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소녀에게
헬레나 페레스카는 특별하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두 살 때 이미 글을 읽었고, 세 살 때 산술을 깨우쳤고, 다섯 살 때 역사와 시를 암송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물으면 헬레나는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단순히 뛰어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녀는 집안에서 겉돌았다. 부모의 노력에도 데면데면하게 굴었고, 그 어색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잘못 끼워진 퍼즐 같은 아이.
아무리 선량한 성품의 레너드라 하더라도, 헬레나 페레스카는 이물질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라버니의 것을 아무것도 빼앗지 않을 거야.”
더구나 헬레나는 레너드에게 곧잘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레너드가 자신보다 우수한 헬레나를 견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오라버니가 당연히 가져야 할 모든 것들을 탐내지 않을 거야. 작위, 재산, 영지, 지위, 사람…….”
그녀가 끝없이 나열하는 것들은, 어린 레너드로서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먼 미래의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도 섞여 있었다.
“사람?”
“그래, 사람.”
헬레나는 재차 힘주어 대답하며 고갤 끄덕거렸다.
“난 절대 오라버니의 부모님을 빼앗지 않을 거야.”
레너드는 그 말이 괴이하다고 여겼지만, 정확히 어떤 것이 괴이한지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안심했다.
적어도 그때는.
“하긴. 헬레나는 똑똑해서, 그런 거 없이 혼자서도 뭐든 잘하니까 말이야.”
헬레나 페레스카는 특별하다.
그 무렵의 레너드는, 그 명제에 의심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 * *
봄이 다가오니, 페레스카 부인은 근처 영지의 귀족 부인들과 함께 숲으로 소풍을 나섰다.
시종들은 넓고 고른 터에 천막을 치거나 테이블을 놓았고, 그사이 부인들은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수다를 떨었다.
주제는 다양했다. 가져온 음식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러나 그중 어린아이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 숲 안쪽에 다녀와 봐도 괜찮나요?”
지루해진 레너드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더니, 어머니가 생긋 미소 지었다.
“저런. 심심했구나. 하지만 숲 안쪽은 위험해.”
“멀리 안 갈게요. 헬레나랑 같이 가니까 괜찮아요.”
레너드의 말에 포사 부인이 부채를 살랑거리며 웃었다.
“저런, 페레스카의 도련님이 동생을 많이 의지하는 모양이군요. 남매 사이가 참 좋네요.”
말에 희미한 비아냥이 담긴 것을, 어린 레너드도 알 수 있었다.
“소공녀께서 그렇게 영특하시다면서요?”
“저도 들었답니다. 벌써 솔레의 <문답론>을 이해하신다고요. 처음에 그 얘기 듣고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니까요.”
부인들이 너도나도 입을 모아 헬레나를 칭찬했다.
페레스카 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헬레나를 칭찬하는 것을 말릴 수도, 레너드 앞에서 마냥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때 헬레나가 레너드의 곁에 다가와,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라버니가 가르쳐 줬어요.”
“어머나.”
부인들이 깜짝 놀라 헬레나를 쳐다보았다. 놀라기는 레너드도 마찬가지였다.
헬레나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부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고전 문법을 가르쳐 줬어요. <문답론>은 오라버니가 먼저 읽었거든요.”
“어머……, 두 자녀 모두 영특하시네요. 페레스카는 걱정할 게 없겠어요.”
맨 처음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던 포사 부인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다들 영특하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 또래들은 아직 <문답론>을 못 읽어요?”
헬레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포사 부인에게 물었다.
포사 부인의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이는 것을, 레너드와 헬레나는 물론이요, 모인 부인들 모두가 확인했다.
포사에게는 레너드보다 한 살 많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글쎄요. 제 아들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터라.”
거짓말이다.
사실 아직 <문답론>은커녕 고전 문법을 제대로 이해도 못 할 나이이니까.
포사 영식이 고전 문법만 해석할 줄 알아도, 진작 아들 자랑이 늘어졌을 것이다.
“아, <문답론>을 배워요? 왜요? 그냥 읽으면 되잖아요? 네? 왜요?”
자, 어서 말해.
너네 아들이 레너드보다 멍청해서 아직 고전 문법도 못 뗐다고 말하란 말이야.
“헬레나.”
헬레나가 미운 일곱 살의 특권인 ‘왜요?’를 시전하기 시작하자, 페레스카 부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숲 안쪽에 가고 싶다고 했니?”
“네. 저 안쪽에 호수가 있대요.”
“멀리 가면 안 된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영영 집에 못 돌아가.”
“오라버니 손 꼭 잡고 갈게요.”
페레스카 부인이 헬레나의 챙 넓은 모자를 고쳐 씌워 주며 웃었다.
“그래, 착해라. 레너드,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 알았지?”
“네, 어머니.”
두 자녀를 빨리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페레스카는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던 숲 탐방을 냉큼 허락했다.
레너드는 헬레나와 손을 잡고 호수가 있는 숲 안쪽으로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부인들이 다시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서 꽤 멀어진 후에야, 레너드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을 헬레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말한 거야?”
“뭐가?”
“난 너한테 고전 문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 나는 <문답론>도 읽지 않았어.”
“괜찮아. 몇 년쯤 지나면 오라버니도 배우게 될 거니까.”
헬레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난 영특하지 않아.”
“오라버니 정도면 영특한 거 맞아. 오라버니에 비하면 포사 부인네 아들은 진짜 멍청 터졌어. 걘 10년이 지나도 <문법론>은커녕 고전 문법도 못 떼겠더라.”
“머, 멍청 터졌다는 게 무슨 뜻이야?”
“……미안. 상스러운 소리를 해 버렸네.”
전생 때 용병단에서 쓰던 말버릇이 나와 버렸군. 헬레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어쨌든 거짓말은 안 좋다고 생각해.”
“거짓말 아니라니까? 오라버니도 곧 배우게 될 거라고.”
“지금은 아니잖아.”
“좀 미리 당겨서 말하면 뭐 어때.”
“거짓말은 나쁜 거야, 헬레나.”
레너드가 걸음을 멈추더니, 헬레나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알았어. 이젠 안 할게.”
“등 뒤로 손가락 꼬고 있는 거 다 알아.”
레너드가 험악한 –나름대로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헬레나가 혀를 찼다.
“……오라버니, 그거 알아?”
“뭘 말이야?”
“내가 지금 ‘거짓말을 안 하겠습니다.’라고 말해도, 거짓말쟁이의 말은 거짓말일 테니까, 그 말도 곧 거짓말이 된다는 거 말이야.”
“헬레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잖아.”
“바보네. 난 태어난 순간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헬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레너드와 잡은 손을 놓고 먼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엇, 헬레나. 손잡고 가야지.”
그러나 헬레나는 싫다는 듯 양손을 머리 위에서 흔들어 댔다.
“나 믿지 마, 오라버니. 헬레나 페레스카는 거짓말쟁이거든.”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헬레나는 일직선으로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