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사랑하지 않습니다
황성 복도를 걷던 단테는, 문득 창가로 다가가 섰다.
내원의 벤치에 에레즈와 웬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리고 앳된 얼굴의 여성은 에레즈가 세 마디 할 때마다 한 번씩 해처럼 웃었다. 웃을 때마다 귀에 걸린 붉은색 액세서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단테는 자신을 따르던 이들 중 보좌관인 스펜서를 손가락으로 까딱거려 곁으로 불렀다.
“저 영애는 누구인가?”
“쿠펠 백작가의 장녀인 레니아 쿠펠 영애입니다.”
“쿠펠?”
귀족 요람을 다 암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단테가 고갤 갸웃하니, 스펜서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르랑드에서 건너온 귀화 가문입니다. 백작이라고는 해도 명예작이라, 요람엔 실리지 않았을 겁니다.”
명예작.
즉, 자녀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없는 당대 작위라는 의미다.
저 여성은 아버지가 백작이라 해도 그 작위를 물려받을 수가 없다. 그녀 개인이 합당한 공을 세워 새로이 봉작을 받게 된다면 또 모를까.
“황성엔 무슨 일이지?”
“다음 달에 오르랑드에 사절을 보내는 문제로 쿠펠 백작이 입성했습니다. 함께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흐음…….”
아.
에레즈가 웃었다.
단테는 눈썹을 으쓱하며 에레즈의 표정을 살폈다.
원체 상냥하고 점잖은 남자지만, 저렇듯 눈매가 곱게 휠 정도로 웃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장 해제된 미소.
“내 특권이라 생각했는데…….”
“네?”
“아니, 아무것도.”
무심결에 내뱉은 혼잣말을 수습하듯, 단테가 고개를 저었다.
“날이 습하니 환기를 시키는 게 좋겠다. 복도 창문을 전부 열어라.”
단테가 점잖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 말에 보좌관인 스펜서가 뒤따르던 시종들에게 재빨리 눈짓을 했다. 시종들은 눈치껏 저마다 창문에 다가가 일제히 복도 창문을 힘껏 열었다.
여러 개의 창문이 동시에 활짝 열리는 것은, 그 모습도 장관이지만 소리도 꽤 요란했다.
내원에 앉아 화기애애한 무드를 조성하던 두 남녀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머나!”
쿠펠 영애가 요란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 가냘픈 몸이 흔들리며, 귀걸이에 햇빛이 다각도로 반사됐다. 붉은색과 노란색과 보라색, 때로 짙은 푸른색까지 여러 가지 색으로 쪼개어지며 귀걸이가 흔들렸다.
에레즈도 그제야 고갤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고 단테를 발견했다.
그는 놀란 기색은커녕 얄미울 정도로 정갈한 표정으로 단테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어머, 어머나, 황제 폐하……!”
반면 쿠펠은 허둥거리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어찌나 허둥대던지, 까딱 잘못했으면 발이 꼬여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단테는 그저 고개만 까딱하여 그 둘의 인사를 받은 후,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듯.
한참 걷던 단테가 스펜서에게 물었다.
“방금 내 심술이 좀 추했나?”
“심술이셨습니까?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스펜서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단테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방금 두 사람, 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젊은 미혼의 공작을 마다할 영애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특히 쿠펠 영애처럼 물려받을 작위도, 뒷배가 되어 줄 가문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뭇 영애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녀들에게 그토록 열렬히 구애를 받고 있는 그는.
‘에레즈 그레이가 마다하지 않을 영애는 과연 누굴까.’
알고 싶다.
알고 싶지 않다.
‘역시, 심술이 맞아.’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만큼의 권력을 쥔 탓에 점점 추해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단테는 죄책감에서 달아나듯 서둘러 복도를 떠났다.
* * *
에레즈는 슬슬 단테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업무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처음엔 보고서를 정리하는 에레즈를 흘끗거리며 쳐다보는 듯했는데, 나중엔 아예 턱을 괴고 앉아 에레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당최 먼저 말을 걸어오진 않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르는 척하던 에레즈도 이제 슬슬 민망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에레즈였다.
“폐하.”
“응.”
“제게 뭔가……, 할 말이 있으십니까?”
에레즈가 쓰게 웃으며 단테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단테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야.”
“네?”
“그 표정이 아니라고.”
“표정이요?”
“어제는 좀 더……, 이렇게 웃지 않았나?”
단테가 양손 검지를 구부려 자신의 눈 위에 덧대며 말했다.
에레즈는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단테에게 답을 듣는 대신, 그녀가 한 말을 찬찬히 되짚어 단서를 모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추론하기로 했다.
‘어제. 어제라면…….’
어제 단테와 만났던 접점이라면 한 번밖에 없었다.
레니아 쿠펠과 내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
“혹시 쿠펠 영애와 관련 있는 이야기입니까?”
“역시!”
단테가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에레즈의 어깨가 흠칫했다. 뭐가 역시라는 걸까. 대체 혼자 무슨 결론을 내렸단 말인가.
“쿠펠 영애와 친한가?”
“누가 말씀이십니까?”
“그대 말씀이다.”
굳이 ‘말씀’이라는 단어를 택한 건 자신을 놀리기 위한 준비 단계인 게 분명하다.
뭘 놀리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만나 인사를 나눈 게 전부입니다. 어제는 쿠펠 백작의 부탁으로 잠시 말동무를 해 주었던 것뿐이고요.”
“그게 전부인가?”
“그 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털어놓아도 되네. 우리는 친우가 아닌가.”
“걱정 마십시오. 맹세코 폐하의 험담 같은 건 안 했습니다.”
에레즈가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는 그렇게 답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네. 혹시 둘 사이에 연애 감정 같은 것이 샘솟지는 않았는가 하는 걸 묻는 거야.”
“전혀요?”
에레즈가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심지어 미간을 찡그리면서.
“하지만 둘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가 굉장히 살랑살랑하던데.”
“살랑살랑은 뭡니까.”
“친우를 속이지 말게, 에레즈. 자네의 웃는 표정이 보통 때와는 전혀 달랐단 말이야.”
단테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에레즈는 조금 전 단테가 손가락을 구부려 보여 주었던 그 이상한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아……, 표정이 문제였던 겁니까?”
“그래. 친우인 내 앞에서도 보여 준 적 없던 표정이었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정말 깜짝 놀랐지 뭔가.”
“뭘 오해하고 계신지는 알겠는데, 잘못 짚으셨습니다.”
“내가 연애 한 번 안 해 봤다고 날 무시하는군.”
“그게 아니라…….”
에레즈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테에게 다가갔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단테는,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레즈를 보며 눈썹을 으쓱했다.
단테의 바로 곁까지 다가온 에레즈가, 만년필을 집어 들더니 단테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애, 실례합니다. 이 펜이 혹시 영애의 것이 아닙니까?”
미소를 머금은 에레즈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르르 녹아 버릴 것만 같다.
단테가 좀처럼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불과 어제 막 처음 발견했던 바로 그 미소. 쿠펠 영애 앞에서 보여 주었던 그 미소 말이다.
“……오오.”
단테는 놀라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어설픈 감탄사를 내뱉었다.
단테의 감탄사에, 에레즈의 얼굴에서 그 미소는 금세 무너졌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후, 펜을 책상 위에 다시 올려 두었다.
“……이런 겁니다.”
“그 표정은 영애들 전용인 건가?”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방금 그대에게 좀 설렜던 것 같다.”
“거짓말 마십시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냐. 진짜 설렜어.”
“진짜 설렌 사람은 자신이 설렜다고 굳이 입 밖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표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법이야. 내 제국의 영애들을 멋대로 농락하다니, 그대의 죄가 깊군.”
“언젠가 폐하까지 농락할 경지에 이르게 되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에레즈가 씁쓸하게 웃어 보인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면 정말 쿠펠 영애와는 아무 관계도 아닌 건가?”
“뭐, 신경은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르랑드 왕가와 미묘한 입장이라,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거든요.”
쿠펠 부인은 오르랑드 국왕의 사촌 누이다. 어쨌든 피가 이어져 있으니, 이용할 가치는 높았다.
에레즈가 쿠펠 영애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그 외엔 없었다.
“그대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건 아니지만, 폐하께 그런 질문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응? 어째서?”
“후계자를 위해서라도 어서 결혼하라 닦달하는 귀족들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신 분 아니십니까?”
“푸하핫! 그것도 그렇군, 참!”
단테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레즈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단테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다소 불만이 섞여 있던 에레즈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결혼이라. 그래, 나도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
“언젠가, 입니까?”
“으음. 지금은 영 생각이 없어.”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자녀를 낳아 잘 키울 자신도 없고, 형제들끼리 자리싸움하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네. 질렸어.”
단테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에레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애정과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되어 알게 된 형제들은, 그녀를 위협으로 여겨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만 했다.
결국 그녀는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하거나 유배 보내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가족에게 염증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도……,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요.”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영애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내가 혼담을 주선해 줄 수도 있네.”
단테가 말했다.
친우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심정이었다.
“마음에 드는 영애라…….”
“오호. 있는 거로군.”
“……없진, 않습니다.”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단테는 흥미진진한 전개에 한껏 고무된 표정이 됐다.
“역시 그랬군! 누구인가?”
“비밀입니다.”
“친우끼리 치사하군. 난 그대에게 뭐든 털어놓고 있는데.”
“말씀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응? 귀족이 아닌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어렵습니다.”
“수수께끼를 내는 것 같구나.”
“제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저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그대의 그 불법적인 미소를 보고도 넘어오지 않는 영애가 있단 말인가?”
단테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에레즈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네요. 도무지 제 농락에 넘어와 주질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매력이기도 하고요.”
“저런……. 힘든 사랑을 하고 있나 보군. 내가 친우로서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에레즈.”
단테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에 에레즈는 웃었다. 단테보다도 더 우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