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2화 (148/156)

* * *

헬레나가 레너드를 찾아가 비적 떼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다른 경로도 염두에 두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자작가의 마차가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어서요. 귀족을 습격할 정도면, 정말 이것저것 안 가리는 놈들인 듯싶고.”

“그 얘기, 저도 들었어요.”

“네. 그래서 이쪽도 이것저것 안 가리는 기사들로 호위를 배치했습니다.”

“아……, 호크 녀석이로군.”

어느 때는 마수 토벌단. 어느 때는 수련병 훈련 조교. 그러나 그 정체는 적기사단 말단 기사.

그 인간은 안 끼는 데가 없구나. 헬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이십니까? 아무래도 마마와 손발이 잘 맞는 기사를 배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넣었거든요.”

“전 보호받는 입장인데, 왜 저랑 손발이 잘 맞는 기사가 필요하죠?”

“뭐, 만약이라는 경우도 있어서.”

레너드가 거절하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련병 시절부터 가르치며 몇 번이나 검을 마주했던 데다 몇 번 토벌을 함께하면서, 헬레나는 호크와 전투에서의 쿵짝이 잘 맞았다.

호크가 유독 더 잘 맞는 건, 지는 것을 아랑곳 않고 덤벼 오는 호크의 기이한 집착 덕분이었다.

수십 번이나 대련을 하다 보니, 세 명의 애제자들만큼이나 호흡이 잘 맞게 됐다. ……그리 원했던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 녀석은……, 말이 너무 많아요.”

“……후방에 배치해 두겠습니다.”

헬레나의 한숨에 레너드가 서류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여러 경로를 염두에 두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어째서죠?”

“돌아서 가는 길은 시간도 더 오래 걸리는 데다 길이 험해서요.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고요.”

길이 험한 것과 비적 떼가 달려드는 것이 비슷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볼 수 있나?

헬레나는 고갤 갸우뚱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마차는 총 두 대입니다. 한 대에는 유모인 엠마와 레지나 공주님, 녹트 자작이 탑승할 거고, 다른 한 대에는 마마와 폐하가 탑승할 겁니다.”

“애매하네. 저랑 엠마랑 레지나가 한 마차에 타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폐하께서 마마랑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보통 아이가 태어나면 아내에 대한 애정은 좀 식는다던데,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제게 물으셔도…….”

그렇다고 마차에 다섯 명이 우글우글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좁은 건 둘째치고, 너무 위험하다.

‘하긴, 나도 오랜만에 카이사르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황성에서는 침실이 아니고서는 어딜 가나 기사나 시종들이 따라붙는다. 방에 단둘이 있을 때에도, 옆방에는 항상 시종들이 대기하곤 했다.

“좋아요,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죠.”

페레스카 공작저로의 여로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고 나니, 이제야 슬슬 ‘집’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났다.

동시에 ‘나는 정말 그곳을 내 집이라고 확실히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오라버니도 오랜만이지? 본저로 돌아가는 것.”

갑자기 반말로 돌아간 헬레나의 질문에 레너드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헬레나가 황후가 된 후로는 단둘이 있을 때에도 반말을 자제하던 두 사람이었으나, 가끔 ‘헬레나의 오라버니’로 돌아갈 때면 레너드는 마치 신호처럼 헛기침을 하곤 했다.

“휴가 때면 들르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머무르다 오는 일정은 처음이긴 하지.”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마침 시기도 여름이잖아.”

“그때치고는 함께하는 인원이 많긴 하지만 말이야.”

헬레나가 들뜬 표정으로 하는 말에, 레너드의 미소가 부드러워졌다.

“어쨌든 너무 들떠 있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황가 일원을 안전히 모시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아하하, 그냥 집에 돌아가는 길일 뿐인걸. 무슨 일이 있으려고.”

헬레나가 정말 한 치의 염려도 없이 활짝 미소 지으며 양팔을 쭉 펼쳐 기지개를 켰다.

“나의 제자들이 전부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용이 쳐들어와도 문제없어.”

헬레나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귀로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정말 개미허리에 앉은 먼지 한 톨 만큼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때 까지만 해도 말이다.

* * *

출발 당일 아침은 날이 화창했다.

호크는 황가 일원을 모신다는 업무에 한껏 들떠 있었다. 빳빳하게 다린 제복과 번쩍거리는 구두가, 십 리 밖에서도 눈에 띌 지경이었다.

호크는 다소 흥분한 듯 살짝 붉어진 뺨을 하고선 레너드와 아고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알펜투스에는 태어나 처음 가 봅니다.”

“시골이라 별로 볼 건 없어.”

“황성 기사라 하면 그 지역 아가씨들에게 인기 좀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밀렌 경. 알펜투스 여자들, 도련님 때문에 눈 되게 높아요.”

“아니, 아고트! 내가 어디가 어떻다고 그런 소리를……, 아얏!”

촐랑거리는 호크의 뒤통수에 따악 하고 꿀밤이 날아들었다.

화가 난 호크가 뒤통수를 문지르며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야! ……허억, 폐하!”

그의 등 뒤에는 한심하다는 표정의 카이사르와 헬레나가 서 있었다.

“밀렌 경. 지금 우리가 놀러 가는 건가?”

“아, 그, 이것은 뭐랄까…….”

호크가 허둥지둥 변명을 찾으려 애썼다. 헬레나만이 ‘응? 우리 놀러 가는 거 맞지 않나?’ 하고 의아해할 뿐이었다.

어차피 카이사르도 겁박을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때문에 레너드도 아고트도 호크의 ‘도움!’이라 말하는 눈빛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입구에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아고트. 레지나는?”

헬레나가 메이드복이 아닌 제복을 입고 있는 아고트를 향해 물었다.

“아침잠이 다 깨지 않아, 엠마와 먼저 마차에서 주무시고 있습니다.”

잘 됐군. 아고트의 보고에 카이사르는 만족한 듯 고갤 끄덕였다.

레지나가 깨어 있다면, 헬레나와 함께 마차를 타겠다고 어리광을 부렸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긴 하지만, 모처럼 얻게 된 헬레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을 수야 없지.

“그러면 가실까요, 부인.”

능청스러운 카이사르의 말에, 헬레나가 피식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건물을 나서며, 헬레나가 카이사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호크에게 뭐라 그럴 것 하나 없네요. 폐하야말로 좀 들떠 계신 것 아니에요?”

“오랜만에 장모님 뵐 생각을 하니 설렘을 참을 수가 없군.”

“정말 그런 이유로?”

“그럼. 절대 헬레나와 마차 안에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을 잔뜩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설렌 게 아니야.”

“……능구렁이.”

마치 핀잔을 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헬레나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대기 중인 마차로 나아가니, 시종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셀즈와 로위나가 두 사람 앞으로 나아왔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이 셀즈, 마마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황후궁을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응. 잘 부탁할게.”

“다녀오십시오, 폐하. 이 로위나,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처리하실 수 있도록 업무를 잘 정리하여 기다리겠습니다.”

“왜 나는 황후네 사람들처럼 훈훈한 배웅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로위나.”

“하는 말의 내용상 큰 차이는 없지 않습니까.”

로위나가 안경을 쓱 올리며 말하자, 카이사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인사를 끝으로, 대기하던 시종들이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두 사람은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 중이던 긴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차는 속도를 내어, 빠르게 제국 수도를 벗어났다.

* * *

출발 당시 날이 맑았기 때문에, 멀리 돌아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그러나 산 중턱의 좁은 길에 들어섰을 무렵부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기어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때라, 결국엔 조심하면서 전진하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의전을 과하게 꾸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네요.”

헬레나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날씨에 이런 좁은 길을 여러 명의 인원을 끌고 지나가면 도리어 더 번거롭고 위험했을 것이다.

“휴가지까지 사람들을 줄줄이 끌고 갈 수야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카이사르는 이 일행에 헬레나와 그녀의 세 제자들이 있는 이상 갖출 전력은 다 갖춘 셈이라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여기에 다른 기사가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더 있어 봐야, 몸집만 커지지 실속은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레지나가 걱정이네요.”

비가 쏟아지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창 너머로는 산 아래로 향하는 가파른 비탈이 보였다.

“레지나가? 왜?”

“무섭다고 울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레지나는 황성을 떠나 이렇게 먼 길을 나서 본 적이 없었다.

분명 불안하고 무서울 것이다.

헬레나의 말에 카이사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차 창문을 열었다. 마침 마차 곁에 바짝 붙어 말을 몰던 아고트가, 마차 가까이 붙었다.

헬레나가 창문을 연 줄 알고 활짝 웃던 아고트의 얼굴이, 카이사르를 발견하고는 떨떠름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세요, 폐하?”

“레지나가 괜찮은지 좀 봐 주겠나? 혹시 날씨 때문에 겁먹었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카이사르의 명령에 아고트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이윽고 뒤따라오던 마차가 아고트를 따라붙었다.

아고트는 마차에 노크를 하여 창문을 열게 하고는, 안에 있는 이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상황을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속도를 높여 카이사르의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겁을 먹긴 먹었네요. 녹트 자작님이요.”

“뭐?”

“카드 게임에서 세 번이나 연패를 하고, 그 벌칙으로 등짝에 멍이 들도록 공주님과 엠마에게 얻어맞고 계세요.”

아고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아주 즐거워 보이시던데요. 녹트 자작님이 자기 좀 살려 달라고 폐하께 전해 드리래요.”

“……괜한 걱정이었군. 알아봐 줘서 고맙네.”

카이사르는 머쓱해하며 마차 창문을 닫았다.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헬레나 역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딸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이야.”

“그러게요. 나중에 해밀턴에게 사과 선물이라도 줘야겠어요.”

육아의 절반을 유모인 엠마가 담당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해밀턴이 담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주로 레지나의 놀잇감, 아니, 놀이 상대로 말이다.

헬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카이사르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이제 안심이 되십니까, 스승님?”

“네. 안심이 되네요, 제자님. 그래서 그런지 슬슬 잠이 쏟아지는데.”

“저런. 자장가라도 불러 드려야겠군.”

농담을 나누며 두 사람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차 밖에서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음에 이어, 마차가 멈춰 섰다. 말의 투레질 소리가 요란한 빗소리를 잡아먹으며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카이사르가 불길함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물음에 답하듯, 마차 문이 열리더니 레너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이 타고 계신 마차의 바퀴가 웅덩이에 빠져서, 빼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웅덩이?”

“네. 길이 좋지 않은 데다 비가 많이 와서 길이 파였는지…….”

“흐음. 날이 이렇게 궂어질 줄 알았으면, 그냥 홀든의 영지를 가로질러 갈 걸 그랬군.”

카이사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너드도 말없이 고갤 끄덕여 동의했다.

“레지나를 이쪽 마차에 태우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겠군.”

“그러면 제가 가서 공주님을…….”

“아냐. 내가 가서 데려오도록 하지.”

카이사르가 레너드에게 손을 들어 말린 후,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가 멈춘 김에 밖의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레너드가 얼른 말에서 내려 카이사르를 호위했다.

마차 밖은 꽤 소란했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웅덩이에서 빼내기 위해 기를 썼다.

바퀴는 웅덩이에 절반쯤 묻혀 있었다. 비 때문에 바닥이 온통 진창이라, 좀처럼 빠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험한 길이라고는 해도 마차가 제법 오가는 길일 텐데, 길 한가운데 저런 웅덩이가 있다니.’

단지 비 때문인 건가.

카이사르는 마음속에서 지펴 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레지나가 타고 있는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해밀턴과 엠마가 레지나를 품에 안고, 기울어진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레지나. 이리 오련.”

“아바마마!”

레지나가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안겨 들었다. 카이사르는 가뿐하게 자신의 딸을 한 팔로 품에 안아 들었다.

“들어 보세요. 제가 해밀턴에게 카드를 다섯 판이나 이겼거든요. 엠마는 두 판 이겼는데요. 아까 제가 조커를 두 장이나 쥐고 있어서요. 근데 마차가 멈춰 가지고요.”

“그래, 그래. 대단하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카이사르는 제 딸의 재잘거림에 해맑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 혼란한 상황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네 살이라니. 이건 헬레나를 닮은 걸까, 자신을 닮은 걸까.

‘아마 헬레나를 닮은 거겠지. 어릴 때의 난 겁쟁이였으니까.’

그런 생각에, 카이사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엄마에게도 가서 얘기해 주자.”

“네, 좋아요!”

해맑은 레지나의 목소리에 꼬리를 물 듯, 멀리서 낮게 천둥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빗소리와 천둥소리는, 적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적이다!”

마차를 밀던 기사 하나가 소리쳤을 때.

적들은 이미 무기를 들고 비탈진 언덕을 속속 내려오는 중이었다.

“역시 일부러 파 둔 웅덩이였군.”

비탈을 내려오는 비적 떼를 보면서도 카이사르의 말투는 영 심드렁했다.

그럴 것이, 적이라는 이들이 하나같이 남루한 옷에 무기라고는 낫, 곡괭이, 몽둥이나 다름없는 녹슨 검 따위가 전부였다.

반면 이쪽은 정예 기사들이 열 명은 넘는다. 당연히 상대가 안 된다.

‘운이 나빴군. 하필 덮쳐도 황가의 마차를.’

“주군을 호위하라! 적의 접근을 막아!”

레너드의 외침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반면 적들은 작전도 뭣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공격을 감행할 뿐이었다.

“크아악!”

“아아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과 유혈이 난무했다.

“레지나.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눈 뜨지 마. 알겠니?”

“네, 아바마마.”

카이사르는 레지나가 그 광경을 볼 수 없도록, 레지나의 머리를 슬쩍 눌러 자신의 가슴팍에 꽉 안았다.

레지나 역시 얌전히 카이사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귀를 막았다.

“폐하! 공주님! 이쪽으로!”

레지나에게 등짝을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해밀턴이 카이사르의 곁에 다가와 다급하게 외쳤다.

카이사르는 얌전히 해밀턴이 부르는 대로 걸음을 옮겨, 진창에 빠진 마차 뒤편에 몸을 숨겼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좀 떨어진 후에야 카이사르는 레지나를 바닥에 내려 주고 상태를 살폈다.

“레지나, 괜찮지? 안 불편하지?”

“네. 그런데 언제까지 눈 감고 있어야 해요?”

카이사르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너머를 확인했다.

비적 떼의 허술함에 반해 그 수는 상당했기 때문에, 다 쓸어 버리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음……, 레지나. 숫자 세는 법 배웠지? 마음속으로 100까지만 세렴.”

“으음, 알았어요.”

레지나는 귀를 틀어막은 채 숫자를 중얼중얼 세기 시작했다.

그때, 기사들이 놓친 적 하나가 카이사르가 숨은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에 작은 도끼를 쥐고 있었다.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

아차.

곤란하다. 지금 무기가 없는데.

“폐하!”

다행히 친위대장인 레너드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다가왔다.

레너드가 휘두른 검이 적의 등을 사선으로 베었다.

“으아아악!”

적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쏟아지는 폭우의 빗방울에 뒤섞여, 붉은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카이사르! 레지나!”

헬레나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고.

“아바마마. 79 다음에 뭐예요?”

이 상황에서도 레지나는 눈을 꼭 감은 채 천진하게 숫자를 세다가 그런 질문을 했고.

“으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도끼를 든 적은, 등에 뜨끈한 통증을 느끼고 나니 죽음에 대한 공포에 미쳐 예측불허로 날뛰기 시작했고.

“마차가 쓰러진다!”

쏟아지는 비와 적들의 난리로, 진창에 빠져 기울어져 있던 마차는 기어코 옆으로 쓰러졌고.

그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정말이지,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그리고 그 여파로, 구덩이를 파 둔 탓에 약해진 지반이 무너졌다.

바로 레지나가 서 있던 곳이 말이다.

“어?”

눈을 감고 있던 레지나는, 바닥이 울렁거리자 그제야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까마득한 비탈 아래로 몸이 내던져진 후였다.

“레지나!”

당황한 카이사르가 레지나에게 손을 뻗었다.

레너드도 헬레나도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헬레나는 너무 멀리 있었고, 레너드는 도끼를 든 적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떨어진다!’

레지나를 낚아채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카이사르의 몸 역시 이미 비탈 쪽으로 중심이 넘어간 후였다.

결국 카이사르는 레지나를 품에 꽉 끌어안은 채 비탈 아래로 추락했다.

“안 돼! 카이사르! 레지나!”

헬레나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쏟아지는 비가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을 적셨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동시에 눈앞에서 추락하다니.

“마마. 일단 몸을 피하셔야…….”

도끼 든 적을 아예 기절시켜 버린 레너드가, 재빨리 헬레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 상황에 헬레나까지 위험에 처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헬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너드가 쥔 검을 빼앗았다. 레너드는 순순히 헬레나에게 검을 양보했다.

헬레나는 근처에서 우왕좌왕하는 말 위에 훌쩍 올라타, 황제와 공주의 추락에 당황하여 어버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왜 다들 손이 멈췄지?! 주군께서 우릴 기다리고 계실 텐데, 여기서 얼마나 더 시간을 낭비할 셈인가!”

이어 헬레나가 분노에 꽉꽉 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딱 세 명.”

그 목소리는 닿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머지는 필요 없으니 다 죽이겠다……!”

기사들은 그녀의 입에서 ‘죽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고 쓰러뜨리는 것이 그녀의 미덕이었건만.

그리고 미덕을 잃은 그녀의 검은, 가차 없이 적을 향하여 내리쳐졌다. 마치 죽음의 신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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