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2화 (146/156)

* * *

호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깊었다. 중앙 부분은 깊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레너드는 그 고요함과 크기에 설레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동감을 표하고 싶어 곁에 선 헬레나를 쳐다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은 시시하다는 표정의 옆얼굴뿐이었다.

“헬레나는 신기하지 않아?”

“응……, 뭐, 호수가 호수지.”

아마 헬레나는 레너드가 호수를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같이 나와 주었을 뿐, 그녀 자신은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레너드는 조금 기가 죽었다.

어쩐지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 같은 이물감이 들었다.

그때, 숲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탓에 헬레나가 쓴 챙 넓은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 호수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 떨어졌다.”

헬레나가 기계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쉬워서라기보다는, 그저 상황을 설명하는 듯한 말투였다.

“엇, 어쩌지? 너무 깊은 곳에 떨어졌는데.”

“그러게. 할 수 없지.”

“하지만 저 모자,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응?”

“외출할 때 매번 저 모자만 썼잖아. 저거, 너랑 잘 어울렸단 말이야.”

레너드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헬레나로서는 매번 저 모자만 쓴 건 모자를 고르는 게 귀찮아서였을 뿐, 그 모자가 특별했던 게 아니었다.

‘모자는 내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거 아냐?’

어쩐지 안달이 난 레너드의 표정을 보며 헬레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레너드는 어른을 데려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왔던 길을 뛰어서 되돌아가, 시종을 불러 다시 호수로 되돌아갔다.

그게 겨우 10여 분 남짓.

그러나 호수로 되돌아와 보니, 헬레나는 호수 중앙에 빠져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헬레나!”

어린 여자애의 몸이 꼴딱꼴딱 잠겼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중에도 한 손으로 모자는 꽉 쥐고 있었다.

다행히 시종이 즉시 물에 뛰어 들어가 헬레나를 건져 왔다.

그 후 시종은 부인들에게 상황을 알리러 뛰어갔다. 그사이 레너드가 헬레나를 보살폈다.

물에서 건져진 헬레나는 콜록거리긴 했지만, 몸을 떨거나 울진 않았다. 운 사람은, 레너드였다.

“왜 울어?”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헬레나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 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왜 우냐니?! 죽을 뻔했잖아?!”

“나 수영할 줄 아는데……. 근데 몸이 생각보다 말을 안 듣긴 하더라.”

“거짓말! 수영 배운 적도 없으면서! 대체 왜 들어간 거야!”

“어……, 모자가 점점 더 안쪽으로 떠내려가길래.”

레너드가 버럭 화를 내니, 헬레나가 당황하여 더듬더듬 변명했다. 레너드가 그렇게 크게 화내는 걸, 헬레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어야지!”

왜?

……라고 반문하듯, 헬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레너드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레너드는 깨달았다.

자신의 여동생에게 느꼈던 이물감의 정체.

그녀는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 판단하고 결정한다.

스스로 해낼 줄 알기 때문이 아니다. 홀로 해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른다.

[난 절대 오라버니의 부모님을 빼앗지 않을 거야.]

그녀가 한 말의 괴이함.

헬레나는 페레스카 공작 부처를 자신의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헬레나 페레스카는 특별하지 않다.

헬레나 페레스카는 그저.

혼자일 뿐이다.

“그래도 모자는 무사히 건졌어. 잘 됐지?”

헬레나가 레너드의 눈치를 살피듯 어색하게 웃으며 모자를 들어 보였다.

레너드는 대답 대신 헬레나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 * *

찰박, 찰박.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레너드는 인상을 쓰며 감았던 눈을 떴다.

“아, 일어났다.”

눈앞에 어린 여자애가 방싯 웃으며 레너드와 눈을 마주쳤다.

어린 여자애의 곱슬거리는 은발이 귀밑에서 찰랑거렸다. 레너드를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가 천진하게 깜박거린다.

눈동자의 색이 아니라면, 꿈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레너드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친위대 방의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어났어?”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레너드의 무릎에 몸을 기댔다.

레너드가 눈을 비비다가, 뺨에 축축한 것이 묻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뭘 묻히신 겁니까?”

“물.”

“아니, 왜요?”

“자는 사람을 깨우려면 물 끼얹어서 깨우면 된댔거든.”

“누가 그런 불필요한 정보를……?”

“로만 아저씨가.”

아, 그 마법사 양반.

한 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안 일어나서, 율리카가 로만을 깨우려고 양동이 물을 몇 번 끼얹은 적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레너드는 뺨에 묻은 물기를 소매로 쓱쓱 닦으며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숨바꼭질.”

“숨바꼭질이요?”

“엄마가 오기 전에 나 좀 숨겨 주면 안 돼?”

여자애가 고갤 갸우뚱하며 도움을 청해 왔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거절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레너드는 여자애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성에서 숨바꼭질이라니, 야단맞으십니다.”

“해밀턴한테만 안 들키면 된댔어.”

“누가요?”

“아빠가. 어제 숨바꼭질할 때 아빠 책상 밑에 숨었다가 해밀턴한테 들켜서 셋 다 혼났거든.”

“셋?”

“나랑, 엄마랑, 아빠.”

이럴 수가. 황가 전원을 혼낼 수 있는 권력이라니. 황성의 최강자는 해밀턴 녹트 자작인 건가.

그때, 문밖 복도에서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지나! 레지나 그레이, 어디 숨었니?”

“헉, 엄마다!”

레지나 그레이.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적통 후계자가, 레너드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머리를 숨기면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레너드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때 밖에서 한층 더 높아진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나오지 못해?!”

“……숨바꼭질이 맞는 겁니까?”

“내가 엄마 검집에 낙서한 걸 들켰다는 것만 빼면.”

“저런.”

“그러니까 빨리 나 좀 숨겨 줘. 응? 레너드 삼촌.”

그럼, 숨겨 줘야지.

나의 사랑스러운 소녀가 내게 도움을 청하는데,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자, 이리 오세요.”

그 말에 레지나가 레너드에게 의지하듯, 소파 위로 올라가 그의 몸 가까이에 붙어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레너드는 그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누가 봐도 숨어 있다는 게 티가 났지만, 그건 그것대로 귀여워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특별하지 않은 소녀는, 특별하지 않은 대로 넘치게 사랑스러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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