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3화 (142/156)

* * *

에레즈는 단테에게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지 짧게 고민했다.

물론 본인은 짧게 고민했다고 생각했으나, 답을 기다리고 있던 단테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다.

결국 단테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이상한가?”

“네? 이상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무룩한 단테의 말에 에레즈가 황급히 고갤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그 격렬한 부정이 오히려 긍정을 의미하는 것만 같아, 단테는 체념했다.

“입기 전에도 엄청나다고는 생각했는데, 입고 나니 확실히 과하군, 이 드레스.”

“용을 잡으신 분에 어울릴 만한 위용입니다, 폐하.”

스펜서가 보다 못해 참견하여 말했다. 그러나 단테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춤 시간에 사람이 아니라 용을 잡을 일 있나.”

“사람도 잡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뭐, 됐어. 자리나 지키고 있으면 될 일이니, 옷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나.”

단테는 춤에 서툴렀다.

에레즈에게 간신히 배우긴 했지만, 늦게 배운 데다 애초에 재능이 없어 또래 영애들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다.

더구나 그녀가 누구인가. 형제를 몰살하고 황위에 앉은 자가 아니던가.

그녀에게 쉬이 춤을 청할 간 큰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우십니다.”

에레즈가 뒤늦게 입을 열어 말했다. 너무 늦은 그 대답에 단테가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이군. 그대도 아부를 할 줄 아는가?”

“제가 언제 빈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폐하.”

에레즈가 새삼 심각한 표정으로 반론했다. 곁에 선 스펜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레이 공의 기준은 좀 이상합니다.”

“불경하군. 자네는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앗, 폐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좀 억울해지는데…….”

스펜서가 우물쭈물하며 뒷말을 흐렸다.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 하나가 들어오더니 스펜서를 찾았다.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입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스펜서를 보며, 단테가 피식 실소했다.

“도망쳤군. 운 좋은 녀석.”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대는 어째서 친우의 편을 들지 않는가. 내가 저자에게 괴롭힘 받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인가?”

단테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니, 에레즈가 단테의 귀밑머리를 넘겨 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스펜서 공이 폐하를 괴롭힌다면 진작 제가 처리했을 겁니다.”

그가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 때면, 단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리고 에레즈는, 이런 순간 단테의 얼굴에 떠오르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좋아했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단테의 귓바퀴를 슬그머니 매만지던 에레즈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 실은 제가 폐하께…….”

“폐하. 실례합니다만, 그레이 공을 잠시 모셔 가도 될까요.”

에레즈가 말을 마치기도 전, 어느새 되돌아온 스펜서가 끼어들어 말을 잘랐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에레즈의 눈썹이 으쓱 올라갔다.

“무슨 일인가?”

“에레즈 공께서 확인하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그렇군. 어서 가 보게, 에레즈.”

“중요한 건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춤 시간이 끝나면 곧장 영지로 떠나려던 것 아니었나?”

단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내게 중요한 할 얘기가 있던 것이었나?”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면 나중에 파티장에서 만나 얘기하면 되지 않겠나.”

어차피 다른 귀족들은 단테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는다.

형제를 몰살하고 황위에 오른 자라는 두려움도 그렇거니와, 사생아라는 입장이 귀족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과 경멸하는 것을 동시에 품는 자들이었다.

“금방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에레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파티 초반, 단테는 자신에게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는 귀족들과 인사말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폐하, 내년에도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비 계단의 회화를 보았습니다. 폐하의 늠름하고 담대한 이미지가 그대로 담겨 있더군요.”

“오늘 드레스가 개선장군의 갑옷과 같이 빛이 납니다, 폐하.”

귀족들, 신전의 사제들, 각종 단체의 대표들…….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으려니, 단테는 막판엔 눈 밑에 경련이 일 정도가 됐다.

그 끝이 없는 인사 행렬의 마지막 즈음에, 쿠펠 백작과 그의 가족이 있었다.

“폐하께 세세토록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저희 쿠펠 가문 사람 모두가 기도하겠습니다.”

백작이 앞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니, 그 뒤에 있던 쿠펠 부인과 딸이 따라서 인사를 했다.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히 시선은 백작의 딸인 레니아 쿠펠에게 닿았다.

그녀는 오늘도 붉은색의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귀걸이가 파티장의 조명에 반사되어 색이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쿠펠 영애.”

단테가 저도 모르게 영애를 불렀다.

쿠펠 영애는 물론이고, 백작과 백작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나가면 될 줄 알았는데, 그 무시무시한 황제가 굳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뭐 하느냐. 폐하께서 부르시는데 얼른 답하지 않고.”

혹시 작은 실수라도 하여 화를 당할까, 백작이 제 딸을 채근하여 말했다.

그제야 레니아 쿠펠이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나와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네, 폐하.”

“낯선 나라에서 정 붙이기 힘들 것인데, 가까이 지내는 영애나 영식은 있는가?”

“모……,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어려움은 없습니다.”

목소리가 굉장히 가늘고 유약하게 들렸다.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건 이런 건가.

나비의 날개 같은 하늘거리는 드레스에, 근육이라는 게 있나 싶을 정도로 가늘게 뻗은 흰 팔과 목덜미.

단테는 문득, 용병 시절에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해 손목까지 덮인 자신의 드레스 소매를 확인했다.

“어려운 것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하라. 친우의 친우이면 내게도 친우이니.”

“네? 친우의 친우라 하시면…….”

“에레즈 그레이 공작 말이다. 나와는 허물없는 사이지.”

그 말에 레니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단테의 곁에 선 스펜서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쿠펠 가문이 물러나니, 더는 인사하러 오는 이들이 없었다. 단테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게 됐다.

“스펜서.”

“네, 폐하.”

“방금 쿠펠 영애의 표정이 영 좋지 않던데, 무슨 일 있나?”

“폐하의 발언 덕분에 방금 무슨 일이 생겼습니다.”

“내 발언?”

“그레이 공에게 치근덕대지 말라는 경고로 들렸을 겁니다, 분명.”

단테가 미간을 찡그리며 스펜서를 쳐다보니, 스펜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폐하께서는 ‘친우와 친하게 지내는 영애이니 나도 친해지겠다’는 순수한 의도이셨겠지만요.”

순수한 의도.

‘순수한 의도……, 였나?’

단테는 자신을 점검하듯 시선을 옆으로 흘깃 보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순수한 의도였을까? 심술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일까?

심술?

왜 자신이 쿠펠 영애에게 심술을 부려야 하지?

“하여튼 폐하께서는 오늘도 의도치 않게 열심히 그레이 공의 혼삿길을 막으셨군요.”

“혼삿길이라니. 그간 그레이가가 쿠펠가와 혼담이라도 오갔던가?”

“쿠펠은 오르랑드 왕가의 방계입니다. 오르랑드와 제국의 관계 진전을 위해 혼인을 고려해 봄 직도 하지요.”

“아니……, 그걸 왜 그레이가에서 고려하나. 황제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아시잖습니까. 그레이 공의 투철한 나라 사랑.”

“……알기는, 하지만.”

알기야, 알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가 뒷배도 뭣도 없는 자신의 검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황위에 올린 이유도 오로지 그뿐인 것을.

그러니 나라를 위하여 그 한 몸 바쳐 외교와 안보에 힘쓰는 그의 대업에 대하여, 황제인 단테는 칭찬과 치하를 아끼지 말아야 할 터……, 이건만.

‘왜 공연히 심술이 나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친우도 처음이고, 귀족의 삶도 처음이라 부대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펜서.”

“네.”

“자네는 너무 빨리 장가들지 말게.”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적어도 3년 내에는 불가해. 내가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거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

“너, 너무하십니다, 폐하! 제 혼삿길까지 막으려 하십니까?”

원인도 모른 채 단테의 심술에 휘말린 스펜서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단테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았다.

“농이라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하여 앉으셔야 합니다!”

와중에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얄미운 녀석. 3년이 아니라 5년 안에 장가들지 못하게 방해해 주마.

“폐하께서 혼삿길을 막다니 무슨 영문입니까?”

“아, 그레이 공!”

스펜서가 투닥거리고 있는 사이, 일을 마친 에레즈가 파티장 안에 들어섰다.

젊고, 친절하고, 강력한 권력까지 쥐고 있는 그의 등장에 뭇 여성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째서일까. 무심한 단테에게 오늘만은 유독 그 시선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단테의 앞에 나선 에레즈가 허리를 숙이더니, 단테의 오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도리어 내가 미안하군. 떠나는 날까지 일을 떠안겨 줘서 말이야.”

“제국을 위한 일이 폐하 혼자만의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폐하를 보필하는 것이 저의 기쁨이며 책임입니다.”

단테를 향해 빙긋 웃던 에레즈의 시선이, 그다음으로 스펜서를 향했다.

“그나저나 흥미로운 이야기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폐하께서 누구 혼삿길을 막고 싶어 하시는 걸까요?”

스펜서는 자신을 향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묘하게 차가운 온도를 머금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농이다. 내가 굳이 안 막아도 스펜서가 3년 안에 장가들 일은 없을 듯하니.”

“너, 너무하십니다, 폐하!”

단테가 콧방귀를 뀌니, 스펜서가 당장 억울하다는 소리를 냈다.

에레즈가 쓰게 미소 지었다.

“어쩌다가 그런 얘기가 나온 겁니까?”

“의도한 바는 아니나, 아무래도 내가 그대의 혼삿길을 막은 것 같아서 말이야.”

“저요?”

“음. 그대와 쿠펠 영애가 친해 보이기에, 나 역시 쿠펠 영애와 좀 가까워져 볼까 말을 걸었는데, 내 진심이 오해를 산 모양이더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말씀이군요. 일단 전 영애와 그다지 친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그대가 나타난 후로 쿠펠 영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네만.”

단테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에레즈도 고개를 조금 돌려 쿠펠 영애가 서 있는 곳을 흘끗 확인했다. 쿠펠 영애가 에레즈와 시선이 부딪치자,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갤 숙였다.

그 반응에 에레즈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 영애들은 대개 미혼의 권력가에게 뜻 모를 환상을 품고 있기 마련이지요.”

“심지어 자네는 잘생겼고 말이야.”

“지난번부터 왜 그리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쿠펠가와 사돈을 맺길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면, 혼인할 텐가?”

“그야 폐하의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난 귀족의 화법은 익숙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알려다오. 그대는 내가 그대와 쿠펠 영애 사이에 혼담을 주선해 주길 원하나?”

황제의 혼담 주선은 어지간해서는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다. 즉, 단테는 에레즈가 원한다면 쿠펠 영애와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밀어 주겠다 말하는 것이다.

그 말에 에레즈는 미간을 찡그렸다. 붉은색 눈동자 위로 조명이 떠돌며 여러 개로 쪼개어졌다.

마치 쿠펠 영애의 귀걸이처럼, 다채로운 색이 떠도는 붉은 눈동자에 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하며 나긋한 에레즈 그레이 공작의, 실로 드물고도 낯선 눈빛.

“제가 폐하보다 앞서 혼인할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친우의 의리인가?”

“충신의 도리입니다.”

……왜일까.

단테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큰일이야. 난 아직 혼인에 마음이 없거든. 정말로 내가 그대의 혼삿길을 막게 생겼어.”

“기꺼이요. 그러니 가엾은 스펜서 공의 혼삿길은 내버려 두시죠.”

“들었나? 자네, 내 친우의 희생 덕분에 결혼해도 되겠어.”

단테가 스펜서를 향해 씩 웃었다.

스펜서는 여전히 걱정이 다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어, 두 사람을 폭소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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