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4화 (137/156)

* * *

테이블 위에는 은은한 푸른색이 도는 편지 봉투가 놓여 있다.

셀즈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 든 편지지에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안녕히, 여러분. 나는 황후로서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나의 행복을 찾아 떠난다. 그대들도 행복하기를!

추신 : 저녁에는 돌아올 테니, 절대 소란 피우지 말 것.

왜 벗어던지면 안 될 것을 자꾸 벗어던지려 하십니까!

그토록 어른스럽고 냉정했던 셀즈는, 편지를 손에 꾸깃 움켜쥐고 그녀답지 않게 포효했다.

“마마아아아아아!”

같은 시각, 본성에 있는 황제 집무실에서도 해밀턴의 포효가 울려 퍼져, 마치 하울링과 같았던 둘의 하모니는 황성 사람들에게 꽤 오랫동안 회자되곤 했다.

* * *

“그러고 보니 아까 편지에는 뭐라고 남긴 거야?”

수도의 번화가. 헬레나는 드레스가 아닌 활동하기 편한 원피스와 단화 차림이었다.

카이사르가 대탈출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헬레나는 이것을 보고 ‘갑자기 결정된 탈출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뭐든 어떠랴. 어쨌든 숨 막히는 과보호와 잔소리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헬레나는 카이사르에게 반말로 질문했다.

그녀의 반말이 그리웠던 카이사르가 얼굴 한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편지?”

“셀즈가 걱정하지 않게 쪽지를 남겨 두겠다고 했잖아.”

“저녁엔 돌아올 거라고 써 뒀어.”

“음, 평범하네. 뭔가 꽤 길게 쓰는 것 같았는데.”

그 외에도 이것저것 써 두긴 했지. 카이사르는 장난스레 남겨 두었던 편지 내용을 함구한 채 그저 짓궂게 미소 지었다.

“아, 황성에서 나온 거 진짜 오랜만이다. 살 것 같아.”

느린 걸음으로 대로변을 걷던 헬레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 탓에 이목이 집중됐다. 성인 여성이 밖에서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생소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가벼운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곱슬거리며 떨어지는 풍성한 은발과 뽀얀 얼굴이,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긴 했다.

“나도 이렇게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는 건 오랜만이군.”

“그렇지?”

“응. 헬레나의 반말도 오랜만이고.”

“침대 위에서는 자주 듣잖아.”

“밖에서 듣는 것과는 또 달라서 말이야.”

“하여튼 이상하다니까. 반말 듣는 걸 왜 그렇게 좋아하……, 앗!”

카이사르와 눈을 마주치며 걷다 보니, 헬레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무리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 무리와 좁은 길에서 부딪칠 뻔한 것을, 카이사르가 재빨리 헬레나를 품으로 끌어당겨 보호했다.

“엇, 죄송!”

무리들은 낄낄거리며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하고는 멀어졌다. 젊은 난봉꾼들인 모양이다.

그들이 멀어진 후에야 헬레나를 품에서 놓아주며 카이사르가 물었다.

“괜찮아, 헬레나? 어디 안 다쳤어?”

“응. 하아, 놀랐네.”

헬레나가 한쪽 뺨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어할 생각에,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갈 뻔했지 뭐야.”

“응……, 그래 보여서 재빨리 나선 거야.”

카이사르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 상대방의 안전을 위해 나섰다는 건 아니다. 그저, 임신한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게 할 수 없었을 뿐이지.

그 증거로, 카이사르는 헬레나 몰래 뒤쪽을 돌아보더니, 엄지로 목 근처를 끽 긋는 시늉을 했다.

“뭐 해?”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기이한 행동에 그를 쳐다보고 질문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갤 저었다.

“아무것도.”

“정말?”

“응. 먼지를 털어 낸 것뿐이야.”

그렇게 답하며, 카이사르는 헬레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보다 뭘 하고 싶어? 일단 뭐부터 할까, 우리?”

카이사르의 질문에 헬레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그러면……, ‘사탕달당’에서 파는 쇼콜라 케이크가 먹고 싶어.”

헬레나의 입에서 유명 디저트 체인점의 이름이 나오니, 카이사르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입맛 참 한결같아.”

“임신한 후로는 홍차고 초콜릿이고 입에도 못 대게 한단 말이야. 몸에 좋은 것만 먹으라고, 식탁 위가 푸른 초장이라고.”

헬레나가 미간을 찡그리며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설마 너까지 먹으면 안 된다며 잔소리할 생각이야?”

“스트레스를 받느니, 하루 정도는 마음껏 먹고 싶은 거 먹는 게 더 낫겠지.”

어차피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거침없이 반말을 하는 아내의 부탁을 거부할 재주가 없다.

“자, 그럼 가 보실까. 사탕달당을 거덜 내러.”

* * *

카이사르가 등 뒤를 돌아보며 목 근처를 엄지로 긋는 시늉을 했을 때.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파르페 가게 앞에 서 있던 호크는, 입 안에 있던 파르페를 꿀꺽 삼키며 투덜댔다.

“아 너무하시네. 내가 호위로 따라 나왔지, 양아치들 참회시키려 나온 줄 아시나…….”

호크의 불만에 곁에 서 있던 레너드가 작게 웃었다.

“안 나와도 되는 걸 따라 나온 건 자네였지 않나.”

“그야 페레스카 경이 혼자 심심하실까 봐 그런 거죠.”

“심심하지 않네.”

“그러면, 외로우실까 봐?”

“그거라면 자네는 별 도움이 안 되고.”

망토 아래로 검을 고쳐 잡으며 레너드가 가볍게 말했다.

호크는 ‘예이, 예이. 그러시겠죠.’ 하고 건성으로 답하며, 남은 파르페를 한꺼번에 입 안에 훅 집어넣었다.

“어차피 우릴 따돌릴 생각으로 내리신 명령일 거야. 호위로 따라붙는 거, 영 탐탁지 않아 하셨거든.”

“하여튼 조심성이 없으신 분들이시라니까요.”

“조심성을 논할 분들이셨던가.”

“아, 아까 그 양아치분들 말입니다.”

호크가 장난스럽게 히죽대며 말했다.

“어휴,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 슬슬 가 볼까요.”

호크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며 말했다. 레너드가 고갤 끄덕인 후, 둘은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오래 가지 않아 두 사람은 문제의 양아치 무리와 마주쳤다. 군것질을 파는 노점에 몰려서서 낄낄거리며 음식을 마구 집어 먹고 있었다.

값을 제대로 치른 게 아닌 듯, 노점상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일단은 레너드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양아치들은 총 네 명이다. 그들은 무해한 표정의 레너드에게 일절 경계심을 품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요?”

“아까 보니 좁은 대로변에서 마구 뛰어다니던데, 위험합니다. 아까 한 여성분과도 부딪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응? 무슨 상관이야? 당신, 그 여자랑 뭐 아는 사이라도 돼?”

“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아까 미안하다고 한 것 같은데. 뭐가 이렇게 끈질겨?”

“그건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었잖습니까. 무엇보다 공중도덕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레너드가 정중하게 조목조목 설명했지만, 그럴수록 양아치들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정중한 태도를 정중하다 보지 못하고, 자신들보다 ‘약자’라고 판단해 버리는 탓이다.

“하! 이 양반, 오지랖도 참.”

“아, 기분 잡쳤네. 주인 양반. 돈은 저 양반한테 받으쇼. 저 인간 때문에 돈 낼 기분 똑 떨어졌으니까.”

애초에 돈 낼 생각도 없었으면서, 양아치들은 킬킬대며 능청을 떨었다.

레너드는 깊은 한숨을 쉰 후, 품에서 금화를 꺼내 먼저 노점상에게 냈다. 이래저래 돈은 못 받게 됐구나 싶어 절망하던 노점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돈을 받았다.

놀란 건 양아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게 큰돈이 나왔다는 데 놀란 눈치다.

“나, 나으리께서 이들을 대신해 돈을 내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양심이 있는 노점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노점상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낸 돈은 이들에게 다시 돌려받을 겁니다.”

“뭐? 무슨 수로? 애초에 우린 그만한 돈도 없거든?”

양아치 녀석 중 하나가 낄낄대며 비아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억!”

레너드가 망토 아래 숨겨 두었던 검을 뻗어, 녀석의 배를 쿡 찔렀다.

검집째 찔렀으니 검에 관통되거나 하진 않았으나, 양아치 녀석은 즉시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아야 했다.

나머지 녀석들이 깜짝 놀라 다시 레너드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검을 다시 망토 아래로 숨긴 뒤였다.

“그만한 돈이 없을 거라는 건 저도 압니다.”

그 와중에도 레너드는 무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머지 금액은 참회의 시간을 거치기 위한 위자료 같은 것입니다.”

“참회……, 뭐?”

쯧쯧쯧.

멀리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호크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공중도덕을 잘 지키겠다고 반성만 했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갔을 것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스멀스멀 살기를 퍼뜨리는 레너드를 보며, 양아치들도 슬슬 그 사실을 후회하고 있긴 했다.

“남의 동생을 다치게 할 뻔했으면 제대로 사과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니, 그 동생이 이런 양아치들 때문에 다치고 자시고 할 사람이냐고.’

호크가 뺨을 긁적거리며 생각했다. 양아치들의 얼굴이 서서히 퍼렇게 질려 가는 게 보였다.

그래, 그래.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긴 하는구나.

뭐……, 이미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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