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성에 도착하니 이미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레나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측근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진찰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의사의 입에서 떨어진 진단명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입덧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헬레나가 아닌 카이사르를 쳐다보고서 말이다.
헬레나와 카이사르는 동시에 멍한 표정이 됐다. 한참 만에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이 몸이 회임을…….”
“그럴 리가 없잖아요!”
헬레나가 깜짝 놀라 버럭 소리쳤다.
“잊은 모양인데, 임신한 사람은 폐하가 아니라 나예요.”
대체 왜 이런 일로 억울함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헬레나는 의사를 향해 간절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의사는 결코 실수로 한 말이 아니라는 듯 표정이 진지했다.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를 진찰한 것도 전데요.”
“그런데 왜 입덧을 폐하가 하신다는 거죠? 제가 아니라?”
“종종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임부가 아니라 그 남편이 입덧을 대신 하는 경우가 말입니다.”
뭐 그런 황당한 경우가!
헬레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그러잖아도 슬슬 입덧이 시작할 시기인데 아무렇지 않으셔서 의아하던 참이었습니다. 뭐, 별다른 징후 없이 넘어가는 임부들도 많긴 하지만요.”
의사의 설명에, 근처에 서 있던 레너드와 로위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참 다행입니다. 큰 탈이 나신 게 아니라서요.”
“십년감수했습니다. 입덧이라면 뭐, 어쩔 수 없네요.”
“아니, 잠깐만요! 둘 다 이 황당한 일을 두고도 왜 그렇게 침착한 거죠?!”
헬레나는 어쩐지 자신만 당황한 것 같아서 더욱 억울했다.
레너드가 동동거리는 제 동생의 생소한 모습에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마. 모르고 계신 모양인데, 저희 부모님도 그랬습니다.”
“네?!”
“어머니께서 마마를 품으셨을 때 아버지께서 입덧 때문에 꽤 고생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도 얼핏 기억에 남아 있고요.”
이럴 수가!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그렇게 흔한 일이었어?!
모든 설명을 들은 카이사르가 한껏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군. 그러잖아도 부모로서의 덕행을 페레스카 공작에게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다행인 거예요?!”
“다행이지. 아이를 품고 있는 것도 힘들 텐데, 입덧이라도 내가 대신 해 주니 다행이지 않나.”
“엇, 그, 그렇지만.”
“잊었나? 뭐든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엇, 그런가?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이것도 나름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일인가?
……그럴 리가!
“아니, 마음이 그렇다는 거죠. 서로 다른 사람이잖아요? 폐하가 뺨을 맞는다고 제 뺨이 아프진 않다고요!”
“그래? 하지만 출산의 고통을 감하려고 남편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있는데.”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대체……?”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어서 많이 공부했거든.”
카이사르가 ‘어떠냐’ 하는 표정으로 헬레나를 향해 씩 미소 지었다.
머리채 잡을 생각 없으니까 그런 공부는 필요 없다고……!
혼란스러워하는 헬레나를 설득하듯, 나이 많은 의사가 입을 열었다.
“뭐, ‘결혼이란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물리적으로 말이에요. 말이 안 되지 않아요?”
“때로 현상은 상식을 뛰어넘지요. 뭐 어떻습니까. 마마께는 나쁜 일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마마.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전 마마께서 덜 고통받으시게 되어 기쁩니다.”
“저런, 페레스카 경. 친구이자 주군이 겪게 될 고통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제가 곁에서 잘 보좌할 테니, 폐하도 염려 놓으십시오.”
“입덧을 보좌하겠다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등을 두드려 드린다든가.”
“실로 의미 없군.”
카이사르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소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니, 의사는 할 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허락하시면,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처방은 없는 건가요?”
“황후궁의 메이드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마.”
“근데 입덧을 황후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하시잖아요…….”
“뭐……, 푹 쉬시면서, 식사는 소량으로 자주 드셔서 공복을 만들지 마시고, 거부감 드는 음식은 가리시고…….”
그야말로 일반적인 임산부에게 주어지는 주의 사항이 줄줄 나열됐다.
다만 그 주의 사항이 자신이 아닌 카이사르를 보며 나열되고 있다는 게 좀 다른 것뿐.
결국 헬레나는 알 수 없는 패배감과 부끄러움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 *
천장을 향하여 침대에 바로 누운 채, 카이사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헬레나.”
“네, 폐하.”
“내가 헛구역질을 몇 번 하긴 했다만, 일단 임신한 장본인은 헬레나이고……, 그러니까 쉬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헬레나이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안 돼요.”
침대에 걸터앉은 헬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카이사르가 난감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의사에게 황당한 대리 입덧 진단을 받은 후, 헬레나는 카이사르가 불면 날아갈까 안으면 부서질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카이사르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안고 다니겠다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입장이 반대가 됐지.’
카이사르는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뭐, 입덧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한 번쯤은 이렇게 강제 휴식을 취하게 해 주고 싶긴 했어요.”
카이사르의 웃음에 괜히 민망해진 헬레나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몸을 빙글 돌려서 옆으로 삐딱하게 기대어 누워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 어째서?”
“일에 치여 사시니까요. 거기에 더해 입덧까지……. 미안해 죽겠어요.”
“왜 헬레나가 내게 미안하지? 헬레나의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한데. 사실 이게 공평한 것 아닌가?”
카이사르의 말에 헬레나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진짜. 그건 그렇네요.”
“그렇지.”
“어, 어쨌든요. 오늘은 푹 쉬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날 불러요. 내가 처리해도 되는 일은 나랑 해밀턴이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요.”
헬레나가 검지를 치켜들고는 단단히 당부하듯 말했다.
“오늘은 이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 금지예요.”
“정말 필요한 건 다 해 주는 건가?”
“물론이죠.”
“맹세할 수 있어?”
“대체 뭘 시키시려고요?”
“일단은 목이 좀 마른데.”
“정말요? 기다려요.”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주전자가 놓인 건너편 테이블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유리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카이사르가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시는 동안, 헬레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런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
“그렇군.”
“그 외에는 또 뭐 없어요?”
“글쎄……. 좀 더운가?”
카이사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레나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모두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어디선가 부채를 가져와 카이사르의 곁에서 부채질을 시작했다.
“시원하네.”
“그렇죠?”
정말 뭐든 말하면 들어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카이사르는 슬그머니 짓궂은 마음이 동했다.
“잠들 수 있게 토닥토닥도 해 줄 수 있나?”
“네? 어린애예요? ……음, 해 줄 수는 있지만.”
헬레나가 웅얼거리며 답했다.
카이사르가 냉큼 침대에 다시 누우니,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가슴을 손으로 토닥이기 시작했다.
진지한 그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잠들 때까지 토닥여 줄 심산인 모양이었다.
“어서 눈 감아요.”
“헬레나 얼굴이 귀여워서 눈을 못 감겠어.”
“그게 뭐예요. 토닥토닥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군. 별수 없으니, 내 옆에 누워서 토닥여 줘야겠는걸.”
능글맞은 카이사르의 표정에 헬레나의 미간이 슬그머니 좁아졌다.
“흐음……, 왜 제가 폐하께 말려드는 기분이 들죠?”
“뭐든 다 들어준다면서?”
“윽, 그건……, 그렇게 말했지만.”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헬레나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침대 위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그러고는 카이사르와 나란히 누워 그의 팔을 토닥거려 주었다.
시간이 좀 흐르니 분위기에 적응이 된 것일까. 헬레나는 흥얼거리며 자장가를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카이사르는 자신의 코앞에 놓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어서 자요. 그만 쳐다보고.”
“굿나잇 키스 해 주면 정말로 잠이 올 것 같아, 헬레나.”
카이사르가 작게 속삭였다.
잘 생각이 전혀 없구나, 이 인간.
아무리 둔한 헬레나라도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다 해 주겠다는 섣부른 약속 때문에 말릴 대로 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말려든 건지, 알면서 말려 들어간 건지.’
헬레나는 작게 실소한 후, 카이사르에게 몸을 더 다가가 키스했다.
“뺨에도.”
카이사르의 요구에, 헬레나는 그의 뺨과 콧잔등, 눈꺼풀 위에 차례로 입술을 찍었다.
카이사르는 그녀의 입술이 닿는 부위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또 뭐 해 줄까요?”
헬레나가 물었다.
“날 이름으로 불러 줘.”
“카이사르.”
“그리고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면 좋겠어.”
그러면 정말 정말 잠이 올 것 같아, 라며 카이사르가 웃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
그리고 가장 많이 들려주는 말.
헬레나는 망설임 없이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랑해, 카이사르.”
“……나도.”
카이사르가 실로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이 남자는 이 말을 질리도록 들으면서도, 매번 이 말에 감동한 표정이 된다.
마치 그 언어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그 말의 깊이를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오늘의 마지막 부탁이야, 나의 사랑하는 스승님. 나랑 같이 자자.”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분명 오늘은 카이사르를 편하게 쉬게 해 주려던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헬레나는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카이사르의 품에 순순히 기대었다.
이제는 익숙한 그의 체온이 서서히 몸에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폐하 없이 혼자 잠드는 게 더 힘들어졌어요.”
“나와 같군.”
“전엔 혼자 있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는데.”
“그것도, 나와 같고.”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가장 신뢰하는 충신이자 유일한 친우였던 에레즈 그레이마저도, 곁에 두고 깊은 잠을 잔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카이사르의 품에 안긴 이 불편한 자세로도 쉽게 잠이 쏟아진다.
그와 함께가 아니면 어색해질 정도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이 두려움과 염려가 익숙함으로 바뀔 날이 오겠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시간을 걱정했던 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일상이 될 날이 오게 되리라.
그러니 새로 태어날 세계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며 맞이해야지.
무엇보다 그 세계는 자신과 카이사르가 함께 만든 세계이니까.
‘분명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거야.’
두려움이 막연히 찾아왔듯, 기대와 설렘도 막연히 찾아든다.
엉켜 드는 모순된 감정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그저 그저 애틋하다.
헬레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녀가 카이사르를 토닥거려 주던 것이 바뀌어, 어느새 카이사르가 헬레나를 토닥거렸다.
한 번도 닿아 본 적 없는 새벽을 기대하며, 두 사람은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나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