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2화 (141/156)

* * *

“어째서 내 초상화는 죄다 이런 식인가.”

겨울의 끝자락.

단테는 본성 중앙 계단에 걸리게 될 회화를 살펴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혼잣말에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이 됐다. 형제를 모조리 척살하고 황위에 오른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모양이다.

화가의 심정을 헤아린 스펜서가 단테의 곁에 서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면 당장 고치라 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

“어느 부분을 고치면 될까요?”

“음, 그것이……, 뭐랄까, 전체적으로…….”

단테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난 죽었다. 화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왜 내 초상화는 죄다 용과 함께인가.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초상화일 수는 없는가.”

바닥에 쓰러진 용의 목덜미에 검을 꽂고, 그 위에 발을 척 올린 채 근엄하게 서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단테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단테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아챈 스펜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악룡을 퇴치하신 대업을 굳이 감출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가…….”

하지만 보통 귀족 부인이나 영애들의 초상화는 이렇지 않다.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여, 창가에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감싸인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동화의 삽화에 쓰여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포근하고 간질거리는 그림 말이다.

‘내 후대의 사람들은 날 이런 이미지의 사람으로 기억하게 되는 건가.’

하긴. 그건 죽고 나서의 일인데 알 게 뭔가.

결국 단테는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불만을 잠재웠다.

“그림 자체는 몹시 마음에 든다. 화풍도 묘사도 섬세하구나.”

“가,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문제가 있다면 모델인 내 탓이겠지.”

저것은 뼈 있는 질책인가. 화가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작 단테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그림과 화가가 물러간 후, 스펜서가 단테의 곁에 서서 설명했다.

“새로운 초상화는 연말 파티 전에 계단에 배치될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폐하를 에스코트할 사람 말입니다만, 일단 명단을 뽑아 보았습니다.”

스펜서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단테에게 넘겼다. 단테는 빠르게 내용을 훑은 후, 눈썹을 으쓱하며 스펜서에게 물었다.

“그레이 공이 없군?”

“매번 공작께 에스코트를 맡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안 될 건 없지요. 공작과 혼인하실 생각이시라면요.”

“이런. 혹시 그동안 내가 그의 혼삿길을 막았던 것인가?”

그간 단테는 파티에 참여할 때 쭉 에레즈의 에스코트만을 받았다. 그 탓에 황제가 점찍어 둔 남자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테의 추측이 맞는 모양이다.

“날 도운 공도 크고 하여, 내 파트너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내 총애가 독이 되다니, 안타깝구나.”

그 ‘공’이 단테의 형제들을 몸통과 머리로 분리한 공임을 새삼 상기하며, 스펜서가 헛기침을 했다.

“파티의 파트너 하나 고르는 것도 이리 골치가 아프니, 황제도 못 해 먹을 짓이군. 그냥 자네가 하면 안 되나?”

“전 길고 오래 사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폐하.”

“그럴 생각이면 내 보좌를 맡질 말았어야지.”

“그걸 결정한 후에 생긴 목표라서요.”

“내 탓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럴 리가요, 있을 수도요.”

“그렇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오라.”

스펜서가 대답을 뭉개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에스코트할 이를 서둘러 정해 주셔야 일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귀족이 있으십니까?”

“글쎄…….”

단테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명단을 훑어보았다. 솔직히 에레즈가 아니면 다들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이 들어왔다.

“폐하. 연말 파티에 착의하실 드레스가 도착했습니다.”

골치 아픈 선택을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었던 단테가 반색했다.

“당장 보고 싶군. 가지고 오라 이르라.”

단테의 명령에 시종 몇 명이 드레스 한 벌을 소중하게 받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드레스를 확인한 단테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스펜서도 마찬가지였다. 드레스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는 아니다.

흡사 기사의 갑옷을 연상하게 하는 드레스의 박력 탓이었다.

“역시 내 이미지는……, 저런 식인가.”

단테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저런 옷을 입고 누구의 에스코트를 받으란 말이냐. 내가 파트너를 에스코트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뭐랄까……, 하아, 죄송합니다. 솔직히 반박을 못 하겠군요. 제가 제작 중간에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스펜서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의상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됐다. 저것도 꼬박 한 달이 걸렸는데 언제 준비하겠는가. 재봉사의 의욕을 꺾고 싶지도 않고.”

“뭐……, 어울리실 거 같긴 합니다. 너무 박력이 넘쳐서 탈이지요.”

“음, 에스코트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 어쩐지 혼자 나가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거든.”

단테가 서류를 스펜서에게 휙 넘기며 말했다.

스펜서도 이번만큼은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저런 의상을 입은 황제의 곁에 서서 존재감을 잃어버릴 남자 귀족들이 가여워졌기 때문이다.

“옷은 저걸로 됐고, 액세서리는 언제 도착하지?”

“머리 장식은 내일 도착합니다.”

“머리 장식만?”

“네.”

“다른 것은 없는 건가? 뭔가……, 귀걸이 같은 거라든가.”

“주렁주렁한 거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지.”

‘그렇지’가 아니라 ‘그랬지’인가.

스펜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단테의 속내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단테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는 듯 상쾌한 표정이었다.

“하긴, 저런 의상에 액세서리까지 주렁주렁 달리면 괴상하긴 하겠어.”

단테가 키득키득 웃으며, 더는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 * *

연말 파티가 끝나면 에레즈는 영지 업무차 수도를 떠난다.

때문에 이 시기는 스펜서도 에레즈도 일종의 인수인계 문제로 바빠진다.

사흘째 집무실에 처박혀 내일의 체력을 당겨 써 가며 밤새워 일을 하던 차에, 스펜서가 몽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은 연말 파티에 어느 댁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기로 하셨습니까?”

“안 합니다. 춤 시간이 끝나자마자 곧장 영지로 떠날 작정이라.”

“저런. 잔뜩 기대하고 있던 뭇 영애들이 울겠군요.”

스펜서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하품을 했다.

에레즈가 그런 스펜서를 보며 피식 실소했다.

“폐하를 에스코트할 귀족은 정해졌습니까?”

“아니요.”

“네? 다음 주가 파티인데 아직도?”

“이번엔 아무에게도 에스코트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럴 것이 드레스가 어마어마하게 나왔거든요.”

“어마어마하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춤을 추러 나서는 게 아니라 적장의 목을 베러 나서야 할 것 같은 분위기더군요.”

“아니, 그건 또 왜…….”

“무리도 아니지요. 다들 폐하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무려 악룡을 퇴치한 영웅이 아니던가.

나긋하고 상냥하며 포근한 느낌이라기보다는, 강하고 사나우며 냉철한 느낌이 더 강하니까.

“부채를 쥐고 있는 것보다 검을 쥐고 있는 것이 더 어울리는 분이지 않으십니까.”

“다들 폐하를 오해하고 있군요. 폐하는 부채와도 잘 어울리십니다.”

“공작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국자를 쥐고 있어도 어울린다 말씀하실 분이시잖습니까.”

“그럼 안 어울린단 말입니까?”

“그 국자가 사람 패는 용도라면 동의하겠지만……. 아, 그 서류는 제게 주십시오. 수정할 게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실없는 대화는 다시 업무로 되돌아갔다. 그나마도 오래 가진 않았지만.

에레즈가 건네는 서류를 받으며 스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채 하니까 생각났는데, 폐하께서 귀걸이를 갖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귀걸이 같은 건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귀걸이요? 목걸이나 팔찌가 아니라?”

“그러니까요. 이상하죠?”

이상하다.

액세서리를 원하는 게 이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필 귀걸이인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 그녀는 귀를 뚫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입으실 드레스가 정말이지, 귀걸이는커녕 어떤 액세서리도 안 어울릴 것같이 생겨서.”

“아니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아, 이 서류, 계산에 오류가 있군요.”

“그렇습니까?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 왜 그럴까요. 돌려주십시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어쨌든,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좋은 신호요?”

“자신을 꾸미는 데 영 관심이 없으시던 분이 아닙니까.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내가 나타나셔서 신경을 쓰시는 게 아닐까요?”

마음에 드는 사내?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게 왜 좋은 신호인지 모르겠군요.”

“귀족 원로들도 빨리 결혼하시라 닦달이고, 아직 후계자가 없는 것도 그렇고……. 이크, 여기 이 항목이 빠져서 계산이 안 맞았던 거로군.”

사각사각. 스펜서가 서류를 수정하기 위해 펜을 놀리는 메마른 소리가 방 안에 부스러지듯 퍼졌다.

에레즈는 왠지 그 소리가 자신의 안에서 뭔가 파삭파삭 부스러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 착각이다.

“솔직히 전 폐하께서 그레이 공과 혼인하시면 딱이라는 생각인데요.”

“폐하께서 그럴 마음이 없으신데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하지만 공께서는 마음이 있지 않으십니까?”

“주군을 상대로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진 않습니다.”

에레즈가 불쾌하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레이는 황가와 연을 맺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손에 황족의 피를 묻힌 가문입니다.”

사실상 단테가 황위에 앉은 것은 그레이가 손에 피를 묻혔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이야 단테가 황위에 앉았으니 그 죄를 묻지 않는 것이지, 만약 그레이가 황가와 연을 맺으려 한다면 분명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다.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고.’

단테를 황위에 올리기로 결심했을 때, 에레즈는 그녀의 그림자가 되자고 굳게 결심했었다.

반발하는 귀족들을 막을 방패가 되고, 그녀의 적을 섬멸할 검이 되고, 그 모든 업을 지고 갈 그림자가 되자고.

그것이 이 제국을 위한 일이라 여겼고.

그것이……, 단테 레나투스를 위한 일이라고…….

“제가 폐하께 바친 마음은 연심 같은 게 아닙니다.”

스펜서가 따진 것도 아닌데, 에레즈는 제 발이 저린 사람처럼 굳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다행이랄지, 스펜서는 서류 수정에 빠져 있느라 에레즈를 수상하게 여길 정신이 없었다.

“예, 뭐.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나마 공께서 폐하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인 것 같아서.”

“언젠가 저보다 더 적합한 자가 나타나겠지요.”

“그럴까요. ……아, 확인 끝났습니다. 이번엔 오류가 없을 겁니다.”

스펜서가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갤 들어, 서류를 다시 에레즈에게 건넸다.

에레즈가 말없이 서류를 건네받을 때, 에레즈의 얼굴을 확인한 스펜서가 고갤 갸우뚱하며 물었다.

“엇, 그레이 공. 아무래도 오래 못 주무셔서 탈이 나신 모양입니다.”

“네?”

“얼굴이 창백하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

그녀에게 더욱 적합한 자가 나타날 것이다.

제국을 평안하게 다스리기에 적합한 자가. 레나투스의 영광을 잇기에 작은 오점도 지니지 않은 자가.

그런 자가 나타난다면.

‘나는 나의 소중한 친우이자 주군을 위하여 기꺼이 축하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에레즈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홍차 한 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주 진하게요.”

이 부질없는 상념은 피로한 탓이다.

에레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 뭐든 저지를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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