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3화 (136/156)

* * *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영지를 지키는 일에 몰두하던 페레스카 공작 부인은, 헬레나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한걸음에 수도로 올라왔다.

심지어 그녀를 앞서 온갖 선물이 먼저 도착했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서 그 많은 것들을 구해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것은 홍차 대신 드실 차입니다. 임부에게 좋다는 음식들도 가져왔으니, 확인하시고요. 아, 그 상자는 지금 열어 볼 것이니, 방으로 옮겨 주시겠어요?”

공작 부인은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보낸 선물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를 가르쳤다.

셀즈와 시종들이 그녀의 명령에 따라 허둥지둥 선물들을 정리했다.

“마마께서 아무리 식욕이 좋으셔도 이렇게 많은 양은 못 드세요.”

공작 부인의 곁에 선 아고트가 부엌으로 이동하는 선물의 양을 보며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그 말에 공작 부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찌 마마만 드시라고 가져왔겠니. 황후궁 사람들 모두 즐기라고 가져왔단다.”

“네?!”

“일전에 마마께서 한동안 깨어나지 못하셨을 때에도 황후궁 사람들 모두 마음고생이 많았잖니.”

공작 부인이 생긋 미소 지었다. 아고트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그런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헬레나의 어머니이다. 배포가 남다르군.

“참, 이것은 네 것이란다, 아고트.”

공작 부인은 막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종이에 싼 작은 물건을 꺼내 아고트에게 건넸다.

아고트는 따로 선물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깜짝 놀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여, 열어 봐도 되나요?”

“물론이지.”

아고트는 조심스럽게 종이 포장을 열었다. 안에는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 들어서 사 보았단다. 수도에서는 뭐가 유행하는지 알 길이 없어 내 취향대로 골라 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헉……, 마음에 들다마다요! 저까지 따로 챙겨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요!”

“지난번 검투 대회에서 우승했잖니. 그 축하 선물이란다.”

공작저의 고용인들 모두, 이 성격 드세고 팔팔한 아이가 황후궁에서 사고나 치지 않을까 걱정만 하던 터였다.

그 소식을 듣고선 다들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하던지.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는 시골의 저택에 모처럼 활기가 돌아, 공작 부인도 꽤나 흡족했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마께서도 챙겨 주셨는걸요.”

“그 애는 분명 포상금이나 주고 말았겠지.”

“헉, 정확하시네요.”

“후후, 그럴 줄 알았지.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돈을 좋아했거든, 그 아이. 풍족하게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을까?”

공작 부인이 한쪽 뺨을 감싸 쥐고선 옛날 일을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어머나, 마마.”

등 뒤에서 들리는 헬레나의 목소리에, 공작 부인과 아고트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편안한 옷차림에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헬레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짐을 나르던 시종들도 일제히 손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헬레나가 손짓을 하니, 그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하러 나오셨습니까? 제가 곧 올라가려 했는데요.”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요.”

헬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공작 부인이 ‘어머나…….’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런 말은 좀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무뚝뚝하고 무심한 성격이었으니.

‘폐하의 애정을 듬뿍 받다 보니, 이젠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된 걸까.’

이만하면 결혼 잘했다고 봐도 되려나.

“마마를 기다리시게 할 순 없으니, 이제 슬슬 올라갈까요?”

공작 부인이 헬레나의 곁으로 다가가자, 헬레나도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왔다.

함께 계단을 오르며, 헬레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릴 때 정말 제가 돈을 밝히고 그랬던가요?”

전생 때 버릇 어디 안 갔구나.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났던 것일까.

돈 밝히는 공작가의 어린 영애라니, 얼마나 웃겼을까.

“우후후후후!”

새빨개진 얼굴로 묻는 헬레나의 말에, 공작 부인은 그저 소리 내어 웃기만 할 뿐이었다.

* * *

“그거 아십니까? 마마께서는 갓난아이일 때에도 울거나 보채지 않으셨다는 거요.”

황후궁의 응접실. 페레스카 공작 부인은 메이드가 따르는 차가 찻잔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지켜보며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랬던가요?”

“네. 정말 울음이 짧은 아이였지요.”

그랬겠지.

헬레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은 태어나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어? 내가 왜 다시 태어났지?’ 하고 자각했었다.

자각한 후로는 요구 사항이 있을 때만 울고, 해결이 되면 울음을 그쳤다. 마냥 울어 봐야 기운만 빠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걷는 것도, 말도 빠르셨지요. 레너드가 하나를 가르쳐 열을 알았다면, 마마는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 아셔서 우리 부부를 놀라게 했었답니다.”

“아……, 아하하. 제가 그랬었던가요. 기억이 안 나네요.”

기억이 안 날 리가.

헬레나는 빨개진 얼굴로 어색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둥 하는 소릴 해서 걱정 끼친 적도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불효막심한 짓이었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부모라는 존재를 신뢰할 수 없었고, 애정도 없었다. 그냥 친절한 아줌마 아저씨 정도의 느낌밖엔 없었다.

“그런 마마의 아이라니.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전 너무나 설레고 궁금합니다.”

공작 부인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해맑은 반응에, 레너드가 어머니를 닮았구나 생각하며 헬레나가 쓰게 웃었다.

“절 닮으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저 키우면서 많이 힘드셨잖아요.”

“전혀요. 마마는 정말 알아서 잘 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손이 안 가는 아이였는걸요.”

그런 것치고는 걱정을 많이 샀던 것 같은데.

헬레나는 걸핏하면 공작 부인이 자신을 끌어안으며 마치 주문처럼 ‘언젠간 사는 게 재미있어질 날이 올 거다.’라고 읊던 것을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헬레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다. 살 만큼 살아 봐서 이미 안다, 사는 게 재미있을 리 없다, 그렇게 체념하면서.

‘그렇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이 옳았어.’

살아 보니.

살아남아 보니,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지금 자신은 사는 게 제법 즐거웠다. 재미있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오히려 걱정이었답니다. 내가 이 비범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이 아이가 원하는 걸 찾게 해 줄 수 있을지.”

“어머니처럼 완벽한 부모도 그런 걱정을 하시나요?”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건 없답니다.”

공작 부인이 생긋 미소 지었다.

“누구든 아이가 태어나야 비로소 ‘처음으로’ 부모가 되지요.”

“하지만 절 키우셨을 땐 이미 완벽한 부모이셨잖아요. 레너드 오라버니를 훌륭하게 키운 경험이 있으셨으니까요.”

“아이란 한 명 한 명이 다 다르고 특별한 존재인걸요. 몇 명을 낳아 키우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는 다시 ‘처음으로’ 부모가 되는 거예요.”

레너드에게 필요한 것과 헬레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르니까.

그렇구나.

자신이 태어난 순간, 이들 역시 ‘헬레나’의 부모님으로 다시 태어났던 거로구나.

‘신기한 기분이야.’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에게도 이런 고민과 서투름이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저도 제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헬레나가 뺨을 붉히며 물었다.

“뭐가 걱정인가요. 제 딸아이는, 하겠다고 결심한 일은 뭐든 해내는 아이인걸요.”

공작 부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딸을 향한 끝없는 애정과 신뢰를 감추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보고 배울 수 있는 부모가 존재한다. 어려울 때 찾아가서 묻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했다.

결코 변하지 않을 절대적인 애정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그것만으로도 헬레나는 큰 안도를 느꼈다.

* * *

회임 사실이 황성 전체에 알려진 후, 헬레나가 어디를 나서든 사람들은 그녀의 시중을 들려고 달려들었다.

“본성에 가려 하십니까? 잠시 기다리십시오.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응?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걸, 마차를 타라고?”

“계단은 위험하니, 저희가 양쪽에서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이거 묘하게 연행되는 기분이니까, 그만두면 안 될까.”

“좋은 것만 보셔야 하니, 당분간 자수 수업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둔 자수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을 참 곱게도 하는구나.”

“혹 더우시면 부채질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목이 마르십니까? 로터스 산의 수원에서 떠왔다는 물을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여봐라! 마마께서 하품을 하셨다! 당장 침실을 정돈하도록!”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이게 더 귀찮아!”

결국 헬레나는 폭발했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왜 스트레스를 더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이른 아침, 어느 귀족가에서 헬레나를 위해 진상한 스트레스 완화용 향초를 들고 황후궁을 찾아온 카이사르가 폭발한 헬레나를 보며 쓰게 웃었다.

헬레나는 카이사르가 오거나 말거나 카우치에 팍 하고 엎드렸다.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 모습이 실로 생소하여, 카이사르는 도리어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의사가 많이 움직이지도 말고 푹 쉬기만 하라 했다 하여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저도 편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이러다 돌겠어요!”

“혹시 검 훈련이 하고 싶은 건가? 그거라면 나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을 것 같은데…….”

“검 훈련이 아니어도 좋아요! 황후궁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어요!”

“이런. 설마 헬레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카이사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파핫 하고 웃었다.

분명 그녀는 숨만 쉬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최강의 게으름뱅이였는데 말이다.

그때 셀즈가 방에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했……, 아니, 마마! 아무리 날이 풀렸대도 그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계시다가는……!”

셀즈의 잔소리에 헬레나가 다시금 울컥했다. 다행히 헬레나가 폭발하기 직전, 카이사르가 셀즈를 향해 재빠르게 검지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셀즈도 눈치가 있는지라, 얼른 입을 다물고 얌전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저렇게 계시면 안 되는데.’ 하는 시선으로 방 안을 쳐다보았지만.

카이사르는 헬레나와 셀즈 양쪽의 불만을 불식시키듯,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말없이 헬레나에게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다들 헬레나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겠지.”

“알아요. 그래도 저 역시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다고요.”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나?”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용에 따라서는.”

카이사르의 무릎을 베고 엎드려 있던 헬레나가, 빙글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워 카이사르와 눈을 마주쳤다.

“황후궁에서 도망치고 싶어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소망이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이사르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사실 그도 짐작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제 슬슬 헬레나가 숨 막히는 생활 패턴에 한계를 맞이했을 거라고 말이다.

‘귀찮다, 게으르게 살고 싶다 하면서도 도무지 게으르게 살지 못하는 게 내 아내의 성격이라.’

이 모순이 또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카이사르는 헬레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헬레나가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

“네? 도망가게 해 주실 건가요?”

“물론 혼자서는 안 되고.”

“기사들과 시종들 줄줄이 거느리고 도망치자는 의미라면 화내겠어요.”

“그건 도망이 아니지.”

카이사르가 악당처럼 씨익 미소 지었다.

“지금 당장 나랑 둘이서 몰래 황성 밖에 나갔다가 올까?”

의사와 이미 상의를 마친 후라는 얘기는 쏙 빼놓고, 카이사르가 마치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계획인 양 속삭였다.

헬레나가 그 유혹을 어찌 모르는 척 넘길 수 있을까.

헬레나 역시 카이사르의 악당 같은 미소가 옮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래요! 나가요, 같이!”

그러고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이 맛에 자꾸 이것저것 해 주고 싶은 거지.

카이사르는 몹시 만족하며, 어리광쟁이가 되어 버린 자신의 아내를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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