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파티가 한창 무르익으니, 춤 시간이 돌아왔다.
“스펜서. 가서 마음에 드는 영애가 있으면 춤이라도 청하고 오게. 내 옆을 지키느라 혼삿길이 막혔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그렇지요. 폐하의 곁은 어차피 혼삿길 막힌 제가 지킬 테니, 다녀오십시오.”
“아 정말 두 분 다, 계속 그러실 겁니까?”
단테와 에레즈의 짓궂은 말에 스펜서가 툴툴거렸다. 물론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대연회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긴 했다.
단테가 서둘러 뭇 영애들이 모인 자리로 다가가는 스펜서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의리 없는 녀석. 가란다고 진짜 가는군.”
책하는 듯 말하고 있으나, 표정은 꽤 즐거워 보였다.
“그대도 다녀오게. 영애들이 혹시 그대와 춤이라도 한번 춰 볼까 목을 길게 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전 괜찮습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만 가 보라니까. 혼자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 그러니.”
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에레즈가 서둘러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고작 테라스까지 가는 길을 에스코트 받아서 뭐 하나.”
“하지만…….”
단테는 귀찮다는 듯 에레즈에게 손을 휘휘 내저은 후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에레즈는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정말 혼자 쉬고 싶어 오지 말라는 것인지, 자신을 배려한답시고 저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괜히 내가 따라가서 방해만 되는 건 아니겠지.’
황제가 된 후, 그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당연히 암살 시도도 사라졌다. 그녀를 해치려 하는 자에게는 죽음으로 갚는다는 것을, 그녀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것으로 몸소 증명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호위에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고…….’
더구나 그녀가 누구인가.
악룡을 퇴치한 영웅이 아닌가.
이 제국에, 아니 이 대륙에 그녀보다 강한 이가 누가 있을까.
‘……아니, 그래도 역시 곁을 지키는 것이.’
간신히 결론을 내린 에레즈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단테를 따라가려는 그때.
“실례합니다.”
등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쿠펠 영애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저어, 공작님. 안녕하세요.”
“네. 좋은 밤입니다, 영애.”
“혹시 춤 상대가 없으시다면, 저의 첫 번째 춤 상대가 되어 주시지 않으실래요?”
굉장히 큰 결심을 하고 다가왔는지, 쿠펠 영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멀리서는 차마 나무를 흔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영애들이, 눈을 빛내며 이쪽을 주시했다.
에레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일이 있어서요. 그 영광된 제안은 다른 신사분께 돌려야겠군요.”
“아, 그, 그렇군요.”
거절은 차마 생각 못 했는지, 쿠펠 영애가 당황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갤 숙이니, 귀에 걸린 붉은색 귀걸이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귀걸이.
그러고 보니 최근 단테가 귀걸이에 관심을 가지더라는 얘길 스펜서가 했었다.
자꾸 쿠펠 영애와 자신을 엮으려 하던 것도 그렇고.
‘혹시 쿠펠 영애의 귀걸이를 보고 하신 말씀이신가?’
쿠펠 영애의 귀걸이는 제법 눈에 띄긴 했다. 어떤 보석을 사용한 것인지, 그 자체의 빛도 영롱한데, 빛을 받아 부서지는 색이 다채로워 실로 아름다웠다.
에레즈는 그것을 한참 쳐다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애.”
“네?”
“혹시 그 귀걸이, 어느 공방에서 맞추신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에레즈의 말에 쿠펠 영애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춤은 거절하더니 액세서리는 관심을 보이는 건가.
“아, 이것은 오르랑드에 계신 제 숙부께서 성인식 때 선물로 보내 주신 겁니다.”
과연, 오르랑드의 물건이었군.
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디자인과 빛깔이더라니.
‘오르랑드면 지금 주문해도 시일이 꽤 걸릴 텐데. 그사이 폐하의 관심도 시들해질 게 분명하고…….’
“저기……, 공작님?”
에레즈가 생각에 잠겨 있으니, 쿠펠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에레즈가, 표정을 관리하듯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귀걸이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제가 정보를 더 드릴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잘됐군요. 그럼 나중에…….”
거기까지 말한 후, 에레즈는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단테는 자신이 쿠펠 영애와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그다지 유쾌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굳이 쿠펠 영애와 자꾸 자리를 만들어 좋을 게 없다. 그는 자기 주군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불충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아니요.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지금은 그저, 어서 단테에게 가 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면 저는 일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에레즈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쿠펠 영애의 앞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급해진 쿠펠 영애가 에레즈의 팔을 붙잡았다.
“필요하시면 이 귀걸이를 드릴 수도 있으니, 가져가셔서……!”
멈칫.
돌아선 에레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쿠펠 영애는 뒷말을 삼켰다.
붉은색 눈동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빨리 단테에게 가야 하는데 자꾸만 방해를 받는 것 같아, 옅은 짜증이 오른 탓이다.
“……용건이 더 남으셨습니까?”
에레즈가 다시 빙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목소리는 전과 같이 나긋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쿠펠 영애는 억지 미소와 함께 도리질을 치며 붙잡은 에레즈의 팔을 놓았다.
“아, 아뇨. 아닙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친절함, 상냥함, 다정함, 그 아름다운 미소와 목소리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어째서인지 쿠펠 영애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에레즈도 알았다.
그러나 상관할 바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에레즈는 예의 바르지만 단호한 말로 인사를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 * *
‘이걸로 심술부렸던 건 만회한 셈 치자.’
연회장에서 한참 떨어진 방의 테라스.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단테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단테는 춤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쿠펠 영애가 초조한 눈빛으로 에레즈를 흘끗거리는 것을 보았다.
일전에 괜히 심술을 부린 일도 있고, 조금 전에도 의도치 않게 겁을 준 모양이고.
그래서 이번엔 눈치껏 자리에서 빠져 주는, 사려 깊은 주군의 면모를 보여 주고 싶었……, 던 것인데.
“여기 계셨군요, 폐하. 한참 찾았습니다.”
……이 남자는 자신이 베푼 ‘깊고 깊은 사려’는 어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여기 있는 것일까.
단테는 테라스로 들어서는 에레즈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왜 온 건가? 혼자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방해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벌을 내리시면 받겠습니다.”
“벌을 내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하는 말이로군. 괘씸하기는.”
단테의 투덜거림에 에레즈가 쓰게 웃으며 다가왔다.
“절 영애들에게 떠넘기고 혼자 도망하시다니, 원망스럽습니다.”
“도망이라니……. 결국 아무하고도 춤은 안 춘 건가?”
“한 사람과 춰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신청이 밀려들어서 무리입니다.”
“인기 많은 자의 고충이로군.”
“그런 셈이지요.”
“좋아. 내 피난처에 숨는 것을 허락하지.”
단테가 난간에 걸터앉으며 활짝 웃었다.
그 자유분방한 태도에 에레즈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폐하께 드리고 싶었던 물건도 있었습니다. 실은 파티 전에 드릴 생각이었는데, 미처 타이밍을 못 맞춰서…….”
아무도 없는 틈에 주고 싶었는데, 스펜서가 계속 들락거리는 통에 꺼내지조차 못한 물건.
에레즈는 이제야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단테에게 건넸다. 단테는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리본을 풀어 상자를 열었다.
“……귀걸이?”
상자 안에는 푸른색의 사파이어를 물방울 모양으로 깎아 만든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단테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으쓱했다.
“귀를 뚫지 않아도 착용할 수 있는 귀걸이입니다. 스펜서 공의 말로는, 요즘 귀걸이에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다고 해서요.”
“아……, 딱히 그랬던 건 아닌데.”
“으음, 실은 제가 멋대로 생각한 게 있는데, 감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혹시 쿠펠 영애의 그 조금 특이한 귀걸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빛에 반사되면 여러 가지 색을 내뿜던 그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귀걸이.
그게 단테의 뇌리에 박혔었다.
정확하게는, 그 귀걸이를 달랑거리며 에레즈 앞에서 꽃처럼 웃던 쿠펠 영애의 모습이.
“……티가 나던가?”
단테가 쑥스러워하며 물었다.
“아뇨. 저밖에 모를 겁니다.”
“그러면 잊어버리게. 그냥 잠깐의 관심이었어.”
단테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고 두려우며 담대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갑옷과 같은 드레스를 입길 원하고, 춤보다는 검을 쥐길 원하며, 나긋하게 노래하기보다 강하게 명령하길 원한다.
제국을 흔들리지 않는 강대국으로 만들 황제이길 원한다.
에레즈 그레이.
그 역시,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는 것을.
……단테 레나투스는, 모르지 않았다.
단테는 에레즈가 준 귀걸이를 착용해 보았다. 드레스 때문인지, 귀걸이는 장신구라기보다는 마법이 깃든 무구(武具)처럼 보였다.
“내 잠깐의 일탈은 이걸로 채워졌다. 고맙구나, 에레즈.”
귀걸이는 어둠 속에서 짙은 푸른색을 머금은 채 흔들렸다.
색색이 쪼개지던 쿠펠 영애의 것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에레즈는 그보다도 더 빛이 난다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그 귀걸이를 한 채 수줍게 웃고 있는 단테 레나투스 그 자체가.
“……그러면 일탈의 연장으로, 오늘 파티의 첫 번째 춤 상대가 될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에레즈가 단테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춤을 청했다.
“여기서?”
“아무도 안 보는 곳이 좋지요. 폐하께서 제 발을 몇 번이나 밟으실지 알 수가 없으니.”
“흠. 그게 걱정되면서 굳이 나와 춤출 이유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에레즈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 정도 실수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친우 아닙니까.”
“……아무래도 그대에게 배운 ‘친우’의 정의는 좀 잘못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단테는 결국 에레즈의 손을 잡았다.
우정. 친의. 신뢰. 충성, 그리고 생명까지.
마주 잡은 손에서, 에레즈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음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설령 거기 사랑이 없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의 바람대로, 혹은 그녀의 바람대로. 거기 사랑이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 후로 몇 번의 계절이 더 지나갔지만, 단테 레나투스가 다른 이들 앞에서 그 귀걸이를 착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