 일어나겠다.”

당황한 원로들을 내버려 둔 채, 카이사르는 실로 후련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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