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오늘도 안전하게
올해로 4살이 된 레지나 그레이는 명실공히 황성 내 최강자였다.
그녀가 나무 검을 휘두르면, 황성 내 어느 기사단의 기사든 맥없이 쓰러졌다.
누가 더 실감 나게 쓰러지는지 기사단끼리 경쟁이 붙을 만큼, 꼬마 영웅 레지나 그레이의 인기는 드높았다.
황제의 집무실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두 번째 특권자이기도 했다. 물론 첫 번째는 헬레나 페레스카다.
“아바마마! 정의의 검을 받아라!”
“오호.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구나, 딸아. 어디 덤벼 봐라.”
레지나가 카이사르에게 달려가 나무 검을 휘두르면, 카이사르는 책으로 그 공격을 막아 냈다.
물론 서너 번 공격을 막고 나면 적당히 검에 맞아 쓰러진다.
“크윽, 레지나 그레이의 빛보다 빠른 검이 나를 쓰러뜨렸구나……!”
그냥 쓰러지면 안 된다. 훌륭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딸이 태어난 후 카이사르에게 늘어난 건 연기력밖에 없다.
과장되게 몸을 떨다가 집무실 책상에 풀썩 엎어지는 카이사르를 보며, 레지나가 양손을 번쩍 들어 환호했다.
“이야! 내가 아바마마를 이겼……, 어어?!”
그 순간, 레지나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해밀턴이 레지나의 팔 아래에 손을 넣어, 그녀를 물건 들어 올리듯 들어 올린 것이다.
“앗, 해밀턴!”
“집무실에 쳐들어와 폐하의 업무를 방해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명실공히 황성의 최강자인 레지나이지만, 그런 그녀의 귀여움에 넘어가지 않는 자도 있기는 하다.
해밀턴이 험악한 표정으로 레지나에게 경고하자, 레지나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마왕이 나타났다! 죽어라!”
“마왕은 지금 황후궁에 계실 겁니다.”
“뭐야?! 그 말은 즉 내 아내가 마왕이란 소리인가?!”
죽어 있던 카이사르가 벌떡 일어나며 해밀턴에게 소리쳤다.
“살아나셨군요, 폐하. 그러면 빨리 서류 좀 확인하고 넘겨주십시오. 자문회에서 폐하의 승인이 떨어지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내 딸이 마왕을 해치우겠다는데, 자문회가 기다리는 게 중요하단 말인가.”
“당연하죠.”
“정이 없군.”
카이사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모습에, 여전히 해밀턴에게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레지나가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아바마마! 제가 아바마마를 괴롭히는 해밀턴을 해치워 줄까요?”
“오, 그래 주면 고맙지.”
“고맙긴 뭐가 고맙습니까? 자, 밖에서 엠마가 기다리고 있으니 공주마마도 어서 황후궁으로 돌아가세요.”
해밀턴이 레지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레지나는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해밀턴에게 냅다 돌진하여 머리를 박았다.
“에잇!”
참고로 해밀턴은 키가 컸고.
레지나는 키가 작았고.
그녀의 머리는 상당히 위험한 부분과 그 키가 딱 맞았고.
“으아아악!”
때문에 해밀턴 마왕은 급소를 공격받아 끔찍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앗, 해밀턴이 쓰러졌어요!”
레지나도 그게 연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카이사르에게 쪼르르 달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음, 이번엔 확실히 심했구나, 딸아. 공격하면 안 될 곳을 공격해 버렸어…….”
“억……, 무슨 느긋한 소릴 하고 계신 겁니까! 전 주, 주, 죽을 것 같은데!”
해밀턴이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 악랄한 황제는 녹트 가문의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이 당한 위기에 어찌 저리 태연할 수 있는가.
“미안하네. 내 딸이 날 닮아서 자비가 없어.”
“그게 할 소리……, 으억…….”
“자, 레지나. 마왕이 가여우니 가서 괜찮은지 살펴봐 주고 오렴.”
아버지의 명령에 레지나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면서도 해밀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작은 손으로 해밀턴의 뺨을 토닥거리며 물었다.
“해밀턴, 많이 아파?”
“레지나. 경어를 배웠으니, 이제 경어를 사용해야지?”
카이사르가 지적하자 레지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레지나는 진지하고도 오랜 고민 끝에, 간신히 말을 수정했다.
“해밀턴. 많이 편찮아?”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슬슬 위장까지 아려 오는 기분이라, 해밀턴은 바닥에 누운 채로 눈물을 흘렸다.
* * *
“매해 검사하고 있습니다만, 공주마마에게서는 약간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용의 영혼과는 무관하다고 보셔도 될 것 같아요.”
이틀 전 레지나의 몸 상태를 검진한 율리카의 보고에, 헬레나는 한시름을 덜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용의 영혼이 유전된 것도 아닌데, 애가 왜 그렇게 힘이 넘치죠?”
“그건 그냥 부모의 영향이겠죠. 평범하게.”
부모가 나란히 제국 최고의 검사인데, 그 딸이 안 닮고 배길까.
더구나…….
“그 나이에는 원래 기운이 넘치는 법이에요. 저도 그랬는걸요.”
아고트가 식은 티 포트를 다시 가져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연하게 방을 나서는 아고트를 바라보던 율리카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구나 검투 대회 우승자가 매일 놀이 상대가 되어 주는데, 기운이 안 넘치고 배기겠어?’
재능도 물려받았고, 환경도 조성됐다. 과연 레지나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 흥미진진하다.
“내가 네 살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헬레나가 검지를 입술에 톡톡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율리카가 새로이 차가 담긴 찻잔을 양손으로 쥐고 빙긋 웃었다.
“마마는 네 살 때 어떠셨나요?”
“조용하고 얌전했던 아이였어요.”
“가장 못 믿을 말이네요.”
“정말이에요. 무언가를 하는 게 영 귀찮았거든요. 신기한 것도 없었고, 재미있는 것도 없었고.”
그렇게 말한 후, 헬레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레지나를 보면 내가 그 나이를 다시 사는 기분이 들어요. 그 애는 매미 껍질만 보고도 거대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즐거워하더군요.”
온갖 금은보화를 눈앞에 두고도 민숭민숭한 어머니와, 매미 껍질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하는 딸이라.
안 어울리는 듯 꽤 어울리는 조합이란 생각에, 율리카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음 주에 페레스카 공작저로 휴가를 가실 예정이라 들었어요.”
“브란테 백작도 영지로 돌아간다고 하니, 황성에 있기 심심해서요.”
“어머나. 입에 발린 소릴 다 하시다니, 황성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셨나 봐요.”
“제 진심은 친우에게 통하지 않는군요.”
“자수 수업 때 팔 아프다, 눈 아프다, 배 아프다 투덜대지 않으셨다면, 저도 믿었을 거예요.”
“……제가 그 정도로 진상이었던가요.”
“뭐, 이젠 괜찮습니다. 한쪽 귀로 흘릴 수 있게 되어서.”
“아니, 황후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 버리면 어떻게 해요?!”
헬레나가 장난스럽게 호통을 치자, 율리카가 웃었다.
“그나저나 공작저에는 얼마나 있다가 오실 생각이세요?”
“아마도 보름 정도요. 어머니는 벌써 일주일쯤 파티를 여실 생각에 들떠 계신 것 같더라고요.”
“따님이 오랜만에 본저로 돌아오니 기쁘시기 때문이겠죠.”
“글쎄, 저 때문이 아닐걸요.”
“네?”
“부모님 모두 레지나를 볼 수 있게 되어 신이 나셨더라고요. 태어난 직후에 보고는 처음이거든요.”
그 말에 율리카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주님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엇,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헬레나가 율리카의 그런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어깨를 흠칫하여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좀……, 공주님은 다음에 함께 가시는 것이…….”
“멀리 데려가기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율리카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작저로 가는 방향이면 홀든의 영지를 지나실 텐데, 요즘 그 지역의 치안이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거든요.”
홀든이라. 헬레나는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분명 작년에 폭설 피해가 심했던 지역이었다.
살기가 각박해지면 평범한 서민들이 비적 떼로 돌변하기 쉽다. 구제를 한다고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니까.
“올 초에 그 근처 산길에서 어느 자작가의 마차가 습격을 당해 둘이나 죽었대요.”
“저런.”
“뭐, 사실 마마는 딱히 걱정이 안 되지만.”
“아니, 저도 걱정 좀 해 주면 안 될까요. 친구잖아요?”
“용을 때려잡는 분을 걱정하는 것도 좀 우습지 않나요?”
이럴 수가. 반박할 말이 없다.
“하지만 공주님은 아직 어리시잖아요. 괜히 위험한 일에 얽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러게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율리카의 걱정에 헬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껏 그녀의 주변에는 비적 떼를 걱정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 걱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모님도 레지나도 다음 주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실망시키기도 그렇고.’
비적 떼는 자주 출몰하거나 드물게 출몰하거나 할 뿐, 사실 언제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비적 떼가 무서워서 일정을 취소하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적 떼라고 해도, 황가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를 습격하겠어요?”
“비적이 될 정도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가문의 문장을 일일이 기억할까요? 수도의 주민들이라면 몰라도요.”
“엇……,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전생의 때를 떠올리며 헬레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단테가 부랑아 시절이었을 땐 레나투스의 문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다.
몰랐으니까, 왕가의 징표를 내내 간직하고 있었기도 했고 말이다.
단테는 그게 어머니와 다시 만나게 될 징표가 될 줄 알았지, 아버지와, 그것도 황제와 만나게 될 징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흐음……. 홀든의 영지를 둘러서 돌아가면 괜찮을지도요.”
그렇게 되면 여정이 하루쯤 더 길어지겠지만, 하는 수 없지.
헬레나의 말에 율리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제일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기사단에 말해서 여정을 변경하도록 해야겠네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제 노파심이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설마요. 브란테 백작이 자신을 이렇게나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레지나가 알아야 할 텐데 말이죠.”
헬레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방문 쪽에서 들려왔다.
“알고 있을걸. 적어도 지난달에 백작에게 선물 받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어 볼 때만 해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눈치였거든.”
“앗, 폐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율리카가 당황하여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문 앞에는 카이사르가 잠든 레지나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 그는 예를 갖추는 율리카에게 손짓을 하여 인사를 받았다.
“제대로 인사를 받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 미안하오, 백작.”
“이 시각에 황후궁에는 어쩐 일이세요, 폐하?”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이 집무실 책상 밑에서 잠들어 있는 걸 방금 찾아냈거든.”
카이사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레지나는 잔소리를 하는 유모를 피해 황제의 집무실로 자주 숨어 들어가곤 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복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유모의 얼굴을 떠올리며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유모의 수당을 좀 더 올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큰일이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집무실 출입을 못 하게 막으셔야 한다니까요. 저번에도 서류 위에 홍차를 쏟았다면서요?”
“겨우 네 살이잖아. 괜찮아.”
“겨우라니요. 전 네 살 때 티토의 서문을 암송했었다고요.”
“대단한걸. 난 네 살 때 황좌의 방석 밑에 소리 나는 개구리 인형을 숨겨 두었다가 혼났었는데. 백작은 네 살 때 뭐 기억나는 일화 없습니까?”
“전 네 살 때 물고기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침대에 나란히 눕혔다가, 시트가 다 젖어서 유모에게 혼난 적 있어요.”
“저런. 끔찍하군.”
“그래요. 제가 비정상이었네요.”
헬레나가 투덜거리며 잠든 레지나를 받아 안았다.
카이사르가 투덜대는 헬레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모습마저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네 살 때의 황후도 한 번쯤 보고 싶은걸. 그때도 이렇게 사랑스러웠겠지?”
“아이참, 브란테 백작도 있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여기 없는 척하고 있을 테니까.”
율리카가 마치 선서를 하듯 한쪽 손을 들며 정색하여 말했다. 그 반응에 헬레나는 도리어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히 심각한 얘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장소를 불문한 카이사르의 애정 공세에, 조금 전까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날아가 버린 기분이다.
민망함을 지우려, 헬레나는 괜히 레지나를 한 번 더 추슬러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